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민속을 배경으로 추리소설을 쓰게 된 동기는 순전히 그 내력에 반했기 때문이다. 비슷한 작풍을 추구했던 타국의 대가를 향한 동경이 크기도 했다지만, 민속학이라는 소재 그 자체가 흥미로웠다. 소설가의 길을 걷기로 다짐했을 때, 흥미로운 소재라면 무엇이든 이야기로 풀어내려고 했는데, 때마침 매료된 것이 우리나라의 민속이었을 뿐이다. 미국산 영화를 애호하고 일본산 소설을 선호하는 나조차도 원점으로 회귀한 것을 보건대, 우리의 민간신앙에는 보편적인 매력이 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이 기고는 나의 창작 여정을 기록한 일종의 작가 노트이다. 멋도 모르는 신인 작가로서, 자료를 수집하고 문장을 쥐어짜는 과정에서 느꼈던 소회를 많은 이와 가감 없이 공유하고자 하는 바람이다.
김홍신의 『풍객』에서 묘사하기를 “무당 내력이란 별수 없이 귀신을 빙자해서 살아지는 목숨”이라고 했다. 탐정의 운명도 무당과 다를 바 없다.
〈김홍신, 『풍객』〉 (출처: 알라딘 중고서점)
미스터리 장르, 특히나 탐정과 트릭이 등장하는 본격 미스터리 장르는 본질적으로 모순을 내포하고 있다. 나름의 소견을 이르자면 판타지 장르의 한 갈래로 분류하는 바이다. 물론 지극히 사실적인 설정이 작품의 기반이 되기는 한다. 물리의 법칙이 존재하고, 당대의 기술 수준을 적용하며, 인간의 신체적 한계를 엄격히 제한한다. 그런가 하면 그토록 복잡한 범행을 실행하는 범인에게 복권 당첨 같은 천운이 몇 번이나 겹치기도, 범인이 일시나마 초인으로 변신한 듯 변수를 완벽하게 통제하기도 한다. 이 괴물 같은 범인을 지성 하나로 끝끝내 물리치는 탐정은 그야말로 마법사나 다름없다. 이런 면에서 본격 미스터리는 현실적인 요소를 끌어모아 초현실적으로 가공한 장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민간신앙에도 이와 유사한 모순이 있다. 가뭄 등의 재해에 직면했을 때 옛사람들은 기우제 같은 의례에 열을 올렸다. 굿으로 병을 고치려고 하고, 부적으로 액을 막으려고 했다는 것은 두 번 말할 필요도 없다. 오늘날에도 합격을 위해 기도하고 예배를 통해 안식을 찾는 사람이 적잖은 것을 보면, 세대가 바뀌어도 인간의 욕구는 크게 변하지 않는 모양이다.
이렇듯 현실의 문제를 다루면서도 그 해결 방식이 현실을 초월한다는 점에서, 본격 미스터리와 민간신앙은 모두 인간의 근원적인 욕구―불가해함을 이해하고 지배하려는 욕구―를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당연히 극명한 차이도 있다. 숱한 주술적 시도에도 현실에서의 고민은 그대로지만, 소설에서의 고민은 탐정이 깔끔하게 해결해 준다. 나는 이러한 공통점과 양가성, 또 실화와 허구의 간극에서 흥미를 느꼈다. 그리고 이 결합을 하나의 ‘미스터리’로 보았다.
〈무녀 김금화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만신》〉 (출처: ㈜엣나인필름)
대중에게 가장 친숙한 무당이라고 하면 김금화(1931~2019)를 꼽을 수 있다. 김금화가 무당으로서 큰 발자취를 남길 수 있던 까닭은 단지 신통한 점복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전국 민속경연대회에 입상하고, 무형문화재 보유자로 지정될 만큼 우수한 기예를 지녔기에 널리 회자된다고 분석하는 바이다.
작가를 지망하고 나서 첫 장편을 준비하던 무렵이었다. 쌀을 뿌리는 무당과 호통을 지르는 무당은 철저히 배제하겠다고 결심하던 나에게, 김금화라는 익살맞은 예인은 큰 울림을 안겨주었다. 한쪽을 보면 무속인이고 다른 한쪽을 보면 예능인인데, 우리는 대개 무당의 일면만 주시하며 눈살을 찌푸리는 경향이 있지 않은가. 뒤이어 떠오른 것은 다중 추리물, 이를테면 수 명의 탐정이 각자의 논리로 각기 다른 답을 도출하며 추리 경연을 펼치는 미스터리 작품들이었다.
점쟁이든 예인이든, 무당의 여러 면모를 탐정의 다양한 시각으로 조명한다면 장르 그 이상의 무언가를 창출해 낼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야무지기 그지없는 포부로 첫 장편 ‘무당집 살인사건’의 집필에 임했다. 역시나 꿈은 꿈일 뿐, 머지않아 난관에 부딪히며 역량 부족을 절감해야만 했다.
