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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 Issue

청춘, 스토리테마파크에서 배우고,
상상하며 꿈꾸다

5대1의 경쟁률,
제2회 스토리테마파크 창작 콘텐츠 공모전 최종 10개 팀 선정


<스토리테마파크 창작 콘텐츠 공모전 오리엔테이션에 참여한 멘토와 멘티>


지난 29일, 서울 상암동 문화창조융합센터에서 제2회 스토리테마파크 창작 콘텐츠 공모전에 최종 선정된 10개 팀(38명)을 대상으로 오리엔테이션을 진행했습니다. 이번 공모전에서는 총 17개 대학 53개 팀이 지원하였고, 1차 기획안 심사에서 11개 대학 20개 팀을 선정, 2차 심층 면접을 거쳐 최종 8개 대학 10개 팀(38명)을 선정했습니다.

올해 공모전은 지난해와 달리 대학생에서 대학원생으로 대상 범위를 넓혀 경쟁이 더욱 치열했으며, 지원 학교와 학과 또한 다양하여 독창적이고 실험적인 기획안이 다수 응모되어 심사위원이 여러 차례 회의를 거쳤습니다. 심사는 소재의 전문성과 기획의 독창성, 활동의지, 발전가능성 등을 기준으로 평가되었으며, 5명의 멘토와 3명의 외부 심사위원에 의해 선정되었습니다.

1‧2차 심사위원장을 맡은 김수영 교수(한양여자대학교 문예창작학과)는 “작년의 경우와 대비해 볼 때 참신성과 형식적 완결성의 측면에서 향상된 수준을 보여줬다.”며 “기획 내용의 전문성과 창작 결과물의 현실성의 측면에서 비중을 두어 심사했으며, 앞으로 진행 과정에 대해 큰 기대감을 갖게 된다.”고 전했습니다.

▶ 2016년도 공모전 최종 선정된 10팀

  • <암행 1738>은 스토리테마파크의 창작 소재 가운데, 사건‧사고와 관련한 이야기 소재를 활용하여 한국적인 셜록홈즈의 활약을 다룬 웹드라마 기획.
  • <헬조선:노비신분사기극>은 스토리테마파크의 부정부패 이야기 소재를 활용하여 양반이라고 사긴 친 노비가 철종의 은밀한 작전에 휘말리면서 겪는 풍자를 다룬 시나리오 기획.
  • <옥중일기>는 스토리테마파크의 이야기 소재 중에서 의병장 허위 선생의 삶과 이야기를 서대문 형무소를 배경으로 공연 기획.
  • <동화책, 시대에 발맞추다>는 스토리테마파크의 이야기 소재 중, 어린아이들의 정서 발달 및 교육에 도움이 되는 이야기를 주제별로 선정하고, 이야기 소재에 적합한 인터렉티브동화책 기획
  • <락수비립>은 개성 충만 4인방 밴드가 헬조선에서 리얼조선으로 타임슬립해 겪는 내용의 웹 드라마 기획.
  • <존심애물>은 스토리테마파크의 ‘존애원기’의 내용을 활용해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영화로 기획.
  • <암마패어사록>은 왕의 비밀 수사부대의 암어사와 행어사의 이야기를 타임슬립 형태의 판타지 웹툰으로 기획.
  • <노비-노비들>이 노하다는 로마에 검투사가 있던 것처럼 조선시대에도 ‘싸움을 위한’ 노예들이 있었을 것이라는 상상, 그들의 이야기를 그려낸 액션 웹툰 기획.
  • <역사! 게임과 함께하다>은 조선시대 살인사건을 해결하는 추리퍼즐역사 모바일 게임 기획.
  • <우당탕탕! 서당타이쿤>은 쇠락한 서당의 부흥과 참교육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는 시뮬레이션 서당게임 기획.


멘토와 멘티, 설레이는 첫 만남 , 지금부터 시작…. 최종심사에서 멋진 모습 보일 것 다짐

치열한 심사과정을 거쳐 선정된 10개 팀(38명)은 4개월 동안 담당 멘토의 교육 및 창작캠프와 피칭교육을 통해 기획안을 심화․발전시켜, 오는 10월 8일(토) 최종 심사를 받게 됩니다.

멘토교육은 각 분야의 전문 창작자로 구성한 5명의 멘토가 각 2팀을 담당하여 밀착 지도하며, 창작캠프는 전통 창작소재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그에 적합한 창작 활동을 펼칠 수 있도록 진행합니다. 또한 최종 심사에서 완성된 작품 기획안을 효과적으로 전달 할 수 있는 피칭(Piching)교육을 병행하게 됩니다.


