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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인의 일기

예순의 한양 관료가 맞닥뜨린 전쟁,
너무도 담담한 기록, 김종의 <임진일록>

김민옥


『임진일록壬辰日錄』은 김종(金琮, 1533~1593)이 임진왜란 직전인 1592년 1월 1일부터 쓰기 시작하여 다음해 임종하기 이틀 전인 1593년 5월 21일까지 쓴 일기이다. 이 일기는 1년 5개월 남짓의 짧은 기간의 기록이지만 임진왜란 발생을 전후한 조선의 사회 분위기와 임진왜란이 발생하고 난 이후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에 처한 당대 한양 관료의 선택과 의식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자료이다.

일기는 1592년 4월 부산 함락을 기점으로 본격적인 전쟁의 기록을 담고 있다. 김종은 곳곳에서 전쟁의 상황을 서술하면서 난리로 인한 당시의 흉흉한 민심을 소개하기도 하였지만, 대체적으로 담담하게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불길한 징조에도, 왜적이 성을 함락해가며 빠르게 한양을 향해 북상하고 있는 상황에도 사실만 기록할 뿐, 그에 대한 감정이나 생각을 구체적으로 덧붙이지 않는다. 따라서 임진일록을 통해 당대를 바라보는 김종의 상태나 마음을 읽어내기가 쉽지 않다.

“태백성太白星이 하늘을 가로질렀다.”

(1592년 1월 3일)

1592년 임진년 새해 첫 출근길에 김종은 태백성(太白星)이 하늘을 가르는 것을 보았다. 조선시대 별자리로 길흉화복을 예단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김종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해 첫 출근길에 병란의 상징하는 태백성을 본 것이다. 태백성은 금성(金星)인데, 오행(목·화·토·금·수)의 측면에서 보아도 숙살(肅殺, 죽임)을 상징한다. 또한 금(金)은 무기, 즉 전쟁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특히 금성이 밤이 아닌 낮에 뜨면 곧 병란이 닥칠 것이라는 징조였다. 새해 김종이 첫 출근을 하면서 바로 금성을 본 것은 자신은 몰랐어도 바로 임진왜란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 될 수 있다.

“부산이 함락되었다.”
“동래가 함락되었다.”
“식후에 마을 사람들이 와서 앉았는데, 왜란에 대해 시끄럽게 전하였다.”

(1592년 4월 14일~1592년 4월 17일)

1592년 4월 13일. 부산이 왜적에 함락되고 한양을 향해 빠르게 북상하고 있다는 소식에도 일기에는 그저 담담하게 사실을 기록할 뿐이다. 임진일록의 기록만으로는 그의 일상은 전쟁 소식과는 무관하게 평온하게 보인다. 한편으론, 나라의 위기 상황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태만한 관료의 모습으로 읽히기도 한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1592년 4월 13일은 아무 일 없는 듯이 지나갔다. 김종은 4월 13일과 14일 꼬박 일을 하고 4월 15일 아침에야 퇴근하였다. 그는 관서에 있으면서 왜적이 쳐들어왔다는 소식을 들은 것이다. 그러나 그의 기록에는 놀라거나 당황한 기색은 전혀 없다. 이미 전쟁이 터졌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데도 다른 사람이 찾아와 뱃놀이를 하자거나 다른 사람들과 하루 종일 잡담을 하였고, 관서에서 술을 마시기도 하고 잠을 자기도 하였다.



전쟁 소식에도 크게 동요하지 않았던 김종도 1592년 4월 23일, 남산 봉수대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를 보고는 사태의 심각성을 느끼기 시작한다. 실제로 이 시기 왜적들은 이미 경상북도 김천을 점령하였으며, 그곳에서 한 편은 추풍령을 넘어 황간으로 넘어가고, 다른 한편은 상주로 넘어가고 있었다.



