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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속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무속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일견 상투적인 듯 보이는 질문을 던지는 것은 무속에 대한 우리 사회의 시각이 여전히 혼란스럽기 때문이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 무속은 한편으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과거의 불합리하고 비현실적인 관습의 하나로, 사람들을 미망에 빠트리는 부정적인 미신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진다. 다른 한편으로 무속은 고유한 전통문화를 담지(擔持)한 중요한 민속 전통의 하나 또는 여러 종교 가운데 하나로 인식된다. 이러한 모순된 시각의 혼재 속에서 무속은 한국 사회에서 여전히 실체가 모호한 경계적 현상으로 남아 있다. 이처럼 무속에 대한 모순된 시각의 혼재는 무속의 성격 및 한국인의 삶에서 무속이 갖는 위상과 의미를 이해하는데 장애 요인으로 작용해 왔다.


〈무속의식에 사용되는 주문을 모아둔 책〉 (출처: 국립민속박물관)


그런데 이런 모순된 상황은 현재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었다. 조선시대에도 무속에 대한 인식의 혼란은 여전했다. 그 주된 이유는 무속을 바라보는 당시의 지배적 시각과 현실의 괴리였다. 잘 알다시피, 조선은 유교를 지배 이념으로 성립된 국가이다. 유교 특히 성리학의 관점에서 무속은 부정의 대상이었고, 당연히 무속을 금지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사람들의 현실 삶에서 무속을 지우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무속은 상하를 막론하고 다양한 신분 계층의 삶에서 여전히 향유되면서 나름의 종교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공적인 입장에서 무속은 음사(淫祀)로 규정되어 그 존재가 공인되지 않았으나, 사적인 삶의 영역에선 여전히 삶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제공하는 종교 가운데 하나로서 기능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무속에 대한 모순된 태도나 시각이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이와 관련해서, 『천예록(天倪錄)』에 실린, 조선 중기의 문신 송상인(宋象仁, 1569~1631)의 이야기를 살펴보자. 송상인은 무속에 대해 성리학의 이념에 철저한 전형적인 유교 지식인의 태도를 보여준다.

송상인 공은 매우 강직하고 정대했으며, 평소에 무당을 질시하고 혐오하였다. 무당들이 귀신을 핑계로 백성들을 속이고, 빌거나 축원한다고 하여 오랫동안 음사를 벌이면서 사람들의 재물을 허비한 것이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으니, 실로 모두가 허망한 짓이라고 하였다. 항상 말하기를 ‘어떻게 하면 이 무리를 모두 없애 다시는 무당이 없도록 할 수 있을까’라고 했다.


이 이야기에 따르면, 송상인이 무속에 대해 단순히 부정적인 시각을 넘어 적대적 태도를 보임을 알 수 있다. 무속에 대한 적대적인 태도는 그가 남원부사가 되었을 때 행한 무당 축출령을 통해 분명해진다.

남원부사가 되자 영을 내리기를 ‘만약 우리 고을에 무당이라 이름하는 자가 발각되면 하나도 남김없이 매를 쳐서 죽일 것이니, 경내에 두루 명하여 모두 다 듣고 알게 하라’고 했다. 무당들이 이 영을 듣고 두려워하여 일시에 달아나 모두 다른 고을로 옮겨 갔다. 송 공은 더는 우리 고을에는 한 명의 무당도 없을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다가 그는 한 무녀를 만나게 되는데, 그 만남을 통해 무당과 무속에 대한 태도가 변화하게 된다. 송상인이 하루는 광한루에 올라갔다가 흙으로 빚은 장구를 메고 말을 타고 가는 무녀 한 사람을 발견한다. 무녀임을 확인하고 관아로 끌고 와서는 ‘무당은 모두 고을을 떠나라’라는 관가의 영을 듣지 못하였는지 묻는다. 그러자 무녀가 대답한다.

소인이 드릴 말씀이 있사오니 원컨대 굽어살펴 주십시오. 무당에도 진짜와 가짜가 있사옵니다. 가짜 무당이야 죽일 수도 있습니다만, 진짜 무당이야 어찌 죽일 수 있겠습니까? 관가에서 영을 내려 엄금하는 것은, 가짜 무당을 얘기하는 것이지 진짜 무당은 아닐 것이옵니다. 소인은 진짜 무당이옵니다. 관가에서 저를 죽이지 않을 것을 알고 편안히 있으면서 옮겨 가지 않았사옵니다.


송상인이 무녀에게 진짜 무당임을 주장하는 이유를 묻자, 무당은 시험을 해 보라면서 ‘영험이 없으면 죽음을 청하겠습니다’라고 대답한다. 그러자 송상인이 귀신을 부를 수 있느냐 묻고, 무녀는 어렵지 않게 부를 수 있다고 말한다.


