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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ver Story

‘상소(上疏)’를 드라마에서 어떻게
쓸 수 있을까?

-드라마 <정도전>과 드라마 <징비록>을 중심으로-



조경란

성균관 유생들의 유소행렬이요!

김윤식(남장을 한 김윤희), 문재신, 구용하를 비롯하여 성균관의 유생 무리들이 성균관을 나와 거리를 지나고 마침내 궁궐 문 앞에 당도한다. 임시 장의이자 소두인 김윤식이 관리에게, 그들 무리의 이름을 모두 적은 연명상소문을 전한다. 그러자 모두 합문(閤門:왕이 평소에 거처하는 편전의 앞문) 밖에 엎드려 한목소리로, 억울하게 옥에 갇힌 성균관 유생 이선준의 무죄방면과, 그를 구금하기 위해 성균관을 범한 형조의 사죄를 요구한다.(19회) 얼마 후(20회), 김윤식이 ‘금등지사(金縢之詞 : 노론이 왕권을 모욕하여 사도세자를 죽게 만들었다는 내용이 쓰인 문서)’의 비밀을 풀어내자 여기서 힘을 얻은 정조는 대궐 문 앞에 엎드려 있던 유생들에게 성군다운 결단을 전한다. 드라마의 결말 부분인 19회와 20회에 등장한 연명상소로 극의 긴장감은 최고조에 이르렀다. 그러나 젊은이들은 자신들의 생각을 모으고 목소리를 하나로 하여서 그들을 옥죄었던 모든 문제를 해결하였다. 이들이 연명상소를 올리는 과정에서, 드라마가 전하려는 메시지가 전해졌고, 드라마가 지닌 판타지 성격도 함께 드러났다.


<성균관스캔들> 20회 복합(伏閤) 장면

드라마 <성균관 스캔들> 의 행복한 결말이다. 그럼, 다른 드라마 속에서 연명상소의 결말은 어떠했을까? 대하드라마 <정도전> 8회에서는 젊은이들이 연명상소하다가 투옥되는 장면이 있다. 우왕 원년에 북원에서 고려에 사신을 보내자, 고려 조정은 공민왕 때 단절된 북원과의 외교를 재개할 것인가를 두고 갈린다. 이인임 등은 친원책을 주장하고, 정도전은 이를 반대하고 친명책을 주장하다가 나주로 유배된다. 이어 이인임의 실정을 탄핵한 이첨과 그 배후를 자처한 박상충도 투옥되고, 이들을 구하기 위해 정몽주와 권근, 염흥방 등 신진사대부들이 연명상소하여 사직한다. 그러나 이들 신진사대부와 최영의 신변을 두고 이인임이 명덕태후와 거래를 하면서, 이들은 모두 고신을 당한 뒤 유배되고 말았다.


<정도전> 8회 정몽주와 신진사대부들이 상소와 관인을 들고 가는 장면


친원책을 주장한 이인임 등의 권문세족과 친명책을 주장한 정도전․정몽주 등의 신진사대부들이 대립하던 정치 상황, 그 대립으로 신진사대부들이 대거 유배된 역사적 상황을 여기서 그대로 볼 수 있었다. 상소의 과정, 처리와 반응, 결과에서 기승전결이 갖춰져 상소는 하나의 사건이 되었고, 그 사건으로 당시 시대상이 설명되었다. 드라마 <성균관스캔들>과는 달리 드라마 <정도전>에서 연명상소의 결과는 유배형이었다. 이 차이점에서는 드라마 <정도전>이 드라마 <성균관스캔들>과는 달리 역사적 사실에 충실한 드라마라는 성향을 읽을 수 있다. 이렇게 드라마의 성향을 드러내는 것 외에도, 상소는 드라마의 국면을 전환하는 기점이 되거나 새로운 사건이 발생하는 시발점이 되기도 한다.
친명배원(親明排元)의 뜻을 같이 했던 고려의 신진사대부들은 몇 년 후에는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된다. 정도전 등은 ‘가짜 왕을 폐하고 진짜 왕을 세우겠다.’는 ‘폐가입진(廢假立眞)’을 명분으로 창왕을 폐위하고 공양왕을 옹립한다. 드라마 <정도전> 37회와 38회에서, 이들은 간관들을 앞세워, ‘가짜 왕[창왕]’을 옹립했던 이색 등의 처형을 주장하는 소를 공양왕에게 올린다. 이에 정몽주 등은 이색을 옹호하고, 상소한 이들을 탄핵하는 소를 다시 올린다. 여기서, 정몽주와 정도전에게 각각 그들을 따르는 무리가 있고, 그 무리들에 둘러싸인 두 사람의 사이가 이제는 더 이상 가까워 질수 없을 만큼 멀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드라마 <징비록> 8회에서는 동인과 서인이 각각 상소를 올려 서로를 견제하는 장면을 볼 수 있다. 서인들은 세자를 세워 왜변을 막자고 연명상소하였다가 오히려 동인에게 역공을 당한다. 동인들의 공격으로 정철 등이 유배를 가게 되면서, 조정은 동인 중심으로 바뀐다. 이 사건은 일본과 세자에 대하여 동․서인의 서로 다른 문제인식과 문제해결 방식으로 갈등을 빚었던 역사적 사실을 설명해 주었다. 이후 드라마는 임진왜란 직전 동인 중심의 정국 운영을 보여주었는데, 이 사건은 그와 같은 전개의 기점이 되었다.

