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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견된 “높은 문화의 힘”

한류를 믿지 않았던 사람의 회고



한국인이라면 어디선가 한번쯤은 들어봤을 말,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부력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에 대한 말 중 가장 유명한 말은 이것이 아닐까 한다. 온갖 문화시설에, 심지어 공사장을 가리는 판에도 쓰이는 이 말은 BTS로 대변되는 이른바 한류가 해외에서 혁혁한 성과를 거둘 때마다 회자되곤 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아니어도 가장 문화의 힘이 높은 아름다운 나라였으면 한다니, 일견 욕심 없는 듯 가장 욕심 많은 말이다.


한류열풍을 불러온 MBC 드라마 〈대장금(2003)〉
(출처: https://program.imbc.com/Concept/daejanggum)


내 기억에 한정한다면, 한류 붐이 일기 시작한 시기는 MBC 드라마 〈대장금〉의 비범한 흥행 이후부터였다. 그때 내가 살던 지역에서 가까운 곳에 한류우드(나중에 한류월드로 이름이 바뀌었다)를 조성한다고 해서 코웃음을 쳤었다. 일단 할리우드를 표방한 이름이 너무 웃겼고, 〈대장금〉 이후로 한류라는 것이 세계무대에서 과연 얼마나 오래 빛을 발할지 의심했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한국에서는 〈프리즌 브레이크〉 등의 미드가 인기를 끌고 있었다. 나도 한드는 등한시 한 채 미드를 정주행하는 문화적 사대주의자였다.

그런데 2021년, 이런 나날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 흔한 가요 한 번 안 듣고 지고지순하게 클래식 음악만 듣던 고모도 BTS의 광팬이 되셨다. 자극적인 드라마가 싫다던 어머니는 TV에 넷플릭스 계정을 연결해 달래서는 〈오징어 게임〉과 〈지옥〉을 정주행하셨다. 언어교환 사이트에 들어가면 아이돌 팬이나 드라마 팬들이 내가 한국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말을 먼저 걸어온다. 사대주의 전과가 있는 나는 어안이 벙벙하다. 17년 전에 나는 왜 코웃음을 쳤을까.(미리 이럴 걸 알았더라면 전공을 사학이 아니라 미디어로 선택했을 것을)


제42회 청룡영화상에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수상 소감을 말하는 배우 윤여정
(출처: https://tenasia.hankyung.com/movie/article/2021112679804)


지난달 26일, 청룡영화상 시상식장에서 배우 윤여정은 “우리는 언제나 좋은 영화, 드라마가 있었다. 갑자기 세계가 지금의 우리를 주목하는 것뿐이다.”라고 말했다. 나를 비롯한 눈 어두운 세계인들은 그간 몰랐던 것이다. 우리가 가진 “높은 문화의 힘”을. 그렇다면 어째서 갑자기 세계가 지금의 우리를 주목하게 되었을까?



거름 위에 자란 꽃


백범 김구의 일견 욕심 없는 듯한 말,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을 다시 읽어보면 높은 문화의 힘은 경제적인 힘과 군사적인 힘에 기반을 둔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다. 국민 모두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한 부력은 얼마나 대단한 경제력이며, 남의 침략을 충분히 막을 만한 강력은 얼마나 대단한 군사력인가. 그래서 나는 이 말이 가장 욕심 많은 말이라 생각했다.

역사적으로 문화가 꽃피어 그 향기를 멀리 퍼뜨린 순간들을 돌아보자. 문화 부흥기를 일컫는 대명사인, 르네상스는 금융을 바탕으로 한 피렌체의 경제력 위에 피어났다. ‘벨 에포크’는 산업혁명으로 형성된 막대한 자본 위에 피어났다. 미국의 ‘광란의 20년대’와 일본의 ‘다이쇼 로망’은 제1차 세계대전으로부터 비롯한 호황 위에 피어났다.