▶ 2016년도 공모전 멘토

이번 오리엔테이션에 참석한 안동대 사학과 맹진욱 학생은 “저는 지난해에도 도전을 했는데, 1차에서 탈락해서 많이 아쉬웠다. 올해 팀을 다시 구성하여 도전하게 되었는데 합격해서 정말 기쁘다.”며 “지금부터가 정말 시작이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멘토교육을 받아서 좋은 결과 만들고 싶다”고 소감을 남겼습니다.

또한 건국대학교 대학원 문화콘텐츠학과 김소영 학생은 “멘토링 제도와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스토리테마파크 원천소스에 매력을 느껴 지원하게 되었는데 이렇게 멘토교육에 함께 할 수 있어 정말 좋다.”며 오리엔테이션 참여 소감을 전했습니다.


<멘토와 멘티, 설레는 첫 만남>


창작 콘텐츠 발굴⋅멘토링을 통한 교육형 공모전의 새로운 가능성

‘스토리테마파크 창작 콘텐츠 공모전’은 2015년부터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국학진흥원이 스토리테마파크에 구축된 전통 이야기 소재들을 활용한 새로운 콘텐츠 개발 가능성을 모색하고, 전문성과 독창성을 갖춘 창작 콘텐츠를 발굴하여 전통인문정신문화를 계승하고 확산시키기 위해 추진되고 있습니다.

올해로 2회째를 맞이한 스토리테마파크 공모전은 ‘교육형 공모전’을 지향하며 공모전에 참여한 예비창작자의 창작 역량을 강화 시켜 인적 자원을 양성하고, 스토리테마파크를 활용한 창작 콘텐츠 발굴 및 확산의 가능성의 틀을 마련하고 있습니다.

최종심사는 예비창작자들의 창의적인 실험과 도전을 지속적으로 응원하고 지원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는 자리이자 콘텐츠 제작자들에게는 젊은 창작자들의 다양한 가능성과 창의성을 발견할 수 있는 ‘프로모션’형태로 구성합니다.

공모전에 참여한 학생들의 창의적인 실험과 도전을 지속적으로 응원하고 지켜봐주시길 바랍니다.

❚ 향후일정

- 멘토별 멘토교육 운영 : 6월 ~10월
- 1차 워크숍 : 7월 1일(금)~7월 4일(월) / 3박 4일
- 2차 워크숍 : 8월 19일(금)~8월 21일(일) / 2박 3일
- 최종심사 : 10월 8일(토) / 문화창조융합센터
“ 어머니의 눈물어린 배웅 - 사도세자의 죽음에 얽힌 억울함을 고하러 한양으로 향하다 ”

권방(權訪), 천휘록(闡揮錄),
1792-04-17
1792년 4월 17일, 정오쯤 부친이 곧바로 봉서(鳳栖)로 오셨는데 아우 석조가 모시고 왔다. 즉시 백부의 편지를 보시고는 사건의 단서를 대충 아시고 다른 별 말씀이 없으셨다. 오후에 내가 부친을 모시고 집으로 돌아오고, 동생 석조는 다시 문소로 향하였다. 표종(表從: 외종)인 신면조(申冕朝)·봉조(鳳朝) 형제가 나의 행사(行事)를 듣고 편지를 보내 고무하여 힘쓰게 하였다. 저물녘에 하상(河上)에 도착하여 백부와 숙부들을 뵙고, 곧 북촌(北村) 본가에 가서 담장 밖에서 어머니의 건강을 탐문하고 우두커니 서서 한참을 바라보았다. 어머니께서 북쪽 창문을 열고 한양 가는 일을 상세히 물으셨다. 나는 이 일의 대강을 말씀드리니 어머니께서는 절반도 듣지 않으시고 목이 메여 눈물을 흘리셨다. 이는 어머니께서 모년(某年: 1762년 사도세자가 죽던 해)의 사건에 그 전말을 상세히 아셨다. 때문에 매번 말을 하다가 그 사건이 언급되면 울분 감개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이 소식을 들으시자 눈물이 절로 흘러내리신 것이다.

“ 발을 싸매고 문경새재를 넘어, 피를 쏟으며 올립니다 - 만 명의 상소문을 올리다 ”

권방(權訪), 천휘록(闡揮錄),
1792-04-27
1792년 4월 27일, 상소문을 작성한 사람들이 이른 아침에 모여 소장을 봉함하였다. 상소문에 이름을 적은 사람은 모두 10,057명 이었다. 상소문의 대략은 다음과 같다. “경상도 유학 이우(李㙖) 등은 발을 싸매고 조령을 넘어 피를 쏟으며 소장을 올립니다. 확실한 처결로 화란(禍亂)의 뿌리를 영원히 뽑아서 의리를 밝히고 윤리와 강령을 세우시기를 바랍니다.”