남산 봉수대의 봉화를 본 이후 김종은 마음이 불안하였다. 왕실의 움직임도 바쁘게 돌아갔다. 김종은 왜적들이 곧 닥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 당시 이미 백성들의 민심은 흉흉해지고 피란 가는 사람들도 많았다. 김종 역시 피란 준비를 시작한다. 1592년 4월 29일, 신립장군이 탄금대에서 패하여 몰살되었다는 소식에 김종은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배 두 척을 사서 가족을 이끌고 김포로 향한다. 김포는 김종의 세거지로, 이곳에 땅이 있고, 집이 있으며, 노비가 있었다. 아무리 전쟁 중이라도 노비들에게 신역(身役)을 거둘 수 있고, 고향이다 보니 피할 곳이 많았던 것이다.

김종의 일기는 대부분 아무런 감정 없이 사건의 기술만 하고 있다. 그런데 이날 일기에는 자신의 감정이 담겨 있다.

“고개를 돌려 궁궐을 보았는데, 몸은 떠나지만 마음은 온통 그곳에 있었다.”

(1592년 4월 29일)

그가 궁을 버리고 피난을 떠난 날, 왕은 아직 궁궐에 남아 있었다. 왕 보다도 먼저 피난을 떠나는 것이 신하로서 불충의 일인 것은 이미 알고 있었고, 떳떳치 못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당시 선조는 김종 보다 하루 늦은 1592년 4월 30일 새벽 2시경, ‘융복’과 ‘주립’을 눌러 쓴 차림으로 좌우의 부축을 받으며 창덕궁을 떠난다.

“지존께서 노천에 계시는데 오늘 밤은 어느 곳에 지내실지. 위로는 국사를 염려하고 아래로는 내 신세를 슬퍼하느라 통곡하며 밤을 지냈다.”

(1592년 5월 1일)

김종은 왕이 피란길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 길 위의 임금을 걱정하며 신하로서의 도리를 다하고 있지 못하고 있음을 담는다. 그의 이런 마음은 1592년 봄에 쓴 것으로 추정되는 김종의 시에도 잘 나타난다.

불행한 내 인생 임진년 난리 만나니
외로운 배 바다 떠돌다 물가로 가네
한밤중 오랑캐 다 죽이는 꿈을 꾸고
종일토록 무료하게 주인을 마주하네
한 조각 붉은 마음 무엇으로 보답할까
하얗게 센 머리카락 가련한 내 신세
뉘 집에서 술 익혀 맞이해 가는가
이웃 노파에게 나 대신 꾸짖어 달라 하네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1년. 난리는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왜적의 약탈과 횡포는 거세지는 상황에서 김종은 꿈속에서나마 왜적을 섬멸하는 것으로 불안함을 달래본다. 또한 자신의 힘으로 어쩌지 못하는 무기력한 상황을 한탄하며 왕에 대한 충성심을 담고 있다.

상의원에서 종 5품의 별좌로 근무하던 한양의 관료 김종.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그는 냉정할 만큼 평온한 일상을 살고, 기록한다. 그리고 전쟁 앞에서 그는 신하로서 왕을 걱정하는 관료였고,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의 가족의 생존을 위해 책임을 다하였다. 어쩌면 전장에서 벗어난 일반 백성들의 삶은 전쟁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을 다 떨쳐내지는 못하지만 김종의 기록에서처럼 하루하루의 일상을 평범하게 살아갔을지도 모르겠다.

임진일록(壬辰日錄)은 김종이 60세가 되던 해인 임진년(1592) 1월 1일부터 계사년(1593) 5월 21일까지 기록해 놓은 1책 71장의 필사본 기록이다. 이 자료는 김종의 후대에 의해 1801년 전서(傳書)한 것이다.




