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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판에 새긴 이름, 편액

편액의 문을 열다

“이리 오너라! 게 아무도 없느냐~~.”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비질을 막 끝낸 듯 단정한 마당이 눈에 들어온다. 처마 끝 풍경소리 들리면 어느새 나는 300년 전의 어느 날에 와 있다.

역사적인 공간은 역사에 대한 내 지식과 상상이 허상이 아님을 말해준다. 100년 전의 6월 어느 한 낮, 혹은 200년 전의 6월 어느 밤, 선조의 삶의 흔적을 따라가다 보면 길 잃은 내 삶의 방향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도산서당과 편액



[나무판에 새긴 이름, 편액]의 시작!


“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편액도 그러하다. 편액은 ‘건물의 문과 처마 사이에 글씨를 새겨 붙인 나무판’이다. 하지만 이 정의만으로는 부족하다. 편액에 새긴 글귀의 함축적이고 상징적인 의미를 알고 나면 편액이 걸린 공간은 물리적인 공간에서 인문학적인 공간으로 바뀐다.

한국의 편액은 건물의 기능과 의미, 건물주가 지향하는 가치관을 3~5자 정도의 글자로 함축하여 표현했다. 한국의 편액이 갖는 인문학적 가치와 서예 미학적 가치를 높게 평가한 ‘유네스코 아시아‧태평양 지역 기록유산 위원회(MOWCAP)는 2016년 5월 19일에 ‘한국의 편액’을 한국 최초의 유네스코 아시아‧태평양 지역 기록유산으로 등재 결정을 했다.


한국국학진흥원 세계기록유산전시체험관 ‘한국의 편액’ 소개



기록유산 등재 이후, 웹진 담談은 2019년 1월부터 [나무판에 새긴 이름, 편액]을 연재하기 시작했다. 김민옥 선생님의 ‘편액에 대하여’를 시작으로 2019년에서 2021년까지 매년 11편의 편액이야기를 담았다. 올해 연재된 4편의 편액이야기를 더하면 총 37편의 편액이야기를 소개했다.



담담 담談 주제 [나무판에 새긴 이름, 편액]
1 59 조보-조정의 기별 편액에 대하여
2 60 양반의 식도락 오직 보물은 청백, 보백당(寶白堂)
3 61 100(百)주년-‘만세’의 의리를 새기다 송백처럼 변함없는 굳은 의미를 담다, 후조당(後彫堂)
4 62 신문물 편액으로 살펴보는 미수 허목 선생 전서를 새롭게 해석하다
5 63 가정교육 어버이를 섬길 날이 많지 않다, 애일당(愛日堂)
6 64 이민자 이민자, 조선에 충효를 다하다
7 65 괴물과 히어로의 경계에서 선비의 무릉도원, 무릉정(武陵亭)
8 66 신흥무관학교를 다녔던 〈아무개〉들을 위한 웹진 독립군의 마중물, 군자정(君子亭)
9 67 쩐의 전쟁 : 왜관편 진주강씨 법전 도은종택
10 68 조선시대 덕후들 공부에 미치다, 뇌풍정(雷風亭)
11 69 어벤져스 : 無限戰爭 서리를 밟다, 조상에 대한 추모의 현장, 이상루(履霜樓)
12 71 謹賀新年 이웃나라 사행단의 일원으로 명나라에 다녀온 구전 김중청을 기리는, 반천정사(槃泉精舍)
13 72 조선시대 이모티콘 퇴계 선생님의 위트와 감성 : 월천서당, 선몽대
14 73 본원적 공포 VS 만들어진 공포 피접의 장소이기도 했던 정자, 고산정(孤山亭)
15 74 코로나의 봄, 우리에게 절실한 힐링타임 갈매기도 놀라게 할 까 두렵다, 반구정(伴鷗亭)
16 75 조선시대 집콕, 랜선 가정방문 두루 평안을 지키고자 했던, 경류정(慶流亭)
17 76 (역사덕) 후후의 세계 충과 절의의 상징, 공북헌(拱北軒)
18 77 오 나의 귀신님! 조상이 살아 계신 듯 하다, 여재문(如在門)
19 78 숨겨진 빌런 독립운동에 앞장선 실천유학자, 회당 장석영
20 79 머리를 볼작시면 청렴결백을 사모하다, 경렴당(景濂堂)
21 80 바람이 朋黨(붕당) 자손들의 화목을 당부하다, 함집당(咸集堂)
22 81 콘퍼런스, 방구석 1열에서 봤더니 자연을 벗삼아 정의를 실현하다, 태고와(太古窩)
23 83 금기와 극복 사욕을 이기고 예로 돌아가다, 극복재(克復齋)
24 84 물렀거라! 액운아 용과 거북이 지켜주다, 쌍암정려(雙巖精廬)
25 85 조선 여성시대 풍산류문의 저력, 상벽가와 화경당(和敬堂)
26 86 가짜 뉴스 독립운동가의 숙명, 그리고 풍뢰헌(風雷軒)
27 87 ‘같이의 가치’ 조선판 대가족 선을 쌓은 집안에는 반드시 남은 경사가 있다, 경수당(慶壽堂)
28 88 나라를 지키는 N 가지 방법 나라사랑의 정신을 기리다, 오계서원(迃溪書院)
29 89 웰-다잉(Well-Dying) 선조의 유훈, 독서종자실(讀書種子室)
30 90 선비의 재테크 나눔과 베풂을 실천하다, 만취당(晩翠堂)
31 91 선비의 공부법 꿋꿋하고 한결같은 마음을 실천하다, 송월재(松月齋)
32 92 조선 문자시대 국문소설의 시발점이 되다, 쾌재정(快哉亭)
33 93 선인의 당근마켓 바람을 맞으며 여유롭게 노닌다, 풍호정(風乎亭)
34 96 호랑이 기운 솟아나라 호랑이를 감동시키다, 야계정(也溪亭)
35 97 공직의 덕목 공직자의 출처진퇴를 보여주다, 용와(慵窩)
36 98 선비, 음률에 기대어 시름을 잊다 노래로 근심을 잊다, 영귀정(詠歸亭)
37 99 조선판 부부의 세계 진충보국의 길 위에 선 화목, 칠인정(七印亭)


