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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일기(2월) - “조선의 여인”

스토리테마파크 ‘담談’ 12호(2015. 2) 이달의 일기에서는 역사와 기억에서 잊혀진 평범한 사람들, 특히 조선 여인의 삶과 이야기를 담아보려고 합니다. 남성중심의 조선 사회에서 여성의 삶이 기억되고 남겨지는 일은 흔치 않았습니다. 이번 호에서는 선인의 일기장에 기록된 조선의 여인을 만나, 그녀들의 삶과 이야기를 기억하려고 합니다.

“ 여든넷의 늙은 종 범정(凡丁) ”

첫 번째로 소개 할 여인은 여든넷의 늙은 종 ‘범정(凡丁)’입니다.
1501년에 노비의 딸로 태어나 1584년, 생을 마감하기까지 84년을 노비로 살았던 여인. 평생을 ‘천한’ 종으로 살았지만 범정의 삶은 결코 천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범정을 종으로 부리던 권문해(1534~1591)는 그녀가 세상을 떠나는 날, 그녀를 추억하며 일기를 남겼는데...

1584년 1월 17일. 맑음
밤 2경(二更) 중에 늙은 종 범정(凡丁)이 죽었다. 이 종은 우리 집에서 4대째 살아온 종으로서 성품이 굳세고 부지런하여 상전의 집안일을 도맡아 처리하매 온 마음을 쏟아 하고 일절 기망하는 폐단이 없었다. 참으로 이른바 ‘세노(世奴, 대대로 부리던 종)’이다. 나이 여든넷에 아들도 있고 딸도 있고 손자도 있으니, 보통사람 중 수명과 복을 모두 온전히 누린 자이다. 이에 애도하는 시를 지어 그를 보낸다.

구십에서 여섯을 뺀 팔십 넷에 九旬除六八旬餘
우리 집 일 처리하며 4대를 종살이 하였네 幹事吾家四代奴
주인 위해 너처럼 마음 다하고 부지런한 이 드무리니 爲主忠勤如爾少
이전의 일 생각하매 눈물이 소매를 흥건히 적시네 憶前時事淚盈裾

430년 전 경상북도 예천 권문해의 종으로 살았던 ‘범정’에 관한 기록입니다. 범정은 권문해가 태어나기 30년 전부터 권문해 집안의 세노로 살았습니다. 권문해는 평생을 함께 살아온 범정을 보내며 비록 신분은 다르지만 오랜 시간 정을 나누었던 이를 향한 애틋한 마음을 일기에 담았습니다. 권문해는 누구보다도 온전히 한 평생을 살다간 그녀의 삶에 경의를 표하며, 1584년 1월 21일 맑은 날 그녀를 부항산(釜項山)에 묻어줍니다.

‘온전히’ 한 평생을 살다간 범정... 그녀의 삶이 궁금합니다.

범정과 권문해가 함께 지냈던 초간종택 범정과 권문해가 함께 지냈던 초간종택 <범정과 권문해가 함께 지냈던 초간종택>

관련스토리 늙은 종 범정(凡丁)의 죽음 권문해 <초간일기>, 1584-01-17 ~ 1584-01-21

“ 시희(詩姬) 얼현(乻玄) ”

두 번째로 소개 할 여인은 ‘시를 짓는 계집’, 얼현(乻玄)입니다.
경상북도 봉화 안동 권씨 집안에는 어여쁜 노비가 한 명 있었습니다. 비천한 노비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빼어난 미모에 시를 짓는 재능까지 탁월했던 여종 얼현. 어려서부터 시 짓는 솜씨가 놀라워 ‘시희(詩姬)’라 불린 얼현은 고향 봉화를 넘어 예안, 안동에 이르기까지 소문이 자자했습니다. 그러나 얼현은 홀연 고향을 떠납니다.

얼현이 태어나 자랐던 봉화읍 유곡리 닭실마을과 권씨 종택 얼현이 태어나 자랐던 봉화읍 유곡리 닭실마을과 권씨 종택 <얼현이 태어나 자랐던 봉화읍 유곡리 닭실마을과 권씨 종택>

그리고 20여년이 흐른 후, 얼현을 다시 만난 건 예안에 살던 김령(1577~1641)입니다. 김령은 안동 권씨 집안의 사위로 얼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김령은 그녀와의 만남을 1625년 1월 3일 일기에 남깁니다. 이 일기를 통해 그녀가 고향을 떠난 후 어떤 삶을 살았는지 상상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625년 1월 3일. 맑음
시희(詩姬) 얼현(乻玄)은 천성(川城) 청암(靑巖) 권동보(權東輔)의 여종이었다. 20년 전에 고향을 떠나 이리저리 떠돌다가 서울에 들어와서 어떤 사람의 첩이 되었는데, 미모가 시들어 이별을 당했다. 이때 와서 나를 찾아왔고 게다가 그 시권(詩卷)도 가지고 왔다. 시어(詩語)가 매우 맑고 아름다웠다. 창석(蒼石) 이준(李埈) 어른이 때마침 왔다가 그 시를 보고 칭찬하면서 그것을 소매 속에 넣어서 돌아갔다.

