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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이슈

한국의 유교책판 체험 연수 프로그램

한국국학진흥원에는 〈한국의 유교책판〉이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이 있습니다. 2015년 세계기록문화유산에 등재된 유교책판은 한국 지식인의 500년 역사가 담겨 있는 조선시대 집단 지성의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이번 스토리이슈에서는 〈한국의 유교책판〉과 학생들의 체험 연수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고자 합니다.


세계유산활용프로그램 (출처: 문화재청)


우리나라 전통 인쇄방법


인간은 기록을 통하여 자신을 표현하고, 자신의 발자취를 후대에 전합니다. 이러한 경험이 축적되어 문화가 되고, 해당 지역의 역사가 되며, 나아가 민족의 역사성을 담아내는 그릇이 됩니다. 인류는 다양한 형태의 문자, 도구를 이용하여 축적한 정보를 기억하고, 보급·전파하게 되었습니다. 문자의 기록은 처음에는 동물의 뼈나 상아, 나무, 돌 등의 도구를 이용했습니다. 이후 붓, 먹, 종이 등의 서사재료와 도구가 발달하면서 붓으로 글씨를 쓰는 필사를 통하여 책의 형태를 처음으로 갖추게 되었습니다. 필사는 직접 써야하기 때문에 동일한 내용이 담긴 여러 권의 책을 다시 만드는 것이 어려우며, 글자의 모양도 일정하지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필사는 단일 정보를 기록하는 수단만 되었을 뿐 정보를 보급하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정보를 오래도록 보존하고 널리 보급하기 위해서는 획기적인 인쇄 수단이 필요하였습니다. 인쇄방법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목판과 활자를 이용한 인쇄술입니다. 목판은 문자를 나무에 새겨 종이에 찍는 기술로 인쇄방법 중 가장 먼저 고안되어 널리 사용되었습니다.


무구정광대라니경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_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목판


목판은 음각(陰刻) 또는 양각(陽刻)으로 문자를 판각하여 책판(冊板)을 만들고, 종이로 찍어 책을 만든 인쇄방법입니다. 서기 636년경 중국에서 처음 시작되어 전파되었으며, 인쇄방법 중 최초로 고안해낸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목판인쇄물로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본으로 알려진 신라의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 고려의 『보협인다라니경(寶印陀羅尼經, 1007)』, 초조대장경(初雕大藏經) 및 재조대장경(再雕大藏經)이 대표적입니다. 조선 초기부터 각종 경서(經書), 불경(佛經), 문집(文集) 등 다양한 주제의 문헌을 찍어내는데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해인사 대장경판 (출처: 한국국학진흥원_스토리테마파크)


목판은 최초의 인쇄 수단이면서 근대까지 가장 광범위하게 활용되었던 인쇄 방식이었습니다. 목판은 보존이 편하고 계속적인 인쇄가 가능하며, 세밀한 그림과 지도를 표현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어서 오래도록 성행하면서 기술과 전통이 계승되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중앙에서 배포된 서적을 번각, 간행하여 민간에 유포하는 목판인쇄가 널리 활용되었습니다. 우리나라 목판인쇄의 꽃은 문집 목판이라 할 수 있습니다. 목판 판각의 70% 이상을 차지했던 문집 목판은 유교 공동체에서 살던 우리 선조들의 뛰어난 문화의식을 보여주는 훌륭한 지적 자산입니다.


성학십도 책판 (출처: 한국국학진흥원_스토리테마파크)




유교책판


‘유교책판(儒敎冊版, Confucian Printing Woodblocks in Korea)’은 조선시대에 718종의 서책을 간행하기 위해 판각한 책판으로, 305개 문중과 서원에서 기탁한 총 64,226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유교책판은 시공을 초월하여 서적을 통하여 학생이 선인들의 사상을 탐구하고 전승하며 소통하는 ‘텍스트 커뮤니케이션(text communication)’의 원형입니다. 책판에 수록된 내용은 문학, 정치, 경제, 철학에 걸친 다양한 분야를 다루고 있습니다. 궁극적으로는 유교의 인륜공동체(人倫共同體) 실현이라는 주제를 담고 있는 것이 공통적인 특징이 있습니다.


성학십도 책판 인출본 (출처: 한국국학진흥원_스토리테마파크)


문중-학맥-서원-지역사회로 연결되는 네트워크를 형성한 지역의 지식인 집단은 ‘공론(公論)’을 통해 인쇄할 서책의 내용과 이후의 출판 과정을 결정하였습니다. 공론을 통한 제작 과정부터 자체적으로 비용을 분담하는 ‘공동체 출판’ 방식은 유례를 찾기 힘든 매우 특별한 출판 방식입니다. 또한 네트워크의 구성원들은 20세기 중반까지 지속적으로 스승과 제자의 관계로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관계는 500년 이상 지속되면서 ‘집단지성(集團知性)’을 형성하였습니다. 영구적으로 보존되어온 영원한 학문의 상징으로서 유교책판은 서책을 원활하게 보급하기 위해 제책(codex) 형태로 인출하도록 제작되었습니다. 더욱이 현전하는 모든 책판은 지금도 인출이 가능할 정도로 원형의 상태 그대로 유지되어 있습니다




