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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의 말

영남유생의 상소이야기

정현민

“이른 아침에 소장을 봉함하였다. 상소문에 이름을 적은 사람은 모두 10,057명 이었다. 상소문의 대략은 다음과 같다. “경상도 유학 이우李㙖등은 발을 싸매고 조령을 넘어 피를 쏟으며 소장을 올립니다. 확실한 처결로 화란禍亂의 뿌리를 영원히 뽑아서 의리를 밝히고 윤리와 강령을 세우시기를 바랍니다.”

- 영남 유생들의 상소과정을 담은 <천휘록>의 1792년 4월 27일 기록 중



스토리테마파크 웹진 ‘담談’ 28호에서는 1792년(정조 16년) 10,057명의 유생들이 올린 ‘만인소’를 중심으로 조선의 상소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224년 전, 사도세자의 죽음에 얽힌 억울함을 고하고 진실을 밝히고자 만여 명의 유생이 한 목소리로 외쳤던 상소, 만인소. 임금(정조) 조차 입에 올릴 수 없었던 절대적 금기사항을 권력 없는 지방 선비들이 집권 세력을 향해 정면으로 맞선 것입니다. 상소는 관직을 갖지 못한 선비들이 정치에 참여할 수 있었던 유일한 통로였습니다. 1792년 집권세력에 대항해 용기를 내고 진실을 규명하고자 했던 유생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그 첫 번째는 한국국학진흥원 김형수 박사의 ‘영남만인소’ 입니다. 영남의 선비들이 만인소를 올리기까지의 과정을 역사적 사실과 기록을 통해 자세히 소개하고 있습니다. 사도세자의 죽음에서부터 1792년에 이어 1855년(철종 5년)에 작성되는 만인소를 당대의 정치·사회적 맥락에서 정리해 주셨습니다.

두 번째 이야기는 소설가 조경란 작가의 ‘상소를 드라마에서 어떻게 쓸 수 있을까?’ 입니다. 드라마 <정도전>과 <징비록>을 중심으로 드라마 속 상소의 장면을 소개하며 ‘상소’ 라는 역사적 기록물의 의미와 콘텐츠의 활용의 가능성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세 번째 이야기는 이승훈․장순곤 작가의 연재만화 <요건 몰랐지> ‘만인의 외침, 만인소’ 입니다. 삿갓 김씨와 종놈 칠복이의 팔도유랑 중 우연히 선비들의 긴 행렬을 만나고 그 뒤를 따르게 되는데, 그 길은 왕에게 상소를 올리기 위한 험난한 길이었습니다. 다소 어려운 역사적 사실을 특급 ‘케미’를 자랑하는 칠복이과 삿갓김씨를 통해 쉽고 재미있게 풀어주셨습니다.

이 외에도 이번 호에서는 이외숙 작가의 연재소설 <연풍신부> 4화 ‘거짓으로 이름을 대다’ 를 이다 작가의 삽화와 함께 전합니다. 또한 이상호 박사의 선인의 일기로 보는 ‘그날’은 ‘어머니의 눈물과 왕의 눈물’ 입니다.

끝으로, ‘스토리 이슈’ 에서는 제2회 스토리테마파크 창작 콘텐츠 공모전에 선정된 10팀을 소개합니다. 본 공모전에 선정된 10팀은 앞으로 4개월 동안 멘토 교육을 통해 스토리테마파크의 이야기를 소재를 활용한 다양한 콘텐츠의 가능성을 실험하고 창작의 과정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 결과는 오는 10월 8일 최종심사에서 만나 볼 수 있습니다.

6월입니다.
30 여 년 전 6월의 오늘(10일)은 1792년 만 명의 유생이 그랬듯이, 금기와 부패에 맞서 온 국민이 목숨을 걸고 한 목소리로 민주화를 외친 날입니다. 진실을 위한 선한 의지는 결국 큰 힘이 되어 금기를 깨뜨릴 수 있음을 2016년 6월에 생각합니다.

“ 어머니의 눈물어린 배웅 - 사도세자의 죽음에 얽힌 억울함을 고하러 한양으로 향하다 ”

권방(權訪), 천휘록(闡揮錄),
1792-04-17
1792년 4월 17일, 정오쯤 부친이 곧바로 봉서(鳳栖)로 오셨는데 아우 석조가 모시고 왔다. 즉시 백부의 편지를 보시고는 사건의 단서를 대충 아시고 다른 별 말씀이 없으셨다. 오후에 내가 부친을 모시고 집으로 돌아오고, 동생 석조는 다시 문소로 향하였다. 표종(表從: 외종)인 신면조(申冕朝)·봉조(鳳朝) 형제가 나의 행사(行事)를 듣고 편지를 보내 고무하여 힘쓰게 하였다. 저물녘에 하상(河上)에 도착하여 백부와 숙부들을 뵙고, 곧 북촌(北村) 본가에 가서 담장 밖에서 어머니의 건강을 탐문하고 우두커니 서서 한참을 바라보았다. 어머니께서 북쪽 창문을 열고 한양 가는 일을 상세히 물으셨다. 나는 이 일의 대강을 말씀드리니 어머니께서는 절반도 듣지 않으시고 목이 메여 눈물을 흘리셨다. 이는 어머니께서 모년(某年: 1762년 사도세자가 죽던 해)의 사건에 그 전말을 상세히 아셨다. 때문에 매번 말을 하다가 그 사건이 언급되면 울분 감개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이 소식을 들으시자 눈물이 절로 흘러내리신 것이다.