한국 민속과 본격 미스터리를 접목하는 작업은 양팔 저울의 평형을 맞추고자 씨름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현대에 이르러 본격 미스터리는 사실상 일본의 전유물이 되었는데, 나 또한 그 그림자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한국식으로 재구성하며 정서를 살리자니 트릭이 한정되고, 배경을 죽이고 일본의 색채를 덧칠해야 재미가 살아나는 딜레마에 빠진 것이다. 좋은 미스터리 작품은 장르적 재미가 최우선이고 이를 보조하는 장치는 어디까지나 장식으로 활용해야 하는데, 애써 깨우친 통찰을 포기하고 싶지 않은 욕심에 배와 배꼽이 뒤바뀌는 순간이 허다했다. 그 와중에 잔머리는 어쩜 그리 떼굴떼굴 잘 굴러가는지, 아이디어가 과포화되는 바람에 하나로 끝내야 할 작품이 두세 개로 쪼개지며 작가 데뷔도 전에 시리즈를 만들 판이었다.
그렇게 호기롭게 출발한 ‘무당집 살인사건’은 장르와 배경, 그 어디에도 발붙이지 못하는 어정쩡한 물건이 되고 말았다. 소설이 없는 추리소설, 소똥 냄새나지 않는 시골 같은 이야기였다고나 할까. 결국 어렵사리 완성한 첫 장편은 서랍 안에 넣어두고, 떨거지로 분류한 소재를 끌어모아 다른 습작을 쓰기 시작했다. 미스터리 작가가 되는 데 우선시해야 할 요소부터 선택 및 집중하여 그 이상의 큰 꿈은 뒷날에 이루고자 하는 바람이었다.
김동리의 『을화』에서 영술은 심란한 와중에도 언어장애가 점차 회복되고 있는 누이동생을 보며 “차츰 혀를 제대로 놀릴 수 있게 된 점을 고무적”이라고 생각한다. 두 번째 작업에 착수했을 때 나의 심정도 영술과 비슷했다.
〈김동리, 『을화』〉 (출처: 문학사상사)
무속에서 신봉되는 신의 숫자만큼이나 무당의 모습도 다채롭기 이를 데 없다. 그중 강렬한 인상을 받았던 것이 아미타불의 기원에 대해 파격적인 이론을 제시한 무당이었다. 요컨대 무당이 나무아미타불을 읊는 것은 아미타불 님이 본래 무속의 신령님이라는 역사적 뿌리에서 연유했을 뿐인데, 승려들이 아미타불 님을 훔쳐 간 통에 무당이 졸지에 ‘짝퉁’이 되어버려 심기가 불편하다는 투정이었다. 따지고 잴 것도 없이 석가모니마저 뒷목을 잡을 법한 발상이었다.
〈고태라 작가의 장편 미스터리 소설 『마라의 요람』〉 (출처: 아프로스 미디어)
어쨌거나 아미타불의 소유권 논쟁, 나아가 불교와 무속의 미묘한 관계에서 실마리를 얻어 집필한 습작이 『마라의 요람』이었다. 무속을 조사하다 보면 불교와 유교, 하물며 도교까지 파고들어야 하는 시련에 부딪히게 마련인데, 불교가 새삼 신비롭게 다가오기도 했다. 난세만 도래하면 목탁을 내려놓고 창검을 잡았다는, 승병들의 활약이 남긴 여운도 한몫했을 것이다.
그렇게 ‘파계승과 명탐정의 지적 대결’이라는 구도가 잡히며 순조롭게 첫 삽을 뜰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시간이 지날수록 인상을 박박 쓰게 되며 막판에 이르러서는 줄담배를 뻑뻑 피워야만 했다.
민속과 역사에 이어 불교까지 공부하는 것은, 숨김없이 고하자면 정말이지 토 나오는 고행이었다. 고행이야 감수하면 그만이지만 진짜 문제는, 불교적 트릭을 위해 일본 밀교의 기괴한 문화를 차용하다 보니 또다시 한국 민속의 맥락에서 엇나갔다는 점이었다. 게다가 이번에도 일본 미스터리의 작법을 빌려온 터라, 『마라의 요람』은 하회탈을 썼지만 까고 보면 가부키 배우의 얼굴이 튀어나오는, 출신이 어디인지 정의하기 어려운 혼종이 되어버렸다. 퇴고를 마치자니 후련함보다는 분함이 앞섰다. 분함을 해소하려면 다음 작품을 준비할 수밖에 없었다.