한편, 서인들이 통문을 돌리고 연명으로 상소하는 과정에서 송익필, 정철 등의 인물들이, 상소가 처리되고 여기에 역공을 가하는 과정에서는 선조, 류성룡, 이산해 등의 인물들이 두드러졌다. 상소라는 사건을 통해 사건을 둘러싼 인물들의 관계, 그 관계 속의 위치, 성격 등이 만들어진 것이다. 앞서 언급한 드라마 정도전 속에서는, 이첨을 구하기 위해 상소의 배후를 자처하여 희생하는 박상충, 상소의 배후가 되어 상소를 정쟁의 도구로 쓰는 이인임이 만들어졌다. 또 서로의 간관들에게 상소를 사주하고, 그 상소로 정쟁을 하고 있는 정도전과 정몽주라는 인물이 만들어지기도 하였다.

상소를 둘러싼 관계나 반응뿐만 아니라 상소 그대로 인물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드라마 징비록 속에서는 조헌이 도끼와 함께 상소를 올리는 부지상소(持斧上疏 : ‘받아들여지지 않으려면 도끼로 머리를 쳐 달라’는 의미)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여기서는 왜적을 막겠다는 내용과, 그것을 적은 강한 글귀 속에 보이는 그의 의지뿐만 아니라 그의 미래까지도 드러난다. 왕에게 목숨을 걸고 상소했던 만큼 조헌은 왜란 중에 의병을 모아 목숨을 걸고 왜적과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드라마 <정도전>에서 언급되었던 정도전의 상소들은, 그의 생각과 계획을 담아내 보여주었다.


드라마 <정도전> 1회 상소가 공민왕에게 전달되기를 기다리는 정도전

인물의 생각이 담긴 상소는 긴 문서가 아니라 때로는 다른 모습으로 드러날 때도 있다. 드라마 <징비록> 2회에서는, 류성룡이 기축옥사에 연루되자 추국장으로 죄인의 모습으로 나아가 자신을 변호하면서 동시에 당시 세태를 질타한다. 이때 류성룡의 대사는 가감이 있기는 하지만, 1589년 선조에게 자신을 탓하면서 올렸던 그 상소의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에 드라마 속의 선조는 류성룡의 죄를 용서하고, 자신의 신을 벗어 그에게 신겨준다. 이 장면 속 선조는 류성룡을 처벌하지 않고 이조판서로 중용하였던 역사적 사실 속의 선조와 다르지 않다. 이 장면은 인물들의 행동, 대사, 분위기로 상소를 표현해 냈다고 할 수 있다.


드라마 <징비록> 2회 선조가 류성룡에게 자신의 신을 벗어 신겨주는 장면


상소(上疏)는 소(疏)를 올린다는 말인데, 이때의 소는 관리가 왕에게, 백성이 왕에게 올리는 문서이다. 상소는 승정원을 통해 왕에게 전달되었고, 왕은 이에 대한 답을 내렸다. 왕에게 올리는 문서이기 때문에 그 문서의 시작은 매우 정중하여,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목욕재계하고 백번 절한 다음에 주상 전하께 말씀을 올린다[誠惶誠恐 謹齋沐百拜 上言于主上殿下]”라는 표현을 썼다. 그러나 그 내용은 관리나 백성이 왕에게 올리는 간언이기 때문에, 위진남북조 때의 문장이론서인 『문심조룡』에서는 상소를 “붓끝에서는 반드시 사나운 바람이 일어나고 종이 위에는 서리가 맺힐 만큼 싸늘함이 있어야 한다.”고 하였다. 상소의 비판 기능은 그 사회를 건강하게 만들 수도 있었고, 쇠락하게 만들 수도 있었다. 상소로 피바람이 일어나기도 하였고, 상소로 피바람에 희생된 이들이 복권되기도 하였다.

