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바로가기본문 바로가기

[ 후이저우 이야기 (10) ]

중국 최고의 조각예술,
휘주삼조(徽州三雕) - 1

임세권


삼조(三雕) 중의 첫째는 목조(木雕)


중국 사람들의 정교하고 세밀한 솜씨는 중국 내의 많은 박물관에서 확인할 수 있다. 내가 중국에서 알게 된 것 중 하나는 눈으로 알아보기 어려울 만큼 작은 것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이 크기를 가늠하기 어려울 만큼 거대한 것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박물관 전시실에서 만나는 초소형 공예유물뿐 아니라 관광기념품을 파는 가게에서 흔히 만나게 되는 손톱만 한 돌에 새긴 반야심경 같은 것으로도 눈을 의심할 만큼 경이롭다. 더구나 그것이 허름하고 조그마한 가게 안에서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알면 그 경이로움은 배로 커지게 된다.

그런데 그런 마이크로의 세계가 일반 사람들이 거주하는 살림집의 문과 벽에 가득 차 있다는 것을 보면 중국인들의 정세한 공예 솜씨는 그들의 생활의 일부였음을 알 수 있다. 적어도 100년 전 까지는. .

후이저우 사람들이 자랑하는 예술품으로 후이저우 어디를 가도 볼 수 있는 것은 크고 작은 집의 안팎에 장식되어 있는 조각품들이다. 돌에 새긴 것(石雕), 벽돌에 새긴 것(塼雕), 나무에 새긴 것(木雕), 이 세 가지를 그들은 휘주삼조(徽州三雕)라고 한다. 곧 후이저우의 세 가지 조각 작품이라는 뜻이다. .

후이저우 집은 외부는 돌과 벽돌로 견고하게 축조되었고 내부는 목재로 구성되었다. 밖에서 보면 견고한 돌집 또는 벽돌집이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부드러운 나무집이다. 그래서 돌과 벽돌에 새긴 것은 주로 집의 외부 장식에 사용되며 집의 내부에는 자연히 나무에 조각된 목조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보는 이의 눈을 의심하리만큼 정교한 맛은 아무래도 석조나 전조보다는 목조가 뛰어나다. 그래서 이번 글에서는 먼저 목조에 관해 쓰기로 하고 석조와 전조는 다음 글에서 다루고자 한다.

후이저우 지역에 명청대의 가옥이 많다고 하지만 실제 명대의 건축은 그리 많지 않다. 또 명대의 건축이라도 청대에 들어와 청나라에서 유행하던 양식의 장식들이 추가된 것이 많아 이를 구분해서 보아야 하는 어려움도 있다.


선성시 롱추안 마을의 호씨종사의 문루.
기둥 윗부분의 액방 위에서 처마 밑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조각들이 새겨져 있다.


규모와 화려한 장식으로 위세를 자랑하는 사당 건축들


후이저우의 마을은 대부분 동성마을이다. 따라서 여러 분야에서 벌어지는 마을과 마을의 경쟁은 문중과 문중의 경쟁이다. 따라서 후이저우 마을은 대외적으로 거대한 기념물들을 세워 마을의 위세를 외부로 내세우게 되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패방과 사당이다. 따라서 사당 건물은 마을에서 가장 웅장하고 화려한 건축이다. 전체 문중을 대표하는 대종사(大宗祠)는 마을 입구에서 마을에 들어오거나 마을을 지나는 사람들에게 위세를 자랑하며 마을 안에도 같은 성씨의 여러 지파(支派)들의 사당이 따로따로 건립된다. 따라서 마을 안에는 크고 작은 사당들이 다수 건립되게 되며 사당들은 모두 공공건물로서의 기능을 가지고 조상에 대한 제사뿐 아니라 문중 회의나 연희 오락 등을 하기도 한다.

문루 향당 침전 정원 랑무 등 여러 채의 대규모 건축물들로 구성된 사당은 각 문중의 위세를 보이고 또 조상들에 대한 존경심, 신들에 대한 외경 등에서 건축 자체를 최대로 화려하게 장식하게 된다. 따라서 모든 건물의 상부 즉 기둥과 기둥을 잇는 인방에서 대들보, 지붕 밑의 마루도리 등에 이르기까지의 수많은 가구재에는 여백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무엇인가의 도형들이 화려하게 채색된 채 가득 새겨져 있다. 꽃과 새, 인물, 건물, 산과 나무와 바위, 소나 말 또는 원숭이 같은 동물 등 다양한 소재들이 묘사되어 있고 추상적인 연속패턴을 보이는 장식무늬도 많이 보인다.

새김법은 아주 얕게 부조한 천조(淺彫), 부조이지만 깊이 새겨 마치 원조처럼 보이는 심조(深彫), 내부에 빈 공간을 만들면서 새긴 투조(透彫), 사방 둘레를 입체적으로 새긴 원조(圓彫) 등 다양하다. 이들은 대개 채색을 한 것이지만 오랜 세월을 지나는 동안 대부분 지워졌다.


