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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로 본 역사이야기

범 내려온다

뇌리에 남은 건 '호랑이 사냥'


한국영화에 유명한 3대 등장씬이 있다고들 한다.


영화 〈늑대의 유혹〉, 2004


첫 번째는 영화 〈늑대의 유혹〉에서 우산 아래로 남자주인공 태성(강동원 분)의 얼굴이 여주인공의 시점으로 천천히 보여지는 씬이고, 둘째는 영화 〈아저씨〉에서 복수를 결심한 아저씨(원빈 분)가 거울 앞에서 머리를 깎으며 처음으로 제대로 얼굴을 드러내는 장면이다. 그 전까지 '아저씨'는 세상과 자신을 차단하기라도 하듯, 장발로 얼굴과 눈을 커튼처럼 가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화 〈아저씨〉, 2010


이 두 장면이 충격적인 가장 큰 이유는 솔직히 강동원, 원빈 두 배우의 숨 막히는 외모 덕분이라 생각한다. 나만 그런가?

어찌 되었든 세 번째로 충격적인(어쩌면 가장 충격적인) 등장씬이라면, 바로 영화 〈관상〉에서 수양대군(이정재 분)이 등장하는 장면이다.

이 영화에서 수양대군은 매우 중요한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시작한 지 무려 한 시간이 지나서야 등장한다. 후에 한재림 감독은 가능한 수양대군의 등장을 늦추려 노력했다고 말 한 바 있다. 영화의 소재가 '관상'과 '얼굴'이니만큼 영화의 전반부에 설치해 놓은 수많은 장치로 한껏 수양대군에 대한 기대감을 고조시킨 후에 비로소 그의 얼굴을 드러낸 것이다. 관객들은 슬로우로 드러나는 그의 발부터 시작해, 검정 털옷을 입은 그의 뒷모습과 어깨, 주변 수하들, 피가 뚝뚝 떨어지는 사냥감과 울부짖는 사냥개를 보며 가슴을 졸이고서야 수양대군의 얼굴을 보게 되니, 이정재 배우의 귀엽게 살짝 아래로 내려간 눈꼬리와 착한 인상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이 '이 자가 진정 역적의 상이다'라 독백할 때,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영화 〈관상〉, 2013


그러나 무엇보다 수양이 진정 '역적'으로 관객의 뇌리에 남은 건 '호랑이 사냥'이라 명명된 김종서 제거작전 때문이었다. 영화 속에서 주인공은 김종서를 처음 본 순간 '호랑이상이다!' 탄성을 지른다. 그런데 역사 속에서도 김종서는 세종대왕의 명에 따라 4군6진을 개척하고 문무를 겸비한 '호랑이 대감'으로 거론되었던 뛰어난 인물이다. 영화 속에서 수양대군은 그를 제거하기 전 호랑이를 사냥해 김종서 집 대문에 걸어둠으로 경고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를 사냥감처럼 무참히 죽였다.


영화 〈관상〉, 2013


김종서처럼 뛰어난 인물을 '호랑이'라 칭한 데서도 볼 수 있듯 우리 민족은 호랑이를 단순한 금수를 넘는 신적 존재로 바라보았다. 민가와 궐에까지 내려와 사람을 죽이는 무서운 동물임에도, 그 동물을 인간의 힘으로 어쩔 수 없다는 데서 오는 무력감이 호랑이에 대한 '경외(敬畏)'로 발전하지 않았나 싶다.



조선과 조선인 그 자체, 일본이 감히 훼손할 수 없는…


2015년 영화 〈대호〉의 호랑이는 지리산의 '산군(山君)'으로 호랑이를 죽이기 위한 일본군의 만행을 보여준다.

일본인 사업가 야마모토 다다사부로(山本唯三郞, 1873~1927)가 1917년 '조선호랑이 사냥행사'를 개최합니다. 사냥단의 이름도 '호랑이를 정복한다'는 뜻인 '정호군(征虎軍)'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출정식 기사를 보십시오.

