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전에는 준비할 것이 많다. 차례 음식들은 물론 새 옷도 준비해야 하는 법이다.
“아, 내 정신!”
정생의 아내가 문득 탄식하듯 내뱉는 소리에 정생은 일단 등골에 소름부터 잡혔다. 저런 소리를 내면 뭔가 중대한 것을 놓친 것이다. 귀찮은 일이 생기기 전에 눈에서 사라지는 게 최고라 생각하고 살금살금 안방에서 나가려는 찰나에 아내가 말했다.
“여보, 어디 가세요?”
“어, 흠흠, 사랑에 가려고 그러는 거지요. 그믐밤에 갈 데가 어디 있겠습니까?”
“별일 없는 모양이니 조 과부네 가서 보따리 하나 받아와 주세요.”
조 과부는 교하로 시집을 갔던 여인인데 일찍 남편이 죽어 과부가 된 사람이었다. 부부 사이에 아이도 없었던 터라 양주로 돌아오게 되었다. 사대부 여인의 개가는 허용이 되지 않지만 평민의 경우는 크게 흠이 되지는 않았으니 새 출발을 하라는 시댁의 배려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기근이 심했을 때 캐어온 나물과 버섯에 안 좋은 것이 있었는지 부모 형제가 모두 죽고 조 과부도 반쯤 죽었다가 살아났다. 그 후에 삯바느질로 입에 풀칠을 하며 홀로 지내고 있었다.
“조 과부네서 보따리라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이제 현아도 일곱 살이 되니 창의와 전복, 복건을 만들었는데, 받아오는 걸 깜빡했네요.”
복건에 눈·코·귀를 만들어 호랑이 얼굴을 표현한 호건(虎巾)(출처: 국립민속박물관)
“마당쇠를 보내면 되지 않습니까?”
“그래도 설인데 집에 가봐야죠. 아까 내보냈어요. 자고 내일 아침 일찍 올 거예요. 더 늦기 전에 빨리 다녀오세요.”
정생도 더 발을 뺄 수가 없었다. 음식 준비 바쁜 삼월이에게 다녀오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두루마기와 갓을 챙기고 등롱을 들고 집을 나섰다. 겨울 해가 짧아 벌써 어두워지기 시작했지만 양반 체면에 빨리 걸을 수는 없었기에 시오리 떨어진 조 과부네에 도착했을 땐 발끝이 안 보일 정도로 깜깜해졌다.
“게 있는가?”
조 과부의 초가삼간에 등불이 보이질 않아서 정생은 사립문 밖에서 소리를 냈다. 삯바느질을 하는 집이라고는 해도 과붓집에 남자가 함부로 들어갈 수는 없는 법이었다.
“뉘신지요?”
안에서 조 과부 소리가 들렸다. 혹시나 집에 없는 거면 어떡하나 했는데, 등불이 아까워 일찍 잠자리에 들었던 모양이다.
“백석골 훈장일세.”
안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섣달그믐 추운 밤인데도 옷을 벗고 자리에 누웠던 모양이다. 가난한 집에서는 등잔 기름도 아깝고 옷 솔기 하나도 소중하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조 과부가 문을 열고 나왔다. 한 손에 보따리가 들려있다.
“훈장 나리가 오실 줄 모르고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습니다. 죄송해요.”
조 과부가 연신 고개를 조아렸다. 조 과부의 치마저고리는 누더기라고 해도 될 만큼 기운 곳투성이였다. 이제 서른 남짓한 나이인데도 그보다 열 살은 더 들어 보였다.
“괜찮네. 자리에 들었는데 찾아오게 되어 민망하이. 그럼 편히 쉬게.”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또 한참 가셔야 하는데….”
조 과부는 그러더니 후다닥 부엌으로 들어가 나무 찬합을 하나 들고 나왔다.
“가시면서 입이 심심하시면 드세요. 솜씨는 별로 없지만 새해라 명태전을 좀 담았습니다.”
“어허, 뭘 이런 것을 나는 됐네. 내일 들게나.”
설날 명태전(출처: 국립민속박물관)
정생이 손사래를 쳤지만 조 과부가 부득부득 손에 들려주었다. 조 과부가 바느질은 잘했지만 음식 손질은 별로였다. 전에도 조 과부가 보낸 생선전을 먹다가 가시가 걸려 죽을 뻔했었다.
“아 참, 고개를 넘어가면 지름길이긴 하지만 그쪽으로는 가지 마시고 좀 돌아가도 큰길로 가세요.”
음? 무슨 일이 있는가? 명화적이라도 나온다던가?”
“명화적이면 차라리 괜찮을 텐데, 산군이 있다고 합니다.”
정생이 흠칫 놀랐다.
“산군? 호랑이가 있다고?”
“흠, 누가 보았다 하던가?”
“쇤네가 오늘 빨래터에서 우연히 들은 거라 누가 보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조심하는 게 상책 아닐까 해서요.”
“알았네.”
