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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

‘억울함을 없게 하라’ – 무원록(無寃錄)

하해빈


이번 호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에서는 조선시대 법의학과 관련하여 무원록에 대해서 알려드리려고 합니다. 무원록은 중국 원나라 왕여가 송나라의 형사사건 지침서들을 바탕으로 편찬한 법의학서입니다. 이를 조선의 실정에 맞게 고친 것이 신주무원록(新註無寃錄)과 증수무원록(增修無寃錄)입니다. 증수무원록과 함께 조선의 형법서인 정약용 선생의 흠흠신서(欽欽新書)도 있습니다. 무원록과 흠흠신서에 대해서 한국국학진흥원 김형수 선생님과의 인터뷰를 통해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Q1. 무원록은 어떤 책인가요?


송·원 시대는 중국 역사상 검험 제도가 완전하게 정비되는 시기로 인명 사건이 발생하면 검험을 하게 하여 공정한 재판이 이루어지도록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송나라는 한민족이었으나 원나라 때는 몽고족 한족 등 다양한 민족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무원록은 중국 원나라 왕여(王輿)가 편찬한 법의학서이자 법률서입니다. 중국 송나라 때의 법의학서인 <세원록(洗寃錄)>과 <평원록(平寃錄)> <결안정식(結案定式)> 등과 앞 시대의 법의학서를 종합하여 편찬하였습니다. 왕여가 무원록을 쓴 시기가 1308년이라고 하는데요, 1308년에는 원나라가 법령개편과 조직개편으로 몽골법령에 한족시스템을 수용하게 된 시기입니다. <무원록(無寃錄)>의 의미는 ‘억울함을 없게 하라’ 입니다.


Q2. 무원록의 저자는 누구인가요?


무원록의 저자는 왕여입니다. 원나라에서 왕여는 관직에 올라 성실하게 일을 하여 기근으로 백성들이 굶어 죽을 때 이들을 살리는 데 큰 공을 세워서 진급하였습니다. 이후 그는 가는 곳마다 반역, 살인 등의 크고 중대한 범죄를 다스리는 사건을 명쾌하게 해결하였다고 합니다. 관직에서 물러난 뒤 산림에 은거하면서 여생을 마쳤다고 전해집니다.


Q3. 무원록을 조선으로 가져와 재해석한 책이 <신주무원록>과 <증수무원록>인데요, <신주무원록>과 <증수무원록>에 대해서 소개해주세요.


무원록은 조선 전기부터 사용하였는데요, 세종은 제도와 법률을 정비하는 작업의 하나로서 최치운에게 해석하도록 하여 <신주무원록(新註無寃錄)>을 간행하고 실제 검시 등에 이용하게 하였습니다. 신주무원록의 구성과 내용을 보면, 상권은 17항목으로 시체검안에 관한 규정과 원나라의 검험판례문이 실려 있습니다. 하권은 43항목으로 시체검험의 구체적인 방법이 있습니다. 이 책은 이후 18세기 <증수무원록>이 간행될 때까지 조선 시대 검시의 표준 서적으로 기능했습니다. 그러나 원서 자체가 이해하기 힘들거나, 조선의 실정에 맞지 않는 점이 많았습니다.


          신주무원록 (출처 : 규장각)                            증수무원록언해 (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그래서 영조 때 <신주무원록>을 토대로 이를 다시 써 1792년(정조 16) 교서관에서 3권 2책의 <증수무원록언해(增修無寃錄諺解)>가 간행되었으며, 1796년(정조 20) <증수무원록대전>이 간행되었습니다. 구윤명 등이 편찬한 <증수무원록대전>을 1790년(정조 14) 정조의 명으로 서유린 등이 언해하여 1792년 간행하였습니다. 중국 원나라 왕여의 <무원록>를 기초로 하여, 시체의 시기적인 변화에서부터 사인 규명에 이르기까지 법의학적 감정을 필요로 하는 각종 사항과 검사 자료, 검안서식(檢案書式)의 수속, 절차 등이 기록된 법의학서로 정비하게 됩니다. <증수무원록대전> 원문에 설명을 달고, 본문에 한글과 한자를 함께 썼으며 어려운 말은 도움말을 달았습니다.


Q4. 무원록의 주된 내용은 검시라고 하는데요, 검시란 무엇인가요?


