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디로 낭패였다. 효문은 지금 동헌 사람들과 마주치면 곤란했다. 현감의 하인에게서 서신을 훔친 게 엿새 전이니 시간이 더 필요했다. 효문은 어쩔 수 없이 형방청의 사내를 향해 얼굴을 돌렸다.
“혹시 현감님이십니까?”
“그건 아니고, 나는 현감 바로 밑에 있는 장이방인디… 여는 아무나 들어오는 데가 아니란 말이지.”
“압니다. 현감님을 만나러 왔는데 길을 잃어서 그만…….”
연풍현 이방 장영이 거들먹거리며 말을 이었다.
“이 사람이 매를 맞아야 정신을 차리겠구먼. 대체 뭐 하는 작잔디 우리 현감님을 찾는단 말이여?”
효문은 옷에 품은 서신을 꺼내서 장이방에게 보여주었다. 그제야 장이방은 뒷짐을 풀었다.
“몰라 뵈어 송구하구먼유. 안 그래도 현감님이 애가 타도록 기다리고 있구먼유. 지를 따라오시쥬.”
장이방은 현감이 있는 동헌으로 효문을 데려갔다.
“한양에서 손님이 도착했구먼유.”
장이방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현감 홍권탁이 방문을 열었다. 동헌 대청으로 나와서는 효문의 손을 반갑게 잡았다.
“며칠 더 걸릴 줄 알았는데 일찍 오시었소.”
“박연지라 합니다. 워낙 중차대한 일이라 말을 급히 몰아서 왔습니다.”
“손에 땀이 아직도 흥건합니다. 급히 오느라 고생하셨소.”
효문의 손이 축축한 것은 당황한 탓이었다. 이 상황을 알 리 없는 현감은 잠깐이지만 서둘러 와준 효문이 고맙기까지 했다. 현감이 효문과 잡은 손을 풀며 말했다.
“박처자의 중매를 하려는데 집안어른이 없으니 어쩌겠습니까. 여기 현감으로 오기 전에 나도 한양서 살았소. 그때 친하게 지낸 인맥을 동원해서 처자의 친척을 수소문하였지요. 근데…….”
갑자기 현감이 효문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당숙이라 하기엔 나이가 한참 어리지 싶소.”
효문은 현감의 시선을 애써 피하며 대답했다.
“아버지께서 몸이 좋지 않아 저를 대신 보내었습니다.”
“아이고, 그런 것이오?”
현감이 자신에게 더 이상 호기심을 갖지 못하도록 효문은 혼사 이야기를 꺼냈다.
“우리 채옥이 중매는 어찌 되고 있습니까? 이 근방에 좋은 혼처가 있는지요?”
“있다마다요. 안 그래도 신랑감이 정해졌소이다.”
“벌써 말입니까? 아무리 현감님이 중매를 한다 해도 제게 상의도 없이 신랑감을 결정하다니요. 혼인은 인륜지대사라 신중하게 진행해야 하거늘…….”
“박처자 나이가 숨넘어가는지라 그리했습니다. 신랑감에 대해선 걱정 안 해도 됩니다. 정성을 다해 찾았으니까요. 그리고 그쪽도 얼른 일을 치르고 한양으로 돌아가는 게 좋지 않겠소이까?”
효문은 현감의 마지막 말이 자못 마음에 걸렸다. 가짜이지만 최선을 다해 채옥의 친척 오라비 행세를 하고 싶었다. 그래야 조금은 덜 미안할 것 같았다.
“신랑감은 어떤 사람입니까?”
“문경 현감의 둘째 아들 이경박입니다.”
“집안이며 사내의 인품이 괜찮은 것이지요?”
“그건 말할 필요도 없지요. 박처자와 천생연분이라 하더이다.”
효문은 현감이 이리 의기양양하게 말하는 사내라면 괜찮을 듯싶었다.
“내일 오후에 사주단자와 청혼서가 오도록 처리하겠소이다. 신랑 신부 궁합 보는 김에 택일 날짜도 알아보았지요. 이레 뒤에 혼인하면 백년해로한답니다.”
“날받이는 신부 집에서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길일이라지만 이레 뒤라니 너무 빠릅니다. 자장도 준비해야 하는데…….”
“그것 때문이라면 걱정 마시지요. 혼례에 필요한 옷이며 물품도 내가 준비해서 보낼 테니까요.”
“혼기를 넘긴 처녀의 중매까지 직접 해주시니 참으로 고맙습니다. 그럼 채옥이에게 신랑감에 대해 전하겠습니다.”
효문은 가볍게 눈인사를 하고 동헌을 나왔다. 임금에게 올릴 장계에 현감을 칭찬하는 내용도 빠뜨리지 말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효문의 모습이 사라지자 현감은 눈빛이 사납게 바뀌었다.
“이레 뒤에 무슨 일이 있어도 혼례를 치러야 하네.”
“많이 급한 감이 있긴 한디…….”
“이번 일에 자네는 물론 내 벼슬자리까지 달렸네. 잔말 말고 바삐 진행하게나.”
“예, 알겠구먼유.”
“그나저나 기다리는 사람은 왔는데 서찰을 가져간 아이는 어찌 이리 함흥차사인고…….”
“돌쇠 놈이 어서 또 놀고 있나보네유. 오믄 따끔하게 혼을 내겠구먼유.”
***
효문은 형방청에서 훔쳐 본 검안서 내용을 곱씹고 있었다.
‘박채영… 처자의 언니로구나. 미인촌 소문이 거짓이 아니란 말인가……. 하나 어찌 그럴 수 있단 말이지… 또한 왜 박처자는 언니 일을 모른다고 했을까…….’
