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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의 말

집단지성의 봄이 온다
“어떤 빛은 야망 / 어떤 빛은 방황 / 사람들의 불빛들 / 모두 소중한 하나”BTS의 노래 〈소우주〉

10대들이 살아가면서 겪는 힘든 일, 편견과 억압을 막아내겠다는 뜻을 지닌 방탄소년단의 노래와 춤에 공감하고 팬덤 공동체의 연대와 활동이 세계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서로 손잡고 교류하면서도 집단에 매몰되지 않으면서 전체로서 노래하고 춤추고 창작하고 협력하는 집단지성 현상입니다. 우리는 역사적으로 깊고 오래된 집단지성의 전통을 지니고 있습니다.

유교철학을 성장시켜 다시 중국과 일본으로 퍼트리고 학문뿐만 아니라 시와 소설, 그림 등을 동아시아 전체에 유행시킬 수 있었습니다. 방탄소년단과 웹툰과 웹소설이 전 세계에 확산될 수 있었던 저력의 뿌리를 집단지성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 학문과 출판에서 문중과 학맥, 서원과 지역 사회의 네트워크가 형성하는 지식인 집단의 공론이 출판 과정을 결정하고, 선비와 학생들은 학문과 무예, 시와 음악과 그림을 함께 즐기고 공감하는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의 집단지성 유전자는 이제 본격적으로 새로운 봄을 준비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강유현 선생님의 〈발견된 “높은 문화의 힘”〉은 한류를 믿지 않았던 관점에서 BTS와 오징어 게임, 지옥, 미나리 등을 통해 어떻게 문화에 대한 새로운 인식에 이르렀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십니다. 그럼에도 문화의 황금기는 생활을 풍족하게 하는 여유로운 마음과 지갑에서 비롯된다는 중요한 원리를 설명합니다. 18세기 조선의 골동서화취미 유행과 17세기에 통신사 수행 화원으로 일본에 갔던 김명국의 선승화의 인기, 임진왜란으로 납치된 도공들의 활약 등을 펼치십니다.

이문영 작가님의 〈정생의 연희일기〉는 청나라 사신을 놀라게 한 산대연희와 일본으로 간 조선통신사의 마상재를 과거 급제한 오진사 댁 손자의 이야기를 통해 풀어 나갑니다. 떠들썩한 인파와 유가 행렬, 그리고 광대들의 산대연희와 걸립패, 술꾼들, 그리고 말을 타고 재주를 부리는 마상재에 대한 이야기까지 거대하고 재미진 풍속화처럼 소설 작품을 보여 주십니다.

서은경 작가님의 〈조선의 얼굴〉은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납치된 포로의 후손이 무장으로 살고 있는 관점에서 조선통신사를 보는 이야기를 담아 주셨습니다. 조선의 문화 수준에 자긍심을 가지면서, 언젠가 반드시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는 조선인의 고통스런 다짐을 눈앞에 그려집니다. 이번 호부터 웹툰 작품을 그려주시는 서은경 작가님은 『마음으로 느끼는 조선의 명화』, 『소원을 담은 그림, 민화』 등의 책을 지으셨고, 스토리테마파크 대학생 콘텐츠 공모전에서 담임멘토와 심사위원을 맡아주신 바 있습니다.

홍윤정 작가님의 〈내 손에 쥔 것이 의외로 휴지가 아닐지 몰라〉는 오징어 게임과 지옥을 시청한 느낌과 드라마와 영화의 생태계에 대해 드라마와 영화 시나리오 작가로서 이야기해줍니다. 작가님이 원작하고 각본을 쓴 〈수상한 그녀〉는 8개 국가에서 리메이크된 바 있습니다. 16세기 허난설헌의 지은 작품집이 수많은 청나라 사람들에게 읽혔던 기록과 K 한류 문화 콘텐츠의 관계에 대해 다루셨습니다. 작가님의 글처럼 우리 손에 쥐고 있던 것이 휴지가 아니라 보석일지도 모릅니다.

이번 달의 스토리 이슈는 〈한국의 유교책판 체험 연수 프로그램〉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한국국학진흥원에선 학생들에게 기록유산의 가치를 확산하고 문화 자긍심을 제고하기 위해 〈한국의 유교책판〉의 가치와 중요성을 알리는 체험 연수를 기획하였습니다. 2022년 봄에는 코로나 팬데믹이 끝나고 더 많은 분들이 이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날이 곧 오기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저희 웹진 담談 편집자들은 2021년 두 번째를 맞이한 전통 기록문화 활용 영화 시나리오 공모전에서 임찬익 작가님의 〈금주시대〉가 대상으로 선정되었다는 기쁜 소식을 전합니다. 이 작품은 재위 50년이 넘는 기간 동안, 강력한 금주령을 시행한 영조의 기록에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금주시대〉를 통해 작가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일지 만나보세요.

