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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혼사추리극 - 연풍의 신부 4

거짓으로 이름을 대다

글 이외숙 / 삽화 이다



4화 거짓으로 이름을 대다


채옥은 느티나무 아래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잠깐 정신을 차린 사내가 다시 정신을 잃었기 때문이었다.
‘가뭄 때문에 현감의 중매로 시집갈 처지라니… 게다가 이 사내는 뭐야 대체… 올해는 삼재가 끼었나 봐…….’
채옥을 고민하게 만든 사내는 다름 아닌 위유사 효문이었다. 조령관에서 현감의 하인을 만나 미인촌으로 가는 지름길을 전해 들었다. 다행히 길을 찾았지만 그 길은 목숨을 걸어야 할 만큼 위험했다. 벼랑길에서 사투를 벌이느라 효문의 꼴은 말이 아니었고, 봇짐도 보이지 않았다.
채옥은 효문의 몸을 있는 대로 흔들었다. 그러고는 손가락으로 효문의 볼을 힘껏 꼬집었다.
“으윽… 정신이 들었으니 손길을 멈추시오.”
“상황이 다급하여… 미안합니다.”
눈을 뜬 효문은 앞에 있는 여인의 얼굴을 가만 바라보았다.
‘얼굴빛은 하얀 옥처럼 맑고, 눈은 가늘며, 입술은 동백꽃잎처럼 붉구나.’
채옥의 얼굴은 첫눈에 보아도 미인상이었다. 다만 이마에 있는 상처와 고집 있어 보이는 콧대는 여인의 것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이럴 때가 아니지. 임금도 여인의 미모에 혹하면 나라가 망한다 하였다. 내가 할 임무만 생각하자…….’
효문은 힘들게 몸을 일으켰다.
“여기가 어딥니까?”
“연풍 목화골입니다. 사람들은 미인촌이라고도 하지요.”
효문은 왠지 모르게 눈앞에 있는 여인이 자신이 찾고 있는 사람이란 직감이 왔다.
“혹시 박채옥이라는 처자를 압니까?”
채옥은 자신을 묻는 사내를 경계하며 조금 거리를 두었다.
“무슨 일로 그 처자를 물으십니까?”
“내가 그 처자와 육촌 되는 사람입니다. 혼사 때문에 내려왔는데 오는 길이 험하여 이 지경이 됐습니다.”
채옥은 몇 시각 전에 연풍 현감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혼인 때문에 한양 사는 친척을 겨우 찾았다더니 정말인가 보네… 근데 벌써 도착하다니 뭔가 수상쩍은데…… .’
채옥은 의심을 풀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이름이 무엇입니까? 박씨 집안과 친척이라는 증표를 보여주시지요.”
순간 효문의 예감은 확신으로 바뀌었다.
“어찌 낭자가 그걸 묻습니까?”
“제가 바로 박채옥입니다. 그러니 제 물음에 답해주시지요.”
채옥은 효문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효문은 귓불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서책이라면 모를까 처음 만난 여인과 이리 가까이 마주하고 대화하는 일이 처음이었다.
“얼굴빛이… 빨갛습니다. 어딜 다쳤습니까?”
“아닙니다.”
효문은 시선을 내리깔며 대답할 수를 생각했다.
“이름이⋯ 그러니까 내 이름은⋯ 연지, 박연지라 합니다.”
열녀연풍박씨지비, 효문은 급한 마음에 열녀비에 있는 글자를 훔쳤다.
“연지… 꼭 여인 이름 같습니다.”
“그런 얘길 종종 듣습니다. 통성명도 했으니 이제부터는 말을 놓아도 되겠지? 아버지 말씀이 초년부터 말년까지 복을 누릴 이름이라는구나.”
거짓말이 죽을 사람도 살린다더니 딱 지금을 두고 한 말이었다.
채옥은 여전히 효문의 정체가 의심스러웠다.
“말을 낮추는 건 증표를 보여준 다음입니다.”
효문은 잊고 있었던 것이 떠올랐다. 급히 소매에서 무언가를 찾았다.
“이거면 되겠느냐?”
채옥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효문이 건넨 종이를 받았다. 그 서찰은 바로 연풍 현감이 채옥의 당숙에게 보낸 것이었다.