〈무당의 영험함은 작두에 올라탄 모습으로도 나타난다.
《작두장군도》는 작두에 올라탄 장군신의 위엄을 보여준다.〉
(출처: 국립민속박물관)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송상인이 진정한 무당을 인정하는 조건으로 다른 세계의 존재인 귀신, 즉 죽은 자를 부르는 능력, 바로 신내림의 능력을 제시한다는 점이다. 송상인이 무녀에게 제시한 조건은, 무당이란 신내림을 통해 인간과 다른 세계의 존재를 연결하는 매개자이며, 무당의 진정성은 신내림의 진정성 여부로 결정된다는 이해를 전제하고 있다. 무당에 대한 이런 인식은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당시 송상인에게는 죽은 지 얼마 안 된 평생의 친구가 있었다. 그는 무녀에게 그 친구의 혼령을 불러 보라고 한다. 무녀가 혼령을 부르기 위해선 음식 몇 그릇과 술 한 잔이 꼭 필요하다고 말하자, 송상인은 음식과 술을 마련해 준다. 또 무녀가 ‘나리의 옷 한 벌을 주시면 그것으로 신령을 청하겠습니다. 옷이 없으면 신이 내리지 않습니다’라며 옷을 부탁하자, 송상인은 전에 입던 옷 한 벌을 준다. 준비를 마친 무녀가 드디어 송상인 친구의 혼령을 불러온다.

무당은 뜰 가운데 한 자리를 마련하고 술과 안주를 진설한 다음, 몸에는 송 공이 준 옷을 걸치고 허공을 향해 방울을 흔들면서 괴상한 말을 늘어놓으며 신이 내리기를 청하였다. 잠시 뒤에 무당이 ‘내가 왔네’라며 공중을 향해 먼저 유명을 달리하며 결별할 때의 슬픔을 말하였다. 그런 뒤 평생 서로 즐거움을 나누며 사귄 정을 이야기하였다. 대나무로 만든 말을 타고 놀던 일부터 책상을 맞대고 공부하던 일, 과거 보러 가던 일, 조정에 나가 벼슬살이를 하던 일, 모든 행동을 함께하고 벼슬하고 물러남도 같이 하며, 속마음을 터놓고 사귀며 아교와 옻처럼 서로 떨어질 수 없는 사이로 지낸 사정에 이르기까지 또렷이 말했다.


놀라운 것은 무녀의 말은 ‘모두 사실로 털끝만큼의 차이도 없이 맞혔다’라는 점이다. ‘또한, 공과 친구만이 알 뿐 남들은 알지 못하는 일도 털어놓았다.’ 이렇게 무녀의 신내림을 통해 죽은 친구(의 혼령)와 만난 송상인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공은 이를 듣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을 흘렸으며, 슬픔을 이기지 못해 말했다. ‘내 친구의 혼령이 과연 왔구나. 의심할 바가 없다.’ 공은 곧 좋은 술과 안주를 차리도록 하여 친구에게 대접하였다. 한참 있다가 인사를 하고 서로 헤어졌다.


신이 내린 무녀의 말을 들으면서, 송상인은 무녀에게 내린 혼령이 자신의 옛 죽마고우임을 확신하고 비록 혼령이나마 친구에게 술과 음식을 대접한다. 송상인은 무당의 신내림을 통해 죽은 친구와 다시 만나는 경험을 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경험은 그가 눈물을 흘리고 의심할 바 없다는 말을 하게 할 만큼 사실적이었다. 한마디로 죽은 친구를 살아있는 사람처럼 만나는 생생한 체험을 한 것이다. 그런 생생한 체험을 가능하게 한 것은 바로 무당의 신내림이었다. 이 경험을 통해 송상인은 무당의 신내림, 나아가 무속의 진정성을 확신하게 된 것이다. 그러면 이 경험은 무속을 바라보는 송상인의 태도와 시각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을까?

공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나는 늘 무당이란 모두 간사하고 거짓된 것으로 간주했는데, 이제 비로소 무당 중에도 진짜가 있음을 알았도다’ 하고, 무당에게 후한 상을 주고 무당을 금하는 영을 거두어들였다. 이로부터 다시는 무당을 몹시 배척하는 말이나 의견을 내지 않았다.


송상인이 이전에 무속을 부정하고 적대시하는 전형적인 유교 지식인의 태도를 보였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이 경험을 통해 무속의 진정성을 인정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그의 변화는 근본적인 변화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변화를 가져온 계기는 무당의 신내림을 통한 죽은 친구(의 혼령)와의 만남이라는 경험이다. 무속을 통해 가능해진 실제 경험이 무속에 대한 태도의 변화를 초래한 것이다.