얼현..., 세월 속에 미모는 시들었지만 그녀의 시는 더 맑고 아름다워진 듯합니다. 아마도 고향을 떠나 전국을 떠돌며 많은 사람들을 만나 시를 쓰고 나누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누구를 만나 어떤 시를 짓고 나누었을지 궁금해집니다.

추사(秋思)
골짜기는 물과 같고 달은 희미한데
나뭇잎은 우수수 밤새 서리 내렸구나
분홍빛 열 두 폭 발 속에 사람 홀로 자니
옥 병풍 속 원앙새를 오히려 부러워 하노라.
- 乻玄 作-

얼현은 많은 시를 지었지만, 현재까지 전해지는 작품은 단 두 편 뿐입니다. 조선 후기의 문신 임방(任房)의 시화집 ‘수촌만록(水村漫錄)’에는 얼현의 시 <추사(秋思)>와 <방석전고거(訪石田故居)>가 실려 있습니다.

관련스토리 아름다운 노랫말과 슬픈 과거를 지닌 여인, 시희(詩姬) 얼현을 만나다 김령 <계암일록>, 1625-01-03

“무덤을 파헤친 며느리”

세 번째로 소개 할 여인은 무덤을 파헤친 ‘조원열의 며느리’입니다.
이름도 없이, ‘조원열의 며느리’로 기록된 그녀의 이야기는 1806년 5월 25일 임천서당중건일기에 남아 있습니다.

1806년 5월 25일
“나천에 사는 조원열의 며느리가 투장된 무덤 3기를 파헤쳤던 일은 참으로 효도와 정열로부터 우러난 진실한 마음이었지 않습니까! 그런데 관청에서는 오히려 사건의 본질을 조사하지도 않고, 무덤을 파헤치는 일반 사건들과 동일하게 판결하였습니다. 억울한 심정에 그 며느리가 몸소 관청에 나아가 여러 날 슬피 호소하였지만 고을 원님의 마음을 돌리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어찌 불쌍하고 측은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임천서당 회원들과 사림이 마땅히 한결같은 목소리로 감영에 상소를 해야 합니다.”

이 이야기는 선산에 몰래 투장된 무덤을 입증하기 위해 무덤 3기를 파헤쳤던 조원열의 며느리에 대한 판결에 이의를 제기하는 임천서당 회원들의 의견을 담고 있습니다.

사건의 발단은 선산에 몰래 투장한 이를 관아에 고소하였던 조원열이 객사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1806년 5월 3일 산송 문제로 관아에 가던 길에 조원열이 그만 익사하게 되고, 산송 문제로 인해 객사한 시아버지의 죽음을 원통해하던 그 며느리가 몰래 투장한 피의자의 무덤 3기를 파헤쳐 관가에 고발합니다. 그러나 관아에서는 남의 선산에 몰래 투장한 사건으로 재판을 전개하지 않고, 오히려 조원열의 며느리가 무덤을 파헤친 사실을 중심으로 재판을 진행하였습니다. 또한 판결도 무덤을 파헤치게 된 앞뒤 정황을 조사하지 않고 무덤을 파헤친 일반 사건들과 동일하게 처리하게 됩니다. 이에 임천서당 회원들은 조원열 며느리의 행동이 정당함을 감영에 호소하자는 의견을 모으며 그 내용을 기록하였습니다.

임천서당 회원들의 상소로 그녀는 시아버지의 억울함을 풀게 되었을까요?

조선시대 여자로 태어나 사는 길은 아버지의 딸로, 한 남자의 아내로, 한 집안의 며느리로 존재할 뿐 온전히 여자로서의 삶을 살기 어려웠습니다. 조선의 여인에게는 ‘부필종부(婦必從夫)’를 최고의 부덕(婦德)으로 삼으므로, 며느리로서는 부자관계에 준하는 행동규범에 입각하여 시부모의 마음을 즐겁게 해드리고 몸을 편안히 돌보아드리며 몸가짐을 단정히 하여 보존하고 남편을 내조(內助)하여 입신출세할 수 있게 함으로써 가문을 빛내는 것이 효행의 길이었다고 믿었습니다.

조원열의 며느리도 그랬겠지요...

산송 관련 검안 및 입안 기록 산송 관련 검안 및 입안 기록 <산송 관련 검안 및 입안 기록>

관련스토리 시아버지의 원통함을 풀고자 투장된 무덤을 파헤친 며느리 <임천서원중건일기>, 1806-05-03 ~ 1806-0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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