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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이저우 이야기 (5) ]

단단함과 부드러움의 융합체,
후이저우의 살림 집 1

임세권



검은 기와, 흰 벽의 절묘한 조화


처음 후이저우의 마을에 갔을 때 눈에 들어온 것은 한여름의 밝은 햇볕 아래 눈부시게 빛나는 하얀 벽과 그 위에 얹힌 검은 기와가 이루어 낸 기하학적 추상화와 같은 풍경이었다. 그 아름다운 집합체는 하나하나의 집들이 모여 만든 흑백의 모자이크처럼 뇌리에 박혔다. 후이저우 집의 이 강렬한 인상은 청와백장(青瓦白墙)으로 표현된다. 중국인들에게 청색은 우리가 말하는 검은색을 말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청와는 검은 기와란 뜻이다. 곧 청와백장은 검은 기와와 흰 벽을 말하는 것이니 중국인에게도 이는 후이저우 집의 첫 번째 특징으로 꼽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마을 안으로 들어가 그 집들의 외관을 가까이 보았을 때 엄청난 반전이 일어났다. 아름다운 추상화 속에 개체로 들어박힌 개개의 집 앞에 섰을 때 눈앞에 보이는 것은 높디높은 거대한 담벼락뿐이었다. 벽돌로 쌓은 벽에 하얀 회칠을 한 외벽에는 창문 하나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그대로 단단한 성채이며 감옥이나 진배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문 안으로 들어가 집안을 둘러봤을 때 두 번째의 반전이 일어났다. 감옥같이 보이던 담벼락 안은 오래된 나무의 질감이 만들어낸 따뜻한 느낌과 지붕 위에서 쏟아지는 햇볕에 드러난 아름다운 조각 장식들이 한편의 판타지 드라마를 연출하고 있었다. 대문 맞은 편 청당(厅堂)으로 불리는 공간은 드라마의 주 무대이고 거기 앉아있는 집 주인들은 주인공처럼 보였다. 밖에서 보는 집의 모습이 강인한 남성이라면 안에서 보는 모습은 부드러운 여성이었다.


청와백장의 독특한 조화로 인해 마을을 멀리서 보면 흑과 백의 모자이크 작품 같다.
황산시 이현 시디(西遞) 마을


흰벽과 검은 기와의 조화, (우위엔현 홍춘 마을)


벽돌에 석회를 바른 외벽 일부가 무너져 내부의 목조 구조가 보인다. (황산시 셔현 진추안향 런펑 마을)


목재의 따뜻함이 느껴지는 집안 풍경 (황산시 이현 루춘 마을 지성당)


담장 속에 갇힌 여인들의 일생


해가 지고 종일 힘들게 일을 마치고 돌아간 집에는 따뜻한 온기가 서려 있고 지친 몸을 맞이해 주는 가족이 있다. 하루의 일정을 마무리하는 곳이고 편안하게 휴식을 취하는 곳이다.

전근대 곧, 청나라까지의 후이저우 집도 당연히 그랬을 것이지만 다른 지역과는 다른 점이 있었다. 후이저우의 집에는 부인과 아이들이 있고 할머니 할아버지도 있는데 하루 일을 마치고 돌아올 남편이 없었다. 남편은 장삿길을 떠나 일 년 내내 중국 천지를 떠돌다가 명절 때나 잠시 집에 돌아오고 얼마 지나면 또다시 기약 없는 길을 떠난다. 집에 있는 부인은 남편 대신 밭에 나가 농사를 짓고 끼니때가 되면 집에 돌아와 아이들과 늙은 시부모의 끼니를 챙겨주어야 한다. 밤에도 바느질이나 음식준비, 그 외의 여러 가지 집안일들에서 놓여날 수 없다.