현감의 하인이 갖고 있어야 할 서찰이 어찌 효문의 소맷자락에 있는 것일까. 효문은 조령관 근처에서 현감의 하인을 만났을 때 서찰을 자신의 초료장과 몰래 바꿔치기하였다. 사내끼리 포옹까지 하며 겨우 바꾼 서찰이었다. 효문은 벼랑길을 위태위태하게 기어갈 때도 그 서찰이 어찌될까 소매만은 꼭 움켜쥐었다.
초료장이 있어야 위유사 자격으로 여행할 때 역원에서 먹을 것과 잘 곳을 제공받을 수 있었다. 자신의 신분을 증명하는 종이이니 효문에게 목숨만큼 중한 것이었다. 그러나 미인촌 소문의 진상을 알아보려면 별다른 수가 없었다. ‘이 낭자의 친척 행세를 하며 혼사를 지켜보면 알겠지… 정말로 혼인날 신부가 죽는지 아닌지 말이다.’
효문은 현감의 하인이 걱정스러웠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았다.
채옥도 현감의 서찰을 확인한 이상 어쩔 도리가 없었다.
“무례했습니다.”
“오래도록 왕래가 없었으니 그럴 만도 하지. 아버지, 그러니까 너의 당숙께서 노환으로 몸이 좋지 않아 내가 왔구나. 정성을 다해 혼사를 진행할 것이니 걱정 말아라.”
무엇이든 처음이 어려운 법, 한 번 거짓말을 하고 나니 다음부터는 힘 들이지 않고 술술 나왔다.
“그런데 나이가 어찌 됩니까?”
순간 효문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내 얼굴이 좀 동안이다 싶은 것이냐? 이리 보여도 너보다 한참 위다. 앞으로 오라버니라 불러라.”
평소라면 효문의 말을 계속 의심하여 따졌겠지만 지금은 한마디로 위급상황이었다. 채옥은 잠시 평정심을 잃고 효문의 허술한 거짓말에 그만 넘어가고 말았다.
“제 집으로 가시지요.”
채옥이 앞장서자 효문의 얼굴에는 그제야 미소가 번졌다. 한숨을 돌리고 나니 채옥의 옷차림이 눈에 들어 왔다. 치마는 방향이 한참 돌아가 있었고, 뒷부분은 말려 올라가 있었다. 걸음걸이는 정숙미인이 아니라 여중호걸이었다.
‘여자는 남자보다 뒤에 서서 가는 것이 예거늘… 시골에서 자란 탓이겠지…….’
곧 효문의 눈앞에 넓은 들판이 나타났다.
“여기가 목화밭이겠구나.”
“꽃이 피면 훨씬 장관이지요. 가뭄이 계속된다면 올해는 꽃을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채옥과 효문은 밭을 가로질러 마을에 다다랐다.
효문의 눈에 비친 미인촌은 소담한 풍경이었다. 10여 채 정도가 모여 사는 작은 마을이었는데, 괴이한 소문과는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평범했다.
그러나 마을에서 만난 사람들의 눈빛은 예사롭지 않았다. 외지 사람이라 그런지 효문을 경계하는 느낌이 가득하였다.
이윽고 마을 길 끝에 있는 초가집에 이르렀다. 집은 방 두 칸과 부엌이 전부였다. 뒤편에는 집 기둥만 한 나무가 몇 그루 서 있었다.
채옥이 아버지가 살아 있을 적 쓰던 방을 가리켰다.
“이 방에서 머무르세요. 한양에서 살던 곳에 비하면 많이 불편할 것입니다.”
“몸을 누일 공간만 있으면 충분하지. 방 투정할 만큼 까탈스럽진 않으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효문은 방에 들어오자마자 그대로 누워버렸다. 그간의 여정이 얼마나 고됐는지 이내 잠에 곯아떨어졌다. 효문이 눈을 떴을 때는 창호지 틈으로 달빛이 비치고 있었다.
그때였다. 문창호지로 손가락 하나가 쑤욱 들어오더니 구멍이 생겼다. 잠시 뒤 그 옆으로 조금 더 큰 구멍이 뚫렸다. 그 틈으로 웬 눈동자가 보였다.
“채옥이냐?”
아무런 대답이 없자 효문은 방문을 열었다. 그러자 밖으로 급히 뛰어나가는 사람의 뒷모습이 보였다.
‘미인촌에 오자마자 나를 엿보는 자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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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소개