코로나로 지친 두 해가 지나고 어느덧 검은 호랑이 해라는 2022년 임인년(壬寅年)이 왔습니다. 선인들의 일기와 생활을 통해 우리의 전통문화의 창조적 계승을 꿈꾸는 저의 웹진 담談의 편집자들 모두 독자 여러분들께 새로운 봄을 맞는 인사와 함께 허난설헌의 〈봄의 노래〉를 전합니다.



院落深沈杏花雨그윽한 뒤 안의 살구꽃 소복소복 지는데
流鸎啼在辛夷塢층계 위 목란가지에서 꾀꼬리 우짖는다
流蘇羅幕襲春寒꽃술 달린 장막에 찬 기운 스며들고
博山輕飄香一縷향로에선 한 가닥 향불 줄기 하늘거려
美人睡罷理新粧잠에서 깨어난 미인 새 단장 매만지고
香羅寶帶蟠鴛鴦향그런운 허리띠엔 원앙이 수 놓였다
斜捲重簾帖翡翠겹 발을 걷고서 비취 이불 개어 놓고
懶把銀箏彈鳳凰열없어 은쟁 안고 봉황곡을 탄다
金勒雕鞍去何處금굴레 안장타신 임은 어딜 가셨나
多情鸚鵡當窓語정다운 앵무새는 창가에서 속삭인다
草粘戲蝶庭畔迷풀섶에서 날던 나비 뜨락으로 사라지더니
花罥游絲闌外舞난간 밖 아지랑이 낀 꽃에서 춤을 춘다
誰家池館咽笙歌뉘 집 연못가에서 피리 소리 구성진가
月照美酒金叵羅밝은 달은 아름다운 금 술잔에 떠있구나
愁人獨夜不成寐시름겨워라 밤에 홀로 잠 못 이루어
曉起鮫綃紅淚多새벽에 일어나면 눈물 자국 흥건하리




편집자 소개

글 : 공병훈
공병훈
협성대 미디어영상광고학과 교수. 서강대 신문방송학과에서 앱(App) 가치 네트워크의 지식 생태계 모델 연구에 대한 박사논문을 썼다. 주요 연구 분야는 미디어 비즈니스, PR, 지식 생태계이며 저서로는 『4차산업혁명 상식사전』등이 있다.
“조선시대 군인들의 강무”

마상재(馬上才)는 달리는 말 위에서 사람이 행하는 갖가지 재주로, 농마(弄馬), 희마(戱馬), 마희(馬戱), 곡마(曲馬), 원기(猿騎), 무마(舞馬), 표기희(驃騎戱), 마기(馬技), 마기(馬伎), 입마기(立馬技), 마술(馬術) 또는 말광대, 말놀음 같이 다양한 용어로 불린다. 이들 용어 가운데 훈련된 말에게 여러 기예를 익히게 하는 무마(舞馬)를 제외하고, 그 나머지 용어는 기수가 달리는 말 위에서 여러 가지 동작을 취하여 재주를 부리는 기예를 뜻하는 말이다. 특히 마상재는 조선시대에 이르러 붙여진 명칭으로 민간에서는 주로 마기(馬伎)라 불렀다. 하지만 마기가 아니라 희마(戱馬)가 옳다는 주장이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에서 확인되는 것으로 미루어 희마가 옳은 표현으로 보인다.
마상재는 기마술의 일종으로 행해지기 때문에 별도로 때를 가리지는 않았다. 다만 조선 후기에 들어와 마상재가 관무재라는 무예 시험의 종목으로 시행되면서 봄과 가을에 주로 많이 행해졌다.
마상재에는 키가 크고 빛깔이 좋으며 훈련이 잘된 말을 골라서 썼으며, 암말보다도 수말이 적당하다고 했다. 특히 부루말(흰말)을 높이 쳤으며, 가라말(검정말) 중에도 네 발굽이 흰 것은 무방하게 여겼다. 이러한 말에 온갖 치레를 갖추었으며 마상재를 하는 사람은 전립 또는 투구를 썼다. 옷은 민소매로 만들어진 붉고 노란 호의(더그레)에 같은 색의 바지를 입었으며 목화나 짚신을 신지 않고 버선발로 말을 탔다.

