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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의 말

산과 들에서 느껴지는 봄바람

60간지의 39번째 해인 임인년(壬寅年)의 용맹스러운 검은 호랑이의 해가 밝았습니다. 조선시대에 궁궐에서는 한해를 마감하고 새해를 맞는 시기에 재앙을 막고 기쁨을 기리며 호랑이 그림을 하사하였다고 합니다. 수많은 문학 작품과 그림, 전설과 기록과 일화들을 통해 호랑이는 용감한 산속의 군주로서 소망을 이루어주고 악귀를 쫓아주는 신앙의 대상이기도 하며, 커다란 덩치와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어 모두를 두려움에 떨게 합니다. 하지만 때로는 은혜와 원수를 갚아주는 착한 모습으로 토끼와 여우의 놀림이나 당하는 어리석고도 재미있는 존재로서 호랑이는 우리 민중의 사랑을 받아왔습니다.

코로나 팬데믹이 3년째의 입춘(立春)을 앞두고 호랑이 같은 기운을 맞으시라는 뜻으로 웹진 담談의 이번 주제는 "호랑이 기운 솟아나라!"입니다.

노정연 선생님은 〈인간이 만들어 낸 한국 호랑이〉에서 전통 민화 속에 호랑이가 지니는 의미를 재해석하십니다. 전통 속의 호랑이가 가지는 성격과 상징을 통해 전통 그림 속의 호랑이 모습 중 대표적인 3가지를 호랑이와 매, 호랑이와 까치, 호랑이와 토끼로서 제시합니다. 그리고 동서양에서 현대적으로 재해석된 ‘호랑이’와 환경문제, 현대적 브랜드의 이미지 등에 대해 이야기하십니다. 노정연 선생님은 전통과 현대의 ‘호랑이’ 이미지를 접목시켜 본인의 일러스트 작품으로 새롭게 창작하였고, 이를 ‘인간이 만들어낸 한국 호랑이’로 명명하였습니다. 이 글을 통해 전통 미술로써 표현된 판화와 그림, 민화와 현대 작품들을 전문적이며 흥미로운 관점으로 감상하는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이문영 작가님의 〈정생의 착호일기〉는 심부름 다녀오는 고갯마루의 숲에서 호랑이를 만난 정생의 이야기를 펼쳐주십니다. 두려움에 떨며 들고 있던 명태전으로 겨우 목숨을 구한 정생이 결국은 여우를 호랑이로 착각한 것이었다는 어이없이 재미있는 이야기입니다.

서은경 작가님의 〈호랑이 똥〉은 멧돼지 퇴치에 효과가 있다는 호랑이 똥에 대한 이야기를 웹툰으로 그려 주셨습니다. 농작물을 망치거나 조상의 분묘를 파헤치는 멧돼지를 쫓는 데 효험이 있다고 알려지면서 호랑이를 키우는 공원이나 사육장에서 호랑이 똥 품귀 현상이 벌어져 몇십 명의 순번 대기자까지 생겨나고 있는 상황을 담아 주셨습니다. 호랑이는 뼈를 비롯한 신체의 거의 대부분의 부위가 한약으로 사용되고 있어서 심각한 생존의 위협을 받고 있는 현실도 생각나게 하는 작품입니다.

범접하기 어려우리만치 세 보이면서도 친근하고, 촌스러운 듯하나 세련되고, 침묵 속에 많은 말을 담고 있는 한국인의 정체성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요. 홍윤정 작가님의 〈범 내려온다〉는 영화와 드라마들에 담겨진 호랑이에 대해 이야기해줍니다. 한국 영화의 유명한 3대 등장씬으로 알려진 〈늑대의 유혹〉(2004), 〈아저씨〉(2010), 〈관상〉(2013)에서 주인공들 등장하는 장면에서의 호랑이 느낌의 표현들에 대한 내용입니다. 조선 호랑이와 호랑이를 사냥하는 사냥꾼 천만덕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 〈대호〉(2015), 얼마 전 인기리에 종영된 드라마 〈옷소매 붉은 끝동〉 등을 다루고 있습니다.

나무판에 새긴 이름, 편액은 아버지에게 효성을 다하여 솔개와 호랑이까지 감동시킨 야계정(也溪亭)의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경상북도 예천군 효자면의 야계정(也溪亭)은 부모님을 정성껏 섬겼던 도시복(都始復, 1817~1891)의 생가와 함께 효공원이 위치한 곳입니다. 도시복은 철종 때 사람으로 솔개도 그 효성에 감동하여 무거운 짐을 날라주고, 호랑이가 100리를 태워주었다고 전해집니다.