집필자 소개

김민옥
전통 기록 자료에서 스토리텔링 소재를 발굴하고 다양한 문화콘텐츠로 창작하고 활용하는 데 관심이 있음. 현재 한국국학진흥원에서 조선 시대 일기류 자료를 활용한 이야기 소재 개발 사업(스토리테마파크story.ugyo.net)을 담당하고 있다.
“위기의 조선을 구할 최고의 궁사를 찾아라! - 정예병사를 얻기 위해 활쏘기 과거시험을 열다”


정탁, 피난행록,
1592-08-26 ~ 1592-08-27
1592년 8월 26일, 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 이시언(李時言)과 서흥부사(瑞興府使) 남억(南嶷)으로부터 8월 23일 왜적들이 황해남도 용천(龍川)에서 황해북도 봉산(鳳山)으로 많은 수가 왔다는 상황보고가 잇달아 평안남도 성천의 분조(分朝)로 올라왔다. 이 지역은 평양과 가까운 곳이라 이 소식은 곧 평양에 왜적이 증원된다는 것이었다.
다음 날 8월 27일 평양의 적들을 정찰해 보니 병력이 증대된 흔적이 보였다. 또 시기는 이미 가을로 들고 비는 적게 와 강동(江東)의 여울들을 얕아지기 시작하였다. 이런 여울들에 장수를 정하여 방비하도록 하려 하였으나, 여울은 많고 군사들은 적었다. 또한 동궁(광해군)을 시위하는 일 역시 소홀히 할 수 없었다. 동궁과 신하들은 왜적들에게 밀릴 땐 밀리더라도 싸워 보고서나 밀리고자 하였다.
이에 분조의 신하들은 병사들을 더 뽑아야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평안남도에서 징집한 병력들은 신하들의 눈에 군량만 축내는 나약한 군졸로 보였다. 신하들은 활을 잘 쏘는 정예의 병사들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모름지기 활을 잘 쏘는 정예의 병사들을 얻어야 공격도 하고 방어도 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분조의 신하들은 이러한 병사들을 뽑는 방법은 과거(科擧) 밖에는 없다고 생각하였다.
과거의 과목과 방법은 활쏘기 단 하나였다. 활쏘기만 하여 가장 화살을 잘 쏜 사람은 직부전시(直赴殿試)하고, 그 다음 잘 쏜 사람들은 직부회시(直赴會試)하고, 그 다음 잘 쏜 사람들에게는 금군(禁軍)으로 제수하면 장정들이 팔을 걷어 올리고 찾아 올 것이다.
신하들은 행재소에 이러한 사실을 아뢰고 선조의 비답을 기다렸다.

“여러 장교들과 함께 교외로 나가 활쏘기 대회를 열어 시상하였다”


조재호, 영영일기, 1751-07-03 ~
1751년 7월 3일, 대구 경상감영에 도착하자마자 여러 가지 공무에 시달리던 조재호는 잠시 시간을 내어 대구읍성 밖에 있는 관덕당(觀德堂)으로 향하였다. 활쏘기라면 감영 내에 있는 제승당에서도 가능할 텐데 일부러 성 밖으로 나간 것이다. 여러 장교들로 하여금 과녁에 활을 쏘게 하여 우등한 사람을 뽑아서 차등을 두어 상을 주었다. 어디가든 인사를 드리러 오는 관리들이 있어서 판관(判官)과 영장(營將)이 문안하였다. 한가롭게 공무를 내팽개칠 수도 없는 법이니 공사소지도 결재하고. 황혼 무렵에야 돌아왔다.

“배를 타고 한산도 제승당에 가서 활쏘기를 하다”


조재호, 영영일기, 1751-09-20 ~
1751년 9월 20일, 맑음. 조재호는 통영(統營)에서 하룻밤을 묵은 후, 해가 뜰 무렵 전선(戰船)을 타고 한산도(閑山島) 제승당(制勝堂)에 가서 노닐면서 둘러보고 활쏘기를 하였다. 조재호 경상감사가 한산도에서 충무공의 자취는 남해 충렬사에서 떠올린 것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노량은 충무공이 순국한 자리이지만, 한산도는 한산대첩의 대승을 거둔 승리의 자리이다. 충무공의 자취가 어린 곳에서 활쏘기를 하며 호연지기를 함양하였다. 오후에 숙소로 돌아왔다. 통영(統營) 통제사(統制使)가 와서 알현하여 한참 이야기를 나누었다.