“근래 점점 퇴패(退敗)해 가는 우리 제국 청년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행사를 펼친다.”(〈매일신보 1917년 11월 18일〉)는 것이었습니다. 행사에 참여한 기자가 지었다는 '정호군가'를 볼까요.

“가토 기요마사의 일이여/지금은 야마모토 정호군…/일본 남아의 담력을 보여 주자/루스벨트 그 무엇이랴/호랑이여 오라…/올해는 조선 호랑이를 모두 사냥하고/내년에는 러시아의 곰을 사냥하세.

더욱이 원정대장인 야마모토는 “늑대는 관심 없고, 조선 호랑이를 잡아야 남자 중 남자!”라고 외쳤답니다.

경향신문 2021.12.20 〈이기환의 Hi-story〉 기사 발췌


일본의 조선 호랑이 사냥의 역사는 유구하다. 일본 열도에서는 볼 수 없는 호랑이를 잡는다는 것은 그들에게 있어 대륙정복의 상징과도 같은 일이었을 것이다.

조선총독부는 '해수구제(害獸驅除,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동물을 잡는다)' 정책을 시행해 조선 땅에서 대대적인 호랑이 사냥에 나섰고, 1940년대에 이르자 결국 조선의 호랑이는 멸종 위기에 다다른다.


영화 〈대호〉, 2015


〈대호〉에서 일본군은 조선의 마지막 호랑이를 죽이기 위해 한물 간 착호갑사 만덕(최민식 분)을 고용한다. 만덕과 대호는 악연으로 얽힌 사이다. 만덕은 대호의 어미를, 대호는 만덕의 아들을 죽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호와 만덕은 같은 신세다. 한 때는 천하를 호령했지만 이제는 그들의 터전인 산에 숱한 다이너마이트를 설치하고, 닥치는 대로 총을 쏘아대는 일본인들에 의해 간신히 숨만 붙어있다는 공통점 때문이다. 그래서 절체절명의 마지막 순간, 대호도 만덕도 서로를 더 이상 해치지 않고, 함께 절벽 끝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자의적인 죽음을 맞는다. 이 순간 그들은 조선과 조선인 그 자체다. 일본이 감히 훼손할 수 없는…

얼마 전 인기리에 종영한 드라마 〈옷소매 붉은 끝동〉에도 호랑이가 등장한다. 이 드라마는 강미강 작가의 소설을 원작으로 했는데, 소설 자체가 고증이 잘 되었을 뿐 아니라, 정조와 의빈 성씨의 실제 이야기가 바탕이 되어 더욱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마침내 책 속의 캐릭터와 그들의 사랑이 드라마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배우들에 의해 펼쳐지자, 단숨에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말았다.


드라마 〈옷소매 붉은 끝동〉, 2021~2022(출처: MBC)


이 드라마 3회에, 궁궐에 출몰한 호랑이 이야기가 나온다. 그날 밤 공교롭게도 궁녀들 잔치가 벌어져 자칫 대혼란으로 악화될 위기에 여주인공 덕임은 책을 읽어준다고 하여 흩어진 사람을 모아 지혜롭게 대피하도록 돕고, 정조는 후원에서 자신을 호위하는 익위사들과 함께 화살로 호랑이를 잡는다. 사실 정조대왕이 직접 호랑이를 잡았다는 기록은 없으나, 정조가 명궁이었다는 사실과, 정조 1년 궐 담을 지키던 군졸이 호랑이에 물려갔으며, 후원에서 호랑이를 잡았다는 기록이 남아있어, 이를 적절히 버무린 작가의 상상력이 아닌가 싶다.

이때 응봉(鷹峰) 근처에 호환(虎患)이 있자 여러 군영이 성 밖으로 나가 호랑이 사냥을 하겠다고 아뢰었는데, 전교하기를,

"성 밖에 호랑이가 출몰하는 것은 제 살 곳을 얻은 때문일 것이니, '험윤(玁狁)을 쳐서 태원(太原)까지만 쫓아냈다'는 것과 다를 게 없다. 더구나 엄동설한의 사냥은 그 폐단이 맹수보다 심할 것이니 즉시 사냥을 그만두도록 하라."