황산시 난핑(南屛) 마을의 청씨사당(程氏祠堂) 대문의 장식들


사당에 들어가는 사람은 먼저 대문과 마주하게 된다. 대문채는 문루(門樓) 또는 문청(門廳)이라 하는 것처럼 대문 자체가 하나의 독립된 대형 건축물이다. 문루의 상부를 꽉 채운 수많은 목조 예술품들은 그 정교함 뿐 아니라 작품의 수에 있어서도 보는 이를 압도한다. 문루의 규모 자체가 거대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지붕 밑의 다양한 가구재에 새겨진 정교한 조각상들이 사당에 들어가기도 전에 사람들을 내리누르는 듯하다.

이러한 경이로운 건축의 입체적 조각 장식은 내부로 들어가면 모든 기둥과 액방(額枋), 대량(大樑), 도리 등에 빈 공간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가득 차 있다. 사당을 찾는 사람들이 사당을 보는 것은 사당에 모셔진 위패나 그 입향조와 그 집안을 중흥시킨 인물들보다는 사당의 기둥마다 들보마다 새겨진 수많은 목조 예술작품을 보는 것이 가장 큰 몫을 차지한다.

중국을 대표하는 사당 건물은 모두 후이저우에 몰려 있다. 곧 황산시(黃山市) 후이저우구(徽州區) 청칸(呈坎) 마을의 루어둥슈(羅東舒) 사당과 쉔청시(宣城市) 지시현(績溪縣) 롱추안(龍川) 마을의 후씨종사(胡氏宗祠) 그리고 우위엔현(婺源縣) 왕커우(汪口) 마을의 위씨종사(兪氏宗祠)를 제일로 친다. 이중 루어둥슈 사당과 후씨종사는 명대에 건축된 것이며 위씨종사는 청나라 중기에 건축된 것이다. 그러나 명대 건축이라도 청대를 거치면서 소목 장식의 정교한 작품의 많은 부분은 청대에 된 것이 많다.

루어둥슈 사당은 명대 건축답게 비교적 단순한 장식을 사용하며 청대 건축에서 보는 현란함은 비교적 덜하다. 그러나 사당의 맨 뒤 건물인 위패를 모시는 보륜각(寶綸閣)의 천정은 대궐 못지않게 화려하면서도 품위 있는 조각 장식들을 볼 수 있다. 보륜각의 천장 구조에 들어간 여러 부재에는 조각보다 채색화를 많이 장식했지만, 일부 보와 동자주 등의 목조 장식들은 단순하면서도 화려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특히 높은 돌기둥 위에 들보와 만나는 부분에 투각으로 새겨 붙인 기둥머리 장식은 그것이 하나의 나무를 깎아 만든 것을 믿을 수 없을 정도이다.


청칸 마을 루어둥슈 사당의 기둥머리 장식


명대의 사당 건축의 또 다른 대표작의 하나인 롱추안 마을의 후씨종사(胡氏宗祠)는 루어둥슈 사당에서 볼 수 없는 목조의 화려함을 보여준다. 특히 문루 정면의 액방에 새겨진 전투 장면의 조각은 실제 전투를 보는 듯 생생하다. 다만 너무 세밀하고 멀리 떨어져야 볼 수 있어서 눈으로 제대로 식별할 수 없는 것이 유감이다. 사진을 확대하여 보면 정교함에 놀라게 된다.

문루를 들어서서 대문 안으로 들어가면 문루의 안쪽에도 역시 같은 위치의 액방에 긴 파노라마의 그림이 펼쳐져 있다. 기둥 위에는 거꾸로 내려오는 사자상이 붙어 있는데 후이저우 지역의 사당이나 민가 주택에서 볼 수 있는 사자상 중에서도 정치함에서 뛰어난 묘사력을 보여준다. 중국의 건물 장식에서 사자가 많이 등장하는 것은 사자를 뜻하는 사(獅)와 높은 벼슬을 뜻하는 태사(太師)의 사(師)가 발음이 같아서 자손 대대로 관직에 나가기를 기원하는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롱추안 마을 후씨종사의 문루 액방 위에 새겨진 목조 장식.
수많은 인물과 전투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롱추안 마을 후씨종사의 천정밑 가구재에 새겨진 다양한 목조 장식들


롱추안 마을 후씨종사(胡氏宗祠) 향전(享殿) 기둥의 사자상


이외에 인상적인 명대 사당 건축의 목조 장식으로 황산시 후이저우구 탕모(唐模) 마을의 쉬씨지사(許氏支祠)가 있다. 상의당(尚義堂)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 이 건물은 1450년경 세워졌다고 하며 문 앞에 목패방이 서 있다. 패방이 많기로 유명한 후이저우에서도 이와 같은 목패방은 매우 귀하다. 현재는 훼손 상태가 심한데 중간의 두 기둥과 그 기둥을 버티어 주는 액방이 있어 가까스로 옛 모습을 전해준다. 이 액방에는 양 끝에 구름 사이를 날아가는 학과 달리는 사슴을 새겼고 가운데 부분에 199송이의 모란꽃을 새겼다. 그러나 문화대혁명 당시 학과 사슴은 깎여나가고 지금은 모습을 볼 수 없다. 사슴의 윤곽만 희미하게 남아 있을 뿐이다. 모란꽃과 학 그리고 사슴은 부귀를 상징하여 중국인들이 장식할 때 가장 선호하는 것들이다. 이중 중심의 모란꽃 무늬는 활짝 핀 모란꽃을 육각형의 틀로 둘로 싸고 각각의 꽃들은 다시 직선으로 연결하여 매우 아름다운 추상화 같은 연속 패턴을 만들고 있다. 꽃과 연속 다각형의 결합으로 이처럼 아름다운 도형을 만들어낸 경우를 별로 본 적이 없다.


