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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판에 새긴 이름, 편액

호랑이를 감동시키다,
야계정(也溪亭)

호랑이의 힘찬 기운이 가득한 임인년(壬寅年) 설날이 왔습니다. 올해는 육십 간지 중 39번째로 임(壬)이 검은색, 인(寅)은 호랑이를 의미하는 '검은 호랑이의 해'입니다. 국토의 대부분이 산으로 이루어져 있는 우리나라에 살았던 선인들은 호랑이를 매우 친숙하게 여겼습니다. 단군신화부터 구전설화, 속담, 민담, 민화의 단골 소재로 등장했던 호랑이는 우리의 문화에 깊숙이 자리 잡은 동물입니다.


효공원의 호랑이 조형물


이번 이야기는 어버이에게 효성을 다하여 호랑이까지 감동시킨 선인의 일화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경상북도 예천군 효자면의 야계정(也溪亭)은 부모님을 정성껏 섬겼던 도시복(都始復, 1817~1891)의 생가와 함께 효공원이 위치한 곳입니다. 임인년을 맞이하여 호랑이를 감동시킨 효자 도시복과 '야계정'을 소개하며, 잊혀진 효의 의미를 다시금 되새겨 보겠습니다.



효성의 정신을 몸소 실천하다, 야계(也溪) 도시복(都始復)



효공원의 도시복 생가(경상북도 예천군 효자면 용두리)


도시복은 본관이 성주이며 호는 야계(也溪)입니다. 철종 때 사람으로 경상북도 예천군 효자면 용두리 야목마을에 살았습니다. 용모가 출중하고, 마음이 어질었으며 효심이 대단하여 부모님을 섬기는데 한 치의 소홀함도 없었습니다. 그는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에도 효를 다하여 3년간 시묘살이를 하였습니다. 그의 효행은 '솔개가 날라준 고기', '한겨울에 때 아닌 수박', '호랑이를 타고 온 홍시', '실개천에서 잡은 잉어' 등의 이야기로 전해졌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어사 이도재가 조정으로 표창을 상신하였고, 국왕은 도시복의 효행을 『명심보감(明心寶鑑)』 「효행(孝行)」편에 수록하여 만백성의 귀감으로 삼았습니다.


효공원의 『명심보감』 조형물



都氏家貧至孝라 賣炭買肉하여 無闕母饌이러라.
一日은 於市에 晩而忙歸러니 鳶忽攫肉이어늘
都悲號至家하니 鳶旣投肉於庭이러라.
一日은 母病索非時之紅柿어늘 都彷徨柿林하여
不覺日昏이러니 有虎屢遮前路하고 以示乘意라.
都乘至百餘里山村하여 訪人家投宿이러니 俄而主人이 饋祭飯而有紅柿라.
都喜하여 問柿之來歷하고 且述己意한대 答曰 亡父嗜柿라.
故로 每秋에 擇柿二百個하여 藏諸窟中하여
而至此五月이면 則完者不過七八이라가 今得五十個完者라.
故로 心異之러니 是天感君孝라하고
遺以二十顆어늘 都謝出門外하니 虎尙俟伏이라.
乘至家하니 曉雞喔喔이러라. 後에 母以天命으로 終에 都有血淚러라.

『明心寶鑑』「孝行」


솔개가 날라다 준 고기



효공원의 솔개 조형물


도시복은 매일 나무를 하여 시장에 가져다 팔아 어머니에게는 항상 고기와 쌀밥을 드리고, 본인은 간소하게 끼니를 이었습니다. 그날도 시장에서 고기를 사서 돌아오는데, 난데없이 솔개가 날아와 고기를 가로채 갔습니다. 도시복은 슬피 울면서 저녁 반찬을 걱정하며 집으로 돌아왔는데, 뜻 밖에도 솔개가 채갔던 고기는 뜰에 있었다고 합니다. 솔개도 도시복의 효성에 감동하여 무거운 짐을 집으로 날라다 준 것이었습니다.



한겨울에 때 아닌 수박



효공원의 수박 조형물


도시복의 어머니가 큰 병이 나서 음력 섣달(12월)에 때 아닌 수박을 찾았습니다. 추운 겨울날씨에 한여름 과일인 수박이 있을 리가 없지만 도시복은 어머니를 위해 수박을 찾아 나섰습니다. 수박이 맛있기로 소문난 풍산 들녘에 도착했지만, 찬바람만 가득하였습니다. 한겨울 수박밭에서 발만 동동 구르며 서 있는 도시복의 머리 위로 까마귀가 날아갔습니다. 까마귀가 날아간 쪽으로 따라간 도시복의 앞에 원두막이 한 채 있었고, 그 안을 들여다보니 푸른 넝쿨 속에 수박 한 덩이가 달려 있었습니다. 도시복은 깜짝 놀라서 다시 살펴보았으나 수박이 분명하였습니다. 그는 수박을 껴안고 덩실덩실 춤을 추면서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께 봉양하였습니다.



