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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일기

물맛도 시간에 따라, 장소에 따라 다르다.
-조선 시대의 물맛 구분-


▮ 물맛도 시간에 따라, 장소에 따라 다르다.
   -조선 시대의 물맛 구분-


물을 그 용도에 따라 여러 가지 이름이 붙는다. 우리가 마시는 식수, 불순물을 제거한 증류수, 탄산가스가 들어 있는 소다수, 광물질이 들어 있는 광천수 등이 그것이다. 여기에 이슬을 받아 만든 감로수, 첫새벽에 길어낸 깨끗하고 시원한 우물물인 정화수, 성경에 나오는 생명수 등등 한이 없다.

조선 시대 양반 집에서는 물을 12가지로 구분해 각각 다른 독에 담아두고 용도별로 사용했다. 이를테면 입춘날 받아둔 ‘입춘수’는 아들을 낳게 한다 하여 부부가 잠자리에 들기 전에 한 잔씩 들이키곤 했다. 입동 열흘 후에 내리는 빗물을 ‘약우수’라 하여 약 달이는 물로 사용했다. 자른 대나무 속에 고인 물은 ‘반천하수’하고 부르며 역시 약을 달이는 물로 사용했다.

물은 위치와 맛에 따라서도 다르게 불렸다고 한다. 서울 북악산을 중심으로 오른쪽 인왕산 줄기에서 흐르는 물을 ‘백호수’, 왼쪽 삼청동 뒷산에 흐르는 물은 ‘청룡수’, 남산에서 흐르는 물은 ‘주작수’라고 각각 이름 붙여졌다. 선비들은 물맛도 까다롭게 구분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물맛이 좋은 물로는 충주의 ‘달천수’가 꼽혔다고 한다. 오대산에서 나와 한강으로 흘러드는 ‘우중수’를 둘째로, 속리산에서 흐르는 ‘삼타수’를 셋째로 쳤다. 같은 물이라도 산꼭대기에서 나는 물과 산 밑에서 나는 물의 맛이 다르고, 바위 틈새에서 나는 물과 모래에서 나는 물의 맛이 다르다고 했다. 흙 속에서 나는 물은 맑으나 텁텁한 맛이 나는 것으로 생각했다. 고인 물보다 흐르는 물을, 양지쪽 물보다는 응달 물을 더 맛있는 물로 쳤다. 황희 정승은 무거운 물을 ‘군자물’이라 하여 맛있는 물로 꼽았다. 율곡 역시 오대산 암자의 일학스님과 함께 물맛을 보는 취미를 즐겼다. 역시 무게로 물맛을 따졌다고 한다.



약 달이는데 쓰이는 물 금강수, 살과 뼈를 찌르듯 맑고 차다

  • 출전 : 금강일기(金剛日記)
  • 저자 : 강희영(姜羲永)
  • 주제 : 놀이와 유람, 고사와 기원
  • 시기 : 1841-04-05 ~
  • 일기분류 : 유산일기
  • 인물 : 강희영, 안종하, 이천범, 경열

    1841년 4월 5일, 금강산을 유람 중이던 강희영은 이날 표훈사와 팔담, 백운대를 보았다. 백운대에서 조금 있다가 아래로 내려와서, 동쪽으로 돌아 내려와 금강수(金岡水)를 마셨다. 물이 매우 맑고 차서 사람의 피부와 뼈를 침으로 찌르는 것 같았다. 싸 온 도시락을 풀어놓고 먹은 후에, 또 석 잔의 물을 마셨다. 이 물이 약을 달이는 데 쓰인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집필자 소개

글 그림 | 정용연
정용연
주요 작품으로 가족 이야기를 통해 한국 근현대사를 그린 "정가네소사" 1,2,3 권과 고려말 제주도에서 일어난 반란을 다룬 "목호의 난1374 제주" 가 있다.


묵호의 난
스토리테마파크의 일기를
이해하기 쉽게
그림과 글로 풀어주시는
정용연 작가의 신간이 나왔습니다.

고려시대
1374 제주를 소재로 한
‘목호의 난’

“딸의 눈물과 70세 노인의 열정으로 받아낸 성주 노강서원의 봉안문”

송시열 초상(출처: 국립중앙박물관) 이우세, 노강서원성담선생추배시일기,
1820-01-30 ~ 1820-03-29

1820년 1월 그믐, 송시열·권상하를 중심으로 한 노론계 인물들이 향사된 노강서원에 송환기(宋煥箕, 1728~1807)를 추가 배향하기 위한 준비들이 진행되는 가운데, 청탁한 봉안문을 받아오기 위해 원회院會에서 이우세(李禹世, 1751~1830)의 조카 이도수(李道壽)를 권망하여 송치규(宋穉圭, 1759~1838)에게 보냈다.
그러나 2월 10일 송치규 어른이 조섭 중에 있었기 때문에 받아오지 못했다. 이로 인해 봉안 행사에 차질이 생기게 되었고, 이것에 대한 대책 논의를 하기 위해 2월 29일 노강서원에 모였다. 여러 날 머물면서 온갖 문제들을 난상토론 하였는데, 모든 이들이 이렇게 결론 내렸다.
“반드시 봉안문을 받고 영정을 받든 뒤에 바야흐로 봉안할 수 있다. 그러므로 유생 중에 노성한 사람을 뽑아서 다시 송치규 어른에게 가서 봉안문을 청해야 한다. 만약 그 분이 고사하면 부득불 서울에 가서 상서 초천(苕川) 김이양(金履陽, 1755~1845)에게 청해야 한다. 그런 뒤에야 일의 실마리가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기꺼이 가려고 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에 부득불 문도 가운데 한 사람을 가려서 보내지 않을 수 없었지만, 이것 역시 일의 성사를 보장하기가 어려웠다.(후략)