탕모마을 쉬씨지사(許氏支祠) 상의당(尚義堂)의 목패방 액방 장식


상의당 목패방 장식 세부


우위엔현 왕커우 마을의 위씨종사(兪氏宗祠)는 청대 건륭년간(1735-96)에 세운 것으로 문루(門樓) 향당(享堂) 침전(寢殿) 희대(戱臺)로 구성된 4진식 건물이다. 이 네 채의 건물에 사용된 모든 목재와 석조 구조물들은 대·중·소 크기에 따라 여러 형태와 도안이 새겨져 있는데 모두 100여조에 이른다. 그중 대부분은 목조 작품이다. 이 집을 목조예술의 궁전이라 부르는 것이 너무 당연하게 들린다.

사당의 정문을 들어오면 널찍한 전정(前庭)이 있고 그 양쪽으로 낭무(廊廡)가 있는데 동쪽에 있는 것을 동무(東廡) 서쪽 것을 서무라 한다. 전정을 둘러싼 대문과 동서무 그리고 향당의 기둥 윗부분 액방 위에 나무에 새긴 부조(浮彫)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다. 어느 한 부분을 보아도 허술한 곳이 없고 그 정교함에 혀를 내두를 정도다. 사진은 서무에 장식된 일부다. 중심부에 언덕이 있고 언덕 앞 절벽 밑을 강물이 흐르는데 작은 배 한 척을 노인 하나가 힘겹게 젓고 있다. 언덕 위에는 소나무를 비롯해서 몇 그루의 나무가 있고 나무 위에는 새들이 앉아 있다. 나무와 새들은 그 뒤쪽의 집이나 절벽 밑의 배와 인물에 비해 엄청 크게 묘사되어 있는데 이는 이런 부조 장식에서 사용되는 독특한 원근법이 아닌가 여겨진다. 언덕 뒤쪽에 가로로 길게 전개된 마을은 기와집들이 겹겹이 들어차 있는데 창문을 통해서 공부하는 학동이 보인다. 대나무를 엮어 만든 울타리나 투창을 낸 담장들의 구체적인 묘사, 강물의 물결, 나뭇잎의 생생한 모습과 기와 한 장 한 장이 선명하게 새겨진 지붕 등이 실제 마을을 보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게 한다.

나는 이 부조를 유씨 사당 전체에 전개된 조각 작품 중에서 가장 뛰어나다고 생각한다. 대부분 투조와 원조로 새긴 것이 겹겹이 층을 이루고 있는 도형들은 현실의 어떤 마을 풍경을 정밀하게 입체 실측하여 3D 프린터로 찍어낸 것이 아닌가 의심이 들 정도다. 이 위씨종사의 목조의 화려함은 청대 건륭 시대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인정받고 있다.


왕커우 마을 위씨종사(兪氏宗嗣) 서무(西廡)의 액방 장식 일부.
투조와 심조를 사용하여 입체적인 풍경을 묘사하였다.


위씨종사 서무의 액방 오른쪽 부분을 확대한 것.
이러한 세부 묘사는 실제 현장에서는 눈으로는 잘 알아볼 수 없다.


소박한 담장 속에 가려진 화려한 생활 공간


후이저우 민간 주택은 대문 앞에 서면 대문의 위쪽은 석조나 전조의 화려한 조각들을 볼 수 있지만 문 좌우의 벽체는 아무런 장식이 없다. 따라서 후이저우의 민간 주택은 밖에서 보면 매우 소박하게 보인다. 그러나 대문 안쪽으로 들어가면서 분위기는 반전된다. 대문 밖에서의 소박하고 견고한 느낌은 집 내부의 부드러운 목재와 그 목재에 새겨진 아름다운 조각 예술품들로 인해 화려함으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더구나 대부분의 조각 장식은 붉은색, 황금색, 검은색 등 채색이 되어 있어 위에서 들어오는 햇볕에 눈부시게 빛나며 화려함의 극치를 이룬다. 대문 안으로 들어서면 안마당에 해당되는 천정(天井)에 내려서게 된다. 천정의 중심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손님맞이 공간인 청당(廳堂)과 그 양쪽에 있는 방의 창문이다. 이 창문들은 대부분 창문 밖으로 창란판(窓欄板)이라고 하는 난간이 장식된 판재가 함께 붙어 있고 창문도 문의 중심에 다시 작은 분합문을 내서 창문 속의 창문을 만드는 등 특이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이 창문의 창살과 창란판에 다양한 무늬의 장식을 하여 대문으로 들어선 사람의 눈길을 사로잡는 것이다.