검시는 사람의 사망이 범죄로 인한 것인가를 판단하기 위하여 수사 기관이 변사체를 조사하는 일입니다. 지금과 다르게 조선 시대 검시의 핵심은 시체의 안색을 관찰하는 방법이었습니다. <무원록>의 검시 방법은 겉으로 드러나는 사체의 상태를 중요시하기 때문이죠. 죽음의 원인에 따라 사체의 색은 매우 다르게 나타나기 때문에 안색을 파악하는 일은 매우 중요했습니다. 검시 기술이 안색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으므로 안색을 위장하여 타살의 흔적을 제거하는 기술도 발달하였습니다.


시체검안문서 (출처 : 경기도 박물관)



이조이 검시 기록 (출처 : 국립한글박물관)죽은 이조이(李召史)의 시체에 대한 검시 기록으로 복검(覆檢)한 것에 대한 조사 경과를 기록한 발사(跋辭)를 베껴놓은 것. 관인 및 회사관(會査官) 등의 서명이 없고 문서의 끝에 ‘등조(謄照)하나니라’로 끝맺어 본래 문서를 베껴놓은 것임을 알 수 있음.



또한 상흔을 위장하지 않았다 해도 사체가 외부에 노출되어 시일이 오래 경과된다면 시체에 나타나는 얼룩이 잘 드러나지 않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원래 피부가 검붉은 사람은 더욱 흔적을 잘 살필 수 없었습니다. 이 경우 활용된 것이 바로 법물들이었습니다. 법물이란 검시에 활용되는 보조 도구 및 수단들로 널리 알려진 것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독을 검사하기 위한 은비녀라고 볼 수 있습니다.


Q5. 조선에서도 살인사건을 심리하는데 필요한 지침서가 있습니다. 바로 정약용 선생님의 흠흠신서(欽欽新書)인데요, 흠흠신서는 어떤 책인가요?


흠흠신서는 정약용의 대표적 저서이자 형법서입니다. 정약용은 살인 사건의 조사, 심리, 처형 과정이 매우 형식적이고 무성의하게 진행되는 것은 사건을 다루는 관료 사대부들이 대명률의 법조문에 밝지 못하고 사실을 올바르게 판단하는 기술이 미약하기 때문이라고 여겼습니다. 이에 따라 생명존중 사상이 무디어져가는 것을 안타까워했는데요, 이를 바로잡고 계몽할 필요성을 느껴 책의 집필에 착수한 것이고, 1819년(순조 19)에 완성 1822년에 간행되었습니다.


흠흠신서 (출처 : 대한민국역사박물관)



흠흠신서는 경사요의(經史要義) 3권, 비상전초(批詳雋抄) 5권, 의율차례(擬律差例) 4권, 상형추의(詳刑追議) 15권, 전발무사(剪跋蕪詞) 3권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경사요의>는 살인사건을 처리하는 기본원칙과 다른 나라의 선례를 뽑아서 제시하고 있습니다. <비상전초>는 중국의 판례를 비판적으로 고찰하였습니다. <의율차례>는 중국의 모범적인 판례를 체계적으로 분류, 제시하여 참고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상형추의>는 정조의 판례를 가지고와 의견과 비평을 덧붙였습니다. <전발무사>는 정약용이 본 사례를 소개하고 비평과 해석을 해놓았습니다.


Q6. 조선 시대에 무원록과 흠흠신서는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나요?


조선 시대에는 살인사건이 일어나면 지방관의 주도로 사건을 처리하게 됩니다.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와서 검시를 하는데요, 경상도의 경우 훈도(訓導)와 심약(審藥), 검률(檢律)이 파견되었습니다. 훈도의 경우 형조에 있는 율학청에서 법률교육을 담당하는 사람입니다. 심약은 조선 시대 궁중에 바치는 약재를 감시하고자 팔도에 파견하던 관리인데요, 약 전문가입니다. 검률은 조선 시대 율학청에 소속된 종 9품의 관직으로 법률의 해석과 인용, 적용법조의 확정 등의 업무를 관장하였습니다.

