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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인의 일기, 한 편의 영화를 만나다 15 영해(寧海)의 류작(柳綽), 세무서의 료쿄를 만나다

하원준

이야기에 앞서, 독자 여러분께 문제를 제시해보겠습니다.

며칠 전, 저는 '담談'의 연재 칼럼을 작성하기 위해 몇몇 일간지를 살펴보던 중, 현(現) 국세청 차장의 기고문을 발견하였습니다. <고액 체납자, 국민 공동 감시>라는 제목의 기고문 요점은 평소 성실하게 세금을 납부했지만, 사업이 힘들어지거나 자금 융통이 되지 않아 일시적으로 세금을 못 내는 대부분의 세금 체납자와 달리 악덕 체납자의 경우엔 해외에 재산을 빼돌리거나 지인 명의로 주식을 위장 분산하는 등, 조세 범죄 행위가 날로 교묘해지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고액 체납자의 세금 납부 회피는 그만큼 성실 납세자의 세 부담이 증가시키는 반면, 그들이 세금을 통해 공급되는 공공재의 혜택을 함께 누리고 있어 명백히 조세 정의에 어긋나고 있다고 합니다. 저자는 국세청이 조세 정의를 실천하기 위해 체납자 재산 추적 전담 조직을 운영하고, ‘체납자 재산 은닉 혐의 분석 시스템’을 통해 호화 생활 혐의 체납자를 정밀 선정하는 과정을 밟고 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저자는 마지막으로 고액 체납자의 재산 은닉은 개인의 사적 영역에서 은밀하게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아 행정력을 통한 추적에 한계가 있음을 토로하며, 국민 모두가 고액·상습 체납자 은닉 재산 환수 파수꾼으로 나선다면, 한국 사회의 조세 형평성도 제고될 것이라는 바람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아래를 향한 조세 정책은 가혹하여도, 위를 향한 조세 정책은 그 원칙이 쉽게 무너져 왔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권력자들은 종종 여러 탈법을 동원하여 조세의 의무를 다하지 않으려고 해왔던 것 같습니다. 이처럼 공평, 공명해야할 조세 정책이 오염되었던 시절에도 엄정한 조세 정책을 실천하려고 노력했던 곧은 선인이 있었습니다. 그러한 선인중 한 사람이 류작(柳綽)이라는 분입니다. 그리고 그 분과 어울리는 영화 속 주인공을 있습니다. 바로 ‘마루사의 여자’에 등장하는 주인공 ‘료코’가 바로 그 인물이지요. 오늘, 조선의 류작과 일본의 료코의 만남을 통해, 스토리 웹진 <담(談)>의 열다섯 번째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영해(寧海)의 류작(柳綽), 세무서의 료쿄를 만나다

류작(柳綽)은 1686년(숙종 12)에 태어난 조선 후기 문신으로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자는 자유(子裕)입니다. 평안북도 구성부사(龜城府使) 덕옥(德玉)의 아들인 그는 숙종 40년(1714) 사마양시(司馬兩試:진사과, 생원과)에 급제하고, 영조 10년(1743) 춘당대시 병과(春塘臺試丙科)에 3등하여 정언(正言), 지평(持平), 장령(掌令)을 거쳐 외직(外職)으로 서산, 영해, 길주목사(吉州牧使) 등을 역임하였다고 합니다.