이현 시디 마을 서원(西園)의 창문 장식.
방안에서 창을 열어도 아래쪽에 창란판이 있어 밖에서 안이 보이지 않아 사생활을 보호할 수 있다.


시디 마을 대부제 창문의 창란판의 장식.
천록(天鹿) 천마(天馬) 유룡(遊龍) 등 상서로운 동물들을 새겼다.


이현 루춘 마을 목조루의 창란판 장식.
윗 줄의 인물상은 옷주름과 옷자락 속에 살짝 드러난 발
또는 탁자나 창호의 섬세한 문양까지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다.
아래는 부귀와 복을 뜻하는 모란과 박쥐를 새겼다.


다시 머리를 위로 올려 보면 기둥 위에 걸린 액방에 새긴 조각 장식이 보이고 아래층과 위층의 사이에 있는 판벽에 새긴 조각들과 기둥머리에 붙은 신선상이나 사자상 등 다양한 조각 장식이 보인다. 몸을 돌려 들어온 대문을 다시 보면 대문 안쪽에 대문과 안채를 가려놓은 판벽에 설치된 병문(屛門)이 보인다. 이 문은 평소에는 사용하지 않고 닫혀 있어 판벽처럼 보이는데 병문 위에는 화려한 조각들이 부조되어 있다. 병문의 양쪽에 있는 사람들이 드나드는 문 위에 설치된 문액(門額)에도 인물상이나 또는 추상적인 선각 도형들이 새겨져 있다. 천정의 좌우에는 모두 여덟 쪽 정도의 문으로 막혀 있는데 밑에서 위까지 정교하고 치밀한 조각들로 채워져 있다.

이처럼 천정(天井) 중심에 서서 사방을 돌아보면 눈길 닿는 곳마다 아름다운 조각품들이 없는 곳이 없다. 더구나 규모가 큰 집은 이런 구조가 뒤로 두 겹 또는 세 겹으로 이어진다. 청당의 옆으로는 후청(後廳) 즉 뒤채로 통하는 문이 있고 그 문을 들어서면 또 하나의 앞에서 본 구조가 이어지는 것이다. 이런 구조를 2진식 또는 3진식이라 하는데 각각의 공간 마다 앞에서 설명한 것 같은 부조 장식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이 집은 단순히 사람 사는 주택이 아니라 그 자체가 훌륭한 미술관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황산시 이현 루춘 마을 지성당 내부.
건물 아래 위층이 화려한 목조 장식으로 가득 차 있다.


후이저우 목조를 대표하는 지성당과 승지당의 목조 장식


후이저우의 목조 장식을 대표하는 주택으로 황산시 이현의 루춘(盧村) 마을 지성당(志誠堂)과 홍춘(宏村) 마을 승지당(承志堂)을 들 수 있다. 이중에서도 후이저우에서 가장 아름다운 목조 장식 주택으로 꼽히는 것은 지성당이다. 지성당을 한 번이라도 가 보았다면 이 집의 목조 장식이 전 중국에서 가장 뛰어나다는데 이의를 달 수 없다. 그래서 지성당은 오늘날 목조루(木雕樓)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하다. 아예 집 이름을 목조루로 바꾼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마을로 가는 길에 표시된 이정표에도 루춘이라는 마을 이름 대신에 목조루라는 건물 이름만 쓰여 있기도 하다. 지성당은 그 목조 예술로 인해 이름이 목조루로 바뀌었고 루춘은 목조루를 마을 이름으로 삼은 것이다.


루춘 마을 지성당의 청당 우측 문장식.
상부 세로로 긴 문의 문살은 가운데 평안을 의미하는 화병과 부귀를 뜻하는 모란과 어우러져 있고
그 밑의 작은 장식 조각은 아이들이 대보름날 놀이하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가장 밑의 큰 그림은 신선들이 그림을 감상하고 바둑을 두는 신선도다.


홍춘 승지당은 지성당과는 또 다른 목조 예술의 보고라고 할 수 있다. 유명한 장식으로는 대문 안쪽 병문 위에 있는 백자뇨춘도(百子鬧春圖)를 들 수 있다. 이 그림은 정월 대보름 날 밤에 백 명의 아이들이 용등과 어등 사자 등을 만들어 춤을 추며 노는 것을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한 것이다. 중국 목조 예술품의 최고봉으로 꼽을 수 있다. 여기서 사자는 앞에서 말한 대로 고위관직을 뜻하며, 물고기는 어(魚)와 넉넉하다는 여(餘)의 발음이 같아 풍요를 의미한다.