유교시대 싱글의 삶을 꿈꾸는 채옥과, 미인촌 소문을 파헤치려고 신분을 위장하여 채옥의 혼인을 진행하려는 효문이 만나 벌어지는 <조선혼사추리극>

등장인물

  • 박채옥 미인촌 박씨 집안 막내딸로 자매 가운데 가장 미모가 뛰어나다. 머리보다 행동이 앞서는 탓에 걷는 것보다는 뛰는 게 일상이다. 치마는 흙투성이, 얼굴에 상처 하나쯤은 장식으로 여긴다. 어릴 적부터 행실도 읽는 일을 제일 싫어했으며, 마을 어귀에 세워진 열녀비에다 아무렇지 않게 돌을 던진다.
  • 김효문 한양 명문가의 아들이나 서출의 신분. 규장각 각신으로 검서관 자리에 있다가 충청 지역에 가뭄이 들자 위유사(천재지변이나 병란이 났을 때 지방의 사정을 살피고, 백성을 위로하기 위해 파견한 임시 관리) 로 임명받는다. 채옥보다 나이가 어린데도 불구하고 육촌 오라버니 행세를 하면서 미인촌 소문을 파헤친다.
  • 어을할매 고갯길에서 주막을 운영하는 노과부. 할매의 나이와 과거는 아무도 모른다. 궁녀 출신이다, 수십 년 전 남편에게 소박맞았다 등 갖가지 소문만 무성할 뿐이다. 남자들에게는 팜므파탈, 채옥에게 친할머니 같은 존재.
  • 박채선과 박채영 미인촌 박씨 집안의 큰딸과 둘째 딸.
  • 박광헌 채선, 채영, 채옥의 아버지.
  • 홍권탁 연풍 현감. 백성의 어려움을 살피지 않고 자리 지키기에만 급급하다.
  • 장영 연풍현 이방. 형방청에서 하는 일이라곤 새로 온 현감에게 어떻게 하면 잘 보일까 고민하는 것이다. 아들이라면 정신을 못 차리는 아들 바보(?).
  • 장병수 연풍현 이방의 아들. 혼인날 일어난 사건 때문에 박씨 집안을 저주한다.
  • 이경박 문경 현감의 둘째 아들로 채옥의 중매남이다. 한마디로 계집 팔아 명당 살 놈.
  • 소진 미인촌에 사는 여자아이. 효문을 좋아한다.
  • 그 외 어정개 주막의 주모와 선비들, 연풍현 하인 돌쇠, 오작인, 노비 막동이 등.

작가의 말

‘연풍의 신부’는 지난해 ‘스토리 테마파크 창작 콘텐츠 공모전’에서 수상한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스토리 테마파크의 자료들 가운데 선인 박재현이 쓴 서정일기에서 모티브를 얻었어요. 서정일기를 보면 “연풍(延豐)의 미인촌(美人村)은 미인이 많은 곳이지만, 혼인하는 날 모두 죽게 되는 괴이한 전설이 있었고⋯⋯.”라는 내용이 나오지요.
전설이란 오랜 시간을 두고 사람들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오는 것입니다. 일기를 보자마자 미인촌 전설에 숨은 이야기가 궁금해졌고, 그 빈틈을 상상력으로 채우고 싶은 욕심이 생겼습니다. ‘유학 군주’라 불렸던 정조의 시대를 배경으로 일기에 미처 담지 못한 미인촌 전설의 시작을 스토리로 만들었어요. 조선 시대 싱글의 삶을 꿈꾸는 처자 박채옥과 미인촌 소문을 파헤치는 위유사 김효문의 만남을 통해 조선 시대 여성의 삶을 들여다보려고 했습니다.