반대로 외지에 나가 있는 남편의 입장에서 보면 아이들과 여자들만 있는 집이 늘 불안했을 것이다. 그래서 돈을 벌면 가족들이 안전하게 살 수 있고 또 힘들게 벌어온 돈이나 재물을 자기가 없어도 안전하게 지킬 수 있는 견고한 집을 짓고자 했다. 후이저우의 살림집을 이해하려면 이러한 그들의 사회나 가정의 문제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이런 이유로 인해 후이저우 집은 조금 특별한 데가 있다. 집의 안전을 해치는 것은 대략 세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는 자연재해다. 거센 비바람에 무너지지 않는 튼튼한 집이라야 한다. 둘째 도둑과 같은 외부의 침입을 막아야 한다. 여자들과 아이들만 있는 집에 나쁜 사람들이 들어와 사람과 재산을 해칠 위험을 사전에 방지해야 하는 것이다. 셋째 눈에 보이지 않는 나쁜 기운을 막아야 한다. 흔히 말하는 잡귀나 사악한 기운들이 침입해 들어오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그래서인지 집의 외관은 밖으로 난 창문이 거의 없이 꽉 막힌 담벼락으로 둘러싸여 있어 마치 감옥 같은 인상을 준다. 담벼락 위를 쳐다보면 아주 작은 창문이 하나 또는 둘 정도 보이긴 하는데 그것은 너무 작아서 창문으로 인식되지 않을 정도다. 집 안으로 들어가는 출입문은 오직 대문 하나뿐이다. 집들은 대개 2층이나 3층으로 되어 있는데 하얗게 회칠이 된 널찍한 벽면은 마치 거대한 캔버스나 스크린을 보는 듯하다.


단단한 돌덩이 같은 느낌을 주는 후이저우 집의 외관 (황산시 후이저우구 청칸 마을)


지붕 양쪽에 마두장이란 담이 서 있다. 창문이 없는 희고 넓은 외벽은 좋은 광고판이 되기도 한다.
(우위엔현 옌티엔 마을)


외부에서 집을 볼 때 흥미 있는 또 하나는 지붕 위에 서 있는 특이한 담벼락이다. 지붕 양 끝에는 사람 한 키 정도의 담장이 서 있다. 담의 윗부분은 수평을 이루고 있고 따라서 지붕의 경사로 인해서 계단식의 2단 또는 3단 구조를 보여준다. 담 위에는 기와를 얹었는데 담장 끝부분의 모습이 마치 말 머리처럼 생겼다. 그래서 이 지붕 위의 담장을 마두장(馬頭墻)이라 부른다. 마두장은 방화, 방풍, 방범의 기능이 있는데, 이중 방풍기능이 가장 크다고 생각된다. 이 지역의 기와는 강풍이 불면 날아갈 정도로 얇고 가볍지만, 지붕 양쪽의 마두장은 웬만한 강풍에는 기와가 날아가지 않도록 바람을 막아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곳 사람들은 마두장의 모양이 장삿길을 떠나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목이 빠지게 기다리는 형상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멀리 동구 밖을 보고 있는 마두장의 실루엣에 후이저우 여인의 슬픈 인생이 오버랩 되어 만들어진 이야기다.


석양을 배경으로 서있는 마두장,
멀리 내다보고 주인을 기다리는 말처럼 보인다. (황산시 후이저우구 청칸마을)


도둑과 귀신은 막고, 고관대작은 기죽이는 대문


집으로 들어가는 문은 오직 대문 하나다. 대문은 꽉 막힌 높은 담처럼 견고하다. 나무로 된 것이 많지만 철문도 드물지 않다. 이 벽과 문의 조합은 마치 중세 유럽의 성문을 연상케 한다. 외출할 때 외부에서 잠그는 잠금장치도 여러 개를 달아 쉽게 열지 못하게 하였지만 집안에서 대문을 잠그는 것은 정말로 성문처럼 단단하다. 잠금장치들은 매우 단단해서 아무도 문을 열 수 없을 정도로 철통 같다.

대문에서 볼 수 있는 또 다른 특별한 것은 문이 벽의 방향과 어긋나 있는 것이 많다는 점이다. 즉 벽과 대문을 삐딱하게 어긋나도록 만든 것이다. 이는 귀신이나 나쁜 기운이 길 또는 벽을 따라가다가 대문을 발견하지 못하고 지나치도록 한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예는 대문뿐 아니라 집안 내부의 방문 등에서도 볼 수 있다. 이와 비슷한 벽사(闢邪)의 의미로 대문에 거울을 달아 놓기도 하는데 귀신이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놀라서 도망간다고 한다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함께 한다.