무속에 대한 실제 경험과 충돌하는 것은 무속에 대한 그의 성리학적 관점이다. 당시에 무속에 대한 지배적 관점은 성리학적 관점이었다. 송상인이 무속에 대한 실제 경험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성리학적 관점을 고수했다면 그런 변화는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다. 서로 모순되고 충돌하는 기존의 성리학적 관점과 실제 경험 사이에서 송상인은 실제 경험이 가리키는 길을 따랐던 것이다. 그것은 송상인이 구체적인 삶의 경험에 열려있는 개방적 사람이라는 점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기존 관점이나 이론을 뛰어넘어 새로운 이해의 길을 열어주는, 실제 삶에서의 구체적 경험의 힘을 확인시켜 주는 것이기도 하다.


〈최근 티빙에서 제작·방영한 《샤먼 : 귀신전》은 평범한 사람들의 생생한 무속 경험을 취재한 다큐멘터리로
큰 인기를 끌었다.〉 (출처: 티빙)


무속은 한국 역사에서 오랜 시간 동안 사회적, 종교적 억압 가운데 지속하여 왔다. 그런 억압 속에서도 무속이 지속할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이었을까? 여러 요인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중 하나가 송상인의 사례를 통해서 나타난, 무속이 제공하는 경험의 진정성과 힘이 아니었을까? 무속은 말로 설명하고 주장하는 종교가 아니다. 그것은 몸의 종교이다. 직접 말하기보다는 몸을 통해 보여주고 실제로 느끼도록 할 뿐이다. 그럼으로써 구체적이고 생생한 경험을 가능케 한다. 무속을 통해 가능한 경험의 생생함, 구체성, 그리고 그런 경험의 진정성이 무속의 종교적 생명력의 하나가 아닐까?

참고문헌
임방 저, 정환국 역, 『교감 역주 천예록』, 성균관대학교출판부, 2005.
이능화 지음, 서영대 역주, 『조선무속고: 역사로 본 한국 무속』, 창비, 2008.




집필자 소개

이용범
안동대학교 문화유산학과 교수. 「일제의 무속 규제정책과 무속의 변화」, 「한국무속과 시베리아 샤머니즘의 비교」 등의 논저가 있다.
“집터의 길흉을 점치다”

점괘패 (출처: 국립민속박물관) 최흥원, 역중일기, 1764-02-14

1764년 2월 14일. 맑은 날이었다. 어머니는 환후가 심해지지 않았으나, 최근 들어 부쩍 음식 드시기를 싫어하시니, 애가 타고 두려운 마음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어제는 송도관이 최흥원을 찾아왔는데, 이 사람은 평소 점을 잘 치기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오늘 아침에는 송도관이 최흥원을 위하여 집터의 길흉을 점쳤는데, 관괘에서 비괘로 바뀌는 점괘를 얻었다. 이 점괘는 대단히 불길한 것으로, 그간 집안에 많았던 좋지 않은 일이 집터로 인해 일어난 것 같았다. 최흥원은 집터가 매우 불길하다는 말을 듣고는 거처를 옮겨야 하나 하는 고민까지 생기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동구에 있는 새 집터에 대한 점도 쳐 보았는데, 이 터에는 복괘가 진괘로 바뀌는 점괘였다. 꽤 길한 점괘라고 할 수 있었다. 본래 이곳에는 항진이가 새로 집을 지어 거처할 계획이었는데, 집터가 좋다고 하니 정말 다행이었다. 항진이는 얼마 전 진사시에도 합격하였는데, 아마 집터의 좋은 기운을 받으면 대과에도 급제할지 모를 일이었다.

아내의 묘도 불길하다고 하여 이장을 하였는데, 이제 집터마저 기운이 좋지 않다고 하니 최흥원은 어찌해야 할지 고민이었다. 아내, 형제, 아들……. 귀중한 혈육들이 이 집에서 몇 명이나 죽어 나갔는지 생각하면 당장이라도 새로운 집으로 이사를 하고 싶은 생각이었다. 그러나 큰일을 쉽게 결정할 수는 없는 법이고, 그럴만한 경제적인 여유도 없었다. 최흥원은 송도원의 점괘를 앞에 두고 깊은 고민에 빠졌다.

