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바로가기본문 바로가기
페이스북PDF
Cover Story

홍도의 영정귀곡(影幀鬼哭)

강윤미


가뭄이 길었다. 군데군데 작은 강에는 흙바닥이 엎드려 죽어 있었다. 한때 나룻배를 묶어두었을 나루터에는 버드나무가 죽은 사람의 혀 같은 나뭇잎을 매달고 있었다. 그 풍경은 사나흘을 바삐 걸어도 바뀔 기미가 없었다. 십 수 년 만에 찾아온 마른장마치고는 역병마냥 지독했다. 가뭄의 뙤약볕은 버드나무의 앙상한 그늘에 붙어 알 수 없는 갈증의 족보를 잇고 있었다.

홍도는 강나루를 벗어나자마자 다리쉼 할 곳부터 찾아 나섰다. 이리저리 시선을 옮겨 보아도 인가는 쉽사리 눈에 띄지 않았다. 간혹 사람의 인기척이 있을 법한 곳은 여지없이 폐가였다. 폐가가 품고 있는 우물들은 하나같이 바짝 말라비틀어져 거꾸로 처박혀 있었다. 우물의 밑바닥에는 짐승의 것인지 사람의 것인지 가늠할 수 없는 뼈가 사금파리와 함께 뒤엉켜 있기도 했다.

삼복더위를 틈타 찾아든 한여름의 뙤약볕과 가뭄 끝의 갈증은 홍도의 입속에도 머리카락 속 서캐처럼 성가시게 다가왔다. 강가에서는 버드나무가 씨름하고, 산에서는 죽은 떡갈나무가 죽은 매미의 울음을 붙들고 있으며, 사람들은 가느다란 숨을 겨우 연명하고 있었다. 홍도는 인천을 떠나온 지 딱 보름째 되는 오늘, 임금이 내린 교지를 꺼내 다시 읽어보았다. 잠시 갈증이 달래지는 듯하였으나, 폐 속 깊이 찾아든 갈증까지는 임금의 어명도 어쩔 수 없어 보였다.

홍도는 무지물 고개의 초입에서 떡갈나무에 붙은 매미의 텅 빈 번데기를 한참 동안 들여다보았다. 매미의 텅 빈 번데기를 보고 있는 동안 홍도는 이 길을 떠나온 것이 자못 후회됐다. 자신의 스승인 강세황만 아니었다면 자신은 도화서의 화원이 될 필요도 없었다. 스물아홉의 나이로 영조 임금의 어진을 그리고 그 뒤 정조 임금의 초상까지 그렸으니, 자신은 살아서나 죽어서나 여한이 없었다. 그러나 다시 찾아온 정조 임금의 어명을 홍도는 끝내 거역할 수 없었다. 조선 최고의 화원이 임금의 영정을 그려 꿩의 깃털에 태우지 않으면 이 가뭄이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조선 최고 점쟁이 ‘김여추’의 말이 결국 어명으로 이어진 것이다. 이는 임금의 어명이기도 하였으나 점쟁이의 어명이기도 했으며 백성을 살리는 길이기도 했으니, 홍도는 거역할 명분이 없었다.

홍도는 사실 연풍 현감 자리에서 파직된 이후 조정의 일에 관여하지 않으려 했다. 그저 인천 바닷가를 배경으로 한 풍속과 인물, 영모 등을 가미하여 그림이나 그리다가 생을 마감하고 싶은 작은 소망만이 있었을 뿐이었다. 그런 홍도에게 임금의 어명은 지금의 갈증보다 더한 고통이었다. 그러나 그런 고민도 잠시 이 무지물 고개에서 만난 가뭄과 뙤약볕의 갈증은 지금껏 홍도가 겪어보던 그 어떤 고초보다도 더 지독하고 징그러웠다. 마치 바늘이 허파를 찌르는 듯한 고통이 뒤따랐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무지물 고개에서는 물을 먹지 못하고 죽은 귀신이 사람에게 붙어 사람의 피를 빨아 목을 축인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홍도는 그 흉측한 소문을 익히 전해 듣고도 이 무지물 고개의 초입에 들어선 것이다.



“이 고개만 넘으면 한양이다......”

