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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로 본 역사이야기

우리들의 회색노트

오래된 일기장을 펴다


며칠 전 중학교 친구들과 만났다. 실제로 만난 건 아니고, 줌(zoom)이라는 화상통화 애플리케이션을 통해서다.

나는 한국에, 친구들은 미국과 캐나다에 떨어져 있으니 이런 신문물이 아니라면 만나기 어렵다. 하긴 캐나다 친구가 아직 한국에 있을 때도 나와 그녀는 서로 만나지 못해, 미국 친구가 잠시 귀국했을 때에야 비로소 얼굴을 보았으니, 거리 탓만 할 건 아니지만. 그 때 이후로 셋이 모인 건 거의 20년 만이라 반가움은 말로 할 수 없었다. 우리 역시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의 모임이라면 반드시 하고 넘어가는 이 일곱 음절로 대화를 시작했다.

“하나도 안 변했다.”

거짓말이란 건 나도 알고 너도 알고 하늘이 안다. 그러나 또 어느 정도는 사실인 게, 웃음소리도, 얘기하는 톤도, 표정도 옛적 그대로다.


〈회색노우트〉 속 수정, 지영, 윤정



이 세 장의 그림은 우리가 중2때 함께 쓰던 교환일기장에 각자 그린 우리의 모습이다. 우리가 쓴 일기장의 제목은 ‘회색노우트’(노트가 아닌 노우트라고 씌어져있다), 당시 감명 깊게 읽었던 로제 마르탱 뒤 가르의 소설에서, 주인공 두 소년이 함께 쓰던 일기장 제목을 본 딴 것이다. 보면 알겠지만, 우리는 각 나라별 예명까지 갖고 있었다. 지금 보면 얼굴이 화끈거리지만 그땐 그게 얼마나 재미있고 흥분되는 일이었는지.

보관 중인 회색노우트를 다시 보니, 싸우기도 많이 싸웠다. 한 사람이 서운하게 굴면, 다른 두 사람이 뭉쳐 한 사람을 공격하기도 하고, 때로 두 사람이 더 친한 모습을 보이면 남은 한 친구가 소외감을 느끼기도 했다.

시험의 압박, 짝사랑하는 선생님, 가족에 대한 솔직한 심정, TV와 라디오 프로그램과 연예인에 대한 이야기까지… 지금 보면 웃어넘길 일이지만 당시로서는 꽤 심각하게 자기혐오와 반성을 오가며 우리는 조금씩 성장하고 있었다.


일기장(출처: 국립민속박물관)



함께 교환일기를 쓰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40년 후, 줌으로 대화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현재의 나에 대해선, 사회에서 만난 친구들보다 잘 모르지만, 그간의 거리를 훌쩍 뛰어넘어 소녀들처럼 까르르 웃어가며 갱년기와 자식, 남편, 무사히 끝나가는 항암치료 등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던 건 모두 그때 부지런히 나누었던 마음 때문이리라.




콘텐츠 창작의 보고, 선인들의 기록


나 자신도 사극 드라마를 기획 중이기도 하고, 웹진 원고를 쓰기 위해서라도 사극 드라마와 영화는 모두 본다는 철칙을 세워놓고 있는데, 한때 제작이 뜸하던 사극 드라마가 최근 들어 조금씩 살아나고 있는 것 같아 반갑다. 여기엔 OTT를 통한 글로벌 팬들의 증가도 무시할 수 없다. 때문에 창작자들의 책임감은 더욱 커졌다. 우리나라 역사에 대한 지식이 전무한 이들에게는 콘텐츠에 구현된 가상의 역사가 곧 한국 역사라는 인식이 퍼질 수 있기 때문에, 글 한 줄, 표현 하나 하나 너무나 조심스럽다.

