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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의 말

숨겨진 조선의 예인(藝人)

하원준

얼마 전 <조선 르네상스>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전문미술해설가인 작가는 이 책을 통해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에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가 있었다면 조선에는 단원 김홍도, 혜원 신윤복, 오원 장승업이 있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책을 통해 우리 문화는 오래 전부터 대중성을 바탕으로 밑바닥에서부터 켜켜이 쌓여왔다는 작가의 주장을 많은 부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조선의 예술은 이처럼 밑바닥이라 부르는 사람들에 의해 거대한 예술의 탑을 구축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를 들어, 노비 시인 백대붕이 그런 밑바닥의 빛나는 예술가이기도 합니다. 매일경제의 칼럼 [M 조선의 엔터테이너]에는 양반도 인정한 노비 시인 백대붕에 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16세기 중반에 태어났을 것으로 추측되는 그는 어떤 경로로 글을 배우고 시를 짓게 되었는지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전함사와 액정서에서 일을 했다고 하니, 글과 문학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허균도 그에 대한 기록을 남겨놓았다고 하니, 아주 강렬한 예술가임이 분명합니다. 그가 지은 시는 단 두 편만이 전해진다고 합니다. 그 중 한편인 취음(醉吟)은 술에 취한 백대붕이 길에 누워서 자고 있다가 행인이 깨우자 시로서 대답한 것입니다.


醉揷茱萸獨自娛 술에 취해서 수유를 꽂고 혼자서 즐긴다
滿山明月枕空壺 온 산에 달빛이 가득한데 나는 홀로 빈 술병을 베고 자네
傍人莫問何爲者 사람들이여, 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 묻지 말게
白首風塵典艦奴 나는 바람결에 백발을 휘날리는 전함사의 종이라네


시에서 진한 풍류가 느껴지는 한편, 신분의 한탄이 깊게 느껴집니다. 어디 이런 예술가가 백대붕 뿐이었겠습니까? 스토리 테마파크 웹진 ‘담談’ 이번 호에서는 조선에 숨겨진 ‘예인(藝人)’의 이야기를 담아보려고 합니다. 한 시대를 풍미하며 창작 활동을 펼친, 이미 우리가 알고 있었던 뛰어난 조선의 예술가들의 삶이 아닌, 일상의 삶에서 소소한 즐거움과 잔잔한 감동을 전했던 감추어진 예인들을 만나보려고 합니다. 두 편의 커버스토리에서 먼저 김창래 영화감독은 조선의 기생에 대해, 두 편의 주목 받은 영화 <간신>과 <해어화>를 인용하여 쉽게 풀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유순덕 관장과 이민주 작가는 퉁소를 부는 노인에 대한 이야기를 극화와 설명을 통해 흥미롭게 접근해주셨습니다. 특히 두 분은 모녀(母女) 사이로 스토리 테마파크의 일기를 처음 경험하고, 함께 생활하며 이야기를 나누는 즐거움까지 얻으셨다고 합니다. 이승훈․장순곤 작가는 연재만화 <요건 몰랐지?>의 여섯 번째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 편에서는 1623년(광해군15년)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담배로 인한 오해와 사건을 풀어 주셨습니다. 이외숙 작가는 연재소설 <연풍의 신부>의 제6화 ‘신랑감이 결정되다’를 이다 작가의 삽화와 함께 전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상호 박사의 해박한 지식과 따뜻한 시선이 돋보이는 <선인의 일기로 보는 ‘그날’>의 6회째 칼럼이 계속됩니다.

퉁소 명인의 연주는 양반의 산행 길에 정취를 더하고, 광대와 선비는‘시와 음악’으로 신분을 넘는 우정을 쌓으며, 삶의 애환을 시로 노래한 계집종의 재능에 감동하고 기록으로 남긴 양반의 이야기 등은 예술의 또 다른 아름다움을 생각하게 합니다. 예술은 아름다운 작품을 창작하는 것이 아닌, 어쩌면 조금은 아름다운 삶을 만드는 것이 아닐까요?

“ 조선시대의 디자이너, 철학에 기초하여 옷을 짓다 ”

서찬규, 임재일기,
1849-06-15 ~ 1859-07-17
1849년 6월 15일, 안동의 신재기(申在箕)[자는 범여(範汝)]씨가 서찬규를 찾아와서 위문하고 제복(祭服)을 만들었다.
1853년 1월 19일, 안동의 신재기 씨가 내방하였다.
1854년 2월 24일, 춘당대에 국왕이 친림하는 인일제를 설하여 시제(詩題)에 내었는데 근래에 없던 것이었다. 과거에 응시한 후에 곧 노량진에 가서 선생의 제사상에 조문을 드리고 곧바로 성균관에 들어갔다.

