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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생의 일기

정생, 몽유록을 만나다

“나리, 오 진사 댁에서 서찰이 왔습니다.”

아까부터 자리에서 몸이 들썩들썩하고 있던 정생은 그 말에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바로 양반이 체통 없이 벌떡 일어난 것이 겸연쩍어 장죽을 공연히 툭툭 털며 먼 산을 바라보는 척했다.

“이리 가져오너라.”

마당쇠가 짚신을 벗고 들어서자 얼른 자리에 앉은 정생이 그리 풍성하지 않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접장이 어깨 너머로 서찰을 보며 물었다.

“그게… 맞습니까요?”

“맞군. 오늘 올 거라 생각하고 어제 잠도 설쳤는데 말이야. 내 좀 다녀올테니, 자네는 여기 지키고 있게. 아이들 잘 보고.”

“어? 어…”

접장이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오늘은 모내기도 바쁘고 해서 학동들에게 휴일을 내준 것도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농일세. 오 한림(翰林=사관을 가리키는 말)이 집에 들렀다 하니 같이 인사 가세.”

접장이 반색을 하며 일어났다. 오 진사 댁에 가는 동안도 접장은 신이 나서 입에 침을 튀기며 떠들었다.

“석진(오명하의 자)이 꼴찌로 대과에 붙은 데다가 오래 임명이 안 되어서 걱정이 많았는데 척 하니 춘추관에 들어갔으니 앞날이 밝지 않습니까?”

정생은 혀를 끌끌 찼다. 얼마 전까지도 오명하의 자가 석진인 것도 모르던 처지에 마치 친구처럼 구는 접장이 안쓰럽기도 했다.

“거기다가 들어가자마자 춘추관을 대리해서 외사고(外史庫)를 점검하는 별겸춘추(別兼春秋)가 되어 행차를 했으니 참 감격스러운 일입니다.”

“그래, 자네, 외사고가 뭔지는 알고?”


평창 오대산사고(출처: 문화재청)



“아이 참, 저를 뭘로 보시는 겁니까? 한양의 춘추관이 내사고(內史庫), 외방에 있는 사고를 외사고라 부르는 거 아닙니까? 과거 임진란 때 전주사고 외의 사고는 모두 불이 나서 책들이 없어졌지만 다시 복원해서 태백산, 오대산, 적성산, 정족산에 보관하고 있죠.”

“허허, 뜻밖에도 잘 알고 있구만.”

“물론이죠. 이번에 우리 고을의 수재인 석진이 태백산 사고를 살피러 간 거 아닙니까? 앞으로 석진의 앞날은 탄탄대로가 분명합니다.”

“그게 어디 그렇겠나?”

“네? 탄탄대로가 아니란 말씀인가요?”

“외사고의 책들은 나라의 보물들이라 때때로 볕을 쐬게 하는데, 그걸 포쇄(曝曬)라고 하지. 본래는 2년에 한 번씩은 하게 되어있는데 나라 형편이 자꾸 안 좋은 탓에 정해진 때에 하지 못하고 미루다가 어쩔 수 없이 하게 되었지.”


사랑채 마루에 책을 널어 말리는 모습(출처: 한국국학진흥원)



“포쇄는 저도 뭔지 압니다. 해 좋은 날에 책을 꺼내서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말리는 거 아닙니까? 작년에 저희도 훈장 어르신 책들을 가지고 나가서 포쇄를 했었죠.”

“그렇게 어쩌다 하는 행사가 되어버리니 어디 높은 분들이 저 멀리 외사고까지 가기 싫으니까 막둥이를 보내는 거 아니겠는가. 한마디로 심부름꾼으로 첩첩산중을 다녀와야 하는 거지.”

“에이, 그래도 저는 그렇게 심부름꾼이라도 되어봤으면 좋겠습니다.”

“허허, 그것도 맞는 말이군. 석진이 앞으로 잘 헤쳐나가면 좋겠구만.”