“ 발을 싸매고 문경새재를 넘어, 피를 쏟으며 올립니다 - 만 명의 상소문을 올리다 ”

권방(權訪), 천휘록(闡揮錄),
1792-04-27
1792년 4월 27일, 상소문을 작성한 사람들이 이른 아침에 모여 소장을 봉함하였다. 상소문에 이름을 적은 사람은 모두 10,057명 이었다. 상소문의 대략은 다음과 같다. “경상도 유학 이우(李㙖) 등은 발을 싸매고 조령을 넘어 피를 쏟으며 소장을 올립니다. 확실한 처결로 화란(禍亂)의 뿌리를 영원히 뽑아서 의리를 밝히고 윤리와 강령을 세우시기를 바랍니다.”

“ 촛불 아래 엎드려 읽은 상소문, 그리고 임금의 눈물 ”

권방(權訪), 천휘록(闡揮錄),
1792-04-27
1792년 4월 27일, 주상이 희정당(熙政堂)에 납시어 서쪽을 향하여 단정하게 앉고, 진신과 장보들이 뜰 아래에 차례로 서니 보좌(寶座)와의 거리가 불과 10여 보 밖에 되지 않았다. 전상(殿上)은 시끄럽지 않고 고요하기만 한대 다만 승선 1명, 기주관 2명, 내관 2~3명이 좌우에 고개를 숙이고 엎드려 있었다. 승선이 교지(敎旨)를 전하여 말하기를 “지난번 이지영(李祉永)의 상소에는 비답(批答)을 내리지 않았는데, 그대들은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천리를 와서 충정을 쏟아내니, 나의 뜻을 면전에서 알리지 않을 수 없어 그대 들을 부르게 하였으니 소두는 전(殿)에 올라와 상소문을 읽는 게 좋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우가 서쪽 계단을 따라 올라가서 동쪽을 향하여 꿇어앉아 엎드려 소장을 읽었다. 소장을 반도 읽지 못하여 해가 이미 저물었다. 사알(司謁)이 여덟 자루 촛불을 전상에 벌여 놓았다. 읽기를 마치자 주상이 한참 동안 마음을 억누르고 진신과 장보들을 각각 몇 명씩 앞으로 나오게 하였다. 승선이 크게 소리 질러 말하기를 “이 일을 잘 아는 진신과 장보 각 2명씩 전에 오르면 된다.”고 하였다. 김한동(金翰東)·강세륜·김희택·이경유가 서쪽 계단을 따라 올라갔다. 주상이 또 말하기를 “다시 몇 명 더 전(殿)에 올라오너라.”라고 하였다. 김한동(金翰東)이 승선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진신 중에 성언집·이헌유와 장보 중에 김시찬을 올라가게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승선이 또 부르기를 “성언집·이헌유·김시찬은 전에 오르시오.”하여, 나아가 엎드렸으나 주상이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옥색(玉色: 임금의 안색)이 몹시 처량하고 슬퍼보였으며 자주 소매를 들어 눈물을 닦았다. 목이 메여 말을 못하다가 한참 만에 장황하게 타이르며 숨김없이 자세하게 말을 다하였는데, 비록 한 집안의 부자 사이라도 이보다 더할 수는 없었다. 소두가 일어났다가 엎드려 대면(對面)을 마치니, 주상이 또 뜰에 있던 여러 진신과 장보들에게 명하여 들어와 전에 올라 비답을 듣게 하였다. 소두가 비답을 받들고 차례로 물러나니, 밤은 이미 사경(四更: 오전 3시~오전 5시) 사점(四點)이었다. 주상의 특명으로 유문(留門: 궁궐 문을 열고 닫는 시각을 유보함)하여 통금을 해제하여 주었다. 진신과 장보들이 서로 손을 잡고 감읍하여 돌아왔다.

“ 성균관생들의 동맹 휴학 - 만인소에 확인 도장을 찍어주지 않은 죄를 물어라! ”