“ 20년만에 만난 관기 몽접, 그녀의 노래실력은 여전하다 ”

양경우, 역신연해군현잉입두류상쌍계신흥기행록,
1618-05-05 ~
1618년 5월 5일, 남도일대를 유람중이던 양경우가 수령에게 접대를 받았다. 관기인 몽접(夢蝶)이란 이가 들어와 인사를 드리는데, 이 기생은 젊었을 때 노래를 잘 불렀다. 난리를 만나 떠돌아다니다가 용성에 이르러 내가 거처하는 촌사(村舍)에 3년 동안 붙어살았는데, 그 이후로 20년간을 어디에서 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지금 문득 만나니 또한 세상사는 사람의 우연한 일이다. 서로 옛날이야기를 하였고 그녀로 하여금 노래를 부르게 하였다. 아직도 옛날과 마찬가지로 한들한들 멋들어지게 노래를 부른다. 태수가 나를 위하여 술자리를 마련하니 밤늦도록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다가 파하였다.

“ 음악과 시로 어울렸던 광대와 양반, 눈물로 헤어지다 ”

서찬규, 임재일기,
1846-09-16
1846년 9월 16일, 서찬규는 며칠 간 망설였던 일을 하고 말았다. 창부(倡夫)들을 내보낸 것이다. 사실, 반년 동안이나 와서 의지했던 터라 그의 마음도 참으로 서운하고 허전하기 짝이 없었다.
창부 일행의 마음도 착잡하긴 마찬가지였다. 모두 돌아간다고 말해놓고 행장은 이미 꾸렸음에도 눈물이 앞을 가려 쉽게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간 서찬규 생원 댁에서 편안하게 지냈는데, 이제 어디로 가서 입에 풀칠을 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비라도 오면 좋으련만, 맑은 날씨가 발길을 재촉하는 것 같아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 아름다운 노랫말과 슬픈 과거를 지닌 여인, 시희(詩姬) 얼현을 만나다 ”

김령, 계암일록,
1625-01-03 ~
1625년 1월, 추운 겨울 고향을 떠나온 지 오래된 나그네 신세의 김령에게 아침 일찍 지인들이 찾아왔다. 김령은 놀랍고 기쁜 마음으로 회포를 풀고, 날이 저물 때까지 그들과 함께 했는데, 무리 중에는 김령을 찾아온 시희(詩姬) 얼현(乻玄)이 있었다.
그녀는 천성(川城) 청암(靑巖) 권동보(權東輔)의 여종이었다. 20년 전에 고향을 떠나 이리저리 떠돌다가 서울에 들어와서 어떤 자의 첩이 되었는데, 미모가 시들자 이별을 당했다. 이때 와서 시권(詩卷)을 가지고 김령을 찾아왔는데, 그 시어(詩語)가 매우 맑고 아름다웠다. 창석(蒼石) 이준(李埈) 어른이 때마침 왔다가 그 시를 보고 칭찬하면서 그것을 소매 속에 넣어서 돌아갔다.

“ 밀양 기생 보금을 연주하다 ”

황사우, 재영남일기,
1519-02-04 ~ 1519-07-09
1519년 2월 4일, 황사우는 밀양의 수산현과 금동역을 거쳐 밀성(密城)에 들어갔다. 집무를 마친 황사우는 저녁에 기녀를 불러 거문고를 연주하게 하고 회포를 풀었다.
7월 8일, 아침 일찍 양산군을 출발하여 밀양에 이르렀다. 춘추 포폄 때문에 감사가 좌수사와 우수사와 함께 집무를 보았다. 황사우는 이들을 뵙고 저녁 식사를 함께 하였다. 그리고 이날 황사우는 밀양에 처음 왔을 때 만났던 기녀를 다시 불렀다. 그녀를 보자 황사우의 가슴이 뛰었다. 그녀의 이름은 보금(寶琴). 보배로운 거문고라는 뜻이었다.
7월 9일, 밀양. 감사와 좌수사, 우수사가 누각에서 집무를 하고, 여러 사람들이 모두 머물렀다. 여러 훈도를 고강하였다. 황사우는 저물 무렵 방으로 내려와 밀양현감과 전 고령현감과 잠깐 술자리를 하고 잤다. 좌수사와 우수사가 감사에게 고기를 먹고 술 마시기를 권하여 밤중까지 이르렀다. 황사우는 그 자리에 끼지 않았는데, 내심 다행으로 여겼다. 칠원현감과 영산현감에게 대전(大典)을 고강했다. 이날도 황사우는 보금을 몰래 연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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