오명하는 강원도 산골에 있는 태백산 사고에서 포쇄를 잘 해내고 돌아왔다고 해서 특별 휴가를 받아 집에 돌아와 있었다. 오 진사는 아들의 벼슬도 자랑할 겸 동네 유지들을 초청하는 잔치를 열었다.

정생이 도착하자 오명하가 얼른 나와 스승의 예로 정생을 안으로 모셨다. 정생의 마음이 뿌듯했을 것은 두말 할 나위가 없는 일이었다.

“그래, 가는 길이 험하지는 않더냐?”

정생이 술잔을 들며 오명하에게 물었다. 오명하가 껄껄 웃으며 말했다.

“그곳이 참 말도 못하게 험한 곳에 있었습니다. 젊은 저를 굳이 보낸 이유를 알겠더군요.”

“임진란 때 귀한 자료들이 다 불타 없어졌으니 다시는 그런 일을 겪지 못하게 안전한 곳에 두고자 한 것이겠지.”

“맞습니다. 기록이 없어지면 국가의 근본이 없어지는 셈이죠. 전주사고의 책들과 태조대왕의 어진(御眞)을 지켜낸 선비들이 참으로 큰 공을 세운 것이죠.”


국보 제317호 조선태조어진(출처: 문화재청)



임진왜란 때 전주가 왜군에게 함락되었는데, 안의와 손홍록 두 선비와 경기전 참봉 오희길이 전주사고의 책들을 옮겨 병화로부터 안전하게 지켜냈었다. 이들이 없었다면 조선왕조실록도 영영 사라지고 말았을 것이다.

“『사기』에서 사마천은 ‘일반 백성이 덕행을 갈고닦아 이름을 날리고자 해도 청운의 선비에게 의존하지 못하면 후세에 알릴 길이 없다’고 하지 않았나? 여기서 선비는 바로 사관을 가리키는 것이라네. 이것이 어찌 일반 백성에게만 해당하는 말이겠는가? 군왕의 일도 기록하지 않는다면 후세에는 아무도 그것을 알 수 없게 되고 마네. 자네는 이제 춘추관에 있으니 군왕의 행적을 올바르게 기록하여 후세에 남겨야 하네.”

“옳은 말씀입니다. 가슴에 깊이 새기겠습니다. 그런데 제자가 한 가지 의문이 있습니다. 군왕의 행적이 올바르지 않으면 그것을 기록하여 후세에 전하는 것이 옳습니까? 아니면 만인의 아버지인 군왕의 잘못은 감추어서 후대에 모범으로 남게 하는 것이 옳습니까?”

“본래 실록은 군왕도 보지 못하게 되어 있는데, 그 이유는 사관이 정직하게 모든 사실을 기록하게 하기 위함이었네. 그렇긴 한데…”

정생은 말끝을 흐렸다. 왕이 실록의 내용을 알게 되어서 선비들이 떼죽음을 당한 일이 과거에 있었다. 연산군 때 사관 김일손이 자기 스승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을 사초(실록을 만들기 위한 기초 자료)에 적었다가 실록편찬 책임자였던 이극돈이 그것을 꼬투리로 잡아서 사화를 일으켰다. 「조의제문」은 세조가 조카 단종을 내쫓고 왕위를 차지한 것을 풍자한 글이었기 때문에 세조의 손자였던 연산군은 크게 화를 내고 김종직의 제자들을 죽이거나 내쫓았다.

이극돈은 자기한테 안 좋은 이야기가 사초에 적힌 것을 보고 이런 일을 저질렀다. 군주가 사초를 보지 못해도, 대신들은 사초를 볼 수 있었기 때문에 이런 문제가 일어날 수 있었다.

오늘날에도 실록을 작성하게 될 때 대신에게 좋지 않은 이야기가 적혀 있다면 무슨 문제가 일어날지 모를 일이었다. 왕이 문제가 아니라 왕보다 더 가까운 곳에 있는 신하가 문제였다. 기록은 역사를 만들지만, 누군가의 희생도 만든다.