홍도는 바짝 타들어 가는 입술에 침을 묻히며 혼잣말을 되풀이했다. 사실 이 말을 반복한 지는 사흘이 훌쩍 넘었다. 무지물 고개의 능선이 기약도 없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이 고개에 들기 전 홍도는 무지물 고개에서 장돌뱅이 셋이 끝내 고개를 넘지 못하고 숨을 거뒀다는 풍문을 전해 들었다. 홍도의 귀에서 이골이 날 정도의 죽음에 관한 풍문은 인천의 저잣거리를 떠돌며 생선의 썩은 비린내를 풍겨냈다. 인천 바닷가에서 한양으로 소금을 옮기던 자들이라는 말과 한양으로 과거 시험을 치러가던 자들이 싸움을 벌였다는 말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물을 먹지 못하고 죽은 귀신들이 사람의 피를 빨아 목을 축였다는 말이 더 신빙성을 얻으며 홍도를 뒤따라왔다. 그러면서도 홍도는 어쩌면 자신이 임금의 어명보다 이 무지물 고개의 소문의 진위가 더 궁금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물이 아주 귀한 까닭에 ‘무지물 고개’라는 말보다, 이 고개의 끄트머리에 사는 눈먼 무당을 만난 사람들 모두가 송장이 되어 돌아왔다는 믿지 못할 이야기는 홍도에게는 그저 세간의 뜬소문처럼 느껴졌다. 그것도 모두 자신의 영정 사진 속 눈물을 핥아 먹으며 죽었다고 하니 보고 듣고도 믿지 못할 이야기들뿐이었다.

홍도는 이 고개를 넘으며 갈증에 시달린 사람들이 죽기 전 자신의 영정을 그린 후 갈증을 참기 위해 영정 속 눈물을 핥아 먹다가 미치거나 죽었을 것으로 생각했다. 무지물 고개에서는 물 한 잔을 얻어 마시고 싶으면, 고개 끝에 있는 무당의 집에 들러 무당이 요구하는 영정의 그림을 반드시 완성해야 한다는 소문도 홍도의 확신을 거들었다. 보통의 경우 사람들은 대충 영정을 그린 후 무당에게 물 한잔을 달라고 요구한다고 한단다. 그러면 눈이 먼 무당이 나타나 우물을 가리키며 물을 마음껏 마시고 가라고 전한단다. 그때 우물 속을 들여다보면 자신의 얼굴이 떠올라 눈썹을 그려달라고 운다는 것이었다. 눈이 먼 무당이니 어찌 그림의 완성을 확인할 수 있을까마는 눈속임이 오히려 목마른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몰았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어쨌든 눈이 먼 무당은 신분의 높고 낮음과 관계없이 그 누구에게나 다짜고짜 한 사람의 영정을 보여준다고 했다. 그리고 완성되지 못한 그 그림을 끝까지 완성하면 물을 먹고 살 수 있고, 그렇지 못하면 목이 말라 죽는다는 소문이었다.

이러한 말들이 조선 최고의 화원이었던 홍도에게는 무척이나 구미가 당기는 호기심의 대상이자 일종의 시험과도 같았다. 영정의 그림을 끝까지 그리면 물 한잔을 얻어 마시고 무지물 고개를 무사히 넘어가게 되지만 그렇지 못하면 영정 속 울음의 눈물만 핥다가 목이 말라 죽는다는 말에는, 조선 최고의 화원에 대한 도전의 의미도 담겨있었다.

홍도는 그 소문을 반드시 이기고서라도 한양으로 가고 싶었다. 홍도는 더욱 바삐 걸음을 재촉했다. 등짐에 챙겨온 물은 오래전 바닥을 다 드러낸 상태였다. 떡갈나무에 붙어 죽은 매미의 울음소리가 귀에 선명하게 들릴 정도로 홍도의 목에 갈증이 찾아들었다. 그때 홍도의 눈에 멀리 대낮의 귀신불(鬼神火)처럼 인가가 눈에 들었다. 홍도는 직감적으로 무지물 고개의 끄트머리에 당도했음을 직감했다.



집의 대문은 지금껏 보아온 인가와는 달리 제법 살림살이의 구색을 잘 맞추고 있었다. 홍도는 마당에 들어서자마자 우물을 눈에 담았으나, 담담하게 인기척을 호명했다. 인기척이 안방의 문을 두드리는 동안 흘깃 바라본 우물에는 방금 물을 길었는지 두레박이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홍도는 당장에라도 그 우물에 뛰어들고 싶었으나 마른 침을 꾸역꾸역 삼키며 인내했다. 홍도는 재차 마당 한가운데서 큰소리로 외쳤다.

“거기, 누구 없소?”