작가소개

이외숙
이외숙
전방위 작가가 되고 싶어서 하루하루 고군분투합니다. 지름길보다는 에움길을 가는 마음가짐으로 이 길을 가려 합니다.
이다 (박은희)
이다 (박은희)
순정만화가. 2003년 만화계 데뷔.
드라마 원작 만화를 만드는 것이 목표. 차기작 ‘향’ 작품 준비 중.
작품으로는 ‘why not?’, ‘포도밭 그 사나이’ 등이 있다.
“ 어머니의 눈물어린 배웅 - 사도세자의 죽음에 얽힌 억울함을 고하러 한양으로 향하다 ”

권방(權訪), 천휘록(闡揮錄),
1792-04-17
1792년 4월 17일, 정오쯤 부친이 곧바로 봉서(鳳栖)로 오셨는데 아우 석조가 모시고 왔다. 즉시 백부의 편지를 보시고는 사건의 단서를 대충 아시고 다른 별 말씀이 없으셨다. 오후에 내가 부친을 모시고 집으로 돌아오고, 동생 석조는 다시 문소로 향하였다. 표종(表從: 외종)인 신면조(申冕朝)·봉조(鳳朝) 형제가 나의 행사(行事)를 듣고 편지를 보내 고무하여 힘쓰게 하였다. 저물녘에 하상(河上)에 도착하여 백부와 숙부들을 뵙고, 곧 북촌(北村) 본가에 가서 담장 밖에서 어머니의 건강을 탐문하고 우두커니 서서 한참을 바라보았다. 어머니께서 북쪽 창문을 열고 한양 가는 일을 상세히 물으셨다. 나는 이 일의 대강을 말씀드리니 어머니께서는 절반도 듣지 않으시고 목이 메여 눈물을 흘리셨다. 이는 어머니께서 모년(某年: 1762년 사도세자가 죽던 해)의 사건에 그 전말을 상세히 아셨다. 때문에 매번 말을 하다가 그 사건이 언급되면 울분 감개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이 소식을 들으시자 눈물이 절로 흘러내리신 것이다.

“ 발을 싸매고 문경새재를 넘어, 피를 쏟으며 올립니다 - 만 명의 상소문을 올리다 ”

권방(權訪), 천휘록(闡揮錄),
1792-04-27
1792년 4월 27일, 상소문을 작성한 사람들이 이른 아침에 모여 소장을 봉함하였다. 상소문에 이름을 적은 사람은 모두 10,057명 이었다. 상소문의 대략은 다음과 같다. “경상도 유학 이우(李㙖) 등은 발을 싸매고 조령을 넘어 피를 쏟으며 소장을 올립니다. 확실한 처결로 화란(禍亂)의 뿌리를 영원히 뽑아서 의리를 밝히고 윤리와 강령을 세우시기를 바랍니다.”

“ 촛불 아래 엎드려 읽은 상소문, 그리고 임금의 눈물 ”

