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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談”에 담담을 더하여

한국국학진흥원의 웹진 “담談”이 100호를 맞이했다는 소식이다. 많은 매체가 생겨났다 없어지기를 반복하는 요즈음, 일백 번이나 새로 내용을 기획하여 필자를 선택하고 청탁을 통해 받은 원고를 정리해서 발간했다는 사실은 당연하게도 크게 박수 받아 마땅한 일이다. 시작이 반이지만, 그 반을 넘어서는 일은 사실 좀처럼 쉽지 않은 법이다. 이제까지 “담談”이 통과해나간 저 긴 세월에 대해서 그리고 그 안에 녹아든 저 땀과 노고에 대해 다시 한 번 박수를 보낸다. 처음 “담談”이 세상에 태어났을 때 그 감격스러운 장면을 같이 겪었던 산파 중 하나였기에, 이 100호를 기념하는 글을 청탁받고는 한없이 기뻤다는 사실을 먼저 고백해야겠다.



웹진 담談의 탄생


한국국학진흥원의 웹진(webzine)이 창간호를 낸 것이 벌써 8년 전 그러니까 2014년 3월의 일이다. 우리나라에서 웹진이라는 형식, 그러니까 종이책으로 발행되던 잡지가 웹(web)이라는 새로운 장소를 발견한 것이 정확히 언제부터인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2014년 당시에 공적 기관에서 웹진이라는 형식으로 독자를 만난다는 것이 아주 일반적이지는 않았다는 점은 확인해 드릴 수 있다. 한국국학진흥원이 전통문화의 보전과 전승에 관련된 기관이기는 하지만, 선인들의 일기를 우리 시대의 독자들에게 친근한 형태로 가공해서 보여주는 웹사이트인 ‘스토리테마파크’를 운영하고 있어서 아마도 비교적 용이하게 웹진을 발간하겠다는 생각으로 이어졌던 것 같다. 어찌 되었건 전통 지식 문화유산에 관련된 기관이 웹진이라는 형식으로 독자들과 만나겠다는 발상은 충분히 새롭고 또 용기 있는 일이었다. 즐거운 마음으로 편집위원 초대에 응했다.

맹렬한 의욕을 가지고 편집위원들이 모이기는 했지만 사실 하나의 웹진을 시작한다는 일은 간단치 않았다. 잡지와 일반 단행본의 편집은 전혀 다르다. 보통의 책은 한 사람의 저자가 자신의 생각을 써내려가며 완성한다. 여러 명의 저자를 두고 있는 공동저술의 경우에도 글의 주제와 방향성 정도만 합의하면 각자 독립적으로 글을 쓰고 그것을 묶어서 독자들 앞에 선보이면 되는 일이다. 그러나 잡지는 전체적인 구성이 매우 중요하다. 매우 다채로운 성격의 주제와 글 그리고 이미지들을 엮어내야 하고, 그래서 그것들이 한데 묶였을 때 그 전체가 과연 어떤 조화로운 모습을 선보일 수 있을지 끊임없이 고민해야 한다.



편집위원, 합주와 합창을 위한 지휘자


그러니까 잡지는 독주가 아니라 합주요, 독창이 아니라 합창이다. 유능한 연주자들을 합류시키는 일이 매우 긴요한 일이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할 뿐이다. 어떻게 하면 그 다양한 악기의 소리 혹은 다양한 성부의 소리들을 엮어내어 아름다운 화음을 들려줄 수 있는지 생각해야 한다. 다소 과장일 수 있으나 잡지의 편집위원은 그래서 지휘자와 같은 역할을 한다. 개별 연주자들이 빼어난 소리를 낼 수 있도록 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 모든 소리들이 조화롭게 울림을 내고 있는지 어느 한 성부가 지나치게 튀는 것은 아닌지 어느 한 성부가 다른 소리에 묻혀서 제 색을 잃고 있는 것은 아닌지 끊임없이 고민하고 살펴야 한다. 물론 편집위원들이 이런 일을 창간호부터 잘 수행해왔다고 자부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 문제로 치열하게 고민했고 그 고민에 많은 분들이 기꺼이 동참해주어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아닌가 생각한다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다.



시의성 있는 주제와 우리만의 개성적인 목소리


잡지를 의미하는 영어 단어 ‘magazine’은 ‘창고’를 뜻하는 이탈리아어 ‘magazzino’에서 나왔다. 본래 잡지라는 공간에는 다양한 물건들이 쌓여 있는 법이다. 그러나 잡지는 쓸 만한 물건들이 많이 모여 있다는 의미에서 그러니까 이를테면 지식창고와 같은 말을 사용할 때의 의미와 같은 창고일 수는 있어도 단순히 많은 물건들이 쌓여 있다는 의미에서의 창고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구슬 서 말이 들어 있는 곳이 아니라 멋지게 엮인 보배 한 점이 창고를 빛나게 하는 법이다.