잠시 후 대청마루 끝에서 방문이 열리고 한 사내가 쪽문으로 얼굴을 내비쳤다. 소문으로만 듣던 눈먼 무당임이 틀림없었다. 홍도는 본능적인 화원의 눈으로 눈먼 무당의 관상을 조심스레 살폈다. 상정(上停, 이마)의 살집은 얇고 뼈가 도드라져 보였지만, 중정(中停, 눈썹에서 콧마루)과 하정(下停, 코 밑의 인중에서 턱까지)은 비교적 살집이 두껍고 풍성하게 보였다. 미간에는 보통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을 만한 점이 있었고, 검은 구름이 희미하게 드려져 있었다. 눈빛의 기운은 눈동자에 정기가 충만해 보이나 울음이 가득 들어차 보였다.

홍도는 바짝 타들어 가는 입술에 마른 침을 바른 후 말을 이어갔다.

“저기,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물 한잔 얻어 마실 수 있소?”

눈먼 무당은 가만히 손을 들어 대청마루 끝을 가리켰다. 홍도는 당장 우물에 달려가 얼굴을 처박고 싶었지만, 익히 소문을 들어온 터라 조선 제일의 화원답게 대청마루에 올라앉아 누군가 그리다가 만 영정 앞에 섰다. 영정 속 얼굴의 이목구비는 저마다의 사연으로 한바탕 말다툼을 벌이고 있는 듯 보였다. 얼굴에 있는 눈, 코, 귀, 입이 한자리에 모여 눈썹을 성토하고 있었다. 눈썹이 그려져 있지 않아 마치 죽은 사람의 인정(人情)처럼 인상이 푸석해 보이기까지 했다.

홍도는 영정을 한참 동안 들여다보며 청나라의 학자 유곡원의 수필 <안면문답>을 떠올렸다. 얼굴에서 아무 역할도 하지 않는 눈썹이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눈썹이 없다면 눈, 코, 귀, 입이 보기 흉할 것임을 홍도는 감각적으로 알아차린 것이다. 그러면서 눈썹은 사람의 조화와 균형을 이끄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는 사실을 애써 기억해냈다. 눈썹이야말로 산 사람의 얼굴을 빛나게 하는 ‘무용(無用)의 용(用)’이었기 때문이다. 홍도는 눈썹이 인간에게만 있고 귀신이나 동물에게는 없음을 덤으로 떠올리며 대청마루 쪽창에 보이는 눈이 먼 무당을 힐긋 쳐다보았다. 홍도는 영정 속의 얼굴이 눈이 먼 무당임을 직감했다. 홍도는 눈 먼 무당이 어쩌면 이 세상 사람이 아닐 수도 있음을 예감하고 영정 속의 눈썹을 정성스럽게 그려 넣기 시작했다.

눈썹의 생김새에 따라 타고난 운과 성격이 달라지므로 되도록 눈썹은 굵고 풍부하게 그려 넣었다. 그러나 한 쪽 눈썹을 그려 넣으면 다른 한쪽이 사라지고, 다시 그쪽을 그리면 또 다른 쪽이 이내 자취를 감추었다. 홍도는 이미 자신에게 찾아든 갈증도 잊은 채 눈썹을 살리기 위한 붓질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영정 속 눈이 먼 무당이 애달프다는 생각을 했다. 홍도의 눈에서 알 수 없는 눈물이 흘러 내려 붓끝을 적셨다. 홍도는 그 눈물을 붓으로 찍어 영정 속 눈이 먼 무당의 눈썹을 완성했다. 그제야 영정 속 얼굴의 눈썹은 제 자리에서 깃을 세웠다. 홍도는 흡족한 표정으로 대청마루 끝에 앉은 눈이 먼 무당에게 영정을 들어 보였다. 그러나 눈이 먼 무당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홍도는 우물에서 물을 마시는 것도 잊은 채 서둘러 무지물 고개에서 빠져나와 가장 가까운 무당을 찾아 물었다.

홍도는 무지물 고개의 일들을 소상히 밝히며 자신이 그린 눈이 먼 무당의 영정을 보여주었다. 며칠간 눈썹이 그려지지 않아 애를 먹었다는 이야기도 덧붙였다. 그러자 무당은 손끝으로 영정을 더듬거리더니 홍도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며 입술을 천천히 떼었다.

“어찌 산 사람이 그릴 수 없는 눈썹을 그려 왔누.”