이러한 문화의 황금기는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한 나라 사람들의 여유로운 마음과 지갑으로부터 비롯한다. 문화를 창조하는 일을 하는 예술가들의 입에 밥이 들어오기 위해서는 밥 먹여주는 게 아닌 창작물을 사 줄 수 있을만한 소비자(후원자)가 필요하다. 입에 밥이 들어온 예술가들의 마음에 여유가 깃들면 좋은 작품이 계속해서 창작되고, 예술가가 되고 싶은 사람들도 늘어나서 풀 자체가 커질 만한 환경이 조성된다.

예술품을 구매하는 것은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주 특별한 일로 여겨졌다.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투자를 목적으로 NFT 예술품의 분할 소유권을 구매하고, 좋아하는 작가의 소품을 사거나 혹은 예술품을 구독하기도 한다. 가수가 앨범을 발행하면 팬들은 ‘총공(총공격의 줄임말로 팬덤의 집합적 행동을 의미함)’으로 후원한다. 예술 후원이 흔해졌다고는 하나 예술가를 후원하고 작품을 수집하고 소장하는 일은 여전히 돈이 많이 드는 일이다. 어쨌든 거름을 주어야 꽃이 잘 자라기 마련이다.

예술 후원과 예술품 소장이 이른바 상류층의 문화로 여겨질 만한 행위가 된 데는 아마도 예술품이 가진 성격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예술품은 물질이지만 그 성격은 비물질적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어딘가 고상해 보이는 예술이란 것은 돈을 주고 살지언정 돈이 가지고 있는 어딘가 비천한 느낌을 정화하는 기술이다. 감각을 자극하는 기술이라고 풀이할 수 있을까.

그렇기에 시대를 불문하고 생활이 풍족해진 사람들은 상류층이 향유하는 예술 후원과 작품 구매에 뛰어들게 된다. 그 목적이 뭐가 되었든 간에 후원자가 많아지면 예술가들은 더 많은 작품을 창작하게 되고, 새로 유입되는 예술가들도 늘어난다. 예술가의 수가 증가하면 창작되는 작품의 스타일도 다양해진다. 여러 취향을 만족시키기 위한 다양한 시도가 이루어지면서 문화가 꽃피는 것이다.


비파를 타는 인물 주위로 자기와 청동기, 벼루, 서화 등 여러 물건이 놓여 있다.
당대 유행했던 골동서화 취미를 드러내주는 그림이다.
김홍도, 18세기, 〈포의풍류도〉, 개인소장, (출처: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563727&cid=46721&categoryId=46878)


18세기 조선에서도 양란 이후의 경제발전에 힘입은 문예문화가 부흥한다. 이 시기 겸재 정선과 단원 김홍도 등 독자적인 화풍을 구사하는 화가들이 등장하였다. 정선과 김홍도가 두각을 나타낼 수 있었던 배경에는 도화서에 대한 왕실의 관심과 자본을 축적한 특정 계층의 골동서화취미의 확산이 있었다. 조선의 문예문화는 오랫동안 중국의 영향을 받았고, 정선과 김홍도 역시 중국 서화를 기반으로 하여 독자적 화풍을 발전시켜 나간 것이었다. 또 골동서화취미 역시 당대 중국 문인들의 취미와 무관하지 않았다.


인왕산이나 금강산 등 실제 조선의 풍경을 보고 그렸다는 점이 특징으로 꼽힌다.
정선, 18세기, 〈인왕제색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출처: https://terms.naver.com/imageDetail.naver?docId=1136327&imageUrl=https://dbscthumb-phinf.pstatic.net/2765_000_58/20181024060510452_3D1VUYSKD.jpg/5810378.jpg?type=m4500_4500_fst&wm=N&cid=40942&categoryId=33052)