각국의 설화와 마찬가지로, 한국의 설화에도 무고한 귀신을 희생양으로 삼는 서사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마을이 흉년에 시달리게 된 원인은 억울하게 죽은 처녀가 애꿎은 마을 사람들에게 저주를 내린 탓이라는, 다시 말해 모든 불화의 원흉을 죽은 처녀로 몰고 가는 이야기들이 대표적이다. 이야기의 결말은 대개 주민들이 처녀 귀신을 위해 제사를 올림으로써 마을이 평화를 찾을 수 있었다는 식으로 훈훈하게 마무리된다. 망자를 악귀로 묘사하며 두 번 죽이는 여러모로 불합리한 기승전결이다. 다만 이런 서사 구조가 한편으로는 본격 미스터리의 특성과 유사하다고 느끼기도 했다. 해결 불가능한 사고가 발생하고 이를 수습하고자 어떻게든 답을 도출하려는 노력이, 아이러니하게도 불굴의 명탐정을 연상케 했다.
〈고태라 작가의 『설곡야담』은 계간 《미스터리》 통권 77호, 2023년 봄호에 수록되었다.〉
(출처: 한국추리작가협회)
『설곡야담』은 이 유사성에서 착안하여 설화적 관행을 전복시키고자 집필한 단편이었다. 설산의 산장이라는 정형화된 미스터리 설정에다 많고 많은 귀신 중에서도 비주류 귀신, 타사신(墮死神)을 택하여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았다. 타사신은 여수 어느 동네의 당집에 달랑 한 줄 기록된 귀신의 한 종류인데, 높은 곳에서 떨어져 죽은 여귀(厲鬼)를 통칭한다. 아마도 까마득할 무렵, 크고 작은 사달에서 비롯된 책임이 타사신에게도 한 번쯤은 전가되지 않았을까 짐작한다. 이런 누명 설화를 구성한 뒤 작중 시점을 달리함으로써 비로소 작의를 관철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설곡야담』으로 소박하나마 데뷔의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 이후 한 해가 지나 『마라의 요람』도 그럭저럭 가다듬어 펴낼 수 있었다.
그런데도 두 작품에 통찰을 명확히 반영하지 못해서 아쉬웠다. 극적 긴장감을 위해 한국의 무당을 일본식 영매로 변형한 점, 세시풍속을 구시대의 미개한 산물쯤으로 곡해하며 세계관을 비이상적으로 묘사한 점도 못마땅할 따름이었다. 한국적이지 못해서 유감이기보다는, 한국 민속 고유의 매력―무당의 삶, 주술과 저주, 민속 의례에 녹아있는 공동체의 정서 등―을 전달하지 못한 점이 못내 불만이었다.
그것은 이를테면 오랜 세월 동안 이 제주도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 전설의 섬이었다.
〈이청준, 『이어도』〉 (출처: 문학과지성사)
민속의 현지 및 현장 조사는 발로 뛰는 일이다. 업무 특성상 열정으로 도전한들 보상받을 가능성이 희박하니, 학자들에게는 마치 전설의 섬을 향한 항해와도 같을 것이다.
지면을 빌려 한국의 민속을 지켜오고 알리는 데 헌신하는 모든 이에게 경의를 표한다. 그들의 노고가 없었다면 나에게 작가라는 타이틀도, 또 다른 염원을 품을 기회도 없었을 것이다. 아울러 그들의 성과를 부정적으로 과장하거나 축소하고 한편으로는 자극적으로 왜곡하는 등, 흥미만을 위해 제멋대로 각색했던 것을 반성하는 바이다.
올해로 접어들어 앞서 언급한 염원을 실현하고자 ‘무당집 살인사건’의 원고를 다시 꺼내 들었다. 오랜만에 원고를 살펴보니, 대대적인 손질을 넘어 아예 첫 문장부터 다시 써야 할 판이라 암담한 지경이다. 장르적 재미를 보강하고 한국 무속의 진면모를 구현하는 동시에, 독자성을 확보하려면 꽤 오랜 시간이 걸릴 듯싶다. 설상가상으로 지난 4년의 세월을 이 기고문으로 풀어내며 전문가 행세를 하고 있으려니 어깨가 더 무거워진다. 태산에 맞먹는 눈높이를 능력이 따라잡을 수 있을지 불신으로 가득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설의 섬을 찾아 헤매는 여정은 계속될 것이다. 비록 토 나오는 고행의 연속일지라도, 민속과 미스터리의 융합이 결실을 볼 때까지는 멈추지 않을 작정이다. 남들은 무슨 콩고물이 떨어지길래 불안정한 일에 집착하냐고 핀잔하지만, 실속 없는 욕심쟁이가 어디 나 하나뿐이겠는가. 과거와 현재가 증명하듯이, 알 수 없는 것을 알아내야만 직성이 풀리는 욕망의 노예는 한둘이 아니다. 그 욕망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미스터리라고 믿으며, 오늘도 탐정의 길을 가고자 한다.
시기 | 동일시기 이야기소재 | 장소 | 출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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