<신주무원록>, <증수무원록> 등 조선 시대 편찬된 법의학서는 원나라의 <무원록>에 기반을 두고 있지만 조선의 실정과 검시 사례에 기반을 두어 체계적으로 발전시켰습니다. <흠흠신서>는 율학 연구서이며 동시에 살인사건을 심리하는데 필요한 실무 지침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 법의학은 매우 체계적이며 과학적인 방법으로 통해 어떤 죽음도 억울함이 없어야 한다는 가치를 지켜나갔던 것으로 보입니다.


조선 시대 검시 장면(좌)과 검시 결과 기록물(우) (출처 : Kocca)



    리  :  하해빈 (한국국학진흥원 국학정보센터)

도움말  :  김형수 (한국국학진흥원 기록유산센터 수석연구원)

“기질이 억세고 싸움하기 좋아하는 안음현에서 살인사건이 나다”

조재호, 영영일기, 1751-06-18 ~

1751년 6월 18일, 오후 3~4시경 안음현(安陰坼) 고현면 기찰(譏察)인 김태건(金太巾)과 북리면 기찰인 구운학(具云鶴)이 살인사건이 났음을 신고하였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도기찰(都譏察) 김한평(金漢平)과 사후(伺侯) 김동학(金東鶴)과 더불어 지대면(知代面) 수망령(水望嶺)을 넘어 관가(官家)에 들어오던 중, 행차가 장수사(長水寺) 뒤에 이르렀을 때에 갑자기 도적 10여명이 불쑥 나타나 도기찰과 사후를 난타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김태건과 구운학 두 사람은 몸을 피해 달아나 사건을 고할 수 있었으나, 아마도 그 사이에 도기찰 등은 분명히 운명할 지경이 되었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이 말을 들은 안음현감은 매우 놀라 위의 변고(變故)를 고한 김태건과 구운학 등을 우선 잡아가둔 후에 사실을 조사하기에 이른다. 한 명도 아니고 두 명이 함께 죽은 데다, 죽은 사람이 민간인이 아닌 군관인 도기찰이란 점에서 예사롭지 않으며, 더욱이 도적 10여 명이 출몰하였다 하니 큰 사건으로 예상되는 것이다.

“은비녀와 흰밥을 이용해 시험하니 독살은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조재호, 영영일기, 1751-06-19 ~

1751년 6월 19일, 검시결과 김한평(金漢平)과 김동학(金東鶴) 두 사람 모두 시험으로 은비녀를 사용하니 비녀의 색깔이 변하지 않았다. 또한 흰밥 한 덩어리를 입 안에 넣었다가 도로 꺼내어 닭에게 먹였는데 닭이 또한 죽지 않았다. 이것으로 보아 독살은 아니라는 것이 밝혀졌다.

“신주무원록에서 밝힌 격식에 따라 시장에 검시 내용을 기록하다”

『신주무원록』
(출처 :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조재호, 영영일기, 1751-06-19 ~

1751년 6월 19일, 처음에 덮었던 포대 2장을 제거하니 다음으로 베적삼 하나, 다음으로 무명 바지 하나 등의 옷이 입혀져 있었다. 머리를 동쪽으로 하고 발을 서쪽으로 하고 전면(前面) 이 되도록 눕히고는 오작(件作) 양인(良人) 하순걸(河順乞)로 하여금 차례차례 벗기고 돌려 눕혀 법물(法物)로 몸을 씻기게 하고 여러 가지 사항을 검시하였다.
나이는 35, 36세가량 남자. 신장이 5척이고 머리털 길이가 2척이고 두 눈이 반쯤 열렸고 입이 반쯤 열렸고 혀가 이[齒] 밖으로 나오지 않았고 온몸에 색깔이 엷은 황색이다. 두 손은 조금 쥐었고 두 다리는 곧게 뻗었고 음경[莖物]과 음낭[腎囊]은 아래로 늘어졌다.
전면[仰面]의 상처는, 머리 부분 오른쪽에 칼자국이 있는데 길이가 1촌 1푼이고 넓이가 3푼이고 깊이가 2푼이고 혈액이 흐르고 부드럽다. 이마(顖門) 두 곳에 피부 찰과상이 있는데 색깔이 자줏빛이고 모양이 작은 팥알 조각 같고 매우 단단하다. 눈썹[眉叢] 왼쪽에 피부 찰과상은 색깔이 자줏빛이고 부드럽다. 오른쪽 눈꺼풀[眼胞]에 찰과상이 있는데 사선의 길이가 2푼 5리이고 넓이가 7리이고, 색깔이 자줏빛이고 부드럽다. 왼쪽 눈동자[眼睛] 아래에 찰과상이 있는데 사선의 길이가 3푼이고 넓이가 2푼이고 색깔이 자줏빛 이고 매우 단단하다. 위아래 입술[脣]은 조금 부었고 색깔이 엷은 청색이고 부드럽다. 왼쪽 아랫입술 아래에 찰과상이 있는데 길이가 6푼이고 넓이가 1푼이고 색깔이 조금 검붉고 매우 단단하다. 아랫입술 아래는 많이 부었고 색깔이 엷은 청색이고 부드럽다. 오른쪽 결분 뼈[缺盆骨]에 피부 찰과상 한 곳이 있는데 직경이 4푼이고 색깔이 엷은 검은색이고 매우 단단하다.

