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 탁, 탁, 탁......”
먼지 쌓인 고서들 사이, 홀로 침잠하듯 서실에 외로이 박혀있던 이정구의 귓가에 맑은 목탁소리가 들려왔다.
“거 누구요?”
“중흥사의 성민의 서신입니다.”
근래에 쓸쓸한 나날을 보내던 이정구에게 그는 진정 반가운 이가 아닐 수 없었다. 성민은 이정구의 불문의 벗이었다. 이정구는 단숨에 성민이 보내 온 편지를 읽었다.
“삼각산에 유람오기로 약속 하셨지요? 산에 가을이 깊어 단풍이 절정입니다. 며칠만 지나면 단풍잎이 모두 떨어질 테니 만약 방문하려는 생각이 있다면 오늘 오셨으면 합니다.”
홀연히 바람을 따라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이정구는 성민의 제안에 무척이나 설렜다. 이정구는 신응구 형님에게도 동행하자는 편지를 보냈다. 그리고 그 편지의 말미에 또 한 명의 동행을 요청했다.
“산에 가면서 퉁소가 없으면 재미가 없지요. 형님 댁에 퉁소 잘 부는 그 노비도 데려오면 좋겠습니다.”
퉁소 부는 것으로 장안에 이름이 난 그의 이름은 억량이었다.
신응구를 만나기로 한 홍제교 앞, 이정구는 도착해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신응구는 보이지 않았다. 이정구는 머쓱해졌다. 오랜만의 나들이에 옆집의 자제들도 대동하고 나왔는데, 신응구가 약속장소에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단 길이 엇갈렸을 수 있으니 중흥동 석문으로 올라가 봅시다.”
“혹... 바람 맞으신 건 아니겠지요?”
자제의 물음에 이정구는 체면이 확 상했다.
‘형님이 이런 적이 없는데...’
이정구는 불안함을 애써 누르고 태연한 척 산을 올랐다.
“정구야!”
신응구가 중흥동 석문의 바위에 걸터앉은 채 이정구 일행에게 손을 흔들었다.
“형님, 왜 홍제교에서 있잖구 여기서 기다리신 거예요?”
“말 마라, 우리가 늦는다고 성민 스님은 벌써 술자리를 시작하였다고 해서 급하게 왔다. 어서 올라가세.”
이정구는 한시름이 놓였다. 그의 마음이 다시 설레기 시작했다. 그런데 신응구의 옆엔 억량이 보이지 않았다.
“헌데 형님, 퉁소 부는 노비랑 함께 오지 않았소?”
“보통 바쁜 게 아니다. 지금도 아마 남의 잔치에 가 열심히 불어재끼고 있을 것이다.”
신응구는 사람 좋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이정구는 대꾸하지 못했지만, 아쉬운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정신없이 서둘러 민지암으로 들어가는 입구, 시냇물을 타고 맑은 퉁소 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이 동네에 억량만큼이나 퉁소를 잘 부는 노비가 또 있던가!’
이정구는 속으로 감탄하며 걸음을 재촉했다. 어느 새 해는 뉘엿뉘엿 산허리로 숨어들고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절에서 성민과 여러 중들이 이정구 일행을 맞아 들였다.
“오시느라 고생 많았소. 이리와 앉으시오.”
이정구 일행은 월대에 걸터앉아 숨을 골랐다. 자제들은 목이 말랐는지, 술 한 주발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참으로 시원합니다. 선생도 한 주발 하시오.”
이정구도 단숨에 한 주발을 들이켰다. 갈증이 가시며 속이 탁 트이는 기분이 들었다. 기분 좋은 어지러움과 약간의 취기가 올라오는 가운데, 멀리서 퉁소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그러더니 이내 그 소리가 크게 들렸다.
“억량, 인사드리옵니다.”
그의 앞에 절을 하는 이, 그가 찾던 명인 억량이었다!
“안 그래도 잔치에 가 있는데, 삼각산에 이정구 선생이 온다하지 않소? 배탈이 났다 핑계를 대고 샛길로 얼른 와부렀소!”
억량은 호탕하게 웃었다. 이정구가 전에도 그의 소리를 높게 평가해준 것을 잊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이정구는 박수를 치며 기뻐했다.
“역시 시냇물을 타고 들려오던 퉁소 소리는 억량의 것이었군!”
깊은 산 속의 푸른 밤, 억량의 맑고 고운 퉁소 소리가 귀를 씻을 듯, 울려 퍼졌다. 이정구는 억량의 퉁소 소리에 묵은 체증이 내리는 듯, 깊은 청량함을 느꼈다.
맑은 계곡물에 발을 담구고 여름의 정취와 풍류를 즐긴 선비들의 모습
강세황 <태종대太宗臺>,《송도기행첩松都紀行帖》중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위의 내용은 1603년 9월 15일 월사 이정구가 삼각산을 유람하면서 풍류를 즐기며 노닐었던 이야기를 담은 『유삼각산기(遊三角山記)』에서 전하는 내용이다. 이처럼 선비들이 풍류생활을 즐길 때 퉁소와 함께 했다는 이야기는 200년이 넘는 세월이 흐른 1850년의 서찬규가 쓴 『임재일기(林齋日記)』에서도 그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1850년 7월 16일 서찬규는 뱃놀이 당시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7월 16일. 맑음.