“청나라 대신이 조선의 침술을 찾다”

정태화, 임인음빙록, 1662-09-29 ~

1662년 9월 29일, 아침부터 청나라의 역관들이 정태화를 만나보러 왔다. 정태화(鄭太和)는 부사 허적과 함께 이들을 만나보았는데, 그들이 전한 이야기는 청나라 보정대신 3명의 부탁이었다.
“수대신(首大臣)에게 병환이 있는데, 마침 사신 일행 중에 데려온 침의(鍼醫)가 있다 하니 치료하고 싶소. 근래 병세를 보니 날짜가 많은 것 같으니 조선 침의 안례(安禮)가 며칠 동안 남아서 침을 놓고 대신의 병환을 살핀 이후 떠나는 것이 어떻겠소?”
이 이야기를 듣자 정태화는 며칠 전 조참례를 행할 때의 광경이 떠올랐다. 수대신이란 사람이 직접 조선 사신단에게 와서 침의 김상성이란 자를 찾았던 것이다. 아마 김상성은 지난번 사행 때 동행해온 의관이었던 것 같은데, 수대신은 그 당시에도 조선의관의 침으로 효과를 보았던 듯하였다. 정태화는 비록 김상성은 오지 않았으나, 이번에도 의술이 뛰어난 자가 함께 왔으니 보내주겠다 약속하고는 안례(安禮)를 보내 주었는데, 며칠간 치료를 받아보니 효과가 좋았던 모양이었다. 이에 아예 공식적으로 조선 사신단에게 의관을 남겨서 치료해 달라 부탁을 해 온 것이었다.
이미 정태화 일행은 사신단의 임무를 마쳤기에 곧 떠날 처지였다. 그러나 만일 이 일을 임금에게 보고한다면 아마 흔쾌히 의관으로 하여금 청나라 대신의 병을 치료하도록 할 것이었다. 여기에 생각이 미치자 정태화는 청나라 보정대신들의 부탁을 허락하고는 안례를 뒤에 남겨 치료를 마친 이후 사신 일행의 뒤를 따라오도록 하였다. 청나라와 같이 크고 넓은 나라에서도 조선의 의술을 찾고 있다니, 정태화는 조선 의술에 새삼 자부심이 일었다.

“중국인들이 가장 선호한 조선의 인삼”

인삼은 5~6세기부터 고구려와 백제의 주요 수출품이었고, 고려시대에는 송나라에 사신이 방문할 때 가져간 인삼이 1,000근이나 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더욱 중요한 수출품이 되었다. 명나라 초기에 조선은 금과 은 등을 조공으로 바쳐야 했으나, 세종대에 금과 은의 조공을 중단하고 그 대신 인삼을 조공하기도 했다. 명 말기부터 중국인들의 인삼수요는 더욱 커졌다. 조선은 사신단의 조공품목 뿐만 아니라 무역품목으로도 인삼을 가지고 갔는데, 경비가 떨어지면 인삼을 팔아서 비용을 마련하기도 했다. 그만큼 당시 조선의 인삼은 귀한 물품이었고, 명나라 사행단이 지나가는 곳의 중국 관리들은 의례히 예단을 받았는데 요동 도사 왕소훈이 예단을 돌려보낸 이유를 인삼이 없어서 서운해 한 것이라고 짐작할 만큼 중국에선 조선의 인삼을 선호했다.
중국에서 인삼의 수요가 또 다시 급증한 것은 청조 말기인데, 당시 아편중독에 인삼이 효과가 있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1841년 조선에서 수입하는 홍삼의 수출량은 2만 근이었는데, 1847년엔 2배인 4만 근까지 급증하기도 했다.

“포로 쇄환”

조선은 일본에 3차례의 회답 겸쇄환사를 파견하였다. 1607년 외교가 재개된 첫 번째 사절에게 일본은 많은 배려를 베풀었다. 쓰시마와 막부에서는 적극적으로 협조하였고, 이에 따라 고국으로 돌아가려는 많은 피로인들이 사신을 따라 조선으로 들어왔다. 이미 귀국을 거부하고 일본에 정착하려는 포로들이 생겨나기도 했다.
1617년 상황은 달라져 있었다. 사신들에게는 막부나 쓰시마와의 교섭 외에 피로인에게 귀국의 정당성을 알리며 설득하는 과제가 늘어난 것이다. 쇄환을 위해 데려온 포로가 다시 돌아가 버리거나 따라왔다가도 마음이 변해 가버리는 일이 속출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전히 피로인은 설득의 대상으로 데리고 돌아가야 할 조선인이었다. 1624년 회답 겸쇄환사에게는 자발적으로 돌아가겠다고 찾아오는 피로인들이 드물 정도가 되었다. 이미 세대가 바뀌어 완전히 일본 습성에 젖은 포로들이 등장했다. 1636년과 1634년에도 극소수의 쇄환이 있기는 하였으나 본격적인 포로의 쇄환은 1624년으로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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