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옥은 느티나무 아래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잠깐 정신을 차린 사내가 다시 정신을 잃었기 때문이었다.
‘가뭄 때문에 현감의 중매로 시집갈 처지라니… 게다가 이 사내는 뭐야 대체… 올해는 삼재가 끼었나 봐…….’
채옥을 고민하게 만든 사내는 다름 아닌 위유사 효문이었다. 조령관에서 현감의 하인을 만나 미인촌으로 가는 지름길을 전해 들었다. 다행히 길을 찾았지만 그 길은 목숨을 걸어야 할 만큼 위험했다. 벼랑길에서 사투를 벌이느라 효문의 꼴은 말이 아니었고, 봇짐도 보이지 않았다.
채옥은 효문의 몸을 있는 대로 흔들었다. 그러고는 손가락으로 효문의 볼을 힘껏 꼬집었다.
“으윽… 정신이 들었으니 손길을 멈추시오.”
“상황이 다급하여… 미안합니다.”
눈을 뜬 효문은 앞에 있는 여인의 얼굴을 가만 바라보았다.
‘얼굴빛은 하얀 옥처럼 맑고, 눈은 가늘며, 입술은 동백꽃잎처럼 붉구나.’
채옥의 얼굴은 첫눈에 보아도 미인상이었다. 다만 이마에 있는 상처와 고집 있어 보이는 콧대는 여인의 것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이럴 때가 아니지. 임금도 여인의 미모에 혹하면 나라가 망한다 하였다. 내가 할 임무만 생각하자…….’
효문은 힘들게 몸을 일으켰다.
“여기가 어딥니까?”
“연풍 목화골입니다. 사람들은 미인촌이라고도 하지요.”
효문은 왠지 모르게 눈앞에 있는 여인이 자신이 찾고 있는 사람이란 직감이 왔다.
“혹시 박채옥이라는 처자를 압니까?”
채옥은 자신을 묻는 사내를 경계하며 조금 거리를 두었다.
“무슨 일로 그 처자를 물으십니까?”
“내가 그 처자와 육촌 되는 사람입니다. 혼사 때문에 내려왔는데 오는 길이 험하여 이 지경이 됐습니다.”
채옥은 몇 시각 전에 연풍 현감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혼인 때문에 한양 사는 친척을 겨우 찾았다더니 정말인가 보네… 근데 벌써 도착하다니 뭔가 수상쩍은데…… .’
채옥은 의심을 풀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이름이 무엇입니까? 박씨 집안과 친척이라는 증표를 보여주시지요.”
순간 효문의 예감은 확신으로 바뀌었다.
“어찌 낭자가 그걸 묻습니까?”
“제가 바로 박채옥입니다. 그러니 제 물음에 답해주시지요.”
채옥은 효문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효문은 귓불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서책이라면 모를까 처음 만난 여인과 이리 가까이 마주하고 대화하는 일이 처음이었다.
“얼굴빛이… 빨갛습니다. 어딜 다쳤습니까?”
“아닙니다.”
효문은 시선을 내리깔며 대답할 수를 생각했다.
“이름이⋯ 그러니까 내 이름은⋯ 연지, 박연지라 합니다.”
열녀연풍박씨지비, 효문은 급한 마음에 열녀비에 있는 글자를 훔쳤다.
“연지… 꼭 여인 이름 같습니다.”
“그런 얘길 종종 듣습니다. 통성명도 했으니 이제부터는 말을 놓아도 되겠지? 아버지 말씀이 초년부터 말년까지 복을 누릴 이름이라는구나.”
거짓말이 죽을 사람도 살린다더니 딱 지금을 두고 한 말이었다.
채옥은 여전히 효문의 정체가 의심스러웠다.
“말을 낮추는 건 증표를 보여준 다음입니다.”
효문은 잊고 있었던 것이 떠올랐다. 급히 소매에서 무언가를 찾았다.
“이거면 되겠느냐?”
채옥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효문이 건넨 종이를 받았다. 그 서찰은 바로 연풍 현감이 채옥의 당숙에게 보낸 것이었다.