웹진 담談 창간호 화면설계서(출처: 한국국학진흥원)


창간호 편집위원들은 웹진의 얼개를 짜나갔다. 우선 잡지의 진정한 의미는 시의성 있는 주제에 대해서 우리만의 개성적인 목소리를 담는 데에 있다는 전제 아래, 쉽지는 않겠지만 매호 특집 주제를 정해서 그에 관련된 원고를 싣기로 했다. 그래서 3월에 발행되는 창간호의 특집은 개학의 의미를 담아 “입학, 공부의 시작”으로 잡았고 이후에 “봄소풍” “짝, 결혼” “관직, 나라의 일꾼” 등으로 특집 주제들이 이어졌다. 그래서 여름에는 “조선의 여름풍경”이라는 주제를, 가을에는 “추석”이라는 주제를 정하고 관련 글들을 싣게 되었다. 항상 성공했는지는 자신이 없지만 적어도 우리는 독자의 관심 그리고 시의성이라는 두 가지의 토끼를 잡으려 고민을 거듭했었다. 그리고 특집 외에 두 개의 고정 꼭지를 정했고, 여기에 디지털 잡지의 특성을 잘 살릴 수 있는 웹툰(webtoon)도 같이 수록하기로 했다.


웹진 담談 1호(출처: 한국국학진흥원 스토리테마파크)



26호, 3주기를 맞아 거대한 재난을 다루다


매호마다 여러 사연들이 있었지만 여기에 특별히 “세월호” 관련 이야기를 기록하고 싶다. 이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한 것이 2014년 4월이었다. 이때는 이제 막 창간호와 2호가 발간되고 이후의 기획들을 확정해서 여러 필자에게 청탁하는 일로 분주했을 시기였다. 우리 사회를 뒤흔든 비극적 소식을 접했을 때 편집위원들은 이 거대한 재난을 대상으로 특집 주제를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를 실행에 옮기는 일은 쉽지 않았다. 이미 많은 필자들에게 원고 청탁이 진행되어서 중간에 갑작스럽게 계획을 변경하는 일은 불가능했다. 더구나 이 전대미문의 비극적 사건에 대해서 보다 시간을 두고 보다 면밀한 성찰을 담아야 한다는 목소리도 설득력을 가지고 있었다. 결국 우리는 바로 세월호 특집을 마련하는 것을 포기하고, 사건 3주기 때 그러니까 2016년 4월에 “재난, 그 후”라는 특집 주제를 정하고 관련 글들을 싣게 되었다. 2014년 4월에 우리가 내린 결정이 최선이었는지는 지금 생각해도 자신이 없다. 그러나 이를 우리가 우리 사회를 둘러싼 현재의 문제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웹진 “담談”의 성찰적 설득력 사이에서 끊임없이 고민했었다는 사실에 대한 하나의 작은 증거로 삼고 싶다.


웹진 담談 26호 ‘재난, 그 후’(출처: 한국국학진흥원 스토리테마파크)


잡지 일을 해본 사람들은 한다. 한 달에 한 번 발간하는 월간 잡지는 사실 실무적으로는 매일 발간되는 일간과도 같다. 매번 새롭고도 설득력 있는 그러면서도 딴전을 피운다는 인상을 주지 않는 매우 현실적인 특집 주제를 정해야 함은 물론이고, 그 기획 의도를 잘 파악해서 멋진 원고를 전해줄 필자를 찾아내야 한다. 입수된 원고들을 읽으면서 감탄과 탄식을 이어갔던 저 시간들이 엊그제의 일처럼 느껴진다. 발간된 웹진은 식탁에 제공된 음식과도 같다. 완성된 음식은 아주 많은 그리고 아주 무모한 저 수많은 노력을 감추고 있다. 오로지 아주 짧은 시간 안에 소비될 뿐이다. 다만 들판의 농부와 주방의 일꾼들은 자신의 땀과 노력 덕분에 아름다운 음식이 완성되어 소비자의 육체 속으로 스며들었다는 사실을 종종 기억하며 스스로의 노고에 대해서 조용히 격려를 보낼 뿐인 것이다.