창작자들이 의지할 곳은 결국 ‘기록’밖엔 없다. 흔히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 말한다. 그래서 많은 역사가들이 역사서나 실록 외의, 야사(野史)나 비사(祕史)에 숨겨진 진실을 찾아내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처럼 창작자들에겐, 평범한 이들의 작은 기록이 때론 크나큰 도움과 영감을 준다. 특히 영상을 통해 역사를 구현하고자 한다면 움직이는 개인의 삶의 모습이 필요한데, 그건 아무리 상상하려고 해도 어려운 일이다. 그때 눈앞에 그려지듯 묘사한 누군가의 일기 한 구절이 있다면 그보다 좋을 수는 없다. 마치 1980년대 소녀들을 묘사하고 싶은 미래의 누군가에겐 역사책보다 나와 친구들이 쓴 ‘회색노우트’가 더 유용할 수 있는 것처럼. 때문에 한국국학진흥원의 스토리테마파크 ‘일기와 생활’은 너무도 고마운 존재다.


한국국학진흥원 스토리테마파크 홈페이지(http://story.ugyo.net/front/index.do)



콘텐츠 창작자는 기록에 의지하고, 기록은 영상으로 살아 움직일 때 더욱 빛난다. 근래 화제가 된 드라마 〈파친코〉를 보며 나는 새삼 소설을 드라마로 만들어준 애플TV에 고마움을 느꼈다.




선자, 우리 모두의 이야기를 담다


소설은 모두 다섯 세대의 이야기를 아우르는데, 드라마 〈파친코〉 시즌1은 1930년대에 일본에 온 선자가 이야기의 중심축이다. 드라마가 시작되자 전 세계적인 반향이 일어났다. 이제까지 몰랐던 한국의 역사, 특히 한국과 일본의 관계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되었다는 이야기들이 많았다. 그러나 일본은 극우세력을 중심으로 ‘역사왜곡 드라마’라며 방송중지 청원 움직임까지 있었다. 우리 시각에서 보자면, 이 드라마에 묘사된 일본인들은 (이전에 우리 국내에서 방송된 콘텐츠 속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에 비해) 그리 악한 모습은 아니다. 작가는 제국주의 일본과 일본인 개개인을 철저히 구분하여 묘사한다. 오사카에 정착한 선자와 그의 가족을 돕는 이들은 양심적인 일본인들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자 개인의 불행은 일제의 조선 침략으로 비롯되었음이, 마치 숨 쉬는 공기처럼 담담히 드라마를 지배하고 있다.


드라마 〈파친코〉, 2022(출처: 애플TV플러스)



특히 7화에서는, 소설에 없던 관동대지진이 주요 소재로 등장한다. 그리고 드라마 말미엔 관동대지진 때 일본 자경단에 의해 희생된 조선인들에 대한 이야기가 자막으로 매우 자세히 설명된다.

시즌1의 마지막 8화는 선자의 남편인 백이삭 목사가 천황제를 부정하다 경찰에 잡혀가자, 남편 대신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거리로 나온 선자가, 직접 담근 김치를 파는 장면으로 끝을 맺는다. 그리고 그 뒤에 이어지는 인터뷰. 선자와 같은 나이대의 재일 한국인 할머니들이 자신의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 먹고 살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온 그들은 해방이 된 후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주린 배를 움켜쥐고 온갖 차별과 박해를 받아가며 견디고 또 견뎌 오늘에 이르렀다는 것을.


드라마 〈파친코〉, 2022, 에피소드 8 (출처: 애플TV플러스)



원작자인 이민진 작가가 실제 재일한국인들의 삶을 오랜 기간 취재하고 연구한 끝에 쓴 소설이기에, 그것은 옳고 그름의 차원을 넘어선 사실이요 역사다. 이 드라마 한 편으로 일본의 침략의 역사가 많은 사람의 눈앞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또한 김치가 자신들의 것이라 주장하는 중국의 주장 역시, ‘먹을 것이 없어 매일 김치만 먹었다’는 한 할머니의 증언과, 오사카 거리에서 “김치 사이소, 한번만 먹어보이소, 우리 어무니 방식으로 만들었어예~” 소리 높여 김치를 팔던 선자의 모습과 오버랩되어, 김치는 조선인의 소울푸드라는 빼도 박도 못할 진리에 슬그머니 꼬리를 내릴 수밖에 없다.