이번 호의 〈스토리이슈〉는 한국국학진흥원 유교문화박물관의 특별전시인 〈식산, 은거의 삶을 말하다〉에 대한 내용입니다. 이 전시는 연안이씨 식산문중이 기탁한 자료를 선별하여 소개하는 자리입니다. 이번 전시는 2022년 6월 26일까지 유교문화박물관 4층 기획전시실Ⅱ에서 관람하실 수 있습니다. 이번 전시를 통해 자연 속에서 휴식하듯이, 편안히 숨 쉬듯이 식산문중의 학문과 예술 세계를 함께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약밥·오곡밥, 묵은 나물과 복쌈·부럼·귀밝이술 등을 먹고 지신밟기·별신굿·안택고사·용궁맞이·기세배(旗歲拜)·쥐불놀이·사자놀이·관원놀음·들놀음과 오광대탈놀음을 통해 어둠과 질병, 재액을 물리치며 이 시기를 지내왔습니다. 한해의 농가를 위해 부지런하게 준비하는 시기이며, 지난 가을에 논밭에 떨어진 알갱이들을 먹으려고 기러기들이 긴 여행의 휴식을 취하며 또다시 긴 여행을 준비합니다. 아직 한겨울 같지만 산과 들에서 느껴지는 봄바람의 소식과 함께 조선 영조 때의 문인 이서구(李書九, 1754~1825)의 시 「봄이 머무는 마을[留春洞]」을 웹진 담談 독자 여러분들에게 전합니다.



林花香不斷숲 꽃에는 향기가 끊이지 않고
庭草綠新滋뜰 풀에는 새롭게 푸르름이 더해지지만
物外春長在보이는 것밖에 언제나 있는 봄은
惟應靜者知오직 고요한 사람이라야 알 수가 있네




편집자 소개

글 : 공병훈
공병훈
협성대 미디어영상광고학과 교수. 서강대 신문방송학과에서 앱(App) 가치 네트워크의 지식 생태계 모델 연구에 대한 박사논문을 썼다. 주요 연구 분야는 미디어 비즈니스, PR, 지식 생태계이며 저서로는 『4차산업혁명 상식사전』등이 있다.
“우리나라 호랑이 이야기”

작호도(鵲虎圖) (출처: 국립민속박물관) 최남선의 전언이 아니더라도 우리나라의 호랑이 이야기는 세계적으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고 풍부하다. 중국의 대문호인 노신(魯迅)도 우리나라 사람을 만나면 반드시 한국의 호랑이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했다는 일화가 있다. 호랑이는 아시아에만 서식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아시아 중에서도 인도·수마트라·중국·만주·한국·시베리아 흑룡강 연안에만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앙아시아나 일본·대만 등에는 살고 있지 않다고 한다. 그러므로 호랑이 이야기도 이러한 분포지역에 따라서 주로 전승되고 있으며 그중에서도 산이 많고 골짜기가 많아 호랑이가 많이 서식했던 한국에서 가장 많이 전승된 것으로 보인다. 역사기록을 보면 조선 시대에만 해도 인왕산에 호랑이가 살고 있었으며, 도성 안이나 궁궐 안에도 호랑이가 출몰했다는 기록들이 자주 나타난다.

“신비의 동물로 여겨진 호랑이”

〈호랑이와 매〉(출처: 고판화 박물관) 권상일, 청대일기, 1753-06-06

1753년 6월 6일, 권상일은 어느 날 이웃 마을의 소식을 들었다. 상주의 인근 고을이었던 용궁현의 월오리라는 곳에 호랑이가 출현했던 것이다. 마을 앞산에 조그마한 소나무 숲이 있었다. 그런데 대낮에 호랑이가 출현하여 그곳에 숨어 있었던 것이다. 일상 호랑이가 나타나게 되면 몸을 피해야 하는 것이 당연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사람들은 몸을 피하지 않고 구경하기에 바빴다.

호랑이는 마을 사람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라기보다는 신기한 대상으로 비쳐졌던 모양이었다. 양반들에게야 호랑이는 백성을 위해서 해로운 대상이므로 당연히 없애야 하는 포호(捕虎)의 대상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일반 백성들에게 호랑이는 신비의 동물이면서 숭배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결국 호랑이를 보러온 마을 사람들은 시간이 지나 물려서 부상을 입은 자가 다수 출현하게 되었다. 그 중에서는 권상일이 잘 알고 지내던 안필세도 있었다고 한다. 이 소식을 듣고 걱정이 앞서지 않을 수 없었다. 양반이었던 권상일에게 호랑이는 당연히 처치해야 할 동물이었지만 그렇게 하지 못한 사실에 너무 놀라고 그 피해 사실에 탄식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마을 사람들이 호랑이에게 물려가다”

호랑이(출처: 픽사베이) 오희문, 쇄미록, 1597-03-07 ~

1597년 3월 7일, 오늘 오희문은 끔찍한 소식을 들었다. 어젯밤 사나운 호랑이 한 마리가 뒷산 인가에 들어와서 자는 사람을 잡아갔다고 한다. 사람을 물어 가는데 옆에 있는 사람들이 차마 빼앗을 수가 없었는데, 아침에 찾아가보니 사람의 반을 먹어버렸다고 한다. 참으로 분통한 노릇이었다.