정생이 딱 부러지게 말을 못하고 있는데, 오명하는 고개를 연신 끄덕이다가 결심한 듯 말했다.

“맞습니다. 역시 정직하게 모든 일을 써야 되겠죠.”

오명하는 그렇게 말하고 술잔을 올렸다. 정생은 어쩐지 자신이 한심스러워 혼자 거푸 술잔을 기울였다.


(출처: 〈밤을 걷는 선비〉, 2015 MBC)



“저 아저씨는 행사 코스프레를 한 건가 봐.”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여자아이 소리가 들려 주위를 돌아보니, 정생이 큰 정자가 있는 야외에 서 있는 게 아닌가? 언제 밖으로 나왔는지 모르겠는데, 심지어 양줏골이 아닌 건 분명했다. 그리고 정자 난간에는 언문으로 뭔가 써 있는 긴 두루마리가 걸려 있는데 무슨 말인지 잘 알 수가 없었다. 정생이 천천히 읽어보았다.

“다나만 를기일 - 사역 의들람사 통보 는읽 로으록기 선조.”

뒤에서 또 키득거리는 여자아이 소리가 들렸다.

“왜 글은 거꾸로 읽는 거지?”

글을 거꾸로 읽는다고? 정생은 두루마리의 글을 거꾸로 읽어보았다.

“조선 기록으로 읽는 보통 사람들의 역사 - 일기를 만나다.”

그러고 보니 정자 안에 서탁이 있고 사람들이 서탁에 펼쳐진 뭔가를 들여다보고 있는 것도 보였다. 그런데 그 사람들도 참 이상한 복장을 하고 있다. 여긴 대체 어디란 말인지.

“안 가세요?”

여자아이의 소리가 또 들렸다.

“뭐라고?”

“앞으로 안 가시냐고요?”

정생이 뒤를 돌아보았다. 십대로 보이는 여자아이가 있었다. 쓰개치마도 없고 치마도 깡똥한 것이 평민이거나 천민인 모양이었다.

“앞으로 가면 뭐가 있느냐?”

“옛날 책이요. 일기도 있고, 그림도 있고 오늘 전시회 첫날이라고 사람들이 많아서 줄 선 거니까 빨리빨리 앞으로 가주세요.”

“그, 그래. 그러마.”

정생은 앞사람에 바짝 붙었다. 여자아이는 이제 정생은 쳐다보지도 않고 같이 온 다른 여자아이와

“도장 찍어야 할 곳이 많은데 여긴 유독 사람이 많다. 그치?”

“화성 도장 찍기를 기록 유산으로 하니까 재밌네. 여기 보고 나면 어디로 가야 해?”

“잠깐만 내가 아까 관광지도 가져왔어. 다음에는 화홍문(華虹門)에서 대동여지도를 볼 수 있대.”

그러고 보니 정자에 편액이 있었다.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 그럼 여기가 선대왕(정조)이 만든 화성(華城)이란 말인가.


방화수류정(출처: 문화재청)



대체 양줏골에서 어떻게 수백 리가 떨어진 화성에 와 있는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여자아이의 복장도 이상했지만 여기 있는 남자나 여자들의 복장도 이상했다. 머리에 관(冠)을 쓴 사람이 거의 없이 맨머리에 두루마기도 없이 있는 걸 보면 다들 상놈이 분명했다. 오늘이 무슨 머슴날이라도 되는 건가?

정생이 정신을 못 차리는 사이에 어느 틈에 정자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서탁 위에는 유리함이 있고 거기에 『정생몽유록(鄭生夢遊錄)』이라는 팻말이 놓여있었다.

“정생이 꿈속을 거닌 기록이라…”

정씨 성을 가진 사람이 조선 팔도에 지천이라 무심히 유리함을 쳐다보던 정생은 소스라치게 놀라 저도 모르게 뒷걸음을 치고 말았다.