『Pachinko』(이미진 저, Head Of Zeus, 2017. 출처: 교보문고)



이처럼 잘 만든 드라마, 영화 한 편이 수많은 책과 연설과 외교적 노력을 넘어서는 것을 우리는 보고 있고, 앞으로 더욱 많이 경험할 것이다.




웹진 〈담談〉을 마무리하며…


웹진 〈담談〉에 원고를 쓴 지 만 4년이 넘어 5년째가 되었다. 역사에 대한 지식도 철학도 일천한 내가 공부하는 마음으로 꾸역꾸역 페이지를 메꾸며 이제까지 걸어왔다. 그간 부족한 원고를 예쁘게 편집하고, 너그럽게 읽어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하고 또 죄송하다. 재미있고 행복한 경험이었지만, 밑천(?)도 떨어져 가고, 본업도 바빠지는 바람에 이번 호를 끝으로 ‘미디어로 본 역사 이야기’에서 필을 놓는다. 그러나 〈담談〉과 스토리테마파크를 향한 열렬한 응원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구중궁궐의 왕으로부터 시골 코흘리개에 이르기까지, 모두의 삶 속에 얼마나 기막힌 희로애락이 담겨 있을까. 미처 발견하지 못한 그들의 이야기가, 숨겨두고 몰래 썼던 ‘회색노우트’가 궁금하기 때문이다.

회색노우트는 밖으로 나와 결국은 눈물이 되고 웃음이 되고 밥이 되어야 한다. 수많은 윤정이와 수정이와 지영이의 삶이 또 다른 윤정이와 수정이와 지영이를 행복하게 해주는 상상을 해본다.




집필자 소개

홍윤정
홍윤정
1999년에 KBS 시트콤 작가로 데뷔, 드라마와 시나리오 작가로 활동 중이다.
대표작은 영화 〈수상한 그녀〉, 〈반창꼬〉, 〈블랙가스펠〉, 〈최강로맨스〉 등이며, 〈수상한 그녀〉로 춘사영화상 각본상을 수상했다.
“무료한 틈에 계사년과 갑오년의 일기를 다시 읽어보다”

오희문, 쇄미록, 1597-07-04 ~

1597년 7월 4일, 벌써 올해 정유년도 절반이 지나갔다. 요사이 밤기운이 서늘하여 싸늘한 바람이 때로 불어 와서 아침저녁으로는 겹옷을 입지 않으면 안되었다. 심신이 상쾌하니, 가을 바람에 몸의 병이 나아가는 것을 스스로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요즘은 특별한 일이 없어 무료한 날이 많은데, 심심함을 이기려고 계사년과 갑오년의 일기를 꺼내어 다시 읽어보는 중이다. 전란을 피해 떠돌아다니며 병을 앓고, 추위와 굶주림에 지치며 고생한 내용을 다시 읽자니, 그때의 기분이 생생히 기억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때는 슬하의 7남매가 모두 무고히 살아 있었으니, 비록 때로 끼니를 잇기 어려운 탄식이 있었어도 비통하고 마음 상하는 일은 없었다.

지금 지내는 산속 고을로 들어온 이후로는 양식과 반찬을 조달하는 데는 어려움이 없고, 또 종종 맛난 반찬도 얻어다가 어머님을 봉양하고 아랫사람들도 먹일 수 있으니, 가히 근심이 없다고 할만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매번 좋은 음식을 앞에 두면 문득 슬피 울기를 그치지 않으니, 얼마전 죽은 딸 단아 때문이었다.

갑오년 봄과 여름에 굶주려 곤궁한 중에도 막내딸과 추자 놀이를 하면서 무료한 회포를 보낸 대목에 이르러서는 더더욱 막내딸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쳐 애통한 마음이 치솟았다. 일기를 읽어 내리던 오희문은 눈가가 촉촉이 젖어왔다.