“과거를 꿰뚫어보는 맹인 점술가 ‘김여추’”

점괘표 (출처: 국립민속박물관) 권문해, 초간일기, 1594-03-09

1584년 3월, 권문해는 추운 겨울을 지나 어서 봄을 만나고 싶었다. 그러나 3월 9일, 바라본 소백산에는 겨울처럼 눈이 내려온 산이 다 하얗게 되었다. 더욱이 연일 서리가 내려 초목의 싹이 대부분 시들어 죽어가는 걸 보니 마음까지도 메마르는 듯하였다. 그러던 중 예천군 성주 류세무와 경상북도 선산부백(善山府伯) 류덕수(柳德粹)가 경상북도 의성군의 대곡사(大谷寺)에 만나기를 청하였다.

3월 14일, 권문해는 집을 나서 대곡사로 향했고 그곳에서 3일을 머무르며 류세무와 류덕수와 이야기를 나누며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

3월 15일, 이야기 중 경상북도 선산군의 부백 류덕수에게 자신의 고을에 맹인 점쟁이 김여추(金汝秋)에 대해서 듣게 된다. 앞을 못 보는 맹인이지만 그 누굴 만나도 그가 살아온 과거를 귀신같이 맞춘다는 것이다. 권문해와 류세무는 명경수(明鏡數) 김여추의 이야기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김여추의 이야기를 한참 듣던 류세무는 율시 한 수를 쓰는데,

화와 복은 다 이미 정해진 것 禍福皆前定
꽃 피고 시드는 것은 각기 때가 있다네 榮枯各有時
정원의 꽃은 일찍 떨어져 버리지만 花落園中早
산골짝 옆 소나무는 오래도록 산다네 松生澗畔遲
현묘한 이치 원래 수가 있는 것이니 玄機元有數
조물주가 어찌 사사로움을 용납하리오 造物豈容私
모름지기 반계(磻溪) 늙은이를 알아야 할거니 須識磻溪叟
끝내 임금의 스승이 되었네 終爲帝者師

대곡사에 모인 권문해와 류세무, 류덕수는 앞 못 보는 맹인 점쟁이 이야기를 통해 세상의 이치를 논하는 이야기로 밤새는 줄 몰랐다.

“자신의 수명을 점쳤던 점괘가 생각나다”

『점괘』 (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오희문, 쇄미록, 미상

1593년 3월, 해가 바뀌자마자 100여 일을 앓았던 오희문은 최근에야 밥을 먹고, 지팡이에 의지하여 운신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사이 사람들 사이에서는 오희문이 병으로 죽었단 소문도 돌았고, 이로 인해 아들에게는 위문편지가 날아오기도 하였다. 병이 너무나 심하여 오희문 스스로도 이제 곧 죽는구나 생각했던 순간들이 많았는데, 이제 이렇게 다시 살 수 있게 되니 감회가 새로웠다.

문득 15년 전의 일이 생각났다. 그때 오희문은 양지현 농촌에 머물고 있었는데, 죽산에 사는 맹인 김자순이란 자가 점을 잘 친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리하여 그를 불러다가 자신의 운명을 점치게 하였는데, 그때 김자순이 이렇게 이야기하였다. “나이 54세, 그러니까 임진년에 큰 횡액이 있고, 이것을 지나면 70살 넘게 살 수 있다” 그때 오희문은 재미 삼아 친 점이라 특별히 신뢰하지 않고 있었는데, 과연 임진년에 난리가 터져 거의 죽을 뻔하게 되었다. 비록 몸의 병은 해를 넘겨 생겼지만, 김자순이란 자가 이야기한 점괘와 신기하게 맞아떨어진 것이 아닌가! 오희문은 새삼 점쟁이 맹인의 신통함에 감탄하였다.

“딸이 죽은 지 백일이 되어 굿을 하다”

오희문, 쇄미록, 1597-05-11

1597년 5월 11일, 오늘은 딸 단아가 죽은지 백일이 되는 날이다. 집사람이 무당을 불러다 놓고, 이웃집에 자리를 차리고는 징과 북을 치면서 굿을 하였다. 아마 딸의 원혼을 달래려고 하는 모양이지만, 한갓 미신인 것을 어찌하겠는가. 오희문은 그것이 허사인줄을 알면서도 애통한 마음과 부인의 마음을 헤아려 그대로 허락하고 말았다. 어쩌면 저 굿은 딸아이가 아니라 집사람을 위한 것이리라.