높은 담벽에 설치된 견고한 철제 대문 (황산시 후이저우구 청칸 마을)


집안에서 본 대문. 문 양옆의 철제 고리에 굵은 나무 장대를 걸어 잠근다.
(황산시 툰시구 청다웨이 옛집)


이 외에도 마른 쑥대공을 대문에 매단 경우도 있고 또 정월에는 파를 붙여놓기도 한다. 모두 귀신을 쫓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이처럼 도둑을 비롯한 잡귀나 사악한 기운까지 못 들어오게 막는 여러 가지 방법들을 대문에서 볼 수 있는 것과 함께 정반대로 사람이 집에 찾아 올 때 어떤 경우에도 막을 수 없게 하는 장치도 있다. 쟝완 마을의 쟝런칭(江仁慶) 옛집의 대문은 두 쪽의 문이 딱 맞지 않고 가운데서 서로 겹쳐서 잠글 수 없도록 되어 있다. 이는 어떤 방문자라도 들어오는 것을 막지 않고 받아들인다는 가진 자의 여유를 뜻한다고 하니 후이저우의 집은 대문만으로도 너무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두 짝의 문이 겹쳐있어 닫히지 않는 대문. (우위엔현 쟝완 마을)


건물 벽과 어긋난 방향의 대문 위로 거울이 매달려 있다. (황산시 셔현 잔치 마을)


설을 쇠면서 파를 걸어놓은 대문 (황산시 슈닝현 리런촌)


양쪽 문짝에 쑥을 걸어놓은 대문 (황산시 셔현 위량촌)


대문을 들어서면 중문이 있다. 중문은 대문을 들어선 사람이 바로 집안을 볼 수 없도록 하는 가림벽과 같은 기능을 한다. 큰 판벽을 세우고 판벽 가운데 문을 만들어 안으로 들어오도록 하는 것이다. 그래서 중국인들은 이 문을 병문(屛門)이라고 한다. 병풍처럼 안과 밖을 가로 막았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나 이 문은 평소에는 사용하지 않고 잔치가 있거나 귀한 손님이 올 때 사용한다. 방문객들은 중문 양쪽에 기둥 사이로 나 있는 옆문을 이용해야 한다. 곧 중문은 중앙의 병문과 양쪽 옆문의 삼문(三門)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문과 중문은 하나의 건물구조를 가지고 있어 합하여 문청(門廳)이라 한다. 이런 구조는 본래 관청 건물에 있던 것으로 고위관료들이 자기 집에 권위를 과시하기 위해 만든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장사로 많은 돈을 번 상인들도 신분은 낮지만 중문을 만들어 고위관직자들 못지않은 위세를 누렸으며, 오히려 관직자들은 옆문으로 드나들게 하여 기를 죽였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황산시 이현 홍춘 마을의 승지당(承志堂)은 소금장사로 큰돈을 번 왕딩구이(汪定贵)의 저택이다. 이 집 중문의 양쪽 옆문 위에는 상(商)자 모양의 문액(門額)을 만들었는데 아무리 높은 고위관리라도 이 상(商)자 문액(門額) 밑을 통과해야 했다. 문액의 모양이 사람 가랑이처럼 생긴 탓에 고관대작도 이 집에 들어오려면 장사꾼 가랑이 밑으로 들어오도록 했다고 한다.


대문에서 중문을 통해 건물 본채의 청당을 본 모습.
평소에는 좌우의 문을 사용하고 중앙의 문은 사용하지 않는다. (황산시 후이저우구 청칸마을 루어룬쿤 댁)


황산시 이현 홍춘마을 승지당의 중문의 옆문 위에 있는 상(商)자형 문액(門額)


세상의 재물을 끌어들인 일평생의 쉼터, 천정(天井)과 청당(廳堂)


중문을 들어서면 바로 안마당이 있다. 판석이 깔린 안마당은 가운데 바닥을 주변보다 한 단 낮게 만들어 물이 고이도록 만들었다. 이것을 천정(天井)이라 하는데 후이저우 집의 가장 큰 특징으로 꼽는다. 천정 중심에 서서 하늘을 보면 천정을 사방으로 둘러싼 지붕이 만든 천정과 똑같은 면적의 하늘이 아득하게 높이 보인다. 사방의 지붕은 모두 천정을 향해 안으로 경사져 있어 비가 오면 지붕에 떨어진 빗물이 모두 천정으로 떨어진다. 이러한 설계는 내 집 지붕에 떨어진 모든 물은 집 밖으로 내보내지 않는다는 후이저우 사람들의 관념과 관련된다고 전한다. 이를 사수귀당(四水歸堂)이란 말로 표현한다. 이러한 관념은 내 집에 들어온 재물을 밖으로 내보내지 않는다는 생각과 통하는데 천정 구조가 실제로 이런 관념에서 만들어진 것이라기보다는 명‧청대에 상인들에 의해 마을이 번성하면서 형성된 이야기라고 해야 할 것이다.