홍춘 승지당의 대문 안쪽 병문(屛門) 위에 장식된 백자뇨춘도(百子鬧春圖).
대보름에 아이들이 북을 치고 용등을 들고 골목을 누비며 노는 장면이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승지당 백자뇨춘도의 일부


백자뇨춘도 아래에는 복(福)자를 마름모꼴에 새겨 걸었는데 마름모의 네 귀에는 박쥐가 장식되어 있다. 박쥐는 편복(蝙蝠)이라 쓰는데 이때 복(蝠)이 행복을 뜻하는 복(福)과 같은 음이기 때문에 박쥐는 복의 상징이 되었다. 그래서 박쥐는 중국인들이 가장 선호하는 장식무늬가 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목가구의 손잡이 등에서 많이 볼 수 있는 박쥐문은 중국에서 들어온 것이다.

후이저우 주택에서 볼 수 있는 목조 장식에는 이러한 우의적 표현이 많다. 이현 시디 마을 광고재(曠古齋)에 있는 사슴과 원숭이의 목조 장식 또한 마찬가지다. 사슴(鹿)은 '루(lu)'라고 읽는다. 이는 관직자의 급여를 뜻하는 록(祿)과 같다. 그래서 사슴은 관직에 진출한 사람의 봉록 의미를 갖는다. 중국인 특히 후이저우 사람에게 인생의 목표는 봉록을 받는 것이다. 그들에게 사슴은 인생의 목표를 뜻한다. 원숭이를 뜻하는 후(猴)는 '허우(hou)'로 읽으며 벼슬을 의미하는 '후(侯)'와 발음이 같다. 곧 높은 벼슬을 하고자 하는 염원이 원숭이에 빗대 표현되는 것이다.


원숭이와 사슴을 새긴 시디마을 광고재(安徽省 黃山市 黟县 西递村 曠古齋)의 문 장식


이렇게 우의적 표현으로 고위관직자가 되고자 하거나 큰 부자가 되고자 하는 염원을 나타내는 것 이외에 중국 고사의 한 장면을 새기는 경우도 많이 볼 수 있다. 승지당의 후청(後廳) 액방에는 당나라 분양왕(汾陽王) 궈쯔이(郭子儀)의 그림이 새겨져 있다. 궈쯔이는 고위 관직에 오르고 또 자식을 많이 낳았을 뿐 아니라 오래도록 행복하게 산 인물로 유명하다. 그래서 그는 복(福) 록(祿) 수(壽)를 상징한다. 이 외에도 삼국지연의나 홍루몽 등의 이야기가 조각 작품으로 표현된 것도 자주 볼 수 있다.


승지당 후청의 궈쯔이상수도(郭子儀上壽圖)


황산시 이현 난핑 마을의 빙릉각(氷凌閣)이라는 집은 북방의 사합원 형식으로 지어진 집으로 안채로 들어가는 문을 월문(月門)이라고 부르는 원형문으로 만들었다. 문의 상하 네 귀에는 목조 사자상이 배치되어 있고 문 상반부 둘레에는 꽃에서 꿀을 빠는 나비가 묘사되어 있다. 이러한 사합원식 건축은 후이저우에서 그리 흔하게 볼 수 없고 안채로 통하는 월문도 흔치 않다.

사랑하는 사람끼리 결혼을 하지 못하고 강제로 다른 남자에게 시집가게 된 사랑하는 여자가 결혼을 피하고 죽음을 택하자 여자의 무덤으로 들어가 함께 죽어 한 쌍의 나비가 되었다는 중국의 전설이 있다. 이 이야기로 인해 나비는 변치않는 사랑과 자유의 상징이 되었고 많은 전통문양에 등장한다. 그래서 이 나비문양을 행복과 행운을 가져오는 의미로 집안에 새겨 넣는 것이다.


황산시 이현 난핑마을에 있는 빙릉각 월문의 나비문양 장식


서호육경(西湖六景)을 묘사한 난핑 마을 빙릉각의 문 장식.
남종산수의 정적이고 사색적인 강안 풍경이 멀리까지 펼쳐지고
버드나무 밑 정자에서 책을 읽다 잠깐 창밖의 풍경에 취한 듯한 선비의 표정이 읽힌다.


마지막으로 후이저우 민가의 목조 예술을 말하면서 꼭 소개하고 싶은 것이 있다. 300년의 역사를 가진 이현 시디 마을 동원(東園)의 학당청(學堂廳)이다. 학당청은 공부를 하는 건물이라고 할 수 서재의 일종이라고 보면 된다. 여기는 동 서로 나누어진 두 개의 방이 있는데 동방(東房)과 서방(西房)으로 부른다. 이 두 개의 방문은 후이저우 전체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방문으로 손색이 없다. 동방의 방문은 사각의 문틀을 크게 만들고 다시 그 안에 상하로 긴 팔각의 분합문을 만들었다. 바깥 문틀과 안쪽 분합문 모두 빙렬문(氷裂紋)이다. 외부의 문틀과 내부의 팔각문은 같은 문양이지만 두꺼운 경계선과 분합문의 중심에 만들어지는 수직선으로 인해 좌우로 나뉜다. 그런데 내 외부의 문판에 만든 빙렬문을 자세히 보면 그것들이 완벽하게 좌우대칭을 이루고 있다. 빙렬문 자체가 마치 무질서한 집합체처럼 보이지만 그들을 완벽한 좌우대칭으로 만들고 있는 것은 매우 정밀하게 계산된 디자인 작업의 결과물이라 하겠다. 빙렬문은 ‘한창고독(寒窓苦讀)’ 즉 추운 가운데 힘들게 공부하여 성공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또 빙렬문의 형태가 매화 가지와 같아 매화를 상징하기도 하는데 매화의 향기는 추울수록 멀리 가고 매화는 추운 곳에서 자라서 봄에 꽃을 피우지만 어려워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는 이야기와도 연관되어 선비의 꼿꼿한 지조를 상징하기도 한다.


