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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와 책

김정미

선비라는 말을 들으면 떠오르는 전형적인 모습이 있을 것이다. 큰 갓, 엷은 빛깔의 치렁치렁한 도포. 때로 잘 다듬어진 수염.... 등등등
그런 모습을 한 선비가 있을 법한 장소는? 전쟁터? 그건 아닐 테고, 시장? 은 가끔 장을 보러 갈수도 있겠지만 물건 파는 사람은 아닐 테고. 논밭?도 있을 순 있겠지만 어쩐지 그 모양새로 일을 할 거 같진 않고.....술집? 뭐.. 어울리지 않는 건 아니지만.....
생각해보면 선비란 존재가 거해서 가장 어울리는 장소는 앉은뱅이책상-보통 궤안(机案)이라고 불리는데 서탁(書卓)이라고도 한다- 앞이다. 그리고 그 위에는 당연한 것처럼 책이 한 권 척 놓여있다. 그리고 선비는 자연스럽게 그 책을 보고 있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생각하는 선비의 가장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선비와 책은 이렇게 떼어내려 해도 떼어 낼 수 없는 모습으로 우리에게 인식되어 있다.
그런데 사실 오늘날의 우리는 선비의 모습을 실제로 본 적은 없다. 결국, 이렇게 선비라고 하면 그려지는 전형적인 모습은 대개 TV 사극이니, 역사영화 등에서 본 모습이다. 그렇다면 이런 TV 사극이나 역사영화들은 무엇을 참고하여 전형적인 선비의 모습을 그리게 된 것일까? 19세기나 20세기 초에 남은 사진 자료도 큰 참고가 되겠지만, 기본적으로 책 읽는 선비의 모습은 옛 문헌에서 찾아낸 선비 일상생활의 구성을 통해 만들어진 것이다.
옛 문헌 속 조선 시대 선비들은 진짜로 책을 자기 몸처럼 소지했으며 자기 몸처럼 아꼈다. 선비들은 책을 통해 지식을 얻을 뿐 아니라 자기 수양과 인격연마, 더 나아가서는 국가경영의 요체를 얻으려고 했고, 얻을 수 있다고 믿었다.

흑립 흑립(黑笠) - 조선 시대 선비들의 상징으로 검은 빛깔의 갓

조선시대 선비

조선은 선비의 나라였다. 선비는 조선 시대 지식인을 의미하는 말로 계급을 가리키는 용어는 아니다. 하지만 때로 선비는 양반이라는 계급적 단어와 혼용되어 쓰이기도 한다. 그 이유는 선비가 양반이 되었고 양반이라면 선비여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한자 문화권에 속했던 조선에서 지식인을 뜻하는 단어인 ‘선비’는 순수 우리말이라는 것이다. 한문공부를 목숨처럼 생각했던 지식인을 순수 우리말인 선비로 불렀던 데는 어떤 민족적 확고한 의지가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때로 한자의 사(士)자를 선비 사(士)라고 하여 그 의미를 공유하고는 있지만, 엄밀히 말하면 선비와 한자의 사(士)는 그 뜻이 조금은 다르다.
선비의 ‘선’은 몽골어의 ‘어질다’는 말인 ‘sait’의 변형인 ‘sain’과 연관되고, ‘비’는 몽골어 및 만주어에서 ‘지식이 있는 사람’을 뜻하는 ‘박시’의 변형인 ‘뵈’에서 온 말이라고 분석되기도 한다. 즉 선비란 어질고 많이 아는 사람이란 뜻이다. 이에 비하여 한자의 사(士)는 ‘벼슬한다’는 뜻인 사(仕)와 관련된 말로서, 일정한 지식과 기능을 갖고서 어떤 직분을 맡고 있다는 의미를 갖는다. 사(士)는 ‘일한다’ 또는 ‘섬긴다’(士, 事也)’는 뜻으로 보아, 낮은 지위에서 일을 맡는 기능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도 한다.
우리 조상들은 한자를 들여오면서 사(士)의 뜻을 선비라고 확정 지었다. 그 안에는 사(士)와 선비라는 존재에 대한 민족적 요구나 열망, 의지 같은 것이 들어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즉, 어질고 지식 있는 사람이 벼슬을 하여야 한다는, 역으로 말하면 벼슬을 하려면 어질고 지식이 있어야 한다고 민족적 합의를 본 것이다.
그래서일 것이다. 선비들이 책 읽기를 게을리 해서는 안 되었던 이유가.
선비들은 책 속에서 지식을 얻어 똑똑해져야 했고 자기 수양과 인격연마를 통해 어질어져야 했던 것이다. 그래야만 국가의 시스템을 떠받치는 자가 되어 벼슬살이를 할 수 있었다. 백성들은 어질고 많이 아는 자의 벼슬살이를 인정하면서 그가 양반이라는 상류층으로 계급화하여 자신들을 다스리는 것을 용인하였던 것이다. 그렇지 않은 자는 선비도 양반도 될 수 없다고 여긴 것이 우리 조상들의 생각 아니었을까?
책을 통한 지식습득과 자기 인격수양의 단계에서 더 나아가 국가 경영과 통치에까지 이르면 선비는 비단 양반 계급뿐만 아니라 왕에게도 요구되는 자격 조건이었다.
조선은 기본적으로 성리학적 이데올로기가 통치이념이었던 국가였다. 그렇다 보니 일단 성리학이 뭔지를 아는 자가 나라를 다스려도 다스릴 수 있는 시스템이었다. 그러니 결국 책 읽기는 왕에게 요구되는 필수 항목이 될 수밖에 없었다. 성리학 자체가 자기인격도야를 수반하는 학문이다 보니 책을 읽다 보면 왕의 인격수양도 저절로 되었을 터. 왕은 세자 시절부터 유수한 학자들을 스승으로 두고 공부에 공부를 거듭해야 했고 왕이 된 이후에도 공부하지 않으면 왜 공부 안 하느냐고 신하들의 질책을 들었다.