언뜻 상소에 대하여 일희일비(一喜一悲)하는 사회로 보이지만, 상소는 공론(公論)을 형성하였으므로, 상소를 둘러싼 조선사회의 반응은 공론정치를 천명한 조선을 가장 잘 설명한다. 상소의 내용과 반응으로 그 시대를 설명할 수도 있고, 이렇게 설명된 시대를 토대로 하여 사건을 전개할 수도 있다. 또 시대의 맥락에 따라 전개되는 사건 속에 인물의 위치를 찾아 정하면, 인물을 만들어 낼 수도 있다. 이는 앞서 살펴본 드라마에서 찾을 수 있었던 상소의 쓰임과 유용성이다. 역사기록물에서 만나는 상소를 이런 측면에서 다시 읽어본다면 딱딱한 문서가 아니라 훨씬 유용한 소재와 콘텐츠로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작가소개

조경란 박사
조경란 박사
재밌는 이야기를 좀 더 많이 알고 싶어서, 서강대에서 역사 공부를 하였습니다. 박사과정(한국사전공)을 마치고 나서는 사단법인 세종대왕기념사업회에서 연구원으로 일하면서 계속 역사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스승님께 배운 수많은 이야기를 혼자만 알고 있는 게 안타까워 알고 있는 것을 나눌 수 있는 방법을 찾다가, MBC 드라마 “주몽” 작가와 같이 공부할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시작해서, 드라마 제작진의 역사 자문에 응한 드라마가 KBS 대하사극 “정도전”, “징비록”, “장영실” 등 약 10여편 정도 됩니다.
“ 어머니의 눈물어린 배웅 - 사도세자의 죽음에 얽힌 억울함을 고하러 한양으로 향하다 ”

권방(權訪), 천휘록(闡揮錄),
1792-04-17
1792년 4월 17일, 정오쯤 부친이 곧바로 봉서(鳳栖)로 오셨는데 아우 석조가 모시고 왔다. 즉시 백부의 편지를 보시고는 사건의 단서를 대충 아시고 다른 별 말씀이 없으셨다. 오후에 내가 부친을 모시고 집으로 돌아오고, 동생 석조는 다시 문소로 향하였다. 표종(表從: 외종)인 신면조(申冕朝)·봉조(鳳朝) 형제가 나의 행사(行事)를 듣고 편지를 보내 고무하여 힘쓰게 하였다. 저물녘에 하상(河上)에 도착하여 백부와 숙부들을 뵙고, 곧 북촌(北村) 본가에 가서 담장 밖에서 어머니의 건강을 탐문하고 우두커니 서서 한참을 바라보았다. 어머니께서 북쪽 창문을 열고 한양 가는 일을 상세히 물으셨다. 나는 이 일의 대강을 말씀드리니 어머니께서는 절반도 듣지 않으시고 목이 메여 눈물을 흘리셨다. 이는 어머니께서 모년(某年: 1762년 사도세자가 죽던 해)의 사건에 그 전말을 상세히 아셨다. 때문에 매번 말을 하다가 그 사건이 언급되면 울분 감개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이 소식을 들으시자 눈물이 절로 흘러내리신 것이다.

“ 발을 싸매고 문경새재를 넘어, 피를 쏟으며 올립니다 - 만 명의 상소문을 올리다 ”

권방(權訪), 천휘록(闡揮錄),
1792-04-27
1792년 4월 27일, 상소문을 작성한 사람들이 이른 아침에 모여 소장을 봉함하였다. 상소문에 이름을 적은 사람은 모두 10,057명 이었다. 상소문의 대략은 다음과 같다. “경상도 유학 이우(李㙖) 등은 발을 싸매고 조령을 넘어 피를 쏟으며 소장을 올립니다. 확실한 처결로 화란(禍亂)의 뿌리를 영원히 뽑아서 의리를 밝히고 윤리와 강령을 세우시기를 바랍니다.”