웹진 담談 2021년 지난호 보기(출처: 한국국학진흥원 스토리테마파크)



웹진 제호 속에 담긴 의미


웹진의 창간 과정에서 편집위원들을 괴롭혔던 수많은 고민들 중에서 으뜸은 사실 새 웹진의 제호에 관한 것이었다. 긴 논의 끝에 “담談”이라는 제호에 안착할 수 있었다. 그때 우리는 “담談”이라는 이름을 세상에 내놓으면서 다음의 세 가지 정도를 마음속에 떠올렸던 것 같다.

우선 “담(談)”이라는 한 글자가 아니라 “담談”이라는 강조 형태를 선택하면서, 이름 그대로 아주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웹진을 만들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우리가 뿌리박고 있는 토양은 “스토리테마파크”가 아니었던가. 스토리가 가득한 정원에서 그 스토리 중에서 가장 흥미롭고 멋진 스토리들을 엮어서 독자들에게 선보이겠다는 의욕을 표현하고 싶었다.


웹진 담談 제호(출처: 한국국학진흥원)


둘째로 한글과 한자를 나란히 모두 표기함으로써 전통문화 자산을 오늘의 젊은 세대들에게 설득력 있게 재구성하여 제시하려는 우리 모두의 뜻을 표현하고자 했다.

마지막으로 비록 이 “담(談)”이라는 글자에 불 화(火)자가 둘이나 자리 잡고 있지만 말 그래도 “담담”하게 웹진을 만들어 나가자고 다짐했다. 웹진이라는 틀에 전통 문화 관련 콘텐츠를 담으면서 우리 사회에 벼락과 같은 엄청난 충격을 안겨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우리 공동체에 내재해 있는 다양한 문제들에 우리 과거 문화의 풍부한 자산이 어떤 해명의 빛을 던져줄 수 있을까를 천천히 고민하면서 한 걸음 한 걸음 굳은 걸음을 내딛자고 마음먹었다. 만약에 둘 다 가질 수 없다면 우리는 근력보다는 지구력을 선택한 셈이다. 그리고 그 선택은 충분히 성공했다고 자부하고 싶다.

웹진 “담談”의 창간에 관련된 이야기를 이렇게 적었으나 사실 창간 이후 긴 세월 동안 잡지의 편집 책임을 맡았다. 2014년 창간호부터 공직을 맡아 더 이상 편집위원직을 수행하기 어렵게 된 2018년까지 그러니까 100호의 거의 절반 정도의 “담談”에 대해서 편집위원직을 맡아 수행했다. 말하자면 이제까지 “담談”의 전반기를 맡았던 셈이다. 어떤 과장이나 겸손을 덧붙이지 않고 이야기하거니와, 후반기의 “담談”이 훨씬 다채롭고 진일보한 웹진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전보다 훨씬 풍요로워졌고 활달해졌다. 이 진전을 보며 전반기의 무능과 게으름을 자책하기 보다는 앞선 우리의 노고가 뒤의 열매를 위한 좋은 토양이 되었을 것이라는 정도로 스스로를 위로하고자 한다.

이제 100호를 맞이했으니 다음의 100호 그러니까 200호를 향해 달리는 일이 남아 있다. 담담하게 이어온 길이 앞으로도 담담하게 이어질 것으로 낙관한다. 다만 이 모든 노고에 독자의 관심이 늘어가기를 바랄 뿐이다. 글은 읽는 사람에게서 완성되는 법이다. 앞으로 담담하게 자기 길을 걸어갈 “담談”에게 큰 박수를 보낸다. 그것 또한 담담하게!




집필자 소개

김수영
김수영
웹진 〈담談〉 초기 기획의 자문을 시작으로 2014년부터 2018년까지 편집위원을 역임했다. 한양여자대학교 문예창작과에 재직 중이며,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원장을 지냈다. 문학과지성사 대표이사, 로도스출판사 대표, 한국출판인회의 정책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이토록 매력적인 철학』이 있다.
“무료한 틈에 계사년과 갑오년의 일기를 다시 읽어보다”

오희문, 쇄미록, 1597-07-04 ~

1597년 7월 4일, 벌써 올해 정유년도 절반이 지나갔다. 요사이 밤기운이 서늘하여 싸늘한 바람이 때로 불어 와서 아침저녁으로는 겹옷을 입지 않으면 안되었다. 심신이 상쾌하니, 가을 바람에 몸의 병이 나아가는 것을 스스로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요즘은 특별한 일이 없어 무료한 날이 많은데, 심심함을 이기려고 계사년과 갑오년의 일기를 꺼내어 다시 읽어보는 중이다. 전란을 피해 떠돌아다니며 병을 앓고, 추위와 굶주림에 지치며 고생한 내용을 다시 읽자니, 그때의 기분이 생생히 기억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때는 슬하의 7남매가 모두 무고히 살아 있었으니, 비록 때로 끼니를 잇기 어려운 탄식이 있었어도 비통하고 마음 상하는 일은 없었다.