권방(權訪), 천휘록(闡揮錄),
1792-04-27
1792년 4월 27일, 주상이 희정당(熙政堂)에 납시어 서쪽을 향하여 단정하게 앉고, 진신과 장보들이 뜰 아래에 차례로 서니 보좌(寶座)와의 거리가 불과 10여 보 밖에 되지 않았다. 전상(殿上)은 시끄럽지 않고 고요하기만 한대 다만 승선 1명, 기주관 2명, 내관 2~3명이 좌우에 고개를 숙이고 엎드려 있었다. 승선이 교지(敎旨)를 전하여 말하기를 “지난번 이지영(李祉永)의 상소에는 비답(批答)을 내리지 않았는데, 그대들은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천리를 와서 충정을 쏟아내니, 나의 뜻을 면전에서 알리지 않을 수 없어 그대 들을 부르게 하였으니 소두는 전(殿)에 올라와 상소문을 읽는 게 좋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우가 서쪽 계단을 따라 올라가서 동쪽을 향하여 꿇어앉아 엎드려 소장을 읽었다. 소장을 반도 읽지 못하여 해가 이미 저물었다. 사알(司謁)이 여덟 자루 촛불을 전상에 벌여 놓았다. 읽기를 마치자 주상이 한참 동안 마음을 억누르고 진신과 장보들을 각각 몇 명씩 앞으로 나오게 하였다. 승선이 크게 소리 질러 말하기를 “이 일을 잘 아는 진신과 장보 각 2명씩 전에 오르면 된다.”고 하였다. 김한동(金翰東)·강세륜·김희택·이경유가 서쪽 계단을 따라 올라갔다. 주상이 또 말하기를 “다시 몇 명 더 전(殿)에 올라오너라.”라고 하였다. 김한동(金翰東)이 승선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진신 중에 성언집·이헌유와 장보 중에 김시찬을 올라가게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승선이 또 부르기를 “성언집·이헌유·김시찬은 전에 오르시오.”하여, 나아가 엎드렸으나 주상이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옥색(玉色: 임금의 안색)이 몹시 처량하고 슬퍼보였으며 자주 소매를 들어 눈물을 닦았다. 목이 메여 말을 못하다가 한참 만에 장황하게 타이르며 숨김없이 자세하게 말을 다하였는데, 비록 한 집안의 부자 사이라도 이보다 더할 수는 없었다. 소두가 일어났다가 엎드려 대면(對面)을 마치니, 주상이 또 뜰에 있던 여러 진신과 장보들에게 명하여 들어와 전에 올라 비답을 듣게 하였다. 소두가 비답을 받들고 차례로 물러나니, 밤은 이미 사경(四更: 오전 3시~오전 5시) 사점(四點)이었다. 주상의 특명으로 유문(留門: 궁궐 문을 열고 닫는 시각을 유보함)하여 통금을 해제하여 주었다. 진신과 장보들이 서로 손을 잡고 감읍하여 돌아왔다.

“ 성균관생들의 동맹 휴학 - 만인소에 확인 도장을 찍어주지 않은 죄를 물어라! ”

권방(權訪), 천휘록(闡揮錄),
1792-04-29
1792년 4월 29일, 듣건대 밖에 있는 유생 이존덕(李存德) 등이 태학에 통문을 보냈는데, 내용이 엄정(嚴正)하였다 한다.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여러 군자께서는 이미 태학에 거처하면서 변괴가 연이어 일어남을 보고서도 어찌 태연히 예사로 여겨 묵묵히 한 마디 말도 없어야 되겠습니까? 만약 우리들의 말을 옳다고 여기신다면 회답을 주시고, 그르다고 여기신다면 이를 잘 헤아려주시기를 바랍니다.” 이리하여 서재생(西齋生)들이 함께 권당(捲堂)을 행사하였다. 성균관장 김방행(金方行)이 들어와서 그들의 의사(意思)을 수렴하여 주상에게 주청하였다.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전 교리 김한동(金翰東)의 상소는, 태학에서 ‘근실’을 허락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를 여러 방면으로 핑계를 대어 의리를 회색(晦塞: 꽉 막혀 깜깜함)시켰다고 하였고 재유(齋儒) 최홍진이 성균관에 보낸 단자와 밖에 있는 이존덕의 통문은 호역완토(護逆緩討: 반역자를 옹호하고, 응징을 느슨하게 함)의 이름으로 몰아붙이니, 염치와 의리로 보건데, 얼굴을 들고 식당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고 하였다. 주상이 사알(司謁)을 시켜 구전으로 하교하기를 “반역자를 성토하는 일을 누가 감히 소홀하게 하겠는가마는, 혹 장의(掌議)이 선출되지 못함으로 인하여 그런 것은 아닌가? 아니면 혹 지방유생들이 격식있는 관례를 알지 못하여 그런 것은 아닌가? 다른 유생들이 마땅히 권하여 식당에 들어오도록 해야 할 일이지만 일이 커지면 대응하기가 몹시 어려우니 권하여 들어오라는 뜻을 대사성에게 전하라.” 하였다. 서재생들이 마침내 저녘식당에 들어가 그날 장의 및 두 반수(班首)인 이동수(李東洙) -이 성토와 징계를 듣고 왜 ‘근실’해 주지 않았는가?-, 맹현대(孟賢大) -의도적이지는 않았지만 불행히도 근실을 해주지 않은 죄에 해당- 의 벌을 의논하였다.