“단오(端午)날에 씨름을 구경하다”


양경우, 역진연해군현잉입두류상쌍계신흥기행록, 1618-05-05 ~
1618년 5월 5일, 양경우(梁慶遇)는 이날 잠자리에서 일어나 식사를 한 후 길을 나서려고 하였다. 그런데 흥양(고흥의 옛 이름)의 수령인 박유귀(朴惟僮)가 와서 출발을 늦춰달라고 했다. 박유귀는 무관 출신의 수령이기는 하나 공부를 나름 하였던 사람이라 말이 통해서 예전부터 친하던 사이였다. 그가 말하길 “오늘은 오월 오일로 명절(단오(端午))입니다. 저희 고을에 비록 자랑할 만한 맛있는 음식은 없지만 어찌 공에게 하루 대접할 음식을 걱정할 정도겠습니까.”라고 했다. 양경우는 하루 더 머물기로 하였다.

문 밖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보니 사람들이 웃고 떠들고 있었다. 박유귀가 하인에게 문을 열라고 하였다. 그러니 고을 백성 백여 명이 마당으로 들어왔다. 박유귀가 자초지종을 설명해주었다. “이 고을에서는 단오 때 각저희(角觗戲 : 씨름)를 합니다. 그렇게 해온 전통이 오래되었습니다. 우리 고을을 방문한 손님께 보여드리기 위해 이렇게 자리를 마련한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막상막하의 기억력”


조보양, 골동록, 미상
김계광(金啓光)과 홍여하(洪汝河)는 같이 영남에 사는 사람이었다. 단순히 알고 지내는 사람이 아니라 시를 주거니 받거니 하며 서로 학문적 경쟁을 하는 벗 사이였다. 두 사람은 모두 어릴 때부터 재주와 학식이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품격까지 있었다.

김계광은 안동에 살았고, 홍여하는 문경에 살았다. 1650년대 어느 날, 홍여하가 우연히 객점(客店)에서 김계광을 만났다. 서로가 서로를 잘 알고 있었지만, 홍여하는 실질적으로 누구의 두뇌가 더 명석한지 시험을 해 보고 싶었다. 그런 홍여하가 김계광에게 말하였다.
“김공(金公), 자네는 기억력이 매우 뛰어나다지. 책을 한 번 보면 다 외운다고 들었네.”
김계광이 대답했다.
“하찮은 재주일 뿐이라네.”
홍여하는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는 김계광이 마땅치 않아 보였다. 홍여하는 망설이지 않고 내기를 제안하였다.
“그렇다면 우리 당장 여기에서 겨루어 보는 것이 어떤가?”
“좋지.”
김계광이 대답하였다.

“누운 신선과 나는 신선 중 누가 나은가를 논란하다”


권상일, 청대일기,
1719-07-22 ~ 1719-07-24
1727년 가을, 유경시는 양양부사에 제수되었다. 서울에서 양양 임지로 가는 동안 유경시는 금강산을 들러보기로 하였다. 어려서는 안동 땅에서 나고 자라 멀리 가볼 기회가 없었고, 성년이 되어서는 관직 생활에 바빠 여가가 없어 가보지 못했던 곳이었다. 비장 신척과 더불어 금강산을 유람하고 양양으로 들어가기로 약속하였다. 낙산에 들러 비를 만나 하루를 묵으면서 날이 개기를 기다렸는데, 마침 다음날 비가 그쳐 금강산에 올랐다.
금강산 와선대(臥仙臺)에 오르니 개울 위에 평평한 바위가 마치 자리를 깔아놓은 듯 하였다. 그보다 조금 위에는 비선대(飛仙臺)라고 부르는 곳이 있었다. 계곡 위에는 돌이 있는데, 아주 깨끗한 돌들이지만 매우 위험해 보였다. 그 자리에 술자리를 벌리고 신척과 더불어 대화를 나누었다. 술기운에 절구도 하나 지어 읊었다.

閒臥黃堂是臥仙(한와황당시와선) 황당에 한가로이 누우면 와선 되고
如飛乘馹是飛仙(여비승일시비선) 말을 타고 날아가면 비선되느니
臺名偶符(대명우부) 누대 이름 우연히 부합하여서
同遊客子是飛仙(동유객자시비선) 나그네 예서 노니 비선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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