호랑이를 타고 구해 온 홍시



호랑이를 타고 홍시를 구하러 가는 도시복


음력 5월에 병이 난 어머니가 가을 과일인 홍시를 찾았습니다. 도시복이 홍시를 찾아 산을 헤매는데 집채만 한 호랑이가 나타나 그를 태우고 백리를 달려 산골 어느 집 앞에 내려놓았습니다. 집주인에게 하룻밤 쉬어가를 청하고, 저녁 밥상을 받았는데 홍시가 있었습니다. 도시복은 사정을 이야기하고, 홍시의 내력을 물었습니다. 주인은 선친이 홍시를 무척 즐겨서 제사 때 쓰려고 해마다 홍시 200개를 토굴에 저장했다고 합니다. 홍시는 매년 제사를 지낼 7~8개 정도만 상하지 않았는데, 올해는 50개나 상하지 않아서 이상하게 여겼는데 모두 도시복의 효성때문인 듯하니 어머니께 가져다 드리라며 스무 개를 내어주었습니다. 도시복은 주인에게 감사 인사를 올리고 나와 보니, 호랑이가 집밖에서 기다려 그를 타고 돌아왔는데 새벽닭이 울었다고 합니다.



실개천에서 잡은 잉어



효공원의 잉어 조형물


어느 날 도시복의 아버지께서 엄동설한에 잉어를 먹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도시복이 사는 산골 실개천과 도랑에는 잉어가 살지 않았지만, 그는 싫은 내색하나 없이 잉어를 찾아 나섰습니다. 얼음 속으로 물이 흐르는 개울을 따라 은풍골 냇물에 이르니 얼음에 구멍이 뚫려 있었습니다. 도시복이 구멍을 들여다보자 팔뚝만한 잉어가 구멍 밖으로 뛰어나왔습니다. 그는 이 잉어를 아버지께 드리니 무척 기뻐하셨다고 합니다.



효공원의 두 정자, 야계정(也溪亭)과 효도정(孝都亭)



도시복의 효행은 현대에 들어와서도 감호조전설(感虎鳥傳說)의 대표적인 이야기로 교재화하는 연구로 이어졌습니다. 감호조전설은 사람이 호랑이나 새를 감동시킨 전설로, 사람의 진실된 행위에 동물조차도 감동을 받은 이야기를 말합니다. 도시복의 효성을 자라나는 아이들의 학습 교재에서 활용하여, 효의 실천과 다양한 삶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기 위한 목적입니다. 효자 도시복은 초등학교 교과서에 수록되어 현대에도 '효'의 대표적인 인물로 자리매김하였습니다. 또한 경상북도 예천군에서는 상리면(上里面)이라는 마을의 명칭을 도시복의 효성을 기리기 위해 효자면(孝子面)으로 변경하고 효공원을 조성하였습니다. 효공원은 효자야계도공정려비(孝子也溪都公旌閭碑)와 야계정(也溪亭), 효도정(孝都亭), 도시복의 생가, 효행을 나타내는 상징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도시복의 정려비


도시복의 정려각


효자야계도공정려비(孝子也溪都公旌閭碑)는 효자인 야계 도시복의 행적을 표창하기 위해 세운 비석입니다. 정려란 효자나 열녀, 충신 등의 행적을 높이 기르기 위해 그들이 살았던 집 앞에 문(門)을 세우거나 마을 입구에 작은 정각(旌閣)을 세워 기념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 정려는 '정문(旌門)', '정표(旌表)'라고도 부르며, 건물이 아닌 문을 세우게 되면 정려문이고, 건물을 세우게 되면 정려각이 됩니다. 도시복의 정려각은 효공원 내부 생가의 앞쪽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효공원의 야계정


야계정의 편액


효공원의 효도정


효도정의 편액


야계정은 도시복의 호를 따서 지어진 정자로, 효공원의 내부에 있습니다. '야계정(也溪亭)'의 글자 아래에 '백두대간(白頭大幹) 고산림(高山林) 무자춘(戊子春) 우재선(禹在善)'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백두대간 높은 산림 소백산 자락에서 무자년인 2008년 봄에 우재선이란 분이 글씨를 쓰신 것입니다. '효도정'은 효자의 '효(孝)'와 도시복(都始復)의 '도(都)'에서 한 글자씩을 따와서 효자 도시복의 정자라는 의미로 보입니다. '효도정(孝都亭)'의 글자 아래에 '경인추(庚寅秋) 우재선(禹在善)'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야계정'의 편액을 쓴 우재선이란 분이 2년 후 경인년인 2010년의 가을에 '효도정'의 편액도 쓰신 것입니다.