효문은 맞은편에서 오던 노파와 부딪히고 나서야 생각을 멈추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미인촌으로 가는 길이 아니라 다른 길에 들어서 있었다.
효문의 눈앞으로 가게들이 쭉 늘어서 있었고, 그곳에서는 약재들을 팔고 있었다. 효문은 제일 오래되어 보이는 가게 앞에서 발길을 멈추었다.
“이건 어디에 쓰는 겁니까?”
“체했을 때 차로 다려 먹으면 좋지유. 어떤 약재를 구하신데유?”
“찾는 게 있긴 한데…….”
약재 가게 주인이 다 안다는 듯 눈 한쪽을 찡긋하였다.
“사내한테 좋은 걸 찾으시는감유?”
“그런 게 아니라… 혹시 길을 잘 찾는 데 도움을 주는 약재는…….”
“그게 무신… 뚱딴지같은 소리래유?”
효문은 가게 주인의 미간이 찡그려지는 것을 보고는 얼른 말을 돌렸다.
“아닙니다. 멍 빠지는 데 도움이 될 만한 걸로 챙겨주십시오.”
“그거라믄 좋은 게 있구먼유.”
“여기서 장사를 오래하였습니까?”
“그람유. 여기 토박이지유. 약재 장사도 3대째 하고 있구먼유.”
효문은 잘못 들어서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가다 미인촌 소문을 들었는데…….”
“아휴, 숭악스런 소문이쥬.”
“아주 옛날부터 내려오던 이야기입니까?”
“아니구먼유. 이 고을이 얼마나 살기가 좋은 곳인데유.”
“그럼 언제부터 소문이 퍼졌습니까?”
“그러니께 미인촌 박씨네 딸이 죽고는 갑자기 확 퍼졌다니께유. 소문이라는 게 흉측할수록 살도 더 많이 붙고 빨리 퍼지니께유. 미인은 박명이라더만 그짝 집안 딸들이 참 안 됐쥬.”
효문은 약재 꾸러미를 받아들고서 미인촌으로 향했다.
***
효문은 마음이 답답했다. 방문을 열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여전히 비는 내리지 않고 있었다.
‘미인촌 소문의 진실을 알아내려면 박처자 언니의 혼인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확인해야 한다. 필시 박채영의 죽음에 무언가 숨겨진 이야기가 있는 것이다.’
하늘을 쳐다보던 효문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돌담 위에 반달이 하나 걸려 있었다.
“숨어 있지 말고 이쪽으로 오너라.”
돌담 위에 살포시 걸려 있던 반달은 사람의 이마였다. 잠시 뒤 소진이 몸을 배배 꼬며 모습을 드러냈다.
“부딪힌 데는 괜찮으냐?”
“멍들었구먼유.”
“혹시 나한테 따지려고 온 것이냐?”
“그런 건 아니어유.”
“이거 챙겨가거라.”
효문은 아랫마을에서 산 약재 꾸러미를 들어 보였다. 눈이 동그래진 소진이 효문에게 다가왔다.
“멍 빠지는 데 좋다는구나.”
“줄려면 더 일찍 줬어야쥬.”
소진은 괜히 뽀로통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너도 채옥이와 성격이 비슷한 모양이구나.”
“그거 칭찬이여유? 욕이여유?”
“비밀이다.”
소진이 효문을 향해 입을 삐죽 내밀었다.
“근데 마을 사내들은 어디로 갔느냐? 여인들만 보이던데…….”
“없구먼유.”“그게 무슨 말이냐?”
“사내는 안 산다구유.”
“어찌…….”
“작년에 채옥 언니 어르신 돌아가시고는 여인들만 남게 됐구먼유.”
“그럼 너도 아버지가 안 계시겠구나.”
“얼굴도 본 적이 없는데유…….”
“사내가 한 명은 있어야 할 텐데… 마을에서 큰일을 치르려면 말이다.”
“그럴 땐 언니가 다 해유.”
“소진아… 작년에 채영, 그러니까 이 집 작은언니의 혼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느냐?”
“몰러유.”
“채옥이가 마을 일을 함부로 이야기하지 말라더냐?”
“진짜라니께유. 그날 이야기 꺼내믄 혼나는구먼유. 다들 너무 슬퍼서 그러는가… 채영 언니가 너무 안 됐어유. 채옥 언니도 불쌍하구유.”
그때 채옥이 집 안으로 들어왔다.
“소진이 왔구나.”
“언니…….”
효문은 몰래 나쁜 일을 하다가 들킨 듯해서 괜히 헛기침을 했다.
“집에 계셨습니까?”
“나도 좀 전에 들어왔다.”
“저녁상 봐오겠습니다.”
“그전에 할 말이 있는데 혼처가 정해졌구나.”
“예? 그럴 리가 없을 텐데요.”
효문은 채옥이 정색하는 까닭을 알 수 없었다.
“신랑감이 정해진 게 기쁘지 않은 것이냐?”
“도대체 어떤 작자입니까?”
“작자라니, 배필이 될 사람에게 쓸 단어는 아니구나.
”
“지나쳤습니다. 어느 댁… 사람입니까?”
“문경 현감 둘째 아들 이경박이다. 너와는 천생연분 짝이라는구나. 혼례 날은 이레 뒤로…….”
효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채옥은 뛰어나가 버렸다. 소진도 약재 꾸러미를 챙겨서는 채옥의 뒤를 따랐다.
‘이곳 여인들은 걷는 것보다 뛰는 게 일상이구나. 그나저나 신랑감이 정해진 게 나한테 이리 화를 낼 일이란 말이냐…….’
효문은 채옥과 소진이 나간 쪽을 쳐다보았다. 효문의 눈빛에는 당황한 기색이 뚜렷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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