정생은 가볍게 인사를 하고 조 과붓집을 떠났다. 금방 고갯길 아래까지 오게 되었다. 정생은 고갯길을 올려다보며 고민에 빠졌다. 올 때 고갯길을 넘어서 왔는데 아무 이상한 것이 없었다. 하지만 호랑이가 있다고 하는데 그걸 올라갈 배짱이 생기질 않았다.
“하지만 돌아가면 길이 세 배는 늘어날 텐데….”
정생이 중얼거리며 서성였다. 이미 여기까지 오는 것도 힘들어서 다리가 뻐근했는데 몇 배나 길을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죽을 맛이었다. 누구라도 동행이 생기면 넘어갈 마음이 들 것 같았는데 주변에 사람 하나가 보이질 않았다.
“거기 뉘시오?”
반대편에서 부르는 사람이 있었다. 고개를 넘어온 사람이었다. 갓을 쓴 것을 보니 양반인 모양이었다.
“백석골 훈장이오. 뉘시오?”
“아, 훈장 나리! 배진구올습니다.”
배 정승네 손자였다. 아직 장가는 가지 않은 열여덟인데 헛상투를 올려 갓을 쓰고 다니고 있었다. 정생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 밤중에 어디 가는 길인가?”
“술도가에 갑니다. 집안 어르신들이 벌써부터 다들 한 잔씩 하시고 계셔서 술이 다 떨어질 판이라서요.”
그런 걸 귀한 도령이 혼자 갈 리가…라고 생각하는데, 배진구 뒤로 하인들이 서너 명이나 보였다.
“혹 고개 넘어오다가 이상한 일은 없었나?”
“이상한 일이라니요? 그믐밤이라 어둡긴 했지만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그렇군. 그럼 일 보게.”
그냥 헛소문일 것이다. 깊은 산도 아닌데 이런 곳에 호랑이가 있을 리가 없다. 어제 있었어도 오늘은 없을 곳이다.
정생은 씩씩하게 고개를 올랐다.
하지만 고갯마루에 가까워질수록 심장이 심하게 뛰기 시작해서 입만 벌리면 튀어나올 것 같아지고 엄동설한인데도 식은땀이 이마에서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차라리 배진구를 따라서 술도가에 갔다가 같이 어울려 돌아오는 것이 낫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가 뒤늦게 찾아왔다.
정생의 발걸음도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양반의 체면이고 뭐고 보는 사람도 없으니까 달음박질이라도 쳐서 여길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리고 고갯마루에 도착했을 때, 정생은 보고 말았다.
호랑이(출처: 픽사베이)
화등잔만 한 눈이 고갯마루 옆 숲속에서 불을 뿜고 있었다.
정생은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꼼짝을 할 수가 없었다.
한 발자국만 움직여도 저 화등잔이 허공을 날아와 그의 목을 덥석 물어버릴 것 같았다. 발을 움직이기는커녕 숨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어쩌지, 어쩌지, 어쩌지, 어쩌지, 어쩌지!
손이 덜덜덜 떨리는데 덜그럭 소리가 어디선가 났다. 그 소리에 깜짝 놀라 몸을 있는 대로 움츠리다가 알았다. 손에 들고 있던 보따리 안의 나무 찬합이 부딪치는 소리였다.
정생은 보따리의 매듭을 손으로 더듬어 조심스럽게 풀었다. 안에 들어있는 명태전을 손에 잡히는 대로 들어서 길옆 숲속으로 던졌다. 동작을 크게 하면 호랑이가 달려들까 싶어 재빠른 손짓으로 던졌다. 그러나 정생이 생각해도 호랑이 크기에 명태전으로 만족할 리가 만무할 것만 같았다.
그렇다고 딱히 무슨 방도가 있는 것도 아니니 정말 난감해서 한 일에 불과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화등잔은 명태전 던진 쪽으로 스르르 돌아가더니 수풀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달아나고 싶었지만 정생의 다리가 도통 움직이질 않았다. 정생은 여기서 못 뛰면 죽는다고 자기 뺨을 두어 번 때리고는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달음박질쳤다. 양반의 체통이고 뭐고 아랑곳하지 않았다.
간신히 대문 앞에 도착한 정생은 그제서야 옷매무새를 고쳤다. 용케도 옷 보따리는 흘리지 않고 왔다.
차례(출처: 한국국학진흥원)
새해가 밝았다. 정생은 밤새 호랑이에게 쫓기는 꿈을 꾸는 바람에 잠을 설쳤다. 아침에 차례를 지내자마자 배 정승 댁을 찾아갔다. 마을 어르신에게 세배를 드린다고 찾아간 것처럼 꾸민 것이고, 원 목적은 배진구를 만나는 것이었다.
“여보게, 초재!”
초재는 배진구의 호였다.
“훈장 어르신 오셨습니까? 세배 받으시지요.”
배진구가 세배를 올리겠다고 자꾸 말하는 것을 정생이 손사래를 치며 막았다. 정생이 나직하게 배진구에게 물었다.
“세배는 무슨. 새해 복 많이 받게. 그런데 자네 어젯밤에 돌아올 때 혹시 그거 못 봤나?”
“그거라뇨?”
“고개 넘어오다가 그거 못 봤느냐고?”