저 유리함 안에 들어있는 것은 정생 본인의 글이었다.

“뭐, 뭐지? 이게 뭐야?”

정생의 혼잣말에 대답하는 듯 한 소리가 들렸다.

“조선시대 일기 기록이죠. 곧 보물로 지정될 예정입니다.”

정생이 소리가 나는 곳을 바라보니 중년 여성이 방글방글 웃으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문화유산 해설사 김미영입니다. 잠깐 『정생몽유록』에 대해서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사람들이 모두 그 여성을 바라보았다.

“정생의 몽유록은 양줏골 서당 훈장이었던 정생의 일기입니다. 몽유록에는 본인의 이름이 나오지 않고 정씨 성을 가진 유생이라는 뜻으로 정생이라고만 되어 있어서 이 일기를 『정생몽유록』이라고 하게 되었습니다.”

왜 내가 쓴 서책이 이런 곳에 만인에게 보여 지고 있는 거지?

“양주 아파트단지 공사 중에 옛 집터가 하나 발굴되었는데 그 집터에서 궤짝이 하나 발견 되었습니다. 보통 종이로 된 유물은 우리나라 땅이 산성토양인지라 흔히 다 삭아서 없어지기 일쑤인데 그 궤짝은 어쩌다 완전 밀봉이 되어서 그 안에 들어있던 이 『정생몽유록』이 깨끗한 상태로 발견되었습니다. 조선 순조 때 정생이라는 서당 훈장이 자신이 겪은 신이담을 기록한 것인데 당시의 지방 생활상과 사람들의 관념을 알아낼 수 있는 소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정생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특히 정생이 수원의 친척 장례식에 가서 괴물을 만났다고 쓴 이야기는 오늘날 유행하는 좀비 이야기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이야기입니다. 제가 간단히 그 내용을 설명하겠습니다.”

아, 안 돼! 일생 가장 창피한 이야기라고! 정생은 그때부터는 해설사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들리지가 않았다. 수백 년 뒤의 세상이 내가 쓴 일기를 읽고 있다니! 부처님, 상제님, 이게 대체 무슨 일입니까!

정생이 머리를 쥐어뜯으려는 찰나, 해설사의 말이 갑자기 들려왔다.

“이렇게 하루하루 쌓아올린 기록들이 역사가 됩니다. 『조선왕조실록』도,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도, 임금님의 일기인 『일성록(日省錄)』도 하루하루 쌓아올려서 우리의 역사를 이루었죠. 그렇게 나라의 중심에서 만들어진 기록도 중요하지만 보통 사람들이 하루하루 만들어간 기록 역시 소중합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모여서 우리가 나라를 만들고 살아가고 있으니까요.”

정생이 마치 항의하듯이 해설사에게 말했다.

“그래도 망신살 뻗치는 이야기라 일기에 적은 것을 남들이 읽으면 창피한 일 아니겠소?”

해설사가 정생을 보며 말했다.


일기를 쓴 종이를 모아 책으로 엮는 모습(출처: 한국국학진흥원)



“일기는 남에게 보여주려고 쓰는 것이 아니잖아요. 매일 매일의 진솔한 이야기를 남기기 때문에 후세에서는 더 가치 있는 기록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래도 앞으로는 내가 멋진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좀 써야 할 것 같소.”

해설사는 정생 앞으로 다가와 쏘아붙이듯이 말했다.

“자기에게 남기는 기록인데도 거짓말로 꾸미려고 한다고 해서 후세 사람들이 그렇게 속아 넘어갈까요? 그 일기는 쓴 사람이 얼마나 거짓말쟁이인지 알려주는 가치를 지니게 될 겁니다. 그렇게 되고 싶으세요?”

정생은 냉기가 훅 얼굴로 밀어닥치는 것 같아서 깜짝 놀라 몸을 떨었다.

“훈장 어르신, 정신 드세요?”

접장이 정생의 얼굴에 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접장이 웃으며 말했다.