홍도는 놀랄 틈도 없이 무당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무당은 두 손끝으로 홍도의 이목구비를 더듬었다. 홍도는 자신 앞에 앉은 무당이 사람들이 입이 침이 마르도록 이야기한 눈이 먼 무당임을 알아차렸다. 눈이 먼 무당은 홍도에게 영정거리 바가지를 내밀며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 많았다며, 이제는 무엇도 서둘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홍도는 껄껄껄 웃음을 터트리며 흐르는 눈물을 애써 닦았다. 마당의 영정 앞에는 이미 전국 방방곡곡 홍도의 제자들이 달려와 무릎을 꿇고 연신 제를 올리고 있었다. 어떤 제자는 울었으나 울지 않았고, 어떤 제자는 울지 않았으나 울고 있었다. 또 어떤 제자는 홍도의 영정 앞에서 물 한잔을 올리며 오래 통곡했다.

홍도는 통곡 소리에 목을 축이며, 임금의 어명도 잊은 채 영정 속 자신의 얼굴을 오래도록 들여다보았다. 영정 속 얼굴의 상정(上停, 이마)은 살집이 얇고 뼈가 도드라져 보였지만, 중정(中停)과 하정(下停)은 비교적 살집이 두껍고 풍성하게 보였다. 미간에는 보통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을 만한 점이 있었고, 검은 구름이 희미하게 드려져 있었다. 눈빛의 기운은 눈동자에 정기가 충만해 보이나 울음이 가득 들어차 보였다. 눈썹은 짙고 두터웠으나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과거를 꿰뚫어 보는 맹인 점술가 ‘김여추’
권문해, 초간일기, 1584-03-09 ~ 1584-03-15




작가소개

강윤미
강윤미
제주에서 출생했다. 2010년 문화일보 신춘문예에 당선했으며, 광주일보 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제주도와 관련한 다양한 이야기에 관심을 두고 있으며, 현재 그와 관련된 글들을 집필하고 있다.
“대낮의 귀신불(鬼神火)”


권문해, 초간일기, 1588-07-07 ~
1588년 7월 7일, 거현(苣縣)이라는 마을에 대낮에 불이 나 논, 밭을 태우고 집을 태웠다. 불을 지른 사람도 없이 대낮에 불은 불길이 하늘로 치솟았다. 귀신불은 지난 2월 거현 마을로 이사 온 류 아무개(柳某)의 집에서 시작되었다. 그런데 이 어찌된 일인지, 이 류씨는 올해 2월 인동(仁同)의 남면지방의 귀신불에 의해 이미 화를 입고 이곳으로 옮겨온 것이다. 2월에 인동면에서 발생한 귀신불로 들판을 태우고 이 마을의 인가(人家)를 모두 태웠다. 물을 끼얹어도 끌 수가 없이 화재는 커져버렸고 마을을 통째로 삼켜버렸다. 이 마을 사람들을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나 피하고 다른 마을로 이사해 살게 되었다. 류씨도 당시 이 화재로 마을을 떠나 거현으로 옮겨온 것이다. 그런데 이사 온 지 다섯 달 만에 다시 그의 집에서 귀신불이 나타난 것이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권문해는 참으로 괴이한 일이라 여겼다. 귀신불은 으레 밤에 일어나는데 대낮에 나타났으며, 또한 류씨를 따라다니는 듯한 귀신불이 괴상한 재앙을 예견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염려를 하였다.

“관아에서 귀신 소동이 일어나다”


박한광 외, 저상일월,
1845-06-05 ~ 1845-07-10
1845년 6월 5일, 박득녕이 사는 예천 고을의 관아 동헌에는 호귀당이 있었다. 그런데 근래 이 호귀당에 귀신들이 나타나서 또록또록 사람 목소리를 낸다고 하니 놀라지 않는 사람이 없다고 한다. 이 귀신소동은 한달 내내 소문이 자자했는데, 벌써 관아의 사람들은 귀신이 나타났다고 이야기하고 다닌 지가 여러 달이 지난 상황이었다.
이 귀신 소동은 날이 갈수록 심해져서 날마다 관아에 있는 사람들이 귀신소리를 듣는다고 한다. 특히 관비들 중에는 귀신들 때문에 넋을 잃어 거의 죽게 된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관비들 말에 따르면 귀신들의 하는 말이 ‘기어이 관원들을 모두 쫓아내고야 말겠다’ 라고 한단다. 그리하여 관아에서는 빌어도 보고, 촛불을 켜놓기도 하였으나 귀신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고 한다. 또 귀신을 잡기위해 큰 소리로 호령이라도 하면 귀신이 더욱 심하게 날뛴다는 것이다. 이리하여 관원들은 결국 가족들을 데리고 관아에서 뛰쳐 나왔으며, 동헌까지도 비워 다른 곳으로 옮겼다고 한다. 사람들은 모두 입을 모아 잡귀의 소행이라고 수군거렸다.
그런데 며칠 후 사건의 진상이 밝혀졌다. 7월 10일 경 관아의 귀신소동의 주모자가 밝혀졌는데 방술사인 여 모 라는 사람의 소행이었다고 한다. 관아에서는 그를 잡아 큰 독 안에 가둔 이후 연못에 던져버렸다고 하는데, 그 뒤에는 귀신들의 소동이 덜해졌다는 소문이 들렸다. 그런데 박득녕은 과연 방술사의 소행인지, 아니면 관아에서 소문을 진정시키기 위해 생사람을 잡은 것은 아닌지 문득 궁금해 졌다.