이런 관계로 오스카 영화제에서 높이 평가 받은 한국 영화에 대해 한국인들이 주목하듯, 중국에서 높이 평가 받은 조선인의 문예 작품에 대해 조선인들도 주목하였다. 당대의 문인이자 수장가이던 김창업은 청으로 사행을 떠나며 정선, 조영석, 이치, 윤두서 등 조선인 화가들의 그림을 챙겨갔다. 그리고는 청에서 안목이 높다고 소문난 마유병에게 이 그림들을 보였다. 마유병이 정선과 윤두서의 그림에 대해 내린 높은 평가는 그들의 명성을 드높였다. 그리하여 역관들과 개성상인들은 연경에서 팔기 위해 정선의 그림을 구하려 애썼다고도 한다. 조선에서도 정선에게 작품을 주문하는 사람이 줄을 이었다. 지금까지 정선의 그림이 많이 남아 있는 이유는 많이 그려졌기 때문이다.


김명국, 17세기, 〈달마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출처: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3573817&cid=58863&categoryId=58863)


이에 앞서 17세기에 통신사 수행 화원으로 갔던 김명국은 조선에서보다 일본에서 많은 인기를 얻었다. 김명국의 그림은 인조 및 여타 사대부들이 좋아했던 단정한 화풍이 아닌 호방한 필치의 화풍이었는데, 당대 일본에서는 달마도와 같은 선승화가 유행 중이었다. 김명국의 화풍이 트렌드에 딱 들어맞은 것이다. 일본인들은 김명국에게 글씨와 그림을 청하기 위해 구름같이 모여들었다. 하지만 일본에서 높이 평가받는 것은 조선에서의 명성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조선인들이 일본의 문화적 역량을 그리 높이 평가하지 않았기 때문일까? 김명국은 사후 반세기나 지난 18세기가 되어서야 조선에서 재평가 받았다. 김명국에 대한 재평가도 다양한 취향이 존중받을 만한 여유가 생겼기에 이루어질 수 있었을 것이다.



깨진 온실의 꽃


풍부한 경제력을 거름삼아 꽃피운 문화는 자연히 주위의 이목을 끌게 된다. 이럴 때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한 군사력을 갖추지 못했다면? 다시 김명국이 일본에 갔던 시점으로 돌아가 보자. 1636년과 1643년 두 차례 통신사행에 참여한 김명국이 일본인들의 요청으로 그림을 그리느라 여념이 없었을 때, 아리타[有田]에서는 조선인 도공 이삼평이 도자기를 굽고 있었다.

이삼평은 임진왜란 때인 1598년 사가번에 피랍되어 1616년에 가마를 설치하고 1655년에 생을 마칠 때까지 도자기를 구웠다. 이삼평과 함께 납치된 조선 도공들이 구운 도자기는 아리타 도자기라 칭해졌으며, 근처의 이마리[伊萬里] 항구를 통해 일본 각지로 퍼져나갔다. 그리고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아리타 도자기를 유럽에 수출하였다. 명청교체기의 혼란으로 인해 중단된 중국 도자기 무역의 공백을 메운 것이다. 일본의 국익 창출에 혁혁한 공을 세운 이삼평은 죽은 뒤 도조(陶祖)로 모셔졌다.


삼평이 자기의 원료를 발견한 이즈미야마 자석장(2010. 7. 6 필자 촬영).
1980년에 일본의 국가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아리타에서는 이삼평의 가마가 열린 1616년으로부터 300년이 되던 해인 1916년 기념비를 세우고 도조제를 열었다. 그리고 같은 해, 조선에서는 총독부에 의해 고려 왕릉의 일제조사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동시에 고려자기를 꺼내기 위한 도굴도 성행하였다. 고려자기에 대한 관심을 가진 것은 조선인이 아닌 외국인, 특히 일본인이었다.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초대 조선통감인 이토 히로부미이다.