“살인사건이 나면 관할 수령과 인근 수령이 직접 시신의 검안을 실시한다”

『검요』
(출처 :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조재호, 영영일기, 1751-07-10 ~

1751년 7월 10일, 성주목(星州牧)에서 죽은 유기장(柳器匠) 조수업(趙守業)의 시신(屍身)을 관할 수령 성주목사(星州牧便) 신준(申晙)이 초검(初檢)을 실시하였으며, 인근 수령인 고령현감(高靈縣單) 정창유(鄭昌兪)가 전례대로 복검(勸僉)을 실시하였다. 그 결과를 전임 경상감사(前慶尙監司) 민백상(閔百祥)이 이임(離任)하여 올라가는 길에 보고하였으며, 또 신임감사 조재호가 부임한 초에 등본(謄本)으로 하여 보고하고 있다.

“말도둑과 도둑을 죽인 자, 누구의 잘못이 더 큰가?”

김택룡, 조성당일기
1616-07-11 ~ 1616-07-14

1616년 7월 11일, 택룡의 큰 아들 김숙이 ‘말도둑 사건’ 처리 문제로 다시 관아에 들어가 현감을 만났다. 그리고 잡히는 과정에서 막복이 쏜 화살에 상처를 입었던 춘금이가 밤사이 숨을 거두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미 현감은 춘금의 어미와 친족들을 모두 불러 이 사실을 전달하였으며, 관찰사에게 보고할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김숙은 일이 간단치 않음을 직감하고 현감을 설득하려하였으나 그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달리 방도가 없어 이 날은 그냥 돌아와 아버지인 택룡에게 걱정만 늘어놓았다.
다음 날 택룡의 큰 아들은 수심에 찬 채로 다시 현감을 만나러 갔다. 현감은 더 강경하게 나왔다. 활을 쏜 막복을 살인자라고 감옥에 가두고, 이웃의 영천 군수에게 춘금의 검시까지 요청하였으며, 관찰사에게 보고해서 처리하겠다고 하였다. 말도둑 사건은 관심이 없고, 춘금의 죽음을 살인 사건으로 몰아 법적 절차대로 해결하려 했다. 택룡의 큰 아들이 수 차례 설득하고 상황을 설명했지만, 현감은 듣지 않았다. 결국 이 날도 합의를 보지 못했다. 택룡과 그의 큰 아들은 다른 대책을 세워야만 했다.

“노비를 죽인 것은 재산을 줄인 것이니 살인죄에 해당하지 않는다”

자매문기(自賣文記)
(출처 : 세계유교문화재단)

조재호, 영영일기, 1752-03-17 ~

1752년 3월 17일, 진주(晉州)의 토호(土豪)인 하수륜(河壽崙)이 병인년(1746) 2월 17일 밤에 그의 계집종 만단(萬丹)의 남편인 유대은악(劉大隱岳)을 구타하여 그 자리에서 죽이고 시신의 목을 매달았다가 만단의 방 안에다 끌어다 두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러다가 유대은악의 형인 유봉안(劉奉安)의 고소장으로 인하여 전례에 따라 사건의 진상이 밝혀진다. 그러나 유대은악은 노비로서 주인이 식구를 줄이려 계획한 것이니 하수륜의 죄악은 전례에 따르면 살인(殺人)은 될 수 없고 독란(瀆亂)의 죄에 해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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