하였다.

정조실록 45권, 정조 20년 11월 13일


실록의 '험윤(玁狁)을 쳐서 태원(太原)까지만 쫓아냈다'는 것은 『시경(詩經)』 「소아(小雅)」 6월에 나오는 구절인데, 여기서는 호랑이를 멀리 쫓아버리기만 하면 되지 끝까지 잡으려 할 필요는 없다는 뜻에서 인용한 것이다.

정조대왕은 호랑이 사냥에 무척 열심이었으나, 무리하게 호랑이 씨를 말리거나 사람들의 희생을 감수하면서까지 호랑이를 잡고자 하지 않았다. 호랑이는 다스려야 하는 존재인 동시에, 결국은 함께 살아가야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는 해로운 동물을 모두 잡아 씨를 말리자는 일본의 정책과 사뭇 대비되어 보인다.



범접하기 어려우리만치 세 보이면서도 친근하고,
촌스러운 듯하나 세련되고


범 내려온다 범이 내려온다
장림깊은 골로 대한 짐승이 내려온다
몸은 얼숭덜숭 꼬리는 잔뜩 한 발이 넘고
누에머리 흔들며 전동같은 앞다리
동아같은 뒷발로 양 귀 찌어지고
쇠낫같은 발톱으로 잔디뿌리 왕모래를
촤르르르르 흩치며 주홍 입 쩍 벌리고 워리렁 허는 소리
하ᄂᆞᆯ이 무너지고 땅이 툭 꺼지난 듯
자래 정신없이 목을 움츠리고 가만이 엎졌것다
범 내려온다 범이 내려온다


국악퓨전밴드 '이날치'의 '범 내려온다' 가사 일부다(이 곡이 실린 앨범명이 '호랑이'다). 이 노래는 2020년 한국관광공사의 홍보영상 배경음악으로 유튜브에 공개된 이후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다. 하루 한 번씩 보지 않으면 안 될 만큼 영상에 중독됐다는 외국인들도 적지 않았다. 노래도 노래지만 노래에 맞춰 춤을 추는 '앰비규어스 댄스컴퍼니'의 세련되고 힙한 모습에 모두 넋을 잃었다. 아직 못 본 이가 있다면 반드시 찾아서 보길 권한다.


한국관광 해외홍보 영상(Feel the rhythm of Korea) Ep.1 서울(출처: 유튜브_한국관광공사TV)


나는 이 영상 자체가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기막히게 잘 드러내고 있다는 생각이다. 범접하기 어려우리만치 세 보이면서도 친근하고, 촌스러운 듯하나 세련되고, 침묵 속에 많은 말을 담고 있는 것 같은 이상한 사람들… 무한한 잠재력을 지닌 대한민국의 2022년을 응원한다.




집필자 소개

홍윤정
홍윤정
1999년에 KBS 시트콤 작가로 데뷔, 드라마와 시나리오 작가로 활동 중이다.
대표작은 영화 〈수상한 그녀〉, 〈반창꼬〉, 〈블랙가스펠〉, 〈최강로맨스〉 등이며, 〈수상한 그녀〉로 춘사영화상 각본상을 수상했다.
“우리나라 호랑이 이야기”

작호도(鵲虎圖) (출처: 국립민속박물관) 최남선의 전언이 아니더라도 우리나라의 호랑이 이야기는 세계적으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고 풍부하다. 중국의 대문호인 노신(魯迅)도 우리나라 사람을 만나면 반드시 한국의 호랑이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했다는 일화가 있다. 호랑이는 아시아에만 서식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아시아 중에서도 인도·수마트라·중국·만주·한국·시베리아 흑룡강 연안에만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앙아시아나 일본·대만 등에는 살고 있지 않다고 한다. 그러므로 호랑이 이야기도 이러한 분포지역에 따라서 주로 전승되고 있으며 그중에서도 산이 많고 골짜기가 많아 호랑이가 많이 서식했던 한국에서 가장 많이 전승된 것으로 보인다. 역사기록을 보면 조선 시대에만 해도 인왕산에 호랑이가 살고 있었으며, 도성 안이나 궁궐 안에도 호랑이가 출몰했다는 기록들이 자주 나타난다.