이토 히로부미를 필두로 한 외국인 고려자기 애호가들은 고려자기의 아름다움에 감탄하며, 조선에서는 이런 것을 헐값에 판매한다고 비웃었다. 이들의 수집욕을 충족시키기 위해 많은 고려 무덤들이 파헤쳐졌고, 그렇게 도굴된 수만 점의 고려자기는 외국인들에게 선물 혹은 판매되었다. 고려 무덤들을 파헤친 것은 조선인들의 손이었다. 가난한 조선인들은 발굴이라는 허명의 도굴에 고용되거나 혹은 스스로 도굴을 직업으로 삼았다.

도굴된 고려자기들은 이왕가 박물관 및 총독부 박물관에도 소장되었지만, 중간상의 손을 통해 여러 나라로 팔려나갔다. 이왕가 박물관이 소장한 6,562점, 그리고 이토 히로부미가 소장한 1천여 점, 일왕이 상납 받은 103점(이후 도쿄박물관 소장) 등 고려자기는 공적으로든 사적으로든 소장품으로서 굉장한 인기를 구가하였다. “높은 문화의 힘”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한 군사력 없이는 그저 약탈의 대상이었을 뿐이다.



모방에서 창조로


21세기, 한국 문화는 다시금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인접국 뿐 아니라 먼 곳에서도 한국이 제작한 드라마, 영화를 시청하고 한국 아이돌의 공연을 관람한다. 나는 20세기의 막바지와 21세기의 초반을 기억한다. 어린 내가 보던 만화는 대체로 일본 작품을 수입한 것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왜색’을 뺀다고 억지스럽게 고친 부분들이 많았다. 슛돌이 같은 굉장한 개명과 기모노를 수정액으로 지우고 한복을 그려 넣은 컷들. 친구 언니가 알려주어서 나는 내가 보는 만화가 일본 것인 줄을 알게 되었다. 뽀빠이와 미키마우스는 개명을 당하지 않았는데 킷카와 히카루가 슛돌이로 개명을 당한 것은 창씨개명에 대한 복수였을까. 주말 명화극장에는 더빙을 한 할리우드 제작 영화가 매주 상영되었다. 한국인 배우 이름은 몰라도 미국인 배우 이름은 절로 알게 되었다.


1994년 1월 1일 편성표. 〈피구왕 통키〉와 채플린, 스필버그 등의 영화들이 눈에 띈다.


21세기 초반까지 일본은 풍부한 자본을 바탕으로 문화산업을 육성할 수 있었다. 인접국가인 한국은 일본문화에 비공식적(?)으로, 그러나 밀접하게 영향을 받았다. 또한 한국의 가장 큰 우방이자 세계적 강국인 미국 역시 한국 문화에 강하게 영향을 미쳤다. 한국전쟁 이후 한국은 미·일 문화를 답습하는 것으로 시작, 여러 변주를 시도하였다. 한국 경제의 눈부신 발전에 힘입어 한국 정부는 한국문화 양성에 많은 심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많은 한국인 개인들이 세계무대에서 활약하기 위해 마치 폭포를 넘는 연어처럼 끊임없이 뛰어올랐다. 지금의 한류 열풍은 관-민의 환상적 콜라보의 결과가 아니겠는가.

이러한 노력 끝에 한국 문화는 세계에 의해 다시금 발견되었고, 한류라는 이름으로 향유되고 있다. 과거 미·일 문화에 대해 가졌을지 모르는 콤플렉스는 이미 극복되었고 이제는 민족적 자부심이 차오르고 있는 듯하다. 외부인들이 한국의 “높은 문화의 힘”을 인정하자 나를 비롯한 K-불신자들도 쭈뼛쭈뼛 한국 문화에 대해 새삼스럽게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괜히 전통문양 파우치도 한 번 사 보고, 한국관광공사 유튜브도 좀 찾아보고, 윤여정 같은 분들에게 “어째서 한국 예술이 갑자기 세계적으로 각광받나요?” 하는 어리석은 질문도 해 보고.