“ 촛불 아래 엎드려 읽은 상소문, 그리고 임금의 눈물 ”

권방(權訪), 천휘록(闡揮錄),
1792-04-27
1792년 4월 27일, 주상이 희정당(熙政堂)에 납시어 서쪽을 향하여 단정하게 앉고, 진신과 장보들이 뜰 아래에 차례로 서니 보좌(寶座)와의 거리가 불과 10여 보 밖에 되지 않았다. 전상(殿上)은 시끄럽지 않고 고요하기만 한대 다만 승선 1명, 기주관 2명, 내관 2~3명이 좌우에 고개를 숙이고 엎드려 있었다. 승선이 교지(敎旨)를 전하여 말하기를 “지난번 이지영(李祉永)의 상소에는 비답(批答)을 내리지 않았는데, 그대들은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천리를 와서 충정을 쏟아내니, 나의 뜻을 면전에서 알리지 않을 수 없어 그대 들을 부르게 하였으니 소두는 전(殿)에 올라와 상소문을 읽는 게 좋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우가 서쪽 계단을 따라 올라가서 동쪽을 향하여 꿇어앉아 엎드려 소장을 읽었다. 소장을 반도 읽지 못하여 해가 이미 저물었다. 사알(司謁)이 여덟 자루 촛불을 전상에 벌여 놓았다. 읽기를 마치자 주상이 한참 동안 마음을 억누르고 진신과 장보들을 각각 몇 명씩 앞으로 나오게 하였다. 승선이 크게 소리 질러 말하기를 “이 일을 잘 아는 진신과 장보 각 2명씩 전에 오르면 된다.”고 하였다. 김한동(金翰東)·강세륜·김희택·이경유가 서쪽 계단을 따라 올라갔다. 주상이 또 말하기를 “다시 몇 명 더 전(殿)에 올라오너라.”라고 하였다. 김한동(金翰東)이 승선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진신 중에 성언집·이헌유와 장보 중에 김시찬을 올라가게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승선이 또 부르기를 “성언집·이헌유·김시찬은 전에 오르시오.”하여, 나아가 엎드렸으나 주상이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옥색(玉色: 임금의 안색)이 몹시 처량하고 슬퍼보였으며 자주 소매를 들어 눈물을 닦았다. 목이 메여 말을 못하다가 한참 만에 장황하게 타이르며 숨김없이 자세하게 말을 다하였는데, 비록 한 집안의 부자 사이라도 이보다 더할 수는 없었다. 소두가 일어났다가 엎드려 대면(對面)을 마치니, 주상이 또 뜰에 있던 여러 진신과 장보들에게 명하여 들어와 전에 올라 비답을 듣게 하였다. 소두가 비답을 받들고 차례로 물러나니, 밤은 이미 사경(四更: 오전 3시~오전 5시) 사점(四點)이었다. 주상의 특명으로 유문(留門: 궁궐 문을 열고 닫는 시각을 유보함)하여 통금을 해제하여 주었다. 진신과 장보들이 서로 손을 잡고 감읍하여 돌아왔다.

“ 성균관생들의 동맹 휴학 - 만인소에 확인 도장을 찍어주지 않은 죄를 물어라! ”

권방(權訪), 천휘록(闡揮錄),
1792-04-29
1792년 4월 29일, 듣건대 밖에 있는 유생 이존덕(李存德) 등이 태학에 통문을 보냈는데, 내용이 엄정(嚴正)하였다 한다.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여러 군자께서는 이미 태학에 거처하면서 변괴가 연이어 일어남을 보고서도 어찌 태연히 예사로 여겨 묵묵히 한 마디 말도 없어야 되겠습니까? 만약 우리들의 말을 옳다고 여기신다면 회답을 주시고, 그르다고 여기신다면 이를 잘 헤아려주시기를 바랍니다.” 이리하여 서재생(西齋生)들이 함께 권당(捲堂)을 행사하였다. 성균관장 김방행(金方行)이 들어와서 그들의 의사(意思)을 수렴하여 주상에게 주청하였다.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전 교리 김한동(金翰東)의 상소는, 태학에서 ‘근실’을 허락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를 여러 방면으로 핑계를 대어 의리를 회색(晦塞: 꽉 막혀 깜깜함)시켰다고 하였고 재유(齋儒) 최홍진이 성균관에 보낸 단자와 밖에 있는 이존덕의 통문은 호역완토(護逆緩討: 반역자를 옹호하고, 응징을 느슨하게 함)의 이름으로 몰아붙이니, 염치와 의리로 보건데, 얼굴을 들고 식당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고 하였다. 주상이 사알(司謁)을 시켜 구전으로 하교하기를 “반역자를 성토하는 일을 누가 감히 소홀하게 하겠는가마는, 혹 장의(掌議)이 선출되지 못함으로 인하여 그런 것은 아닌가? 아니면 혹 지방유생들이 격식있는 관례를 알지 못하여 그런 것은 아닌가? 다른 유생들이 마땅히 권하여 식당에 들어오도록 해야 할 일이지만 일이 커지면 대응하기가 몹시 어려우니 권하여 들어오라는 뜻을 대사성에게 전하라.” 하였다. 서재생들이 마침내 저녘식당에 들어가 그날 장의 및 두 반수(班首)인 이동수(李東洙) -이 성토와 징계를 듣고 왜 ‘근실’해 주지 않았는가?-, 맹현대(孟賢大) -의도적이지는 않았지만 불행히도 근실을 해주지 않은 죄에 해당- 의 벌을 의논하였다.