“신비의 동물로 여겨진 호랑이”

〈호랑이와 매〉(출처: 고판화 박물관) 권상일, 청대일기, 1753-06-06

1753년 6월 6일, 권상일은 어느 날 이웃 마을의 소식을 들었다. 상주의 인근 고을이었던 용궁현의 월오리라는 곳에 호랑이가 출현했던 것이다. 마을 앞산에 조그마한 소나무 숲이 있었다. 그런데 대낮에 호랑이가 출현하여 그곳에 숨어 있었던 것이다. 일상 호랑이가 나타나게 되면 몸을 피해야 하는 것이 당연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사람들은 몸을 피하지 않고 구경하기에 바빴다.

호랑이는 마을 사람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라기보다는 신기한 대상으로 비쳐졌던 모양이었다. 양반들에게야 호랑이는 백성을 위해서 해로운 대상이므로 당연히 없애야 하는 포호(捕虎)의 대상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일반 백성들에게 호랑이는 신비의 동물이면서 숭배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결국 호랑이를 보러온 마을 사람들은 시간이 지나 물려서 부상을 입은 자가 다수 출현하게 되었다. 그 중에서는 권상일이 잘 알고 지내던 안필세도 있었다고 한다. 이 소식을 듣고 걱정이 앞서지 않을 수 없었다. 양반이었던 권상일에게 호랑이는 당연히 처치해야 할 동물이었지만 그렇게 하지 못한 사실에 너무 놀라고 그 피해 사실에 탄식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마을 사람들이 호랑이에게 물려가다”

호랑이(출처: 픽사베이) 오희문, 쇄미록, 1597-03-07 ~

1597년 3월 7일, 오늘 오희문은 끔찍한 소식을 들었다. 어젯밤 사나운 호랑이 한 마리가 뒷산 인가에 들어와서 자는 사람을 잡아갔다고 한다. 사람을 물어 가는데 옆에 있는 사람들이 차마 빼앗을 수가 없었는데, 아침에 찾아가보니 사람의 반을 먹어버렸다고 한다. 참으로 분통한 노릇이었다.

호랑이가 마을 사람을 해친 것은 비단 오늘 뿐만이 아니었다. 지난 달 26일에는 관아에 소속된 관비가 범에게 물려갔다고 한다. 관비는 범에게 물려갈 때 살려달라고 사람들을 애타게 불렀는데, 사람들이 두려워서 나가보지 못했다고 한다. 호랑이는 관비를 물고 달아날 때 관아 뒤를 지나갔다고 하던데, 그곳은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사는 곳이었다. 사람이 호랑이에게 물려 가는데도 두려워서 누구 하나 나서지 못하였으니, 참으로 고약한 인심이라 할 만 하였다.

요사이 호랑이들이 많이 돌아다녀서, 혹은 대문을 부수고 울타리를 헤치고는 인가로 들어온다고 하니 몹시 걱정이었다. 악독한 맹수가 성하게 다니면서 사람을 상하게 하는데도, 이것을 잡아 없애지 못하고 사람마다 두려움에 질려서 해가 넘어가자마자 문을 굳게 닫고 나오지를 않는 상황이었다. 오희문은 또 한 가지 걱정거리가 늘어,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원수를 갚은 호랑이”