“벼루는 망실되고 시렁 위 천체관측기는 형태만 남아 있구나”

천상열차분야지도(출처: 국립중앙박물관) 권우, 유청량산록, 1660-04-05 ~

1660년 4월 5일, 권경은 도산으로 향했다. 도산(陶山)으로 말하자면 퇴옹(退翁)께서 만년에 은퇴하고 물러나 쉬던 곳이다. 푸른 협곡으로 해서 가는 중에 석천(石川)이 가로로 흐르는데, 물 흐르는 기세가 두려울 정도인지라 마침내 말을 경계하며 건너갔다. 길가에 과실이 있었으니 이 터에서 생겨난 것들이라고 하였다.
도원(陶院)을 찾으려다가 옆 계곡으로 잘못 들어갔다가 다시 나왔다가 들어가며 우경(虞卿)에게 일러 말하기를, “그대는 이미 이 길에 익숙하다고 말했으면서도 지금 이처럼 잘못 들어서 헤매고 있는가?”라고 말하곤 서로 더불어 한바탕 웃었다.
해가 저물어서야 작은 고개를 넘으니 큰 강이 비껴 흐르고 푸른 봉우리가 울창하였다. 그 아래로 바로 원택(院宅)이 보였다.
골짜기 아래 돌 위에 덥수룩한 비석 하나에 ‘석간대(石澗臺)’라는 세 글자가 새겨 있었으니, 이것은 바로 선생이 손님을 배웅할 때 늘 여기에 이르러 작별을 했기 때문에 그렇게 표시했던 것이라 한다.
마침내 원기(院祇)에 들어서 상덕사(尙德祠)에 알현하는데 갑자기 동주(洞主) 이가회(李嘉會)가 우리 행차를 듣고서 즉시 들어와서 손을 잡으니, 그 기쁨을 눈으로 표현하자니 말로 형언할 수 없을 정도라 즉시 동주(洞主)와 함께 원택의 제실(諸室)을 두루 완상하였다.(후략)

“물맛도 시간에 따라, 장소에 따라 다르다”


물을 그 용도에 따라 여러 가지 이름이 붙는다. 우리가 마시는 식수, 불순물을 제거시킨 증류수, 탄산가스가 들어있는 소다수, 광물질이 들어있는 광천수 등이 그것이다. 여기에 이슬을 받아 만든 감로수, 첫새벽에 길어낸 깨끗하고 시원한 우물물인 정화수, 성경에 나오는 생명수 등등 한이 없다.
조선시대 양반 집에서는 물을 12가지로 구분해 각각 다른 독에 담아두고 용도별로 사용했다. 이를테면 입춘날 받아둔 ‘입춘수’는 아들을 낳게 한다 하여 부부가 잠자리에 들기 전에 한잔씩 들이키곤 했다. 입동 열흘 후에 내리는 빗물을 ‘약우수’라 하여 약 달이는 물로 사용했다. 자른 대나무 속에 고인 물은 ‘반천하수’하고 부르며 역시 약을 달이는 물로 사용했다.
물은 위치와 맛에 따라서도 다르게 불렸다고 한다. 서울 북악산을 중심으로 오른쪽 인왕산 줄기에서 흐르는 물을 ‘백호수’, 왼쪽 삼청동 뒷산에 흐르는 물은 ‘청룡수’, 남산에서 흐르는 물은 ‘주작수’라고 각각 이름 붙여졌다. 선비들은 물맛도 까다롭게 구분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물맛이 좋은 물로는 충주의 ‘달천수’가 꼽혔다고 한다. 오대산에서 나와 한강으로 흘러드는 ‘우중수’를 둘째로, 속리산에서 흐르는 ‘삼타수’를 셋째로 쳤다. 같은 물이라도 산꼭대기에서 나는 물과 산 밑에서 나는 물의 맛이 다르고, 바위 틈새에서 나는 물과 모래에서 나는 물의 맛이 다르다고 했다. 흙속에서 나는 물은 맑으나 텁텁한 맛이 나는 것으로 생각했다. 고인 물보다 흐르는 물을, 양지쪽 물보다는 응달 물을 더 맛있는 물로 쳤다. 황희 정승은 무거운 물을 ‘군자물’이라 하여 맛있는 물로 꼽았다. 율곡 역시 오대산 암자의 일학스님과 함께 물맛을 보는 취미를 즐겼다. 역시 무게로 물맛을 따졌다고 한다.

“퇴계의 시에서 청량산을 읽다”

청량산 김몽화, 유청량산서

청량산은 예안(禮安)의 동북 지역에 우뚝 솟아 있는데, 퇴도(退陶) 이황(李滉) 노선생께서 왕래하며 그 가운데서 쉬었다. 이로부터 산 이름이 세상에 알려져 절 안과 문밖에 유람하는 사람들의 신발이 항상 가득하였으니 어찌 (퇴계 선생의) 고산경행(高山景行)을 사모함은 사람마다 똑같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아! 고금의 사람들이 산을 유람하는 것은 숨겨진 곳을 찾아 끝까지 탐색하고 빼어난 경치를 그윽이 감상하는 것을 상쾌하게 여기기 때문이지만, 누가 등산의 묘한 맛은 눈으로 이르지 못하는 곳에 있다는 것을 알겠는가?
생각건대, 우리 노선생께서는 산수의 즐거움으로 인하여 인지(仁智)의 취미를 드러내셨다.
그전에 (청량산)을 유람할 때 지은 시에 이르기를, 妙意祇難言(묘의기난언) 기묘한 뜻을 말하기 어려우나 佳處每獨領(가처매독령) 아름다운 곳은 매양 홀로 도맡았네.
라고 하셨다.(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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