“막내 작은아버지가 대낮에 귀신을 보다”


류의목, 하와일록, 1802-08-14 ~
1802년 8월 14일, 조금 흐린 날이었다. 류의목의 할아버지와 신양 어르신이 병산서원에서 돌아오셨다. 관에서 출제한 문제에 답한 글들을 채점하러 갔다 오신 것이었다. 류의목 역시 관의 순제에 응시하여 글을 몇 편 지어 바쳤는데, 신양 어르신이 채점 과정에서 류의목의 글을 좀 보신 모양이었다. 류의목의 글을 좋게 여기셨는지, 신양 어르신은 류의목에게 ‘이번 겨울에 네가 양식을 준비할 수 있다면 내 손자인 수오와 함께 중대에서 머무르며 같이 공부하면 좋겠구나’ 라고 하셨다. 류의목은 신양 어르신의 말씀에 감사하며 생각해 보겠노라 대답하였다.
얼마 후에 막내 작은아버지께서 의곡에서 돌아왔는데, 조금 믿기 힘든 이야기를 전해 주었다. 대낮에 귀신을 봤다는 것이다. 이야기를 전하는 막내 작은아버지의 표정은 아직도 상기되어 있었다.
“오늘 소현령을 지나려고 하는데, 괴상한 일이 있었지. 고개를 넘으려고 하는데 왠지 마음이 꺼름찍하더군. 내가 말을 타고 가는데 앞에 왠 사람이 서있었지. 검고 더러운 적삼을 걸치고 있고 작은 두건을 쓰고 있었는데, 갑자기 나를 보고는 막 웃기 시작하더라구...

“아들의 병을 고치기 위해 무당을 불러 푸닥거리를 하다”


김택룡, 조성당일기,
1616-10-16 ~ 1616-10-18
1616년 10월 16일, 김택룡은 이 날 운심이를 군내(郡內)로 보내 무당[巫史(무사)]을 찾아보게 하였다. 김택룡은 또 복이(福伊)를 둘째아들 김적이 있는 산양(山陽)으로 보내 그 편에 편지를 써서 아들의 병을 물었다. 그리고 아들에게 18일에 푸닥거리[사신(祀神)]를 하겠다고 말했다. 다음 날 10월 17일, 아침에 군내로 갔던 운심이가 돌아왔다. 돌아와서 전하길, 순좌(舜佐)의 처를 부르려고 했는데 사정이 있다고 핑계대고 오지 않으려 한다고 하였다. 김택룡은 ‘순좌의 처는 무당이긴 해도 꽤 영리해서 운수도 점칠 줄 알아[추수(推數)] 괜찮건만. 그리고 우리 집에 오랫동안 출입하였으니 그 점도 안심인데...’라고 생각하였다.
10월 18일, 이 날 김택룡은 예정대로 영주 산장(山庄)에서 푸닥거리를 하며 아들 김적의 병이 낫기를 기도하였다.

“서로 싸우는 물고기와 개구리”


정경운, 고대일록, 1601-03-04 ~
1601년 3월 4일, 충청도 서산 땅에 연못의 물이 넘쳐 나, 물고기와 개구리가 서로 싸웠다는 소문을 들었다. 죽은 개구리 가운데 혹 머리가 끊어지고 배가 찢어진 것, 혹 발이 잘린 것이 부지기수여서 쌓인 것이 언덕과 같았다.

닫기
닫기
관련목록
시기 동일시기 이야기소재 장소 출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