시디 마을 동원 학당청의 동방문(왼쪽)과 서방문


서방의 방문은 얼핏 동방과 비슷한 구조로 보이지만 동방과 달리 이중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안쪽에 장식 없는 판문으로 분합문을 만들고 그 바깥으로 다시 투각으로 장식된 문틀을 만들었다. 이 투각문틀은 가운데 출입 공간이 비어 있고 사각형의 둘레를 회문(回紋)이라고 부르는 소용돌이무늬를 기본으로 하고 출입 공간 상부를 박쥐 날개 형태로 장식하여 돌렸다. 따라서 이방에 들어가려면 박쥐 날개 밑을 통과하는 것처럼 디자인된 것이다. 박쥐는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박쥐를 뜻하는 편복(蝙蝠)이라는 말의 복(蝠)이 복(福)과 같은 말로 보아 복을 가져오는 의미로 사용된 것이다. 두 개로 나누어진 공부방의 문이 하나는 추운 겨울을 나는 매화처럼 인내심을 가지고 공부하여 성공하라는 의미를 표현했고 또 하나는 그렇게 공부하면 복이 내릴 것이라는 상징을 표현한 것이다. 중국인의 학문 목표가 어디 있는지 매우 현실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후이저우 민가 건축에서 보는 목조 예술의 아름다움은 위의 예를 가지고는 그 끄트머리 한쪽도 잡기 어렵다. 홍춘 마을의 승지당 한 곳에 있는 목조 장식만 해도 책 한 권으로 다 소개하기 힘들 정도다. 또한 수많은 작품들은 모두 각각의 이야기를 지니고 있다는 것도 놀랄만한 일이다. 후이저우 건축은 그대로 이야기의 보물창고이기도 하다. 나는 중국 고사에 밝지 못하니 그 그림들을 보고 무슨 이야기인지 알지 못해 읽는 사람들에게 일일이 소개하지 못하는 것이 유감스럽다. 그러나 이야기를 알지 못한다고 해도 그 조각 작품들의 아름다움을 보는 눈요기라도 할 수 있으니 다행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작가소개

임세권 (포토갤러리 유안사랑 관장)
임세권
1948년 생. 1981년부터 2013년까지 안동대학교 교수로 재직했으며, 한국과 동북아시아 선사암각화와 고대 금석문 연구자로 다양한 조사‧연구를 진행했다. 1992년 2월부터 1년간 중국에 체류하면서 중국 암각화 유적 조사, 이후 2012년까지 러시아 몽골 중국 등 동북아시아 암각화 현장 조사, 1999년 8월부터 1년간 미국에 체류하면서 미국 남서부 암각화 유적 조사. 2007년부터 현재까지 중국 후이저우 지역 전통마을 조사 및 촬영 작업을 진행중이다. 2013년 9월 포토갤러리 유안사랑 개관하고, 현재 사진작가로 활동 중이다.

지은 책
<중국 변방을 가다>(신서원), <한국의 암각화>(대원사),
<한국금석문집성1 고구려 광개토왕비>(한국국학진흥원) 등이 있다.
“유생 한난무가 거짓 고변의 벌로 유배를 가다”


황사우, 재영남일기,
1520-08-01 (윤) ~ 1520-08-20 (윤)
1520년 윤8월 1일, 경상도 의령지역 유생인 유학(幼學) 한난무(韓蘭茂)라는 사람이 경상도 병영으로 가서 임금께 친히 아뢸 일이 있다고 하여, 경상도병사가 칼을 씌어 올려 보냈다. 한난무가 사정전(思政殿)에 들어가서 친히 아룀에 임금이 남곤, 이유청, 손주, 심정을 불러 참석하도록 명령하고 명패(命牌)를 내보냈다. 그런데 말한 바가 사실이 아니어서 의금부에 하옥시켰다.
윤8월 2일, 의금부에서 한난무의 공초(供招) 사실을 아뢰었다. “나이는 43세입니다. 제가 지난 5월에 집 앞 길가에 앉아 있는데, 이름은 알 수 없고 나이는 18~19세 가량 된 중이 지나가기에 잠깐 쉬어가도록 청하였습니다.”(중략)
윤8월 6일, 의금부에서 아뢰기를 “한난무가 두 차례 형벌을 가해도 자백하지 않으니, 형벌을 더해서 실상을 파악함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자 그렇게 하라고 윤허하였다.
윤8월 12일, 의금부에서 한난무와 중이 시골에 살면서 요망한 말을 곧이듣고 고변한 죄를 아뢰고, 곤장 100대를 쳐서 2000리 밖으로 유배시키는 법을 적용하였다.
윤8월 20일, 한난무에게 곤장 100대를 쳐서 2000리 밖으로 유배시키는 형벌을 시행하여 평안도 용천 땅으로 유배를 보냈다.