권방(權訪), 천휘록(闡揮錄),
1792-04-29
1792년 4월 29일, 듣건대 밖에 있는 유생 이존덕(李存德) 등이 태학에 통문을 보냈는데, 내용이 엄정(嚴正)하였다 한다.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여러 군자께서는 이미 태학에 거처하면서 변괴가 연이어 일어남을 보고서도 어찌 태연히 예사로 여겨 묵묵히 한 마디 말도 없어야 되겠습니까? 만약 우리들의 말을 옳다고 여기신다면 회답을 주시고, 그르다고 여기신다면 이를 잘 헤아려주시기를 바랍니다.” 이리하여 서재생(西齋生)들이 함께 권당(捲堂)을 행사하였다. 성균관장 김방행(金方行)이 들어와서 그들의 의사(意思)을 수렴하여 주상에게 주청하였다.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전 교리 김한동(金翰東)의 상소는, 태학에서 ‘근실’을 허락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를 여러 방면으로 핑계를 대어 의리를 회색(晦塞: 꽉 막혀 깜깜함)시켰다고 하였고 재유(齋儒) 최홍진이 성균관에 보낸 단자와 밖에 있는 이존덕의 통문은 호역완토(護逆緩討: 반역자를 옹호하고, 응징을 느슨하게 함)의 이름으로 몰아붙이니, 염치와 의리로 보건데, 얼굴을 들고 식당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고 하였다. 주상이 사알(司謁)을 시켜 구전으로 하교하기를 “반역자를 성토하는 일을 누가 감히 소홀하게 하겠는가마는, 혹 장의(掌議)이 선출되지 못함으로 인하여 그런 것은 아닌가? 아니면 혹 지방유생들이 격식있는 관례를 알지 못하여 그런 것은 아닌가? 다른 유생들이 마땅히 권하여 식당에 들어오도록 해야 할 일이지만 일이 커지면 대응하기가 몹시 어려우니 권하여 들어오라는 뜻을 대사성에게 전하라.” 하였다. 서재생들이 마침내 저녘식당에 들어가 그날 장의 및 두 반수(班首)인 이동수(李東洙) -이 성토와 징계를 듣고 왜 ‘근실’해 주지 않았는가?-, 맹현대(孟賢大) -의도적이지는 않았지만 불행히도 근실을 해주지 않은 죄에 해당- 의 벌을 의논하였다.

“ 이제 그만 고향으로 돌아가 학업에 전념하시오 - 3차 상소를 준비하던 유생들에게 내린 임금의 하교 ”

권방(權訪), 천휘록(闡揮錄),
1792-05-16
1792년 5월 16일 소청에 모여 소록을 등사하였다. 막 칙교를 받았을 때는 비록 도리에 구애되어 상소하는 일을 잠시 멈추었지만 다사들의 체류가 재일(齋日)이 지나면 충심으로 호소하는데 지나지 않으니 22일 후에 다시 세 번째 상소를 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한편으로는 소초(䟽草)를 작성하고 한편으로는 소록을 작성하였다. 19일 소록 작성을 다 마쳤다. 모두 11,365명이다. 20일 소초가 완성되었다. 소두 권 감찰·김시찬이 각각 한 본씩을 작성하였으나 봉사대부가 지은 것이 가장 적절하여 사론이 반드시 이것을 사용하려고 하였다. 장로들의 소견(所見)이 일치하지 않아 더하고 뺀 것이 많아서 다른 곳에 물어보고 다시 다른 조목을 넣었다. 21일 이 날은 곧 우리 경모궁(景慕宮)[사도세자]의 제삿날이다. 우리 성상(聖上)의 그립고 애통한 마음 어찌 다함이 있겠으며 우리들이 두렵고 피가 끓는 것은 과연 어떠하겠는가? 제사를 마친 뒤에 즉시 상소를 하려고 하였으나 첫째는 차마 못하겠고 둘째는 감히 못하겠으니 우선 다음 날을 기다려보기로 하였다. 22일 주상이 김한동(金翰東)을 불러 하교하기를 “지금은 의리가 분명하게 결판이 났으니 영남 유생들은 더 체류할 필요가 없다. 아까 경연에서 좌의정이 주청한 바가 있었다. 물러나가 좌의정을 보고 상세히 물어서 영남 유생에게 전달을 하라. 일전에 체류 식량을 받지는 않았지만 지금 회량(回糧)을 주면 반드시 감히 받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또 들으니 유생들이 물러나 학업을 닦으라는 비답을 듣고자한다고 하니 모름지기 비답을 내리는 법식에 의하여 말로 하교를 전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하였다. ...... 중론이 마침내 상소를 정지하자는 의논을 주장하였다. 그 중에 불충에 죽더라도 남쪽으로 돌아갈 뜻이 없는 자는 다만 2~3명뿐이었다. 그러나 일이 이미 이에 이르렀으니 다시 무엇을 하겠는가? 아! 애통하구나. 우리들이 천리를 와서 일만 명이 한목소리로 30년간 꽉 막혀서 감히 말하지 못한 일을 말하는 것이 과연 얼마나 큰 의리이며 큰 행사인데 다만 우리의 정성이 부족하고 의견이 일치하지 않아 끝내 유시무종(有始無終: 시작은 있으나 결과가 없음)의 탄식으로 돌아가니 애석함을 이길 수 있겠는가? 그러나 우리 성상이 꾹 참고 있는 본 뜻은 중천에 뜬 태양같이 밝으니 우리영남의 모든 유생들의 윤리는 죽더라도 거의 눈을 감을 것이다. 이날 서울인사로서 문안인사를 온 자가 매우 많았으나 다 힘없이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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