“ 촛불 아래 엎드려 읽은 상소문, 그리고 임금의 눈물 ”

권방(權訪), 천휘록(闡揮錄),
1792-04-27
1792년 4월 27일, 주상이 희정당(熙政堂)에 납시어 서쪽을 향하여 단정하게 앉고, 진신과 장보들이 뜰 아래에 차례로 서니 보좌(寶座)와의 거리가 불과 10여 보 밖에 되지 않았다. 전상(殿上)은 시끄럽지 않고 고요하기만 한대 다만 승선 1명, 기주관 2명, 내관 2~3명이 좌우에 고개를 숙이고 엎드려 있었다. 승선이 교지(敎旨)를 전하여 말하기를 “지난번 이지영(李祉永)의 상소에는 비답(批答)을 내리지 않았는데, 그대들은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천리를 와서 충정을 쏟아내니, 나의 뜻을 면전에서 알리지 않을 수 없어 그대 들을 부르게 하였으니 소두는 전(殿)에 올라와 상소문을 읽는 게 좋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우가 서쪽 계단을 따라 올라가서 동쪽을 향하여 꿇어앉아 엎드려 소장을 읽었다. 소장을 반도 읽지 못하여 해가 이미 저물었다. 사알(司謁)이 여덟 자루 촛불을 전상에 벌여 놓았다. 읽기를 마치자 주상이 한참 동안 마음을 억누르고 진신과 장보들을 각각 몇 명씩 앞으로 나오게 하였다. 승선이 크게 소리 질러 말하기를 “이 일을 잘 아는 진신과 장보 각 2명씩 전에 오르면 된다.”고 하였다. 김한동(金翰東)·강세륜·김희택·이경유가 서쪽 계단을 따라 올라갔다. 주상이 또 말하기를 “다시 몇 명 더 전(殿)에 올라오너라.”라고 하였다. 김한동(金翰東)이 승선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진신 중에 성언집·이헌유와 장보 중에 김시찬을 올라가게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승선이 또 부르기를 “성언집·이헌유·김시찬은 전에 오르시오.”하여, 나아가 엎드렸으나 주상이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옥색(玉色: 임금의 안색)이 몹시 처량하고 슬퍼보였으며 자주 소매를 들어 눈물을 닦았다. 목이 메여 말을 못하다가 한참 만에 장황하게 타이르며 숨김없이 자세하게 말을 다하였는데, 비록 한 집안의 부자 사이라도 이보다 더할 수는 없었다. 소두가 일어났다가 엎드려 대면(對面)을 마치니, 주상이 또 뜰에 있던 여러 진신과 장보들에게 명하여 들어와 전에 올라 비답을 듣게 하였다. 소두가 비답을 받들고 차례로 물러나니, 밤은 이미 사경(四更: 오전 3시~오전 5시) 사점(四點)이었다. 주상의 특명으로 유문(留門: 궁궐 문을 열고 닫는 시각을 유보함)하여 통금을 해제하여 주었다. 진신과 장보들이 서로 손을 잡고 감읍하여 돌아왔다.

“ 성균관생들의 동맹 휴학 - 만인소에 확인 도장을 찍어주지 않은 죄를 물어라! ”