참고문헌

유홍준, 2001, 『화인열전』 1, 역사비평사
이구열, 1996, 『한국 문화재 수난사』, 돌베개
「블록체인 플랫폼 출현과 미래 소유의 변화」, 『매일경제』 2019. 11. 28 (https://www.mk.co.kr/premium/special-report/view/2019/11/27219/)
「윤여정 "평창동 주민·세종대왕 감사"…재치 만점 '청룡' 오프닝」, 『한국경제』 2021. 11. 26 (https://www.hankyung.com/entertainment/article/202111268104H)




집필자 소개

강유현
강유현
서울시립대학교 국사학과 박사과정에 재학 중이며, 연세대에서 조선후기 중인층의 서화완상문화에 관해 공부하고 석사학위를 받았다. 인간의 욕망이 문화 저변에 드러나는 모습에 주목하였다. 지금은 19세기 이래 근대기의 미술과 권력의 유착에 관심을 두고 연구하고 있다.
“조선시대 군인들의 강무”

마상재(馬上才)는 달리는 말 위에서 사람이 행하는 갖가지 재주로, 농마(弄馬), 희마(戱馬), 마희(馬戱), 곡마(曲馬), 원기(猿騎), 무마(舞馬), 표기희(驃騎戱), 마기(馬技), 마기(馬伎), 입마기(立馬技), 마술(馬術) 또는 말광대, 말놀음 같이 다양한 용어로 불린다. 이들 용어 가운데 훈련된 말에게 여러 기예를 익히게 하는 무마(舞馬)를 제외하고, 그 나머지 용어는 기수가 달리는 말 위에서 여러 가지 동작을 취하여 재주를 부리는 기예를 뜻하는 말이다. 특히 마상재는 조선시대에 이르러 붙여진 명칭으로 민간에서는 주로 마기(馬伎)라 불렀다. 하지만 마기가 아니라 희마(戱馬)가 옳다는 주장이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에서 확인되는 것으로 미루어 희마가 옳은 표현으로 보인다.
마상재는 기마술의 일종으로 행해지기 때문에 별도로 때를 가리지는 않았다. 다만 조선 후기에 들어와 마상재가 관무재라는 무예 시험의 종목으로 시행되면서 봄과 가을에 주로 많이 행해졌다.
마상재에는 키가 크고 빛깔이 좋으며 훈련이 잘된 말을 골라서 썼으며, 암말보다도 수말이 적당하다고 했다. 특히 부루말(흰말)을 높이 쳤으며, 가라말(검정말) 중에도 네 발굽이 흰 것은 무방하게 여겼다. 이러한 말에 온갖 치레를 갖추었으며 마상재를 하는 사람은 전립 또는 투구를 썼다. 옷은 민소매로 만들어진 붉고 노란 호의(더그레)에 같은 색의 바지를 입었으며 목화나 짚신을 신지 않고 버선발로 말을 탔다.

“청나라 대신이 조선의 침술을 찾다”