1750년(영조 26) 정4품 장령이었던 류작은 해서(海西-황해도)의 변장(邊將-변방 수비 대장) 및 조선시대 의약과 일반 서민의 치료를 맡아본 관청인 혜민서(惠民署)를 혁파(없애거나 그만두게 하는)상소를 올렸다고 합니다. 영조는 이 상소가 대간(臺諫)의 체통을 갖추었다고 답하면서 정3품의 당상관 직위인 병조참지(兵曹參知)를 특별히 가자(조선시대, 정3품 통정대부 이상의 품계를 올림)하였다고 합니다. 대간은 사헌부(司憲府)와 사간원(司諫院)을 말하는 것으로 사헌부는 관료의 부정부패를 척결하는 대관(臺官)이고, 사간원은 국왕의 독주를 간쟁(諫諍)하는 간관(諫官)이며 이 둘을 합해서 대간이라고 합니다. 영조로부터 대간의 체통을 갖추었고, 직위를 특별 가자하였다면 그는 평소 공명정대하였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조선왕조실록에 류작이 등장하는 것은 이 기록이 마지막이라고 합니다만, 1751년 경상감사 조재호가 감사로서 각 지역을 순시하며 하루하루의 일과를 기록한 ‘영영일기(嶺營日記)’ 에도 류작이라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1752년 2월 22일, 영해(寧海-지금의 영덕)는 온갖 폐단이 집중되어 있어 오랫동안 파국을 이루었던 고을이었다고 합니다. 토호들이 결탁하여 제멋대로 하는 것이 일상화 되었고 여러 해 흉년이 거듭된 데다가 자주 부사(府使)를 교체하여 관가의 업무와 백성의 일이 수습할 수 없는 지경으로 망가졌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부사 류작(柳綽)이 도임하여 임의대로 쇄신하여 예리한 뜻으로 정치를 하여 토호들과 아전들을 강하게 압박하였지요. 그리고 여러 해 동안 납부하지 않은 환곡(還穀-흉년 또는 춘궁기에 곡식을 대여하는 제도)을 모두 징수하였고, 논밭의 행정 오류를 고쳤으며, 어민세의 납부와 부역의 면제 또한 고르게 하니, 백성들이 모두 안도하여 거의 소생할 희망을 갖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조세의 의무에 있어서 공명정대했던 류작은 정3품에 해당하는 길주목사(吉州牧師)로 제수되었고, 조재호 경상감사는 류작을 보내고 싶지 않아 재임을 청하는 장계를 간곡히 올렸다고 합니다. 류작이 올바른 목민관이었음을 알려주는 기록이라 할 수 있지요.

그런 류작과 대동소이한 영화 속 주인공이 있습니다. 바로 ‘마루사의 여자(1987년 제작)’에 등장하는 세무서의 조사관 이타쿠라 료코가 그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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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타미 주조 감독의 ‘마루사의 여자’는 국세청에 근무하는 여성 조사관이 탈세를 저지르는 야쿠자 조직과 벌이는 싸움을 코믹하고 시니컬하게 그린 영화입니다. 1988년 (제11 회) 일본 아카데미 상 최우수 작품상과 최우수 남우주연상 (야마자키 츠토무), 최우수 여우주연상 (미야모토 노부코), 최우수 남우조연상 (츠가와 마사히코)와 올해의 동상을 거의 휩쓴 ‘마루사의 여자’는 작품의 성공을 바탕으로 캡콤이 패밀리 컴퓨터용으로 게임화 하였고, 이듬해에는 속편 ‘마루사의 여자2'가 제작되었지요.

마루사의 여자

항구 도시 세무서의 조사관인 료코는 관내의 파칭코 도박장의 누락된 소득을 발견하거나, 노부부가 경영하는 식품 슈퍼의 매출 계산 누락을 지적하는 등, 소소한 세무 업무를 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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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어느 날, 료코는 보행이 부자연스럽고 평소 지팡이를 짚고 다니는 사업가, 곤도 히데키 경영하는 러브호텔에서 영수증을 받을 손님이 없고, 매출 제외가 용이하다는 것을 이용하여 거액의 탈세를 하고 있음을 직감으로 알게 됩니다. 그녀는 즉시 조사를 실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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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강제 조사 권한이 없는 세무서의 한계로 인해, 교묘한 곤도 탈세를 조사할 수 없지요. 그런 가운데, 료코는 국세청 사찰관인 마루사에 발탁되어 강제 조사 권한을 얻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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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세의 증거를 찾아내기 위해 여러 루트로 애를 쓰던 료코는 곤도에게 배신당한 애인 켄 모치를 통해 곤도의 탈세에 관한 비밀 정보를 알아냅니다. 그리고 료코는 곤도의 조사를 앞서서 맡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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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도 조직의 위협에도 료코는 물러서지 않습니다. 그러던 중, 료코는 책꽂이로 위장된 비밀 금고를 발견하게 되며, 상황을 역전시키게 됩니다. 그리고 곤도와의 대형 탈세 전쟁에서 승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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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타미 주조 감독은 ‘마루사의 여자’에서 비판과 풍자를 바탕으로 한 일본 사회의 어두운 탈세 행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는 일본사회의 암적 존재인 야쿠자를 대상으로 야쿠자 퇴치법을 다룬 영화를 만들었다가 야쿠자의 보복으로 얼굴을 난도질당하기도 할 만큼 용감하게 싸웠던 감독이었지요. 비록 원치 않는 여성스캔들의 폭로를 앞두고 빌딩에서 투신자살하여 삶을 비극적이며 극단적으로 마감했지만, 그것 역시 자신과 관련된 어떤 오점도 남기지 않겠다며 불의에 대응한 행동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마루사의 여자

조선의 곧은 목민관 류작과 타협과는 거리가 먼 이타미 주조가 탄생시킨 왈패 캐릭터 료코. 두 사람 모두 고액 체납자에겐 공포의 세무 저승사자라고 할 수 있겠지요. 마지막으로 류작과 료코의 진정한 체납 세금 환수 한일전을 즐겁게 상상해보며 4월의 칼럼을 마치겠습니다.