“ 이제 그만 고향으로 돌아가 학업에 전념하시오 - 3차 상소를 준비하던 유생들에게 내린 임금의 하교 ”

권방(權訪), 천휘록(闡揮錄),
1792-05-16
1792년 5월 16일 소청에 모여 소록을 등사하였다. 막 칙교를 받았을 때는 비록 도리에 구애되어 상소하는 일을 잠시 멈추었지만 다사들의 체류가 재일(齋日)이 지나면 충심으로 호소하는데 지나지 않으니 22일 후에 다시 세 번째 상소를 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한편으로는 소초(䟽草)를 작성하고 한편으로는 소록을 작성하였다. 19일 소록 작성을 다 마쳤다. 모두 11,365명이다. 20일 소초가 완성되었다. 소두 권 감찰·김시찬이 각각 한 본씩을 작성하였으나 봉사대부가 지은 것이 가장 적절하여 사론이 반드시 이것을 사용하려고 하였다. 장로들의 소견(所見)이 일치하지 않아 더하고 뺀 것이 많아서 다른 곳에 물어보고 다시 다른 조목을 넣었다. 21일 이 날은 곧 우리 경모궁(景慕宮)[사도세자]의 제삿날이다. 우리 성상(聖上)의 그립고 애통한 마음 어찌 다함이 있겠으며 우리들이 두렵고 피가 끓는 것은 과연 어떠하겠는가? 제사를 마친 뒤에 즉시 상소를 하려고 하였으나 첫째는 차마 못하겠고 둘째는 감히 못하겠으니 우선 다음 날을 기다려보기로 하였다. 22일 주상이 김한동(金翰東)을 불러 하교하기를 “지금은 의리가 분명하게 결판이 났으니 영남 유생들은 더 체류할 필요가 없다. 아까 경연에서 좌의정이 주청한 바가 있었다. 물러나가 좌의정을 보고 상세히 물어서 영남 유생에게 전달을 하라. 일전에 체류 식량을 받지는 않았지만 지금 회량(回糧)을 주면 반드시 감히 받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또 들으니 유생들이 물러나 학업을 닦으라는 비답을 듣고자한다고 하니 모름지기 비답을 내리는 법식에 의하여 말로 하교를 전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하였다. ...... 중론이 마침내 상소를 정지하자는 의논을 주장하였다. 그 중에 불충에 죽더라도 남쪽으로 돌아갈 뜻이 없는 자는 다만 2~3명뿐이었다. 그러나 일이 이미 이에 이르렀으니 다시 무엇을 하겠는가? 아! 애통하구나. 우리들이 천리를 와서 일만 명이 한목소리로 30년간 꽉 막혀서 감히 말하지 못한 일을 말하는 것이 과연 얼마나 큰 의리이며 큰 행사인데 다만 우리의 정성이 부족하고 의견이 일치하지 않아 끝내 유시무종(有始無終: 시작은 있으나 결과가 없음)의 탄식으로 돌아가니 애석함을 이길 수 있겠는가? 그러나 우리 성상이 꾹 참고 있는 본 뜻은 중천에 뜬 태양같이 밝으니 우리영남의 모든 유생들의 윤리는 죽더라도 거의 눈을 감을 것이다. 이날 서울인사로서 문안인사를 온 자가 매우 많았으나 다 힘없이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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