“어제 잠을 설쳤다고 하시더니 술 몇 잔에 곯아떨어지셨네요.”

“술이 문제가 아니야. 그보다 말야. 자네 궤짝 튼튼하게 만드는데 좀 아나?”

“네?”

“내 글이 후세에 나라의 보물이 된다고. 알겠나? 사고에 보존하겠지? 후세는 내가 얼마나 글을 잘 쓰는 사람인지 다 알게 된다 이 말이야! 그러니까 먼저 궤짝이 필요하다고. 튼튼한 궤짝이!”

“네?”

접장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정생이 술을 너무 많이 마셨나 걱정되었다. 접장이 걱정하거나말거나 정생은 기분 좋게 술병을 기울였다. 그리고 누구에게 하는 이야긴지 모를 말을 큰소리로 외쳤다.

“기록이 쌓이면 역사가 되고, 일기는 진실되게 써야 하는 것이라네! 알겠나!”




집필자 소개

이문영
이문영
역사, 추리, SF, 판타지를 넘나들며 글쓰기를 하고 있다. 소설 뿐만 아니라 인문서 쪽으로도 출간을 하고 있으며, 청소년 글쓰기 사이트 글틴의 소설게시판지기로도 활동했다. 장르소설 전문 출판사 파란미디어 편집주간으로 있으면서 여전히 활발한 창작활동을 겸하고 있다. 역사추리소설 『신라 탐정 용담』, 어린이 그림책 『색깔을 훔치는 마녀』, 역사동화 『역사 속으로 숑숑』, 어린이 인문서 『그게 정말이야?』, 역사인문서 『만들어진 한국사』를 비롯해서 MMORPG 『무혼』 등 여러 편의 게임 시나리오도 만든 바 있다.
“무료한 틈에 계사년과 갑오년의 일기를 다시 읽어보다”

오희문, 쇄미록, 1597-07-04 ~

1597년 7월 4일, 벌써 올해 정유년도 절반이 지나갔다. 요사이 밤기운이 서늘하여 싸늘한 바람이 때로 불어 와서 아침저녁으로는 겹옷을 입지 않으면 안되었다. 심신이 상쾌하니, 가을 바람에 몸의 병이 나아가는 것을 스스로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요즘은 특별한 일이 없어 무료한 날이 많은데, 심심함을 이기려고 계사년과 갑오년의 일기를 꺼내어 다시 읽어보는 중이다. 전란을 피해 떠돌아다니며 병을 앓고, 추위와 굶주림에 지치며 고생한 내용을 다시 읽자니, 그때의 기분이 생생히 기억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때는 슬하의 7남매가 모두 무고히 살아 있었으니, 비록 때로 끼니를 잇기 어려운 탄식이 있었어도 비통하고 마음 상하는 일은 없었다.

지금 지내는 산속 고을로 들어온 이후로는 양식과 반찬을 조달하는 데는 어려움이 없고, 또 종종 맛난 반찬도 얻어다가 어머님을 봉양하고 아랫사람들도 먹일 수 있으니, 가히 근심이 없다고 할만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매번 좋은 음식을 앞에 두면 문득 슬피 울기를 그치지 않으니, 얼마전 죽은 딸 단아 때문이었다.

갑오년 봄과 여름에 굶주려 곤궁한 중에도 막내딸과 추자 놀이를 하면서 무료한 회포를 보낸 대목에 이르러서는 더더욱 막내딸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쳐 애통한 마음이 치솟았다. 일기를 읽어 내리던 오희문은 눈가가 촉촉이 젖어왔다.

“종이가 모자라 일기를 쓰지 못하다”

장흥효, 경당일기,
1621-08-21 ~ 1621-08-22

1621년 8월 21일, 일기는 장흥효에게 있어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면서 성찰의 기회가 될 수 있는 자신만의 공간이었다. 그의 일기는 다른 어떤 것에도 구애되지 않으면서 자기가 추구한 성리학적인 삶을 완성하는 하나의 경전과도 같았다. 공자의 논어와 맹자의 맹자, 주자의 사서집주(集註)가 있다면 장흥효에게는 일기가 있었다. 그만큼 그에게는 어떠한 것보다도 소중한 보물이었다.