“종이가 모자라 일기를 쓰지 못하다”

장흥효, 경당일기,
1621-08-21 ~ 1621-08-22

1621년 8월 21일, 일기는 장흥효에게 있어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면서 성찰의 기회가 될 수 있는 자신만의 공간이었다. 그의 일기는 다른 어떤 것에도 구애되지 않으면서 자기가 추구한 성리학적인 삶을 완성하는 하나의 경전과도 같았다. 공자의 논어와 맹자의 맹자, 주자의 사서집주(集註)가 있다면 장흥효에게는 일기가 있었다. 그만큼 그에게는 어떠한 것보다도 소중한 보물이었다.

그런데 종이가 모자랐다. 일기를 작성하기 위해서는 지속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기록할 종이가 공급되어야 했다. 물론 제자들이 공부를 배우는 대가로 종이를 가져오기도 하였고 친지들이나 아는 관원들이 종이를 지급해 주기도 하였다. 유력 양반이라면 사찰에서 질 좋은 종이를 공급받을 수 있었지만, 장흥효의 형평상 그렇게 하지는 못했다.

결국 종이가 모자라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장흥효는 심지어 20여 일 동안 종이가 없는 상태로 일기를 작성하기도 했다. 그러한 날이면 그는 날짜, 간지, 날씨만을 기록하기도 했다. 그래야 어찌 되었든 일기를 이어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천신만고 끝에 종이를 구했지만 문제는 모두 다 기록을 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있었다. 너무 오래되어 기억이 나지 않았다. 매일매일 쓰지 않으면 기억이 사라지는 나이가 된 것이다.

“서울 소식 전해주는 신문, 조보(朝報)”

김광계, 매원일기,
1634-01-17 ~ 1644-04-11

예나 지금이나 시골 사람들의 생활은 도시보다 단조롭기 마련이다. 김광계의 일상 역시 늘 읽던 책을 또 읽고 항상 만나던 사람을 다시 만나는 일의 연속이었지만 그렇다고 새로운 사건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1634년 1월 중순, 김광계는 ‘경보(京報)’를 읽었다는 기록을 일기에 남겼다.

경보란 조선시대 승정원에서 매일의 소식을 적어 발행하던 조보(朝報)를 의미한다. 김광계처럼 지방에 거주하던 양반들은 서울 소식이라는 뜻에서 조보를 경보라고도 불렀다. 조보를 읽으면 새로 바뀌는 세금 정책이나 조정의 정치적 논쟁, 당장 다음 달에 올 신임 수령의 인선까지 알 수 있었으니 지방 양반들에게 조보는 중요한 소식 창구였다.

현대의 종이 신문은 구독을 신청하면 매일 아침마다 집으로 배달받아 간편하게 볼 수 있지만 조선시대의 조보는 그렇지 않았다. 승정원에서 매일 조보를 발행하면 각 지방 관청의 서리들이 일일이 손으로 베껴 발송하는 식이었다. 따라서 관직이 없는 지방 양반들은 거주지의 수령에게서 빌려 읽거나 서울에서 오는 인편에 조보를 가져다 줄 것을 부탁하는 등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조보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서울에서 발행된 조보가 지방까지 오려면 시차가 생길 수밖에 없었고 매일 나오는 조보를 지방에서 그때그때 챙겨 읽기란 불가능했으므로, 보통 지방 양반들은 며칠이나 몇 달치 조보를 한 번에 얻어다 읽곤 했다. 김광계의 재종숙부 김령의 일기에는 예안 현감에게서 조보를 빌려 읽었다는 기록이 자주 등장한다. 열성 구독자로 거의 달마다 조보를 구해 읽고 그 내용도 상세히 적어 놓은 김령과 달리 김광계는 조보 읽기에 큰 흥미를 보이지 않고 어쩌다 들어오면 읽어 보는 수준이었던 듯하다. 번다한 세상사에 관심을 갖기보다 스스로의 공부와 수양에 더 마음을 쏟은 것이 김광계의 성품이었다.