“죄의 무겁고 가벼움에 따라 유배지의 거리가 다르다”

민백상 영정. 서울대학교박물관 소장
조재호, 영영일기, 1751-07-20 ~
1751년 7월 20일과 21일 이틀에 걸쳐 모두 8명의 죄인이 경상도 각처로 유배를 오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먼 거리로 유배를 간 죄인은 거제도로 유배 온 전임 경상감사인 민백상이다. 거리가 먼만큼 죄도 그만큼 무거운 것이다.

“귀양온 두 명의 관리, 평생의 소원인 백두산에 함께 오르다”

백두산정계비
서명응, 유백두산기,
1766-05-21 ~ 1766-06-16
1766년(영조 42) 5월 21일 영조는 서명응에게 특교를 내려 홍문관록을 주관하라고 하였다. 홍문관 부제학이었던 서명응은 마땅히 이 일을 주관해야 했지만 받아들이지 않았다. 두 번째 명도 어기고 나아가지 않았다. 영조가 유지를 내려 “만약 행하지 않는다면 신하로서 갖추어야 할 절조가 없는 것이니 무엇을 애석히 여기겠는가?”라고 질책했다. 세 번째 명을 내렸지만 서명응은 역시 응하지 않았다. 결국 서명응은 갑산부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영조는 조엄(趙曮)을 대신 부제학으로 삼았다. 그러나 조엄도 나가지 않았다. 영조는 조엄을 삼수부에 귀양보내도록 명하였다. 귀양가던 날 두 사람이 동문 밖에 나왔다. 전송하는 사람들은 서로 바라볼 뿐 이별을 나눌 수 없었다. 땡볕 더위에 빨리 달려 누원(樓院)에서 상봉하였다. 여기서부터 갈 때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였지만, 잘 때는 반드시 이웃하였다. 대략 13일 만에 유배지에 도착하였다.
서명응은 조엄(趙曮)과 함께 평생 소원인 백두산에 오르기로 했다. 6월 10일 서명응, 조엄, 갑산부사, 산수부사 외에 수행원을 포함한 1백 여명은 갑산부를 출발하여 운총진(雲寵鎭), 보다산(寶多山), 서수라덕령을 넘어 심포(深浦)에 도착했다. 지세가 매우 험하고 가파를뿐 아니라 숲이 울창해 도끼로 나무를 베어 넘어뜨리면서 갔지만 말도 사람도 모두 지나기 힘들었다. 12일 심포를 출발해 자포령을 넘고 어수참(魚水站)에 도착했다.
13일 삼수와 갑산의 척추이자 백두산과 소백산의 출입문인 허항령, 무지봉에 도착하니 백두산이 눈앞에 보였다. 서명응과 조엄은 안내자의 말을 듣지 않고 길을 재촉하다가 되돌아왔는데, 동행한 수행인의 말에 따라 산신에게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14일 백두산에 오르는 길에 백두산정계비를 보니 당시 박권과 이선부의 실책으로 잃은 두만강 인근 700리땅을 생각하니 인해 탄식이 절로 나왔다.
날씨가 쾌청하여 백두산 정상의 장엄한 주변경관을 모두 볼 수 있었다. 연못과 주변 봉우리들에 마땅한 이름이 없기 때문에 이름을 짓기로 했다.

“김성극이란 사람이 허탄한 말로 일가 사람을 곤경에 빠뜨리다”