지금 지내는 산속 고을로 들어온 이후로는 양식과 반찬을 조달하는 데는 어려움이 없고, 또 종종 맛난 반찬도 얻어다가 어머님을 봉양하고 아랫사람들도 먹일 수 있으니, 가히 근심이 없다고 할만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매번 좋은 음식을 앞에 두면 문득 슬피 울기를 그치지 않으니, 얼마전 죽은 딸 단아 때문이었다.

갑오년 봄과 여름에 굶주려 곤궁한 중에도 막내딸과 추자 놀이를 하면서 무료한 회포를 보낸 대목에 이르러서는 더더욱 막내딸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쳐 애통한 마음이 치솟았다. 일기를 읽어 내리던 오희문은 눈가가 촉촉이 젖어왔다.

“종이가 모자라 일기를 쓰지 못하다”

장흥효, 경당일기,
1621-08-21 ~ 1621-08-22

1621년 8월 21일, 일기는 장흥효에게 있어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면서 성찰의 기회가 될 수 있는 자신만의 공간이었다. 그의 일기는 다른 어떤 것에도 구애되지 않으면서 자기가 추구한 성리학적인 삶을 완성하는 하나의 경전과도 같았다. 공자의 논어와 맹자의 맹자, 주자의 사서집주(集註)가 있다면 장흥효에게는 일기가 있었다. 그만큼 그에게는 어떠한 것보다도 소중한 보물이었다.

그런데 종이가 모자랐다. 일기를 작성하기 위해서는 지속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기록할 종이가 공급되어야 했다. 물론 제자들이 공부를 배우는 대가로 종이를 가져오기도 하였고 친지들이나 아는 관원들이 종이를 지급해 주기도 하였다. 유력 양반이라면 사찰에서 질 좋은 종이를 공급받을 수 있었지만, 장흥효의 형평상 그렇게 하지는 못했다.

결국 종이가 모자라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장흥효는 심지어 20여 일 동안 종이가 없는 상태로 일기를 작성하기도 했다. 그러한 날이면 그는 날짜, 간지, 날씨만을 기록하기도 했다. 그래야 어찌 되었든 일기를 이어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천신만고 끝에 종이를 구했지만 문제는 모두 다 기록을 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있었다. 너무 오래되어 기억이 나지 않았다. 매일매일 쓰지 않으면 기억이 사라지는 나이가 된 것이다.

“서울 소식 전해주는 신문, 조보(朝報)”

김광계, 매원일기,
1634-01-17 ~ 1644-04-11

예나 지금이나 시골 사람들의 생활은 도시보다 단조롭기 마련이다. 김광계의 일상 역시 늘 읽던 책을 또 읽고 항상 만나던 사람을 다시 만나는 일의 연속이었지만 그렇다고 새로운 사건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1634년 1월 중순, 김광계는 ‘경보(京報)’를 읽었다는 기록을 일기에 남겼다.

경보란 조선시대 승정원에서 매일의 소식을 적어 발행하던 조보(朝報)를 의미한다. 김광계처럼 지방에 거주하던 양반들은 서울 소식이라는 뜻에서 조보를 경보라고도 불렀다. 조보를 읽으면 새로 바뀌는 세금 정책이나 조정의 정치적 논쟁, 당장 다음 달에 올 신임 수령의 인선까지 알 수 있었으니 지방 양반들에게 조보는 중요한 소식 창구였다.

현대의 종이 신문은 구독을 신청하면 매일 아침마다 집으로 배달받아 간편하게 볼 수 있지만 조선시대의 조보는 그렇지 않았다. 승정원에서 매일 조보를 발행하면 각 지방 관청의 서리들이 일일이 손으로 베껴 발송하는 식이었다. 따라서 관직이 없는 지방 양반들은 거주지의 수령에게서 빌려 읽거나 서울에서 오는 인편에 조보를 가져다 줄 것을 부탁하는 등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조보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서울에서 발행된 조보가 지방까지 오려면 시차가 생길 수밖에 없었고 매일 나오는 조보를 지방에서 그때그때 챙겨 읽기란 불가능했으므로, 보통 지방 양반들은 며칠이나 몇 달치 조보를 한 번에 얻어다 읽곤 했다. 김광계의 재종숙부 김령의 일기에는 예안 현감에게서 조보를 빌려 읽었다는 기록이 자주 등장한다. 열성 구독자로 거의 달마다 조보를 구해 읽고 그 내용도 상세히 적어 놓은 김령과 달리 김광계는 조보 읽기에 큰 흥미를 보이지 않고 어쩌다 들어오면 읽어 보는 수준이었던 듯하다. 번다한 세상사에 관심을 갖기보다 스스로의 공부와 수양에 더 마음을 쏟은 것이 김광계의 성품이었다.