체험 연수 프로그램


그렇습니다. 이처럼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가진 〈한국의 유교 책판〉은 보존과 가치 전승을 위해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습니다. 이를 보존하고 관리하는 한국국학진흥원에선 학생들에게 기록유산의 가치를 확산하고 문화 자긍심을 제고하기 위해 〈한국의 유교 책판〉의 가치와 중요성을 알리는 체험 연수를 기획하였습니다. 이번 연수를 통해 한국의 유교책판과 책판이 제작되고 사용된 한국의 서원(세계유산)에 대한 종합적인 이해를 통해 유네스코 유산 사업에 대한 이해를 돕고자 하였습니다. 이를 위해서 체험 연수 프로그램은 이론 강의와 체험 프로그램을 함께 운영하였습니다.


전진성 강사(유네스코 한국위원회 문화팀장)의 강의 (출처: 한국국학진흥원)


먼저, 유네스코 한국위원회의 담당자 및 대학 교수진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사업과 등재 유산인 한국의 유교책판에 대한 강의가 이루어졌습니다. 유네스코 역할과 세계기록유산 사업에 대한 기본적인 설명 및 유교책판에 대한 심도 깊은 강의가 이루어졌습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도산서원’ 답사 (출처: 한국국학진흥원)


세계기록유산 전시체험관 체험 (출처: 한국국학진흥원)



체험 프로그램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도산서원’과 세계기록유산 전시체험관, 유교문화박물관을 답사하였습니다. 먼저, 조선시대 유교책판이 제작되고 실제로 사용되었던 도산서원에서 선인들의 공부법과 서적 및 책판 보관법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한국국학진흥원의 세계기록유산 전시체험관에서 AR과 VR을 이용하여 실감나게 세계유산 문화콘텐츠를 체험했습니다. 유교문화박물관에선 조선시대 유교의 인륜공동체와 선인들의 생활상을 확인하였습니다.


고서 인출 및 만들기 체험 (출처: 한국국학진흥원)



그리고 유교문화박물관의 학예사와 함께 세계기록유산인 한국의 유교책판의 체험용 복제 목판을 활용한 고서 인출 및 만들기 체험을 하였습니다. 선인들이 고서를 만드는 과정을 하나하나 배우고 실제로 인출해보고 책을 묶어 볼 수 있었습니다.

2021년 연수는 중고등학생과 대학생으로 나누어 각각 10차에 걸쳐 진해되었고, 제반 비용은 한국국학진흥원에서 부담하였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2021년 연수는 코로나19 때문에 숙박을 하기 어려운 상황으로 당일에 모든 강의와 체험 프로그램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2022년 새해에는 부디 코로나19가 종식되어 인문정신연수원에서 숙박을 하면서 보다 여유로운 일정으로 체험 연수가 진행되길 희망합니다. 강의와 체험이 함께하는 〈한국의 유교책판〉 체험 연수 프로그램! 여러분의 많은 참여를 기다립니다.




정      리
임근실 (한국국학진흥원)
사진 촬영
한국국학진흥원 기록유산센터
“조선시대 군인들의 강무”

마상재(馬上才)는 달리는 말 위에서 사람이 행하는 갖가지 재주로, 농마(弄馬), 희마(戱馬), 마희(馬戱), 곡마(曲馬), 원기(猿騎), 무마(舞馬), 표기희(驃騎戱), 마기(馬技), 마기(馬伎), 입마기(立馬技), 마술(馬術) 또는 말광대, 말놀음 같이 다양한 용어로 불린다. 이들 용어 가운데 훈련된 말에게 여러 기예를 익히게 하는 무마(舞馬)를 제외하고, 그 나머지 용어는 기수가 달리는 말 위에서 여러 가지 동작을 취하여 재주를 부리는 기예를 뜻하는 말이다. 특히 마상재는 조선시대에 이르러 붙여진 명칭으로 민간에서는 주로 마기(馬伎)라 불렀다. 하지만 마기가 아니라 희마(戱馬)가 옳다는 주장이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에서 확인되는 것으로 미루어 희마가 옳은 표현으로 보인다.
마상재는 기마술의 일종으로 행해지기 때문에 별도로 때를 가리지는 않았다. 다만 조선 후기에 들어와 마상재가 관무재라는 무예 시험의 종목으로 시행되면서 봄과 가을에 주로 많이 행해졌다.
마상재에는 키가 크고 빛깔이 좋으며 훈련이 잘된 말을 골라서 썼으며, 암말보다도 수말이 적당하다고 했다. 특히 부루말(흰말)을 높이 쳤으며, 가라말(검정말) 중에도 네 발굽이 흰 것은 무방하게 여겼다. 이러한 말에 온갖 치레를 갖추었으며 마상재를 하는 사람은 전립 또는 투구를 썼다. 옷은 민소매로 만들어진 붉고 노란 호의(더그레)에 같은 색의 바지를 입었으며 목화나 짚신을 신지 않고 버선발로 말을 탔다.