“40여 년 동안 쓴 『해주일록(海洲日錄)』은 전감으로 삼을 만하다”

남붕, 해주일록, 1930-06-05

1930년 6월 5일, 남붕은 며칠 동안 읽은 『중용혹문(中庸或問)』 등사본의 후지(後識)를 작성하려다가 붓을 멈췄다. 등사했던 날짜를 쓰려고 했는데 기억이 나지 않아서였다. 남붕은 날짜를 확인하기 위해 『해주일록(海洲日錄)』을 가져 와 꼼꼼히 살펴보았는데, 아들 원모(元模)가 죽기 전인 기유년(1909) 봄에 난고정(蘭皐亭)에서 원모가 등사한 것임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남붕은 아들이 등사한 『중용혹문』에 발문을 짓고 점심 때 발문을 다시 베껴 썼다.

이렇게 오래 전의 일이 기억나지 않을 때 『해주일록』을 살펴보면 마치 어제 일처럼 기억이 역력하니 40여 년 동안의 기록이 지난 일을 살피고 증거로 삼을 수 있으니 여간 큰 도움이 되는 게 아니었다.

한 달 정도 지난 윤6월 4일 아침을 먹은 뒤에 남붕은 『해주일록』을 처음 쓰기 시작한 병술년(1886) 조 부터 살펴보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40여 년이고 해마다 기록한 것이 거의 50여 권이니, 전감(前鑑)이 될 만하다고 생각되었다.

“세월이 흘러도 『동소만록』은 썩지 않고 전해질 책이다”

남붕, 해주일록,
1926-03-06 ~ 1930-11-02

1926년 3월 8일. 남붕은 이틀 전에 우현(禹玄) 족조를 찾아갔다가 빌려 온 『동소만록(桐巢漫錄)』을 읽고 있었다. 남붕은 『동소만록』을 쓴 남하정(南夏正)이 조야의 고사를 수집하여 사건마다 평론을 붙여 마치 옛날의 『사기史』의 사례와 같이 글을 쓴 것에 관해 감탄하였다. 또한 남인(南人)과 노론(老論)이 벌인 당론의 시비에 대하여 더욱 분명하게 분석하여 놓았으니, 실로 남인의 보배이고 서인에게는 눈엣가시임이 분명했다고 생각했다.

남붕은 『동소만록』을 눈에서 떼지 못할 정도로 푹 빠져있었다. 누가 찾아오기라도 하면 함께 보거나, 책 속의 사건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족제 호의(浩義)가 왔을 때도 함께 보았고, 백우길이 찾아왔을 때도 책을 보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늘 빠짐없이 밤마다 경문을 외우는 일도 그만두고 『동소만록』을 보았다.

11일에는 8대조 통덕랑공(通德郞公)의 묘소, 부곡(釜谷)의 조부 부군의 묘소, 도동(道洞)의 부모님의 묘소를 참배하고, 뒷산의 여러 묘소와 위 봉우리 뒤 증조부 묘소까지 찾아 가 참배를 하기 위해 집을 나섰는데, 그 행낭 속에도 『동소만록』 1책을 챙겨 넣었다. 2~3일간 오고 가는 짬짬이 아직 다 보지 못한 것을 보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길을 나선 남붕은 긴 고개에 이르러 아들의 묘소를 둘러본 후 8대조 통덕랑공(通德郞公)의 묘소를 참배하고, 부곡(釜谷)으로 가서 조부 부군의 묘소를 참배하고, 정오에 도동(道洞)에 도착하여 부모님의 묘소를 참배한 후 그날 밤에 재사에서 잠을 잤다. 잠들기 전까지 『동소만록』을 보다가 자려고 하였는데, 금계(金溪) 종숙이 찾아와서 또 함께 이 책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음 날 아침에 뒷산의 여러 묘소와 증조부 묘소를 참배하고 재사에 머무르며 드디어『동소만록』을 다 보았다. 그리고 오후에는 금계 족숙의 집에서 머무르며 다시 『동소만록』을 보았다.

남붕은 몇 년이 지난 후 『동소만록』을 또다시 보았는데, 다시 보아도 이 책에서 기록한 국가와 조정의 고사나 의론은 정밀하고 분명하며 문장이 간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책이야말로 참으로 썩지 않고 오래도록 전해질 글이라고 생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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