이외에도 효공원엔 도시복의 효성을 상징하는 조형물들이 곳곳에 있습니다. 특히 명심보감에서 수록된 내용의 고기를 날라다 준 '솔개', 넝쿨째 나타난 '수박', 홍시를 구하는 도시복을 태워준 '호랑이', 실개천에서 뛰어나온 '잉어' 등을 찾을 수 있습니다. '잉어'는 과연 몇 마리가 있을지 찾아보는 것도 하나의 재미가 될 것 같습니다.

설날은 온가족이 함께 한해의 안녕과 소망을 기원하는 날입니다. 특히 조선시대 마을의 동약소에선 어르신들을 위해 새해 선물을 보내고, 공경을 표현했습니다. 마을 전체에서 자신의 어버이께 하듯이 지극한 효를 다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전통을 계승하고 임인년, 흑호랑이해를 맞이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효성의 동물 호랑이와 효자 도시복의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새해엔 가족들과 함께 예천군 효자면의 효공원을 방문하여 부모님의 건강을 기원하고, 앞으로 효도를 다하겠다고 다짐해보면 어떨까 합니다. 여러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정      리
임근실 (한국국학진흥원)
자      문
권진호 (한국국학진흥원)
사진촬영
임근실 (한국국학진흥원)
“우리나라 호랑이 이야기”

작호도(鵲虎圖) (출처: 국립민속박물관) 최남선의 전언이 아니더라도 우리나라의 호랑이 이야기는 세계적으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고 풍부하다. 중국의 대문호인 노신(魯迅)도 우리나라 사람을 만나면 반드시 한국의 호랑이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했다는 일화가 있다. 호랑이는 아시아에만 서식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아시아 중에서도 인도·수마트라·중국·만주·한국·시베리아 흑룡강 연안에만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앙아시아나 일본·대만 등에는 살고 있지 않다고 한다. 그러므로 호랑이 이야기도 이러한 분포지역에 따라서 주로 전승되고 있으며 그중에서도 산이 많고 골짜기가 많아 호랑이가 많이 서식했던 한국에서 가장 많이 전승된 것으로 보인다. 역사기록을 보면 조선 시대에만 해도 인왕산에 호랑이가 살고 있었으며, 도성 안이나 궁궐 안에도 호랑이가 출몰했다는 기록들이 자주 나타난다.

“신비의 동물로 여겨진 호랑이”

〈호랑이와 매〉(출처: 고판화 박물관) 권상일, 청대일기, 1753-06-06

1753년 6월 6일, 권상일은 어느 날 이웃 마을의 소식을 들었다. 상주의 인근 고을이었던 용궁현의 월오리라는 곳에 호랑이가 출현했던 것이다. 마을 앞산에 조그마한 소나무 숲이 있었다. 그런데 대낮에 호랑이가 출현하여 그곳에 숨어 있었던 것이다. 일상 호랑이가 나타나게 되면 몸을 피해야 하는 것이 당연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사람들은 몸을 피하지 않고 구경하기에 바빴다.

호랑이는 마을 사람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라기보다는 신기한 대상으로 비쳐졌던 모양이었다. 양반들에게야 호랑이는 백성을 위해서 해로운 대상이므로 당연히 없애야 하는 포호(捕虎)의 대상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일반 백성들에게 호랑이는 신비의 동물이면서 숭배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결국 호랑이를 보러온 마을 사람들은 시간이 지나 물려서 부상을 입은 자가 다수 출현하게 되었다. 그 중에서는 권상일이 잘 알고 지내던 안필세도 있었다고 한다. 이 소식을 듣고 걱정이 앞서지 않을 수 없었다. 양반이었던 권상일에게 호랑이는 당연히 처치해야 할 동물이었지만 그렇게 하지 못한 사실에 너무 놀라고 그 피해 사실에 탄식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마을 사람들이 호랑이에게 물려가다”

호랑이(출처: 픽사베이) 오희문, 쇄미록, 1597-03-07 ~

1597년 3월 7일, 오늘 오희문은 끔찍한 소식을 들었다. 어젯밤 사나운 호랑이 한 마리가 뒷산 인가에 들어와서 자는 사람을 잡아갔다고 한다. 사람을 물어 가는데 옆에 있는 사람들이 차마 빼앗을 수가 없었는데, 아침에 찾아가보니 사람의 반을 먹어버렸다고 한다. 참으로 분통한 노릇이었다.

호랑이가 마을 사람을 해친 것은 비단 오늘 뿐만이 아니었다. 지난 달 26일에는 관아에 소속된 관비가 범에게 물려갔다고 한다. 관비는 범에게 물려갈 때 살려달라고 사람들을 애타게 불렀는데, 사람들이 두려워서 나가보지 못했다고 한다. 호랑이는 관비를 물고 달아날 때 관아 뒤를 지나갔다고 하던데, 그곳은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사는 곳이었다. 사람이 호랑이에게 물려 가는데도 두려워서 누구 하나 나서지 못하였으니, 참으로 고약한 인심이라 할 만 하였다.