현감의 하인이 갖고 있어야 할 서찰이 어찌 효문의 소맷자락에 있는 것일까. 효문은 조령관 근처에서 현감의 하인을 만났을 때 서찰을 자신의 초료장과 몰래 바꿔치기하였다. 사내끼리 포옹까지 하며 겨우 바꾼 서찰이었다. 효문은 벼랑길을 위태위태하게 기어갈 때도 그 서찰이 어찌될까 소매만은 꼭 움켜쥐었다.
초료장이 있어야 위유사 자격으로 여행할 때 역원에서 먹을 것과 잘 곳을 제공받을 수 있었다. 자신의 신분을 증명하는 종이이니 효문에게 목숨만큼 중한 것이었다. 그러나 미인촌 소문의 진상을 알아보려면 별다른 수가 없었다.
‘이 낭자의 친척 행세를 하며 혼사를 지켜보면 알겠지… 정말로 혼인날 신부가 죽는지 아닌지 말이다.’
효문은 현감의 하인이 걱정스러웠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았다.
채옥도 현감의 서찰을 확인한 이상 어쩔 도리가 없었다.
“무례했습니다.”
“오래도록 왕래가 없었으니 그럴 만도 하지. 아버지, 그러니까 너의 당숙께서 노환으로 몸이 좋지 않아 내가 왔구나. 정성을 다해 혼사를 진행할 것이니 걱정 말아라.”
무엇이든 처음이 어려운 법, 한 번 거짓말을 하고 나니 다음부터는 힘 들이지 않고 술술 나왔다.
“그런데 나이가 어찌 됩니까?”
순간 효문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내 얼굴이 좀 동안이다 싶은 것이냐? 이리 보여도 너보다 한참 위다. 앞으로 오라버니라 불러라.”
평소라면 효문의 말을 계속 의심하여 따졌겠지만 지금은 한마디로 위급상황이었다. 채옥은 잠시 평정심을 잃고 효문의 허술한 거짓말에 그만 넘어가고 말았다.
“제 집으로 가시지요.”
채옥이 앞장서자 효문의 얼굴에는 그제야 미소가 번졌다. 한숨을 돌리고 나니 채옥의 옷차림이 눈에 들어 왔다. 치마는 방향이 한참 돌아가 있었고, 뒷부분은 말려 올라가 있었다. 걸음걸이는 정숙미인이 아니라 여중호걸이었다.
‘여자는 남자보다 뒤에 서서 가는 것이 예거늘… 시골에서 자란 탓이겠지…….’
곧 효문의 눈앞에 넓은 들판이 나타났다.
“여기가 목화밭이겠구나.”
“꽃이 피면 훨씬 장관이지요. 가뭄이 계속된다면 올해는 꽃을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채옥과 효문은 밭을 가로질러 마을에 다다랐다.
효문의 눈에 비친 미인촌은 소담한 풍경이었다. 10여 채 정도가 모여 사는 작은 마을이었는데, 괴이한 소문과는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평범했다.
그러나 마을에서 만난 사람들의 눈빛은 예사롭지 않았다. 외지 사람이라 그런지 효문을 경계하는 느낌이 가득하였다.
이윽고 마을 길 끝에 있는 초가집에 이르렀다. 집은 방 두 칸과 부엌이 전부였다. 뒤편에는 집 기둥만 한 나무가 몇 그루 서 있었다.
채옥이 아버지가 살아 있을 적 쓰던 방을 가리켰다.
“이 방에서 머무르세요. 한양에서 살던 곳에 비하면 많이 불편할 것입니다.”
“몸을 누일 공간만 있으면 충분하지. 방 투정할 만큼 까탈스럽진 않으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효문은 방에 들어오자마자 그대로 누워버렸다. 그간의 여정이 얼마나 고됐는지 이내 잠에 곯아떨어졌다. 효문이 눈을 떴을 때는 창호지 틈으로 달빛이 비치고 있었다.
그때였다. 문창호지로 손가락 하나가 쑤욱 들어오더니 구멍이 생겼다. 잠시 뒤 그 옆으로 조금 더 큰 구멍이 뚫렸다. 그 틈으로 웬 눈동자가 보였다.
“채옥이냐?”
아무런 대답이 없자 효문은 방문을 열었다. 그러자 밖으로 급히 뛰어나가는 사람의 뒷모습이 보였다.
‘미인촌에 오자마자 나를 엿보는 자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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