“40여 년 동안 쓴 『해주일록(海洲日錄)』은 전감으로 삼을 만하다”

남붕, 해주일록, 1930-06-05

1930년 6월 5일, 남붕은 며칠 동안 읽은 『중용혹문(中庸或問)』 등사본의 후지(後識)를 작성하려다가 붓을 멈췄다. 등사했던 날짜를 쓰려고 했는데 기억이 나지 않아서였다. 남붕은 날짜를 확인하기 위해 『해주일록(海洲日錄)』을 가져 와 꼼꼼히 살펴보았는데, 아들 원모(元模)가 죽기 전인 기유년(1909) 봄에 난고정(蘭皐亭)에서 원모가 등사한 것임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남붕은 아들이 등사한 『중용혹문』에 발문을 짓고 점심 때 발문을 다시 베껴 썼다.

이렇게 오래 전의 일이 기억나지 않을 때 『해주일록』을 살펴보면 마치 어제 일처럼 기억이 역력하니 40여 년 동안의 기록이 지난 일을 살피고 증거로 삼을 수 있으니 여간 큰 도움이 되는 게 아니었다.

한 달 정도 지난 윤6월 4일 아침을 먹은 뒤에 남붕은 『해주일록』을 처음 쓰기 시작한 병술년(1886) 조 부터 살펴보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40여 년이고 해마다 기록한 것이 거의 50여 권이니, 전감(前鑑)이 될 만하다고 생각되었다.

“세월이 흘러도 『동소만록』은 썩지 않고 전해질 책이다”

남붕, 해주일록,
1926-03-06 ~ 1930-11-02

1926년 3월 8일. 남붕은 이틀 전에 우현(禹玄) 족조를 찾아갔다가 빌려 온 『동소만록(桐巢漫錄)』을 읽고 있었다. 남붕은 『동소만록』을 쓴 남하정(南夏正)이 조야의 고사를 수집하여 사건마다 평론을 붙여 마치 옛날의 『사기史』의 사례와 같이 글을 쓴 것에 관해 감탄하였다. 또한 남인(南人)과 노론(老論)이 벌인 당론의 시비에 대하여 더욱 분명하게 분석하여 놓았으니, 실로 남인의 보배이고 서인에게는 눈엣가시임이 분명했다고 생각했다.

남붕은 『동소만록』을 눈에서 떼지 못할 정도로 푹 빠져있었다. 누가 찾아오기라도 하면 함께 보거나, 책 속의 사건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족제 호의(浩義)가 왔을 때도 함께 보았고, 백우길이 찾아왔을 때도 책을 보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늘 빠짐없이 밤마다 경문을 외우는 일도 그만두고 『동소만록』을 보았다.

11일에는 8대조 통덕랑공(通德郞公)의 묘소, 부곡(釜谷)의 조부 부군의 묘소, 도동(道洞)의 부모님의 묘소를 참배하고, 뒷산의 여러 묘소와 위 봉우리 뒤 증조부 묘소까지 찾아 가 참배를 하기 위해 집을 나섰는데, 그 행낭 속에도 『동소만록』 1책을 챙겨 넣었다. 2~3일간 오고 가는 짬짬이 아직 다 보지 못한 것을 보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길을 나선 남붕은 긴 고개에 이르러 아들의 묘소를 둘러본 후 8대조 통덕랑공(通德郞公)의 묘소를 참배하고, 부곡(釜谷)으로 가서 조부 부군의 묘소를 참배하고, 정오에 도동(道洞)에 도착하여 부모님의 묘소를 참배한 후 그날 밤에 재사에서 잠을 잤다. 잠들기 전까지 『동소만록』을 보다가 자려고 하였는데, 금계(金溪) 종숙이 찾아와서 또 함께 이 책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음 날 아침에 뒷산의 여러 묘소와 증조부 묘소를 참배하고 재사에 머무르며 드디어『동소만록』을 다 보았다. 그리고 오후에는 금계 족숙의 집에서 머무르며 다시 『동소만록』을 보았다.

남붕은 몇 년이 지난 후 『동소만록』을 또다시 보았는데, 다시 보아도 이 책에서 기록한 국가와 조정의 고사나 의론은 정밀하고 분명하며 문장이 간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책이야말로 참으로 썩지 않고 오래도록 전해질 글이라고 생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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