천정으로 떨어진 물은 배수구를 통하여 밑으로 빠지는데 천정의 지하에 별도의 저수시설을 갖춘 곳도 있다. 또 배수구는 집안을 한 바퀴 돌아 밖으로 나가도록 하여 여름철에 집안의 공기를 식혀 시원하게 해주는 역할도 한다. 물 순환 원리를 이용한 수냉식 에어컨이다.


청칸 마을 루어룬쿤(羅潤坤) 댁의 천정


천정에서 올려다 본 하늘. 천정의 면적은 하늘의 면적과 일치한다.
청칸 마을 연익당(燕翼堂)


연익당 3층에서 내려다 본 천정


후이저우 옛집의 지붕형태. 모든 지붕경사면이 집 내부로 기울어져 있다.
우위엔현 져위엔향(浙源鄕) 링지아오춘(岭脚村) 마을


지붕으로 둘러싸인 공간이 마치 지붕위에 있는 우물처럼 보인다. 우위엔현 홍춘(洪村) 마을


중문의 맞은편에 보이는 건물 중심에는 청당(廳堂)이라고 하는 공간이 있다. 정면 판벽에는 가운데 그림 족자가 걸려 있고 그림 양쪽에는 대련(對聯) 글씨가 걸려 있다. 또 그림 위로는 집의 이름을 새긴 현판이 걸려 있다. 그림의 아래에는 좁은 선반이 설치되어 있는데 선반 위에는 시계, 화병, 거울을 반듯이 놓는다. 이 세 가지 물건에는 후이저우 사람들이 평생 동안 평안을 누리라는 기원이 담겨 있다. 이것은 중국인들이 좋아하는 같은 발음의 글자를 빌어 다른 뜻을 표현하는 차자(借字)의 풍습과 관련된다. 즉 화병의 병(甁)은 발음을 ‘핑’이라 하며 평생의 평(平)과 발음이 같다. 또 시계는 종(鐘)이라 하고 발음은 ‘종’이라 하며 마칠 종(終)과 같은 음을 가진다. 마지막의 거울은 경(鏡)이라 쓰고 발음은 ‘징’이라 하는데 고요하다는 의미의 정(靜)과 같은 발음이다. 이 세 가지 물건 즉 병(甁), 종(鐘), 경(鏡)을 다른 글자로 바꾸면 평(平), 종(終), 정(靜)이 되는데, 이는 평생종정(平生終靜) 즉, 한평생을 아무 탈 없이 편안하고 조용하게 지내다가 삶을 마치는 것이 가장 행복하다는 소망을 표현한 것이다.

청당은 손님을 청하면 응접실이 되고 제삿날이면 제청이 된다. 또 설이나 추석에 각지에 흩어져 살던 가족들이 모이면 이곳에서 함께 식사도 하고 이야기꽃을 피우는 다목적 공간이다.

청당의 양쪽에는 작은 침실이 있는데 우리 식으로 말하면 곁방이라 할 수 있다. 이 방의 창문은 천정을 향해 정면으로 나 있으며 창살의 모양이나 구조가 매우 정교하고 아름다워 집안으로 들어설 때 가장 주목을 받는 곳이다. 창문은 문 속의 문이라 할 수 있는 이중적 구조로 되어 있다. 즉 평면적으로는 창문 가운데를 뚫어 다시 작은 창을 냈다. 창문의 앞에는 아랫부분을 가리는 창판(窓板)을 붙였는데 창을 열어도 바로 외부에서 방안이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문의 형태는 결혼 전의 규수방에 많이 설치하였으므로 소저창(小姐窓)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 작은 창문은 구조도 매우 뛰어나지만 창문에 장식한 조각공예 또한 뛰어나게 아름다워 집안으로 들어서면 그 집의 예술적 향취를 가득 느낄 수 있다.