왕의 서재 영화 <역린> 에 등장 한 왕(정조)의 서재

최근에 개봉된 영화 <역린>에는 현빈이 분한 정조를 지근에서 모시는 내시로 ‘상책’(정재영 분)이 나온다. 많은 사람들이 상책을 내시 개인의 이름이라고 여길지 모르는데 이는 이름이 아니라 내시부의 벼슬 명이다. 상책은 조선 시대 내시부의 종4품 벼슬자리였다. 보통 상책의 자리는 3개 정도였는데 주로 왕의 서책을 담당하는 일을 맡았다. 말하자면 왕의 개인 사서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 <역린>에서도 상책은 정조의 책을 보관하고 찾아오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나온다.
상책 3명 중 한 명은 임금의 매사냥에 관계하는 응방의 내시였고 나머지 두 명은 왕을 지근에서 모시면서 왕이 원하는 책을 찾아다 주거나, 더 나아가 왕비전의 명령을 출납하는 일도 맡았다. 왕의 매사냥이나, 책 찾기, 왕비전 일들이 일정 정도 왕의 사생활과 관련되어 있다 보니 당상관직은 아니었지만, 상책은 왕과 매우 밀접한 위치에 있는 내시였던 것은 분명하다. 왕의 내밀한 사생활을 공유하는 내시에게 책과 관련한 업무를 맡긴 것을 보면 조선시대 왕의 책 읽기는 상당히 중요하면서 생활화된 필수적인 일이었던 것 같다. 즉 조선 시대에는 왕도 책을 읽어 어질고 많이 아는 선비가 되어야 했던 것이다.
이러한 왕의 선비적 자질의 요구는 조선 후기로 내려오면서 더욱 강화된다. 일단 양반 선비사회가 안정화하면서 지식의 축적이 상당해졌기에 이들을 상대하여야 했던 왕은 이들과 맞먹거나 혹은 이들을 이겨 먹을 정도의 지식은 가져야 무시당하지 않았다. 조선 후기의 경우 영조와 정조는 상당한 학문을 이루어서 선비출신 관료들과 대등하거나 우월한 입지에서 정국을 운영했지만, 그렇지 못한 왕들은 신하들에게 암묵적인 무시를 당하면서 정치적으로도 질질 끌려가는 모습을 보인다. 왕의 책 읽기가 정치에 반영되다 보니 그것이 민생과 직결되었음을 말하지 않아도 알 일이다.(이것은 오늘날의 정치와도 분명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선비들의 책사랑

그렇다면 조선 시대 선비라고 하는 사람들은 어떤 책을 어떻게 읽었을까?
일단 선비가 되기 위한 기본 중의 기본이 되는 책은 4서 5경이었다. 이보다 앞서 초심자 코스의 입문은 <소학>을 읽는 데부터 시작되었다. 소학은 오늘날로 치면 초등학교 과정이라고 할 수 있는데 가장 기본적인 인간의 도리를 몸에 익히고 체득하도록 가르친 입문서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다음 사서(四書)와 오경을 통해 성현의 뜻을 본받고 실천하였다. 사서란 <대학(大學)>, <논어(論語)>, <맹자(孟子)>, <중용(中庸)>이고 오경은 <역경(易經)>, <서경(書經)>, <시경(詩經)>, <예기(禮記)>, <춘추(春秋)>이다.
이런 기본이 완성되면 그 위로 갖가지 학문 도야와 인격수양에 관계된 책들을 읽었다. 중국 책과 우리나라 유수한 학자들의 책이 두루 읽혔고, 퇴계나 율곡의 대학자들은 이들의 책을 읽고 따르는 제자들이 형성되기도 하였다. 조선이 성리학 국가였던 만큼 <근사록>이나 <주자문집> 등 주자의 저술과 송나라 시대 저작, <통감> 등의 역사서도 인기 서적 중의 하나였다.