... 이날 밤은 고요하고 하늘과 강은 공활하여, 노 젓는 소리에 다만 물새들이 놀라고 마을에서 달을 보고 짖는 개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갈대만한 작은 배에서 서로 어지럽게 떠들며 객의 퉁소가 노래에 화답은 이루지 못하였으나, 바가지 술을 서로 권하니 그 즐거움이 적벽의 신선 소동파에 양보되지 않았다. ...
여름 밤, 고즈넉한 정취와 퉁소 소리와 사람들의 담소 소리가 이어지는 풍경은 선비들의 풍류생활의 여유로움과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이와 같이 좋은 자연경관 속에서 ‘시서금주(詩書琴酒)’로 노니는 것을 풍류라 하여 생활의 주요 영역으로 삼았다고 한다. 여기서 거문고(琴)는 피리나 퉁소 등으로 대체되기도 했다. 중요한건 이와 같은 문인들의 풍류생활이 단순히 즐기는 데에서 머무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풍류 속에서 나온 시나 글은 문학적 축적을 가능케 했고 풍류생활의 주내용 중의 하나인 음악은 나름대로 뚜렷한 음악문화를 형성할 수 있게 하였다. 위에서 본 두 문인의 일기만으로도 퉁소가 선비들의 일상생활 속의 음악으로써 자리한지 200년을 훌쩍 넘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선비들의 풍류 생활 속에 퉁소가 들어온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퉁소라는 용어가 우리나라에 공식적으로 소개된 시기는 고려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후 궁중과 민간에서 사용되었고, 조선후기에는 풍류방에서 널리 사용되는 악기로 발전되었다. 조선후기의 여러 『진찬의궤』, 『진연의궤』, 『진작의궤』에 의하면 궁중잔치 때마다 퉁소는 연례악 연주에 사용되는 악기였다고 한다. 이러한 형태의 퉁소가 다양하게 개량되면서 선비와 서민들의 음악에 합류하게 된 것이다. 그 때 선비들이 풍류를 즐기는 자리에서 퉁소를 부는 음악 수요에 응하는 이를 적노(笛奴)라 했다. 즉 젓대를 부는 노비(奴婢), 억량(億良)과 같은 이라고 할 수 있다.
퉁소는 어느 한쪽도 막혀 있지 않고 위 아래가 통하는 관대의 모습의 관악기
악학궤범(樂學軌範) 권 7에 실려 있는 퉁소
『한겨레 음악 대사전』에 기록된 바에 의하면 억량은 광해군(1608~1623) 때 젓대(大琴)명인이다. 광해군 시기에 앞서 1603년 이정구가 『유삼각산기(遊三角山記)』에 먼저 억량을 언급하여 사실상 오늘날 전해오는 억량에 대한 기록은 이것이 전부이다. 사전의 기록에 따르면 억량은 평천군수 신공(申公)이 참석한 잔치판에서 이정구 선생이 자신을 초대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가능하면 그곳을 빨리 빠져 나올 궁리를 찾았다고 한다. 누구보다 자신의 음악을 알아주는 이정구였기 때문이다.
그가 적노(笛奴)에서 젓대 명인의 칭호를 얻기까지 신분 상승의 과정은 이정구와 같이 억량의 음악적 재능을 알아주는 이가 있었기에 가능했을 거라 추측된다. 이정구가 기록한 가을산에서 풍류를 즐긴 어느 날의 일기에는 비교적 억량의 능력과 등장이 세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정구는 처음부터 억량에 대해 ‘퉁소 부는 것으로 장안에 이름이 났다’고 언급하며 그가 실력을 인정받은 이라는 것을 언급했고, 시냇물을 타고 들려오는 퉁소 소리에 ‘억량의 퉁소 소리와 비슷했다’라고 말할만큼 그만의 특별함을 알아주었다.
서찬규의 『임재일기』를 비롯한 다른 문헌을 보아도 퉁소를 부는 이는 풍경으로 존재할 뿐이지, 이처럼 그 자신이 주체가 될 만큼 기록되지 않았다. 이정구가 노비인 억량에게 어떤 태도를 가졌는지 짐작되는 대목이다. 풍류생활 속의 풍경으로 존재했던 억량을 예술가로 이끌어 낸 것은 바로 이정구 선생이었다.
여러 잔치판에 불려 다니며 사대부들의 호사취미에 하는 수 없이 부응하는 것과 달리 자신의 음악적 재능을 알아주는 이정구 선생과의 풍류자리는 억량이 예술적 기지를 뽐내는 자리가 되었을 것이다. 잔치판에서 꾀를 내어 빠져 나온 뒤 이정구 선생에게 들뜬 마음으로 달려왔을 억량의 마음을 헤아려 본다. 예술가의 기질은 자신을 알아봐 주는 이의 앞에서 더욱 빛난다. 억량에게 이정구는 자신의 소리를 알아주는 지음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앞에 있을 때 억량은 적노(笛奴)라는 현실의 제약을 뛰어넘은 예술가였을 것이다.
시기 | 동일시기 이야기소재 | 장소 | 출전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