그런데 종이가 모자랐다. 일기를 작성하기 위해서는 지속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기록할 종이가 공급되어야 했다. 물론 제자들이 공부를 배우는 대가로 종이를 가져오기도 하였고 친지들이나 아는 관원들이 종이를 지급해 주기도 하였다. 유력 양반이라면 사찰에서 질 좋은 종이를 공급받을 수 있었지만, 장흥효의 형평상 그렇게 하지는 못했다.

결국 종이가 모자라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장흥효는 심지어 20여 일 동안 종이가 없는 상태로 일기를 작성하기도 했다. 그러한 날이면 그는 날짜, 간지, 날씨만을 기록하기도 했다. 그래야 어찌 되었든 일기를 이어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천신만고 끝에 종이를 구했지만 문제는 모두 다 기록을 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있었다. 너무 오래되어 기억이 나지 않았다. 매일매일 쓰지 않으면 기억이 사라지는 나이가 된 것이다.

“서울 소식 전해주는 신문, 조보(朝報)”

김광계, 매원일기,
1634-01-17 ~ 1644-04-11

예나 지금이나 시골 사람들의 생활은 도시보다 단조롭기 마련이다. 김광계의 일상 역시 늘 읽던 책을 또 읽고 항상 만나던 사람을 다시 만나는 일의 연속이었지만 그렇다고 새로운 사건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1634년 1월 중순, 김광계는 ‘경보(京報)’를 읽었다는 기록을 일기에 남겼다.

경보란 조선시대 승정원에서 매일의 소식을 적어 발행하던 조보(朝報)를 의미한다. 김광계처럼 지방에 거주하던 양반들은 서울 소식이라는 뜻에서 조보를 경보라고도 불렀다. 조보를 읽으면 새로 바뀌는 세금 정책이나 조정의 정치적 논쟁, 당장 다음 달에 올 신임 수령의 인선까지 알 수 있었으니 지방 양반들에게 조보는 중요한 소식 창구였다.

현대의 종이 신문은 구독을 신청하면 매일 아침마다 집으로 배달받아 간편하게 볼 수 있지만 조선시대의 조보는 그렇지 않았다. 승정원에서 매일 조보를 발행하면 각 지방 관청의 서리들이 일일이 손으로 베껴 발송하는 식이었다. 따라서 관직이 없는 지방 양반들은 거주지의 수령에게서 빌려 읽거나 서울에서 오는 인편에 조보를 가져다 줄 것을 부탁하는 등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조보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서울에서 발행된 조보가 지방까지 오려면 시차가 생길 수밖에 없었고 매일 나오는 조보를 지방에서 그때그때 챙겨 읽기란 불가능했으므로, 보통 지방 양반들은 며칠이나 몇 달치 조보를 한 번에 얻어다 읽곤 했다. 김광계의 재종숙부 김령의 일기에는 예안 현감에게서 조보를 빌려 읽었다는 기록이 자주 등장한다. 열성 구독자로 거의 달마다 조보를 구해 읽고 그 내용도 상세히 적어 놓은 김령과 달리 김광계는 조보 읽기에 큰 흥미를 보이지 않고 어쩌다 들어오면 읽어 보는 수준이었던 듯하다. 번다한 세상사에 관심을 갖기보다 스스로의 공부와 수양에 더 마음을 쏟은 것이 김광계의 성품이었다.