장황 장황(裝潢) - 서책을 보존하고 장식하는 도구

스토리테마파크에서도 서비스 하는 17세기 인물 김택룡이 쓴 <조성당일기>를 보면 성리학 서적과 주자 관련 서적의 인기를 실감할 수 있다. 1612년 김택룡은 강원도 영월현감(寧越縣監)에 재직하고 있었는데 당시 강원 관찰사였던 한덕원(韓德遠)이 명나라 사신으로 가게 되자 중국에서 책을 좀 사다 달라며 인삼을 서적구입비로 맡기며 부탁한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학문선진국으로 가는 사람 편에 부탁해 외서를 구입한 셈이다. 국가간 교류가 많지 않던 시절에 영월현감 정도의 자리에 있던 사람이 중국의 서적을 구하고자 할 정도라면 당시 선비들의 책 욕심은 가히 놀랍다고 할 만하다. 이때 사온 책이 『성리대전(性理大全)』과 『통감(通鑑)』, 『송감(宋鑑)』 이었다. 이 책을 전해 받은 김택룡은 안동의 분천에 보내 특별주문으로 책에 비단을 발라 보관하였다. 책에 대한 애정이 대단했던 것이다.
책 자체를 장식품으로 소중히 한 것만은 아니었다. 19세기 인물 서찬규의 <임재일기>에서는 선비에게 책은 밥과 차와 같다고 했으며 배움을 얻기 위해 가지지 못한 책이 있으면 이를 밤새 베껴 쓰면서 공부하기도 하였다. 20세기 초 학자인 김교준은 책을 하도 읽어서 요통을 얻을 정도였다고 한다. 또 앞의 <조성당일기>에서는 책 읽기를 게을리 한 손자에게 할아버지가 회초리를 치는 등 선비의 책 읽기와 교육을 게을리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어느 나라 어느 시대든, 정책을 세우고 실행하는 지식인 엘리트 관료군은 있다. 하지만 조선의 경우처럼 넓은 의미에서 관료 후보군들이면서 책을 통해서 자신의 학문 도야와 인격수양을 수행한 엘리트들은 거의 없었다. 조선은 선비라는 이름으로 오늘날로 말하자면 소위 공인들에게 학문과 인간수양의 자세를 요구했고 공인예비군들에게도 이를 요구함으로써 지행합일한 어질고 똑똑한 광범위한 엘리트군을 양성했다.
조선의 선비들은 책을 통해 자기 존재를 인식했고 증명했으며 표출하였다.

작가소개

김정미 작가
공병훈 교수
영화 시나라오 작가, 역사 칼럼니스트, 선문대학교 강사
대학과 대학원에서 한국사를 전공했고, 현재는 역사를 재밌는 콘텐츠로 만드는 일을 공부하는 중이다. 방송드라마, 다큐멘터리 작가로 활동했으며 현재는 영화 시나리오를 쓰면서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역사 관련 칼럼들을 여러 매체에서 연재중이다.
<세계사 여자를 만나다> <천추태후> <그들은 어떻게 세상을 얻었을까> 등 책을 냈으며 최근에 낸 책 <한국사영화관>를 통해서는 영화를 통한 역사읽기, 역사 속에서 영화소재 찾기 등 영화와 역사간 통섭을 시도하고 있다.
“미안하네.. 책을 내주기 어렵네.”

미안하네. 책을 내주기 어렵네. 1623년 3월 5일 경상북도 종사관(從事官)으로 근무하던 김자중(金子中)의 아들 곡(?)은 예안현 김령의 집을 찾는다. 아버지의 편지를 가슴에 품고. 그러나 한식제와 또 다른 제사가 겹쳐 김령이 출타 중이었기에 김곡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어렵게 구한 책에 비단을 바르다”

어렵게 구한 책에 비단을 바르다 1616년 8월 24일 경상북도 예안의 김택룡의 서재에 비단을 곱게 입혀 장황(裝潢)을 마친 책이 도착했다. 지난 5월 김택룡은 당나라 시대에 인쇄된 《통감(通鑑)》, 《송감(宋鑑)》, 《성리대전(性理大全)》등 40여 책을 도산면에 사는 이운에게 보내어 장황을 맡겼다.

“빌려 보고, 베껴 쓰고, 선비의 독서법”

빌려 보고, 베껴 쓰고, 선비의 독서법 대구 달성에 사는 젊은 선비 서찬규는 어려서부터 책을 읽고 삶의 이치를 논하기를 좋아했다. 22세인 1846년에 진사에 올랐으나 벼슬을 버리고 오로지 자신을 수양하고 학문을 탐구하는 데 온 힘을 쏟았다. 더욱이 이 시기의 조선은 서양의 사상과 문물이 유입되면서 사회적으로 큰 변화와 혼란의 시기를 맞이하고 있었기에

“독서로 얻은 요통을 치료하러 지리산에 가다”

독서로 얻은 요통을 치료하러 지리산에 가다 충청북도 옥천에 살던 김교준은 몇 년째 작고 낮은 책상 앞에 다리를 접고 앉아 허리를 숙이고 책만 보았다. 그는 책을 볼 수 있음에 행복해하며 독서에 매진하였다. 그러나 스물셋이 되던 해에 그에게 이상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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