무당이 한창 북과 징을 울려대며 푸닥거리를 하니, 옆에서 집 사람 역시 무당의 말을 듣고는 눈물을 줄줄 흘리며 통곡하였다. 그것을 바라보는 오희문 역시 애통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다. 미신인줄이야 알지만, 무당이 딸아이의 목소리를 흉내내는 대목에서는 콧등이 시큰거려 도저히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오희문 딸의 백일 기일이란 이야기를 듣고는 이 고을의 품관과 교생 등 15명 남짓 사람들이 술자리를 베풀고는 오희문과 아들 윤겸을 초청하여 위로의 자리를 가졌다. 비록 오희문은 얼마 전에 난 입병 때문에 술을 마실수가 없었으나, 그들의 호의는 무척 감사하였다. 이곳은 사람들의 품성도 순박한데, 음식도 사람들을 닮아서 모두 담백한 맛이었다. 이런 순박한 맛이야말로 선현들이 말한 후하고 아름다운 풍속이 아니었겠는가. 위로해 준 사람들은 모두 술에 취하여 저마다 시끄럽게 떠들고, 노래도 하고, 춤을 추기도 하였다. 맨 정신의 오희문은 자리에 앉아 살아있던 시절 딸의 얼굴을 떠올려 보았다.

“미신인줄 알면서도 기도를 올리다”

오희문, 쇄미록, 1597-01-16

1597년 1월 16일, 딸 단아의 증세가 날로 심각해져갔다. 지난 해 10월부터 병을 앓기 시작하더니, 해가 넘기고도 병세가 잦아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오래도록 누워있고 씻지를 못하니 온 몸에 이가 끓고 피부병마저 앓게 되어 그 형상이 참혹하였다. 약을 써도 듣지를 않으니 답답한 노릇이었다. 단아의 병으로 피난 길에 오른지 한 달이 되었건만 아직 충청도 아산 고을에 머물러 있었다.

어떤 사람이 지나가는 말로 가르쳐주기를, 병자의 생기복덕일을 가려서 글 아는 중을 불러가지고 쌀 3되로 밥을 지어 세 그릇에 담고, 정화수 한 그릇에 백지 한 장으로 깃대 5개를 만들어 세운 이후, 징을 치고 경을 외우면서 빌면 자못 효험이 있다고 한다. 오희문은 듣는 순간 그것이 허망한 일인 줄은 알았지만, 딸아이의 병이 어떻게 해도 효험이 없자 이거라도 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이리하여 사람을 시켜 중을 불러다가 물었더니, 다행히 내일이 딸 단아의 생기일이라고 한다. 이에 들은 대로 준비해서 그 암자로 보내어 내일 새벽에 기도를 올리도록 하였다. 그리고 종 개질지를 시켜서 짐을 가지고 가도록 하고 아울러 등유 반종지도 함께 보냈다.

중의 이름은 인천이란 자였는데, 호남 출신의 중으로 이 암자에 머물고 있으면서, 이러한 기도로 일을 삼는다 하였다. 오희문은 영 믿음이 가지 않았으나,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기도가 효험이 있기를 빌었다.

“몇 자 되는 뱀을 때려죽이다”

오희문, 쇄미록, 1596-06-16

1596년 6월 16일, 오늘은 종일 음산하게 비가 내렸다. 말더듬이 계집종과 개금이, 그리고 품삭일꾼 두 명으로 하여금 어제 끝내지 못한 김매기를 시켰는데, 역시 오늘도 끝내지 못하였다. 밤에 창 앞에 누워 있는데, 처마 끝에서 잠자던 새들이 놀라 지저귀는 소리가 시끄러웠다. 이상한 생각에 올려다보니 뱀이 새집을 찾으며 처마에 걸려 있었다. 깜짝 놀란 오희문은 종 덕노를 시켜서 갈고리로 뱀을 걸어 내려서 때려죽였다.

뱀이 오희문 집에 나타난 것은 오늘이 처음이 아니었다. 지난 10일경 그날도 비가 내리는 날이었는데, 처마에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려 창문을 올려다보니 처마 끝에 뱀이 걸려 있었다. 그 뱀은 길이가 무려 몇 자나 되고 검붉은 반점 무늬가 있는 것으로 보아 독사가 분명하였다. 새집을 찾아서 새끼를 잡아먹기 위해서 지붕에 올라갔던 것이다. 만일 잡아 죽이지 않으면 필경 사람을 해칠 뻔했으므로, 뱀을 잡은 것을 다행스럽게 여겼던 터였다.

그런데 오늘 잡은 뱀을 보니 얼룩진 무늬가 먼젓번 죽였던 뱀과 똑같은 것이었다. 독이 있는 뱀이 이와 같이 자주 출몰하니 매우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며칠 사이에 이와 같은 큰 뱀을 두 마리나 잡아 죽였으니, 혹 집안에 이상한 변고가 생기는 것은 아닌지.... 오희문은 마음에 꺼림칙한 생각이 들어 고개를 가로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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