류의목, 하와일록, 1801-01-08 ~
1801년 1월 8일, 조금 맑은 날이었다. 얼마 전 향교에 시를 쓸 때, 서인들에 대한 불편한 마음을 표현하였다가 역모로 몰릴 뻔한 김광제 어른이 온성의 유배지로 출발하였다고 한다. 다행히 역모의 혐의는 벗어 죽음은 면하였지만, 노구를 이끌고 온성까지 유배를 떠나는 것이 쉬운일은 아닐 터였다. 그런데 들리는 이야기로, 풍기 고을에 도착하자 그곳 수령이 사뭇 정성스럽게 대접해 주었다고 한다. 풍기 수령의 배려로 유배를 떠나는 마음이 다소나마 외롭지 않을 수 있을 듯 하였다.
오늘 망정 할아버지가 와서 이웃 고을의 김성극이란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그자는 사람됨이 매우 허탄해서 과장하고 거짓말 하는 것을 일삼는 무리였는데, 관아의 사람들과도 가깝게 지냈다고 한다. 그런데 그가 예안 수령을 만나보고는 ‘장시경이 우리 집안 사람의 집에 와서 묵고 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가 떠날 때에는 노자까지 갖추어 보냈습니다’ 라고 이야기하였다. 장시경은 얼마 전 역모로 몰린 대역죄인인데, 그가 찾아와 묵고 갈 정도로 가까운 사이라면, 필시 이것은 작은 일이 아닌 것이었다. 이에 예안 수령이 크게 놀라서 장계를 써서 경상도 감영에 통지하였다.
감영의 영장은 처음에는 이 사실을 무마시키려고 시간을 끌고 있었는데, 이 김성극이란 자가 다시 감영에 들어가 영장을 직접 만나보고 오래 이야기를 나누었다. 영장이 근래 듣기에 자네의 일가붙이 중에 장시경이 찾아와 묵고 간 집이 있다 하던데 사실인지 물었다. 그러자 김성극이 그러한 일이 있다고 대답하고는, 자신의 친척인 김성벽과 도선, 그리고 몇 사람의 이름을 이야기하였다 한다. 이후 이야기를 마치고 김성극이 나갔는데, 영장이 즉시 명령하여 그를 잡아들이고, 아울러 그가 이야기했던 사람들도 모두 잡아들이도록 하였다.
영장이 이들에게 친히 심문하여 그러한 일이 있는지 물었는데, 모두들 한결같이 사실무근이라고 대답하였다. 대답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조리에 맞고 한결같아서, 영장이 보기에도 이것은 무고인 듯 하였다. 이리하여 이들을 풀어주고 즉시 장계를 써서 보고하였다고 한다. 들으니 이 김성극이란 사람은 일가를 곤경에 처하게 하려고 없는 말을 지어낸 것 같은데, 곤장 25대를 맞고 풀려났다고 한다. 자칫 일가친척을 역모에 연루시킬뻔한 죄인인데, 25대는 너무 가벼운 처벌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대마도 유배 의병들, 일본 관헌이 강압적으로 머리를 깎이고 복색을 바꾸려 하자 이에 저항하다”

둔헌(遯軒) 임병찬(林炳瓚)
임병찬, 대마도일기, 1906-07-09 ~
1906년 7월 9일, 오후에 한동안 최익현, 임병찬과 홍주 의병들은 시를 읊으며 상호간 교감하면서 동지 의식을 확인하였다. 그러나 이도 잠시였고 곧이어 이들을 감시하던 일본군 경비대대의 대대장, 중대장이 병정 4-5명을 대동하고 교사로 찾아왔다. 잠시 화기애애했던 분위기는 다시 긴장 가득한 분위기로 바뀌었다.
중대장은 병사들을 시켜 의병장들 신체의 이상 유무를 검사한 다음 일본어로 명령했다. 통역에 의하면 일본군의 장관이 왔으니 경례를 해야 하니 관을 벗으라는 명령이었다. 최익현은 대노하여 일본군 장교들을 꾸짖었고 통역은 다소 난감해하면서 최익현의 말을 하나하나 일본군 장교들에게 전달했다. 통역의 말을 다 듣고 대대장은 의병장들의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 중대장을 시켜 재차 지시에 따를 것을 명령했다. 중대장은 앞으로 나와 다음과 같이 의병장들에게 말했다.
“너희들은 일본(日本)이 주는 밥을 먹었으니 일본의 명령을 좇아야 할 것이다. 관(冠)을 벗으라면 관을 벗고, 머리를 깎으라면 깎아 명령대로 시행할 것이지, 어찌 감히 거역한단 말이냐.”
일본군 장교들의 말을 통역이 전달해주자 최익현은 들은 채도 하지 않았다. 최익현에게서 아무런 반응이 없자 중대장은 병정들에게 눈짓하여 의병장들의 의관을 벗기고자 하였다. 그러나 최익현은 노기어린 표정으로 일본 병정들을 제지하였고, 병정은 장교의 명령을 이미 들은지라 총 머리로 위협하며 자신들의 의도를 관철시키고자 하였다. 최익현은 그럼에도 꼿꼿하게 앞으로 나와 큰 소리로 병정에게 그 총으로 자신을 찌르라고 외쳤다.
일본군 장교들은 상대가 녹록치 않은 것을 알고 일단 오늘은 그냥 돌아가고자 하였다. 하지만 최익현은 이들에게 예를 표하지 않았고 자리에 앉은 그대로 꼿꼿하게 있었다. 일본 병정 두어 사람이 좌우에서 끌어 일으켜 세우고자 완력을 쓰니 여러 의병장들이 이를 뜯어 말렸다. 일단 최익현이 노구인지라 더 심하게 구속하면 무슨 사단이 날것 같자 일본군 장교들은 병정들에게 그만 둘 것을 명하고 그냥 자리를 떴다.
최익현과 의병들은 일본군이 예를 다해 대접하지 않은 것을 통탄하였다. 특히 임병찬은 노구인 스승이 저리도 당당하게 나서는 것에 경외감을 느끼면서도 혹여나 신상에 무슨 문제가 있지는 않을까 조마조마해 했다. 그럼에도 최익현의 태도는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으며, 이러한 최익현의 모습은 다른 의병들에게도 큰 감명을 주었다. 일본 측의 부당한 대우에 언제든지 맞서고자 하나 둘 마음을 단단히 먹고 맞서고자 하는 분위기가 일었다.

닫기
닫기
관련목록
시기 동일시기 이야기소재 장소 출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