호랑이가 마을 사람을 해친 것은 비단 오늘 뿐만이 아니었다. 지난 달 26일에는 관아에 소속된 관비가 범에게 물려갔다고 한다. 관비는 범에게 물려갈 때 살려달라고 사람들을 애타게 불렀는데, 사람들이 두려워서 나가보지 못했다고 한다. 호랑이는 관비를 물고 달아날 때 관아 뒤를 지나갔다고 하던데, 그곳은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사는 곳이었다. 사람이 호랑이에게 물려 가는데도 두려워서 누구 하나 나서지 못하였으니, 참으로 고약한 인심이라 할 만 하였다.

요사이 호랑이들이 많이 돌아다녀서, 혹은 대문을 부수고 울타리를 헤치고는 인가로 들어온다고 하니 몹시 걱정이었다. 악독한 맹수가 성하게 다니면서 사람을 상하게 하는데도, 이것을 잡아 없애지 못하고 사람마다 두려움에 질려서 해가 넘어가자마자 문을 굳게 닫고 나오지를 않는 상황이었다. 오희문은 또 한 가지 걱정거리가 늘어,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원수를 갚은 호랑이”

노상추, 노상추일기, 1764-05-27 ~

노상추가 사는 선산에서 큰 소동이 벌어졌다. 웅곡면(熊谷面) 일촌(一村)에 사는 남 씨 일가와 심 씨 일가가 호환(虎患)을 입었다는 소식이 선산 일대에 쫙 퍼졌다. 노상추도 전해 들은 이 소식의 전말은 다음과 같았다. 남 씨네 집 아들과 심 씨네 집 아들은 어느 날 뒷산에 갔다가 호랑이와 마주쳤다. 호랑이는 새끼 네 마리를 데리고 있었기 때문인지 매우 예민했다. 두 사람은 포효하는 호랑이로부터 달아나면서 새끼 네 마리를 모두 죽였다. 큰 호랑이는 죽이지 못했지만, 마을에서는 두 사람이 돌아온 것이 천행이라며 모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불행은 거기서부터 시작되었다. 호랑이로부터 달아난 날로부터 나흘 후, 호랑이가 남 씨‧심 씨네 집이 있는 마을로 내려왔다. 호랑이는 먼저 심 씨의 집에 들어가 외양간에 묶여 있던 큰 소를 죽였다. 그리고 죽인 소를 먹는 대신 온 집안을 들쑤시며 간장 항아리와 가마솥 등의 물건을 모두 깨부쉈다. 그 뒤에는 남 씨의 집으로 가서 안방에 있던 남 씨의 처와 며느리, 딸 두 명과 아들 한 명을 물어 죽였다. 그리고 근처에 있던 승려 한 명과 호랑이를 죽이러 온 포수 한 명을 죽였다.

이 모든 일을 한 다음 호랑이는 남 씨의 집 방에 들어가 누운 채 나오지 않았다. 소와 사람들을 물어 죽이기는 했으나 먹지 않은 점은 호랑이의 행동이 결코 배가 고파서가 아니었음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마치 죽음을 기다리듯 방에 누워 있었다는 점이 기이했다. 결국, 관에서는 별포수(別砲手)를 파견하여 호랑이를 쏘아 죽였다. 잡은 호랑이의 크기는 턱밑 길이가 세 뼘 반에 달할 만큼 거대했다.

“조선시대 사냥꾼 부대의 존재”


일기에는 백두산에 당시 오랑캐 사냥꾼의 움막이 있었음을 표현하고 있다. 이는 당시 사냥꾼들이 산속에 움막을 지어놓고 장기간 사냥을 다녔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조선 시대 사냥꾼들은 비단 일반 사냥꾼뿐만 아니라 군부대로서 기능도 갖고 있었다. 호랑이 사냥을 전담하는 군대인 착호군(捉虎軍)은 조선 건국 초부터 중앙과 지방에서 포호(捕虎) 정책을 수행했다. 착호군은 현종 15년(1674년) 때 5000명, 숙종 22년(1696년)에는 1만1000명까지 늘어났다. 17세기 들어 산의 외진 곳까지 개간하며 생활한 화전민이 늘어나고 수렵이 활성화되자 갈 곳을 잃은 호랑이들이 민가의 가축이나 인명을 노리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착호군이 국가 위기 상황에서는 전투에 나서 탁월한 전과를 올렸다. 이들은 전시에 소집될 의무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전과는 특히 19세기 제국주의 열강과 싸움에서 두드러졌다. 19세기 미국의 동양학자인 윌리엄 그리피스는 조선의 착호군이 병인양요와 신미양요에서 서구의 근대적인 함선과 총포로 무장한 군대를 물리쳤다고 ‘한국, 은둔의 국가’(1907년)에 상세히 기술했다. 병인양요에서 프랑스군에 맞선 주력은 관동과 경기지방에서 모인 포수 370여 명이었다. 신미양요가 발발하자 포수를 중심으로 한 별초군 3,060명이 상경해 미군에 대항했고 고종 13년(1876년) 강화도조약을 체결할 때는 포수 4,818명이 상경해 대응하기도 했다. 이는 사냥꾼들이 지닌 탁월한 사격 솜씨 때문이었다고 보여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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