정태화, 임인음빙록, 1662-09-29 ~

1662년 9월 29일, 아침부터 청나라의 역관들이 정태화를 만나보러 왔다. 정태화(鄭太和)는 부사 허적과 함께 이들을 만나보았는데, 그들이 전한 이야기는 청나라 보정대신 3명의 부탁이었다.
“수대신(首大臣)에게 병환이 있는데, 마침 사신 일행 중에 데려온 침의(鍼醫)가 있다 하니 치료하고 싶소. 근래 병세를 보니 날짜가 많은 것 같으니 조선 침의 안례(安禮)가 며칠 동안 남아서 침을 놓고 대신의 병환을 살핀 이후 떠나는 것이 어떻겠소?”
이 이야기를 듣자 정태화는 며칠 전 조참례를 행할 때의 광경이 떠올랐다. 수대신이란 사람이 직접 조선 사신단에게 와서 침의 김상성이란 자를 찾았던 것이다. 아마 김상성은 지난번 사행 때 동행해온 의관이었던 것 같은데, 수대신은 그 당시에도 조선의관의 침으로 효과를 보았던 듯하였다. 정태화는 비록 김상성은 오지 않았으나, 이번에도 의술이 뛰어난 자가 함께 왔으니 보내주겠다 약속하고는 안례(安禮)를 보내 주었는데, 며칠간 치료를 받아보니 효과가 좋았던 모양이었다. 이에 아예 공식적으로 조선 사신단에게 의관을 남겨서 치료해 달라 부탁을 해 온 것이었다.
이미 정태화 일행은 사신단의 임무를 마쳤기에 곧 떠날 처지였다. 그러나 만일 이 일을 임금에게 보고한다면 아마 흔쾌히 의관으로 하여금 청나라 대신의 병을 치료하도록 할 것이었다. 여기에 생각이 미치자 정태화는 청나라 보정대신들의 부탁을 허락하고는 안례를 뒤에 남겨 치료를 마친 이후 사신 일행의 뒤를 따라오도록 하였다. 청나라와 같이 크고 넓은 나라에서도 조선의 의술을 찾고 있다니, 정태화는 조선 의술에 새삼 자부심이 일었다.

“중국인들이 가장 선호한 조선의 인삼”

인삼은 5~6세기부터 고구려와 백제의 주요 수출품이었고, 고려시대에는 송나라에 사신이 방문할 때 가져간 인삼이 1,000근이나 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더욱 중요한 수출품이 되었다. 명나라 초기에 조선은 금과 은 등을 조공으로 바쳐야 했으나, 세종대에 금과 은의 조공을 중단하고 그 대신 인삼을 조공하기도 했다. 명 말기부터 중국인들의 인삼수요는 더욱 커졌다. 조선은 사신단의 조공품목 뿐만 아니라 무역품목으로도 인삼을 가지고 갔는데, 경비가 떨어지면 인삼을 팔아서 비용을 마련하기도 했다. 그만큼 당시 조선의 인삼은 귀한 물품이었고, 명나라 사행단이 지나가는 곳의 중국 관리들은 의례히 예단을 받았는데 요동 도사 왕소훈이 예단을 돌려보낸 이유를 인삼이 없어서 서운해 한 것이라고 짐작할 만큼 중국에선 조선의 인삼을 선호했다.
중국에서 인삼의 수요가 또 다시 급증한 것은 청조 말기인데, 당시 아편중독에 인삼이 효과가 있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1841년 조선에서 수입하는 홍삼의 수출량은 2만 근이었는데, 1847년엔 2배인 4만 근까지 급증하기도 했다.

“포로 쇄환”

조선은 일본에 3차례의 회답 겸쇄환사를 파견하였다. 1607년 외교가 재개된 첫 번째 사절에게 일본은 많은 배려를 베풀었다. 쓰시마와 막부에서는 적극적으로 협조하였고, 이에 따라 고국으로 돌아가려는 많은 피로인들이 사신을 따라 조선으로 들어왔다. 이미 귀국을 거부하고 일본에 정착하려는 포로들이 생겨나기도 했다.
1617년 상황은 달라져 있었다. 사신들에게는 막부나 쓰시마와의 교섭 외에 피로인에게 귀국의 정당성을 알리며 설득하는 과제가 늘어난 것이다. 쇄환을 위해 데려온 포로가 다시 돌아가 버리거나 따라왔다가도 마음이 변해 가버리는 일이 속출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전히 피로인은 설득의 대상으로 데리고 돌아가야 할 조선인이었다. 1624년 회답 겸쇄환사에게는 자발적으로 돌아가겠다고 찾아오는 피로인들이 드물 정도가 되었다. 이미 세대가 바뀌어 완전히 일본 습성에 젖은 포로들이 등장했다. 1636년과 1634년에도 극소수의 쇄환이 있기는 하였으나 본격적인 포로의 쇄환은 1624년으로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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