“청나라 대신이 조선의 침술을 찾다”

정태화, 임인음빙록, 1662-09-29 ~

1662년 9월 29일, 아침부터 청나라의 역관들이 정태화를 만나보러 왔다. 정태화(鄭太和)는 부사 허적과 함께 이들을 만나보았는데, 그들이 전한 이야기는 청나라 보정대신 3명의 부탁이었다.
“수대신(首大臣)에게 병환이 있는데, 마침 사신 일행 중에 데려온 침의(鍼醫)가 있다 하니 치료하고 싶소. 근래 병세를 보니 날짜가 많은 것 같으니 조선 침의 안례(安禮)가 며칠 동안 남아서 침을 놓고 대신의 병환을 살핀 이후 떠나는 것이 어떻겠소?”
이 이야기를 듣자 정태화는 며칠 전 조참례를 행할 때의 광경이 떠올랐다. 수대신이란 사람이 직접 조선 사신단에게 와서 침의 김상성이란 자를 찾았던 것이다. 아마 김상성은 지난번 사행 때 동행해온 의관이었던 것 같은데, 수대신은 그 당시에도 조선의관의 침으로 효과를 보았던 듯하였다. 정태화는 비록 김상성은 오지 않았으나, 이번에도 의술이 뛰어난 자가 함께 왔으니 보내주겠다 약속하고는 안례(安禮)를 보내 주었는데, 며칠간 치료를 받아보니 효과가 좋았던 모양이었다. 이에 아예 공식적으로 조선 사신단에게 의관을 남겨서 치료해 달라 부탁을 해 온 것이었다.
이미 정태화 일행은 사신단의 임무를 마쳤기에 곧 떠날 처지였다. 그러나 만일 이 일을 임금에게 보고한다면 아마 흔쾌히 의관으로 하여금 청나라 대신의 병을 치료하도록 할 것이었다. 여기에 생각이 미치자 정태화는 청나라 보정대신들의 부탁을 허락하고는 안례를 뒤에 남겨 치료를 마친 이후 사신 일행의 뒤를 따라오도록 하였다. 청나라와 같이 크고 넓은 나라에서도 조선의 의술을 찾고 있다니, 정태화는 조선 의술에 새삼 자부심이 일었다.

“중국인들이 가장 선호한 조선의 인삼”

인삼은 5~6세기부터 고구려와 백제의 주요 수출품이었고, 고려시대에는 송나라에 사신이 방문할 때 가져간 인삼이 1,000근이나 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더욱 중요한 수출품이 되었다. 명나라 초기에 조선은 금과 은 등을 조공으로 바쳐야 했으나, 세종대에 금과 은의 조공을 중단하고 그 대신 인삼을 조공하기도 했다. 명 말기부터 중국인들의 인삼수요는 더욱 커졌다. 조선은 사신단의 조공품목 뿐만 아니라 무역품목으로도 인삼을 가지고 갔는데, 경비가 떨어지면 인삼을 팔아서 비용을 마련하기도 했다. 그만큼 당시 조선의 인삼은 귀한 물품이었고, 명나라 사행단이 지나가는 곳의 중국 관리들은 의례히 예단을 받았는데 요동 도사 왕소훈이 예단을 돌려보낸 이유를 인삼이 없어서 서운해 한 것이라고 짐작할 만큼 중국에선 조선의 인삼을 선호했다.
중국에서 인삼의 수요가 또 다시 급증한 것은 청조 말기인데, 당시 아편중독에 인삼이 효과가 있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1841년 조선에서 수입하는 홍삼의 수출량은 2만 근이었는데, 1847년엔 2배인 4만 근까지 급증하기도 했다.

“포로 쇄환”

조선은 일본에 3차례의 회답 겸쇄환사를 파견하였다. 1607년 외교가 재개된 첫 번째 사절에게 일본은 많은 배려를 베풀었다. 쓰시마와 막부에서는 적극적으로 협조하였고, 이에 따라 고국으로 돌아가려는 많은 피로인들이 사신을 따라 조선으로 들어왔다. 이미 귀국을 거부하고 일본에 정착하려는 포로들이 생겨나기도 했다.
1617년 상황은 달라져 있었다. 사신들에게는 막부나 쓰시마와의 교섭 외에 피로인에게 귀국의 정당성을 알리며 설득하는 과제가 늘어난 것이다. 쇄환을 위해 데려온 포로가 다시 돌아가 버리거나 따라왔다가도 마음이 변해 가버리는 일이 속출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전히 피로인은 설득의 대상으로 데리고 돌아가야 할 조선인이었다. 1624년 회답 겸쇄환사에게는 자발적으로 돌아가겠다고 찾아오는 피로인들이 드물 정도가 되었다. 이미 세대가 바뀌어 완전히 일본 습성에 젖은 포로들이 등장했다. 1636년과 1634년에도 극소수의 쇄환이 있기는 하였으나 본격적인 포로의 쇄환은 1624년으로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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