“ 이제 그만 고향으로 돌아가 학업에 전념하시오 - 3차 상소를 준비하던 유생들에게 내린 임금의 하교 ”

권방(權訪), 천휘록(闡揮錄),
1792-05-16
1792년 5월 16일 소청에 모여 소록을 등사하였다. 막 칙교를 받았을 때는 비록 도리에 구애되어 상소하는 일을 잠시 멈추었지만 다사들의 체류가 재일(齋日)이 지나면 충심으로 호소하는데 지나지 않으니 22일 후에 다시 세 번째 상소를 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한편으로는 소초(䟽草)를 작성하고 한편으로는 소록을 작성하였다. 19일 소록 작성을 다 마쳤다. 모두 11,365명이다. 20일 소초가 완성되었다. 소두 권 감찰·김시찬이 각각 한 본씩을 작성하였으나 봉사대부가 지은 것이 가장 적절하여 사론이 반드시 이것을 사용하려고 하였다. 장로들의 소견(所見)이 일치하지 않아 더하고 뺀 것이 많아서 다른 곳에 물어보고 다시 다른 조목을 넣었다. 21일 이 날은 곧 우리 경모궁(景慕宮)[사도세자]의 제삿날이다. 우리 성상(聖上)의 그립고 애통한 마음 어찌 다함이 있겠으며 우리들이 두렵고 피가 끓는 것은 과연 어떠하겠는가? 제사를 마친 뒤에 즉시 상소를 하려고 하였으나 첫째는 차마 못하겠고 둘째는 감히 못하겠으니 우선 다음 날을 기다려보기로 하였다. 22일 주상이 김한동(金翰東)을 불러 하교하기를 “지금은 의리가 분명하게 결판이 났으니 영남 유생들은 더 체류할 필요가 없다. 아까 경연에서 좌의정이 주청한 바가 있었다. 물러나가 좌의정을 보고 상세히 물어서 영남 유생에게 전달을 하라. 일전에 체류 식량을 받지는 않았지만 지금 회량(回糧)을 주면 반드시 감히 받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또 들으니 유생들이 물러나 학업을 닦으라는 비답을 듣고자한다고 하니 모름지기 비답을 내리는 법식에 의하여 말로 하교를 전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하였다. ...... 중론이 마침내 상소를 정지하자는 의논을 주장하였다. 그 중에 불충에 죽더라도 남쪽으로 돌아갈 뜻이 없는 자는 다만 2~3명뿐이었다. 그러나 일이 이미 이에 이르렀으니 다시 무엇을 하겠는가? 아! 애통하구나. 우리들이 천리를 와서 일만 명이 한목소리로 30년간 꽉 막혀서 감히 말하지 못한 일을 말하는 것이 과연 얼마나 큰 의리이며 큰 행사인데 다만 우리의 정성이 부족하고 의견이 일치하지 않아 끝내 유시무종(有始無終: 시작은 있으나 결과가 없음)의 탄식으로 돌아가니 애석함을 이길 수 있겠는가? 그러나 우리 성상이 꾹 참고 있는 본 뜻은 중천에 뜬 태양같이 밝으니 우리영남의 모든 유생들의 윤리는 죽더라도 거의 눈을 감을 것이다. 이날 서울인사로서 문안인사를 온 자가 매우 많았으나 다 힘없이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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