황산시 이현 루춘(盧村) 지성당(志誠堂)의 청당과 곁방의 창호.


청당의 벽면 구조.
그림이 걸린 아래쪽 선반에 시계와 화병이 있고 오른 쪽에는 큰 화병, 왼쪽에는 거울이 있다.
(황산시 이현 홍춘마을 승지당)


황산시 이현 홍춘 마을 승덕당(承德堂)의 청당 곁방에 설치된 소저창(小姐窓)


설날 가족들이 청당에 모여 식사를 하는 모습. 황산시 슈닝현 리런촌





작가소개

임세권 (포토갤러리 유안사랑 관장)
임세권
1948년 생. 1981년부터 2013년까지 안동대학교 교수로 재직했으며, 한국과 동북아시아 선사암각화와 고대 금석문 연구자로 다양한 조사‧연구를 진행했다. 1992년 2월부터 1년간 중국에 체류하면서 중국 암각화 유적 조사, 이후 2012년까지 러시아 몽골 중국 등 동북아시아 암각화 현장 조사, 1999년 8월부터 1년간 미국에 체류하면서 미국 남서부 암각화 유적 조사. 2007년부터 현재까지 중국 후이저우 지역 전통마을 조사 및 촬영 작업을 진행중이다. 2013년 9월 포토갤러리 유안사랑 개관하고, 현재 사진작가로 활동 중이다.

지은 책
<중국 변방을 가다>(신서원), <한국의 암각화>(대원사),
<한국금석문집성1 고구려 광개토왕비>(한국국학진흥원) 등이 있다.
“유생들이 모인 서원 근처, 어둠이 내린 가운데 호랑이 울음소리가 진동하다”

(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김령, 계암일록, 1611-04-26 ~
1611년 4월 26일, 칠흑같이 어두운데 호랑이 울음소리가 진동했다. 도산서원, 여강서원, 이산서원 향교의 유사들이 여강사원에 모여서 5월 11일에 열릴 소회를 논의하고 있었다.

“쌍나팔을 불어 호랑이를 쫓으며, 천길 낭떠러지 위의 삐걱대는 다리를 건너며 산으로 간다”

김도수, 남유기, 1727-09-16 ~
1727년 9월 16일 기사일에, 김도수 일행은 남여를 타고 불일암(佛日庵)에 올랐다. 승려가, “산중에는 호랑이가 많습니다.” 라고 하고는 쌍각(雙角)을 불어 앞에서 인도하였다. 길이 험하여 돌비탈을 우러러 몇 리를 올라가니 조금 평평한 곳이 나왔다. 거친 밭 몇 묘가 있다. 또 몇 리를 가니 승려가, “길이 끊어져 가마가 갈 수 없습니다.” 라고 고하여, 지팡이를 짚고 나아가니 앞에 절벽의 허리에 걸려 있는 허술한 잔교가 나왔다. 그 아래로는 천길 낭떠러지인데, 밟자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우러러 불일암을 바라보니 아득하여 구름 끝에 풍경을 매달아 놓은 듯하였다. 암자에 도착해보니, 방 가운데서 차가운 바람이 분다. 마치 귀신이 휘파람을 부는 것 같았다. 암자에서 10여 보 거리에 있는 대(臺)에는 ‘완폭대(翫瀑臺)’라고 새겨져 있다. 앞에는 향로봉(香爐峰)이 있는데 우뚝 솟은 바위가 파랗다. 길다란 폭포가 오른쪽 산등성이에서 곧바로 떨어지는데, 눈발이 흩날리듯 우박이 떨어지는 듯하며 우레가 울리고 번개가 치는 것 같다. 깊숙하고 어두워 만 길 깊이로 음침한 곳은 청학동(靑鶴洞)이라고 한다. 승려가, “고운이 항상 이 골짜기에 머물러 청학을 타고 왕래하였기에, 바위틈에 옛날에 한 쌍의 청학이 있었습니다.” 라고 하였다. 암자에 앉아서 잠시 쉬었다. 준필이 동쪽 담으로부터 와서 똘배 다섯 개를 올렸는데, 맛이 시어 먹을 수가 없었다. 작은 병을 찾아서 거듭 몇 잔의 술을 마시고 다시 나와 바위 위에 앉으니 골짜기의 바람이 솟구쳐 일어 바위의 나무들이 모두 흔들린다. 구름 기운이 넘쳐 일렁거려 마치 거센 파도가 서로 부딪히는 것 같다. 돌아와 비탈길을 따라 내려오다가 한 무더기의 호랑이 똥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것을 보았다. 종자가 놀라 눈이 휘둥그래져서 다시 쌍각을 부니 골짜기에 소리가 진동하였다.