작가소개

하원준
하원준
서울예술대학교와 추계예술대학원을 졸업했으며, 현재 영화시나리오 작가, 영화감독, 그리고 대학에서 겸임교원으로 활동 중이다.
주요 작품으로는 <두사부일체> <그녀를 모르면 간첩> <뜨거운 안녕> <렛미 아웃>
<들개들> 등이 있다.
“토지세 과다부과사건의 전말- 담당 아전의 농간으로 드러나다”

토지세 과다부과사건의 전말- 담당 아전의 농간으로 드러나다 김택룡 <조성당일기>, 1617-03-13 ~ 1617-03-25
1617년 3월 13일, 김응희가 문단(文壇)으로 가서 그 편에 충의위 이절과 좌수 황열에게 소식을 전했더니, 김택룡에게 답장이 왔다.
김응희의 전세[田稅, 논밭의 세금 즉 토지세]를 결정할 때 경작한 수량을 지나치게 많게 하였는데, 이것은 서원[書員, 세금담당 아전] 김국(金國)이 농간을 부렸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황열과 김개일이 김택룡을 찾아 와서 함께 대화를 나누었다. 5일 뒤 3월 18일, 김택룡은 별감 김개일에게 편지를 보내어, 세금담당 아전 김국이 시경[時耕, 진전이 아니라 현재 경작하고 있는 토지]의 수량을 지나치게 많이 책정한 것에 대해 그 사정을 물어봐달라고 했다.

“조세를 운반하는 수레들이 10리
까지 이어지다”

조세를 운반하는 수레들이 10리까지 이어지다 박종 <백두산유록>, 1764-05-16
골짜기 입구로 들어가자, 조세를 운반하는 수레들이 10리까지 이어져 마치 제갈량이 만들었다는 목우유마(木牛流馬)를 닮았다. 포사곡(褒斜谷)을 따라 나오며 물었더니, 모두 무산의 백성들이었다. 풀밭에서 자고 모래 밥을 지어 먹으며 밤낮으로 걸었기 때문에 비바람을 피할 수 없었다고 하였다. 머리가 허연 늙은이가 부러진 수레바퀴의 축을 고치면서 박종에게 말하기를, "자식 하나는 병으로 죽고, 사위 하나는 병으로 누워 있는데, 관아의 위엄으로 성화같이 독촉하여 늙은이가 떠날 수밖에 없다. 몇 고랑의 밭을 일구었는데, 아직 한 번도 김을 매지 못했다. 지금 살아서 돌아간들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영해부사 류작이 능력을 인정받아 더 힘든 자리로 승진하여 가다”

영해부사 류작이 능력을 인정받아 더 힘든 자리로 승진하여 가다 조재호 <영영일기>, 1752-02-22
목민관으로서 힘써 일한 결과 류작(柳綽)은 정3품에 해당하는 길주목사(吉州牧師)로 제수된다. 지금까지 영해부사로서의 능력을 인정받아 기근이 심한 북녘 고을에 승진 임명함으로써 진휼하는 정치를 하게 위함이다. 그러나 가는 곳마다 살기 어려운 곳이니, 목민관으로 살아가야 하는 올바른 정치의 길은 어렵고도 힘든 것이다. 조재호 경상감사는 류작을 보내고 싶지 않아 재임을 청하는 장계를 간곡히 올린다.

“똑 부러지는 수령의 살림살이로 벌꿀이 넘치는 관고(官庫) ”

“똑 부러지는 수령의 살림살이로 벌꿀이 넘치는 관고(官庫) 김령 <계암일록>, 1616-07-13
1616년 7월, 안동부사(安東府使) 박동선(朴東善)이 판관 임희지(任羲之)의 탐욕과 포악함을 다스리지 못하여 관고(官庫)가 점점 탕진되고 있었다. 박동선은 장자의 기량이 있긴 했지만, 한스럽게도 재주도 없고, 염치도 모자랐다.
반면 예안현 수령 이계지(李繼祉)는 청렴하고 근실하며, 성정이 곧아서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은 자였다. 관내의 창고에는 물품이 가득하여 쓰고도 남아돌았다. 옛날에는 관아에서 사용하는 벌꿀이 매번 부족해서, 다음해의 공납을 미리 거두었으며, 소금과 장은 중들에게서 지나치게 취하였고, 관아의 창고에 곡식이 모자라거나 떨어지면 또 백성들로부터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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