요사이 호랑이들이 많이 돌아다녀서, 혹은 대문을 부수고 울타리를 헤치고는 인가로 들어온다고 하니 몹시 걱정이었다. 악독한 맹수가 성하게 다니면서 사람을 상하게 하는데도, 이것을 잡아 없애지 못하고 사람마다 두려움에 질려서 해가 넘어가자마자 문을 굳게 닫고 나오지를 않는 상황이었다. 오희문은 또 한 가지 걱정거리가 늘어,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원수를 갚은 호랑이”

노상추, 노상추일기, 1764-05-27 ~

노상추가 사는 선산에서 큰 소동이 벌어졌다. 웅곡면(熊谷面) 일촌(一村)에 사는 남 씨 일가와 심 씨 일가가 호환(虎患)을 입었다는 소식이 선산 일대에 쫙 퍼졌다. 노상추도 전해 들은 이 소식의 전말은 다음과 같았다. 남 씨네 집 아들과 심 씨네 집 아들은 어느 날 뒷산에 갔다가 호랑이와 마주쳤다. 호랑이는 새끼 네 마리를 데리고 있었기 때문인지 매우 예민했다. 두 사람은 포효하는 호랑이로부터 달아나면서 새끼 네 마리를 모두 죽였다. 큰 호랑이는 죽이지 못했지만, 마을에서는 두 사람이 돌아온 것이 천행이라며 모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불행은 거기서부터 시작되었다. 호랑이로부터 달아난 날로부터 나흘 후, 호랑이가 남 씨‧심 씨네 집이 있는 마을로 내려왔다. 호랑이는 먼저 심 씨의 집에 들어가 외양간에 묶여 있던 큰 소를 죽였다. 그리고 죽인 소를 먹는 대신 온 집안을 들쑤시며 간장 항아리와 가마솥 등의 물건을 모두 깨부쉈다. 그 뒤에는 남 씨의 집으로 가서 안방에 있던 남 씨의 처와 며느리, 딸 두 명과 아들 한 명을 물어 죽였다. 그리고 근처에 있던 승려 한 명과 호랑이를 죽이러 온 포수 한 명을 죽였다.

이 모든 일을 한 다음 호랑이는 남 씨의 집 방에 들어가 누운 채 나오지 않았다. 소와 사람들을 물어 죽이기는 했으나 먹지 않은 점은 호랑이의 행동이 결코 배가 고파서가 아니었음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마치 죽음을 기다리듯 방에 누워 있었다는 점이 기이했다. 결국, 관에서는 별포수(別砲手)를 파견하여 호랑이를 쏘아 죽였다. 잡은 호랑이의 크기는 턱밑 길이가 세 뼘 반에 달할 만큼 거대했다.

“조선시대 사냥꾼 부대의 존재”


일기에는 백두산에 당시 오랑캐 사냥꾼의 움막이 있었음을 표현하고 있다. 이는 당시 사냥꾼들이 산속에 움막을 지어놓고 장기간 사냥을 다녔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조선 시대 사냥꾼들은 비단 일반 사냥꾼뿐만 아니라 군부대로서 기능도 갖고 있었다. 호랑이 사냥을 전담하는 군대인 착호군(捉虎軍)은 조선 건국 초부터 중앙과 지방에서 포호(捕虎) 정책을 수행했다. 착호군은 현종 15년(1674년) 때 5000명, 숙종 22년(1696년)에는 1만1000명까지 늘어났다. 17세기 들어 산의 외진 곳까지 개간하며 생활한 화전민이 늘어나고 수렵이 활성화되자 갈 곳을 잃은 호랑이들이 민가의 가축이나 인명을 노리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착호군이 국가 위기 상황에서는 전투에 나서 탁월한 전과를 올렸다. 이들은 전시에 소집될 의무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전과는 특히 19세기 제국주의 열강과 싸움에서 두드러졌다. 19세기 미국의 동양학자인 윌리엄 그리피스는 조선의 착호군이 병인양요와 신미양요에서 서구의 근대적인 함선과 총포로 무장한 군대를 물리쳤다고 ‘한국, 은둔의 국가’(1907년)에 상세히 기술했다. 병인양요에서 프랑스군에 맞선 주력은 관동과 경기지방에서 모인 포수 370여 명이었다. 신미양요가 발발하자 포수를 중심으로 한 별초군 3,060명이 상경해 미군에 대항했고 고종 13년(1876년) 강화도조약을 체결할 때는 포수 4,818명이 상경해 대응하기도 했다. 이는 사냥꾼들이 지닌 탁월한 사격 솜씨 때문이었다고 보여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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