“40여 년 동안 쓴 『해주일록(海洲日錄)』은 전감으로 삼을 만하다”

남붕, 해주일록, 1930-06-05

1930년 6월 5일, 남붕은 며칠 동안 읽은 『중용혹문(中庸或問)』 등사본의 후지(後識)를 작성하려다가 붓을 멈췄다. 등사했던 날짜를 쓰려고 했는데 기억이 나지 않아서였다. 남붕은 날짜를 확인하기 위해 『해주일록(海洲日錄)』을 가져 와 꼼꼼히 살펴보았는데, 아들 원모(元模)가 죽기 전인 기유년(1909) 봄에 난고정(蘭皐亭)에서 원모가 등사한 것임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남붕은 아들이 등사한 『중용혹문』에 발문을 짓고 점심 때 발문을 다시 베껴 썼다.

이렇게 오래 전의 일이 기억나지 않을 때 『해주일록』을 살펴보면 마치 어제 일처럼 기억이 역력하니 40여 년 동안의 기록이 지난 일을 살피고 증거로 삼을 수 있으니 여간 큰 도움이 되는 게 아니었다.

한 달 정도 지난 윤6월 4일 아침을 먹은 뒤에 남붕은 『해주일록』을 처음 쓰기 시작한 병술년(1886) 조 부터 살펴보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40여 년이고 해마다 기록한 것이 거의 50여 권이니, 전감(前鑑)이 될 만하다고 생각되었다.

“세월이 흘러도 『동소만록』은 썩지 않고 전해질 책이다”

남붕, 해주일록,
1926-03-06 ~ 1930-11-02

1926년 3월 8일. 남붕은 이틀 전에 우현(禹玄) 족조를 찾아갔다가 빌려 온 『동소만록(桐巢漫錄)』을 읽고 있었다. 남붕은 『동소만록』을 쓴 남하정(南夏正)이 조야의 고사를 수집하여 사건마다 평론을 붙여 마치 옛날의 『사기史』의 사례와 같이 글을 쓴 것에 관해 감탄하였다. 또한 남인(南人)과 노론(老論)이 벌인 당론의 시비에 대하여 더욱 분명하게 분석하여 놓았으니, 실로 남인의 보배이고 서인에게는 눈엣가시임이 분명했다고 생각했다.

남붕은 『동소만록』을 눈에서 떼지 못할 정도로 푹 빠져있었다. 누가 찾아오기라도 하면 함께 보거나, 책 속의 사건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족제 호의(浩義)가 왔을 때도 함께 보았고, 백우길이 찾아왔을 때도 책을 보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늘 빠짐없이 밤마다 경문을 외우는 일도 그만두고 『동소만록』을 보았다.

11일에는 8대조 통덕랑공(通德郞公)의 묘소, 부곡(釜谷)의 조부 부군의 묘소, 도동(道洞)의 부모님의 묘소를 참배하고, 뒷산의 여러 묘소와 위 봉우리 뒤 증조부 묘소까지 찾아 가 참배를 하기 위해 집을 나섰는데, 그 행낭 속에도 『동소만록』 1책을 챙겨 넣었다. 2~3일간 오고 가는 짬짬이 아직 다 보지 못한 것을 보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길을 나선 남붕은 긴 고개에 이르러 아들의 묘소를 둘러본 후 8대조 통덕랑공(通德郞公)의 묘소를 참배하고, 부곡(釜谷)으로 가서 조부 부군의 묘소를 참배하고, 정오에 도동(道洞)에 도착하여 부모님의 묘소를 참배한 후 그날 밤에 재사에서 잠을 잤다. 잠들기 전까지 『동소만록』을 보다가 자려고 하였는데, 금계(金溪) 종숙이 찾아와서 또 함께 이 책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음 날 아침에 뒷산의 여러 묘소와 증조부 묘소를 참배하고 재사에 머무르며 드디어『동소만록』을 다 보았다. 그리고 오후에는 금계 족숙의 집에서 머무르며 다시 『동소만록』을 보았다.

남붕은 몇 년이 지난 후 『동소만록』을 또다시 보았는데, 다시 보아도 이 책에서 기록한 국가와 조정의 고사나 의론은 정밀하고 분명하며 문장이 간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책이야말로 참으로 썩지 않고 오래도록 전해질 글이라고 생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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