노상추, 노상추일기, 1764-05-27 ~

노상추가 사는 선산에서 큰 소동이 벌어졌다. 웅곡면(熊谷面) 일촌(一村)에 사는 남 씨 일가와 심 씨 일가가 호환(虎患)을 입었다는 소식이 선산 일대에 쫙 퍼졌다. 노상추도 전해 들은 이 소식의 전말은 다음과 같았다. 남 씨네 집 아들과 심 씨네 집 아들은 어느 날 뒷산에 갔다가 호랑이와 마주쳤다. 호랑이는 새끼 네 마리를 데리고 있었기 때문인지 매우 예민했다. 두 사람은 포효하는 호랑이로부터 달아나면서 새끼 네 마리를 모두 죽였다. 큰 호랑이는 죽이지 못했지만, 마을에서는 두 사람이 돌아온 것이 천행이라며 모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불행은 거기서부터 시작되었다. 호랑이로부터 달아난 날로부터 나흘 후, 호랑이가 남 씨‧심 씨네 집이 있는 마을로 내려왔다. 호랑이는 먼저 심 씨의 집에 들어가 외양간에 묶여 있던 큰 소를 죽였다. 그리고 죽인 소를 먹는 대신 온 집안을 들쑤시며 간장 항아리와 가마솥 등의 물건을 모두 깨부쉈다. 그 뒤에는 남 씨의 집으로 가서 안방에 있던 남 씨의 처와 며느리, 딸 두 명과 아들 한 명을 물어 죽였다. 그리고 근처에 있던 승려 한 명과 호랑이를 죽이러 온 포수 한 명을 죽였다.

이 모든 일을 한 다음 호랑이는 남 씨의 집 방에 들어가 누운 채 나오지 않았다. 소와 사람들을 물어 죽이기는 했으나 먹지 않은 점은 호랑이의 행동이 결코 배가 고파서가 아니었음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마치 죽음을 기다리듯 방에 누워 있었다는 점이 기이했다. 결국, 관에서는 별포수(別砲手)를 파견하여 호랑이를 쏘아 죽였다. 잡은 호랑이의 크기는 턱밑 길이가 세 뼘 반에 달할 만큼 거대했다.

“조선시대 사냥꾼 부대의 존재”


일기에는 백두산에 당시 오랑캐 사냥꾼의 움막이 있었음을 표현하고 있다. 이는 당시 사냥꾼들이 산속에 움막을 지어놓고 장기간 사냥을 다녔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조선 시대 사냥꾼들은 비단 일반 사냥꾼뿐만 아니라 군부대로서 기능도 갖고 있었다. 호랑이 사냥을 전담하는 군대인 착호군(捉虎軍)은 조선 건국 초부터 중앙과 지방에서 포호(捕虎) 정책을 수행했다. 착호군은 현종 15년(1674년) 때 5000명, 숙종 22년(1696년)에는 1만1000명까지 늘어났다. 17세기 들어 산의 외진 곳까지 개간하며 생활한 화전민이 늘어나고 수렵이 활성화되자 갈 곳을 잃은 호랑이들이 민가의 가축이나 인명을 노리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착호군이 국가 위기 상황에서는 전투에 나서 탁월한 전과를 올렸다. 이들은 전시에 소집될 의무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전과는 특히 19세기 제국주의 열강과 싸움에서 두드러졌다. 19세기 미국의 동양학자인 윌리엄 그리피스는 조선의 착호군이 병인양요와 신미양요에서 서구의 근대적인 함선과 총포로 무장한 군대를 물리쳤다고 ‘한국, 은둔의 국가’(1907년)에 상세히 기술했다. 병인양요에서 프랑스군에 맞선 주력은 관동과 경기지방에서 모인 포수 370여 명이었다. 신미양요가 발발하자 포수를 중심으로 한 별초군 3,060명이 상경해 미군에 대항했고 고종 13년(1876년) 강화도조약을 체결할 때는 포수 4,818명이 상경해 대응하기도 했다. 이는 사냥꾼들이 지닌 탁월한 사격 솜씨 때문이었다고 보여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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