“호랑이 때문에 문경새재가 막히다”

권상일, 청대일기,
1754-12-02 ~ 1754-12-21
1754년 12월 2일, 겨울에 들어서자 호랑이 피해가 속출했다. 들으니 문경새재에 호랑이 출몰이 잦아져 다니는 사람들이 많이 물려 죽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소문이 돌면서 문경새재를 넘어가는 사람들이 줄어들었다고 한다. 이에 상주 영장(營將)과 충주 영장이 호랑이를 잡기 위해 많은 포수를 데리고 서로 만나 의논을 했다고 한다.
문경새재를 지나온 채감(蔡瑊) 군이 와서 말하기를, 문경새재에서 호랑이에 물려 죽은 사람이 무려 40여 인이나 되고 경상도 내에서는 호랑이 때문에 죽은 사람이 무려 100여 인에 이른다고 한다. 호랑이로 인한 피해 때문에 대책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한편 충주 영장이 호랑이를 잡았는데 작은 호랑이 세 마리였고, 상주 영장은 한 마리도 못 잡았다고 한다. 경상감영에서는 문책을 피하려 군관까지 파견했는데, 만약 끝내 잡지 못한다면 장계를 올려 파면할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사실 못 잡을 만도 했다. 포수들이 모두 노숙하는데, 어느덧 15일째에 이르러 몰골들이 말이 아니라는 것이다. 한번은 큰 호랑이와 마주쳤는데, 포수가 겁을 먹고 감히 총을 쏘지 못했다고 한다. 큰 호랑이는 마치 수레를 끄는 큰 소만했다고 한다.
나중에 듣기로는 상주 영장 또한 큰 호랑이 한 마리를 잡아 감영에 보냈다고 한다. 이로써 경상감영에서도 문책은 피하게 되었다.

“비나이다, 무탈하길 비나이다 - 백두산의 산신령과 수신에게 제사를 지내다”

이의철, 백두산기, 1751-05-24
1751년 5월 24일 이의철은 백두산에 오르기 위해 갑산부를 출발했다. 선발대 1백여명은 이미 4, 5일전에 출발한 상태이고 토병, 포수 등 일행만 40여명, 말 16필이 동원되었다. 말과 가마를 번갈아 타면서 올라갔는데, 곳곳에 거대한 고목이 쓰러져 있고 무릎까지 빠지는 진창으로 인해 고생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갑산지역 사람들은 백두산에 들어가서 사냥을 할 때 반드시 산신령에게 제사를 지낸다. 이들은 노루, 사슴, 담비 등을 사냥한다. 물가에 사는 사람들은 수신(水神)에게 제사를 지낸다. 이의철 일행이 백두산에 오를때에도 제사를 지냈다. 이들은 허항령에서 장교와 하인들이 목욕재계를 하고 제사를 지냈다. 그리고 연지봉 아래에서 또다시 제사를 지냈다. 연지봉 숙소에서부터는 누구도 시끄럽게 떠들거나 농담을 하며 웃지도 않았다.
백두산에 올라 유람할 때에 운무가 갑자기 씻은 듯이 사라지자 모두 부사의 행차에 산신령이 돕고 있다고 말하였다. 맑고 쾌청한 날씨에 천지와 연지봉까지 모두 유람을 마치고 무사히 귀환하였다. 갑산 관사로 돌아오니 마을에서는 그동안 비바람이 불고 날씨가 계속 흐려서 매우 걱정하고 있었다고 했다. 이전에 백두산에 들어간 사람들 가운데 이번 행차처럼 조용하고 편안하게 인마가 병들고 죽거나 하는 사고없이 다녀온 경우가 없었다고 하였다. 이의철은 그 말이 정말 마음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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