권방(權訪), 천휘록(闡揮錄),
1792-04-29
1792년 4월 29일, 듣건대 밖에 있는 유생 이존덕(李存德) 등이 태학에 통문을 보냈는데, 내용이 엄정(嚴正)하였다 한다.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여러 군자께서는 이미 태학에 거처하면서 변괴가 연이어 일어남을 보고서도 어찌 태연히 예사로 여겨 묵묵히 한 마디 말도 없어야 되겠습니까? 만약 우리들의 말을 옳다고 여기신다면 회답을 주시고, 그르다고 여기신다면 이를 잘 헤아려주시기를 바랍니다.” 이리하여 서재생(西齋生)들이 함께 권당(捲堂)을 행사하였다. 성균관장 김방행(金方行)이 들어와서 그들의 의사(意思)을 수렴하여 주상에게 주청하였다.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전 교리 김한동(金翰東)의 상소는, 태학에서 ‘근실’을 허락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를 여러 방면으로 핑계를 대어 의리를 회색(晦塞: 꽉 막혀 깜깜함)시켰다고 하였고 재유(齋儒) 최홍진이 성균관에 보낸 단자와 밖에 있는 이존덕의 통문은 호역완토(護逆緩討: 반역자를 옹호하고, 응징을 느슨하게 함)의 이름으로 몰아붙이니, 염치와 의리로 보건데, 얼굴을 들고 식당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고 하였다. 주상이 사알(司謁)을 시켜 구전으로 하교하기를 “반역자를 성토하는 일을 누가 감히 소홀하게 하겠는가마는, 혹 장의(掌議)이 선출되지 못함으로 인하여 그런 것은 아닌가? 아니면 혹 지방유생들이 격식있는 관례를 알지 못하여 그런 것은 아닌가? 다른 유생들이 마땅히 권하여 식당에 들어오도록 해야 할 일이지만 일이 커지면 대응하기가 몹시 어려우니 권하여 들어오라는 뜻을 대사성에게 전하라.” 하였다. 서재생들이 마침내 저녘식당에 들어가 그날 장의 및 두 반수(班首)인 이동수(李東洙) -이 성토와 징계를 듣고 왜 ‘근실’해 주지 않았는가?-, 맹현대(孟賢大) -의도적이지는 않았지만 불행히도 근실을 해주지 않은 죄에 해당- 의 벌을 의논하였다.

“ 이제 그만 고향으로 돌아가 학업에 전념하시오 - 3차 상소를 준비하던 유생들에게 내린 임금의 하교 ”

권방(權訪), 천휘록(闡揮錄),
1792-05-16
1792년 5월 16일 소청에 모여 소록을 등사하였다. 막 칙교를 받았을 때는 비록 도리에 구애되어 상소하는 일을 잠시 멈추었지만 다사들의 체류가 재일(齋日)이 지나면 충심으로 호소하는데 지나지 않으니 22일 후에 다시 세 번째 상소를 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한편으로는 소초(䟽草)를 작성하고 한편으로는 소록을 작성하였다. 19일 소록 작성을 다 마쳤다. 모두 11,365명이다. 20일 소초가 완성되었다. 소두 권 감찰·김시찬이 각각 한 본씩을 작성하였으나 봉사대부가 지은 것이 가장 적절하여 사론이 반드시 이것을 사용하려고 하였다. 장로들의 소견(所見)이 일치하지 않아 더하고 뺀 것이 많아서 다른 곳에 물어보고 다시 다른 조목을 넣었다. 21일 이 날은 곧 우리 경모궁(景慕宮)[사도세자]의 제삿날이다. 우리 성상(聖上)의 그립고 애통한 마음 어찌 다함이 있겠으며 우리들이 두렵고 피가 끓는 것은 과연 어떠하겠는가? 제사를 마친 뒤에 즉시 상소를 하려고 하였으나 첫째는 차마 못하겠고 둘째는 감히 못하겠으니 우선 다음 날을 기다려보기로 하였다. 22일 주상이 김한동(金翰東)을 불러 하교하기를 “지금은 의리가 분명하게 결판이 났으니 영남 유생들은 더 체류할 필요가 없다. 아까 경연에서 좌의정이 주청한 바가 있었다. 물러나가 좌의정을 보고 상세히 물어서 영남 유생에게 전달을 하라. 일전에 체류 식량을 받지는 않았지만 지금 회량(回糧)을 주면 반드시 감히 받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또 들으니 유생들이 물러나 학업을 닦으라는 비답을 듣고자한다고 하니 모름지기 비답을 내리는 법식에 의하여 말로 하교를 전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하였다. ...... 중론이 마침내 상소를 정지하자는 의논을 주장하였다. 그 중에 불충에 죽더라도 남쪽으로 돌아갈 뜻이 없는 자는 다만 2~3명뿐이었다. 그러나 일이 이미 이에 이르렀으니 다시 무엇을 하겠는가? 아! 애통하구나. 우리들이 천리를 와서 일만 명이 한목소리로 30년간 꽉 막혀서 감히 말하지 못한 일을 말하는 것이 과연 얼마나 큰 의리이며 큰 행사인데 다만 우리의 정성이 부족하고 의견이 일치하지 않아 끝내 유시무종(有始無終: 시작은 있으나 결과가 없음)의 탄식으로 돌아가니 애석함을 이길 수 있겠는가? 그러나 우리 성상이 꾹 참고 있는 본 뜻은 중천에 뜬 태양같이 밝으니 우리영남의 모든 유생들의 윤리는 죽더라도 거의 눈을 감을 것이다. 이날 서울인사로서 문안인사를 온 자가 매우 많았으나 다 힘없이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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