“그거가 뭔지는 몰라도 고개 넘어올 때 쥐새끼 하나 못 봤습니다.”
“저, 사실은 내가 넘어오다가 개호주를 봤단 말일세.”
산군이나 개호주는 모두 호랑이를 가리키는 말이다. 호랑이가 개를 물어가는 일이 왕왕 있어서 개의 주인이라는 뜻으로 개호주라고도 불렀다.
“아니, 산군이 정말 있었단 말입니까?”
“쉿! 조용히 하게.”
“그런 이야기를 술도가에서 듣긴 했는데….”
“내가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단 말일세.”
“그럼 이럴 때가 아니잖습니까? 빨리 관아에 소를 올려 착호군을 불러야 하지 않습니까?”
병부(兵符)(출처: 한국국학진흥원)
호랑이가 나타나면 호랑이 잡는 군대를 따로 불러야 한다. 그들을 가리켜 착호군이라고 불렀다. 원래 군대를 동원하려면 병부(兵符)가 필요하기 때문에 조정에 상소가 올라가서 병조에서 임금님의 재가를 받아야 하는데, 호랑이가 나타난 경우는 예외에 속했다.
호랑이가 일으키는 재난, 즉 호환을 막기 위해 먼저 군사를 모아도 되었다. 착호장이 착호갑사들을 이끌고 호랑이 사냥에 나서게 되는데, 이때 물론 몰이꾼은 따로 필요했다. 이게 보통 문제가 아니었다.
정생이 혀를 차며 말했다.
“착호군이 동원되면 글겅이질이 얼마나 심한지 말도 못 하네. 3년 전에 한 번 겪어봤지.”
3년 전에 배진구는 아직 댕기 머리를 한 소년이었기 때문에 그런 문제를 알지 못했다.
“글겅이질이라고요?”
“군사들을 먹여 살리는 일을 누가 해야 할 것 같은가? 남정네들은 모두 몰이꾼으로 나가야 하고 개까지 다 데리고 나가서 미끼로 써야 한다네. 호랑이가 빨리 잡히지 않으면 산속에서 먹고 자야 하는데 그것도 보통 일이 아니지.”
“아하, 그렇군요. 그럼 어쩌죠?”
“자네가 나보다 늦게 돌아왔는데 그때 개호주가 나타나지 않은 걸로 봐서 이건 작은 놈일 것 같네.”
“작은 호랑이는 잡아도 포상이 별거 없지요?”
정생이 고개를 끄덕였다.
“크게 무서운 놈이 아닐지도 몰라. 다친 사람도 없으니 아직 새끼일지도 모르고.”
그 말에 배진구가 의견을 하나 내놓았다.
“그럼 번거롭게 하지 말고 우리 집 하인들을 데리고 수색을 한 번 나가보는 게 좋지 않을까요? 진짜 있는지, 얼마나 되는 놈인지 알아본 뒤에 대책을 세우는 게 좋지 않을까요?”
정생이 무릎을 탁 쳤다.
“좋은 생각이네. 내가 어제 그놈을 유인한 바 있으니 거기 가보면 놈의 발자국이 남아있을 걸세. 가서 확인해보세.”
이리하여 정생과 배진구는 하인 넷을 데리고 다시 고갯길로 갔다.
“내가 어제 여기서 그놈을 딱 마주쳤는데, 재빨리 명태전을 집어 던졌더니 그쪽으로 휙 갔단 말이지. 그 틈에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네.”
“정말 대단하십니다. 저는 엄두도 못 낼 이야기네요.”
배진구가 입을 딱 벌리며 감탄했다. 정생은 한껏 기가 살았다.
“그래, 저기가 그곳이네.”
정생이 가리킨 곳으로 하인들이 달려갔다. 그들이 막대를 들어 풀숲을 헤치며 호랑이 흔적을 찾기 시작했다.
“어, 이거!”
하인 하나가 깜짝 놀라 말했다.
“여기 죽은 놈이 하나 있습니다!”
그러더니 하인이 뭔가를 들고 정생 쪽으로 다가왔다.
“이게… 호랑이가 아닙니다.”
배진구가 하인이 들고 있던 걸 보더니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다.
“아니, 이건… 훈장 어르신, 이건 호랑이가 아니라 새끼 여우네요. 하긴 한밤중에 보면 여우도 호랑이처럼 보일 수도 있겠죠. 그래서 호가호위(狐假虎威)라고 하는 모양입니다. 하하하.”
여우(출처: 픽사베이)
그놈의 여우가 명태전을 먹다가 가시에 목이 걸리는 바람에 숨통이 막혀 죽었던 모양이다.
“훈장 어르신, 창피해 하지 마십쇼. 이것도 호는 호입니다. 여우도 호(狐)라고 하지 않습니까. 하하하.”
정생은 얼굴이 빨개져서는 어젯밤보다 더 빠르게 고개를 내려갔다. 그나마 관청에 알리지 않아 다행이었다. 하마터면 착호군(捉虎軍)을 불러 착호군(捉弧軍)을 만들 뻔하지 않았나. 그랬으면 기군망상(欺君罔上: 임금을 속임)의 죄가 되었을지도 몰랐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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