[나무판에 새긴 이름, 편액]의 기록!


한국의 편액은 건물의 건축 목적에 따라 교육 공간, 수양 공간, 주거 공간, 추모 공간으로 구분할 수 있다. 교육 공간은 조상과 선현의 교육 이념을 담고 있는 공간이며, 수양 공간은 대체로 유유자적하는 선비들의 여유와 풍류를 담고 있는 공간이다. 주거 공간은 선현들의 정신적 가치를 담고 있는 공간이며, 추모 공간은 선현의 학덕을 추모하고 존경하는 의미를 담고 있는 공간이다.


한국국학진흥원 세계기록유산전시체험관
편액과 공간에 대한 안내



[나무판에 새긴 이름, 편액]에 소개한 주요 편액을 교육, 수양, 주거, 추모 공간으로 나누어 분류하면 다음과 같다.

교육 공간


번호 명칭 서체 문중명 장소 담談
1 반천정사
(槃泉精舍)
해서 안동김씨 봉화구전종택
(安東金氏 奉化 苟全宗宅)
봉화군 봉성면 봉성리 71호
2 월천서당
(月川書堂)
해서 횡성조씨 월천종택
(橫城趙氏 月川宗宅)
안동시 도산면 동부리 72호
3 공북헌
(拱北軒)
행서 우계이씨종택
(羽溪李氏宗宅)
봉화군 봉화읍 도촌리 76호
4 회당
(晦堂)
행초서 인동장씨 남산파회당고택
(仁同張氏 南山派晦堂古宅)
칠곡군 기산면 각산리 78호
5 경렴당
(景濂堂)
해서 현풍곽씨 포산고가
(玄風郭氏 苞山古家)
달성군 현풍면 대리 79호
6 극복재
(克復齋)
해서 영양남씨 봉주공파
(英陽南氏 鳳洲公派)
영덕군 창수면 가산리 83호
7 오계서원
(迃溪書院)
해서 영주평은 오계서원
(榮州平恩 迃溪書院)
영주시 평은면 천본리 88호

수양 공간


번호 명칭 서체 문중명 장소 담談
1 무릉정
(武陵亭)
해서 연안이씨 별좌공종택
(延安李氏 別坐公宗宅)
예천군 호명면 송곡리 65호
2 군자정
(君子亭)
해서 고성이씨 법흥종택
(固城李氏 法興宗宅)
안동시 법흥동 임청각길 66호
3 뇌풍정
(雷風亭)
행서 진주강씨 입재문중
(晉州姜氏 立齋門中)
봉화군 법전면 법전리 68호
4 선몽대
(仙夢臺)
해서 진성이씨 백송파종중
(眞城李氏 白松派宗中)
예천군 호명면 백송리 72호
5 고산정
(孤山亭)
해서 봉화금씨 관찰공파
(奉化琴氏 觀察公派)
안동시 도산면 가송리 73호
6 반구정
(伴鷗亭)
행서 고성이씨 법흥문중
(固城李氏 法興門中)
안동시 정상동 74호
7 태고와
(太古窩)
행서 영일정씨 지수종택
(迎日鄭氏 篪叟宗宅)
영천시 화북면 횡계리 81호
8 쾌재정
(快哉亭)
행서 인천채씨
(仁川蔡氏)
상주시 이안면 가장리 92호
9 풍호정
(風乎亭)
해서 평산신씨
(平山申氏)
청송군 진보면 합강리 93호
10 영귀정
(詠歸亭)
행서 안동김씨 만취당종택
(安東金氏晩翠堂宗宅)
의성군 점곡면 사촌리 98호
11 칠인정
(七印亭)
해서 인동장씨 흥해파
(仁同張氏興海派)
포항시 흥해읍 초곡리 99호


주거 공간


번호 명칭 서체 문중명 장소 담談
1 보백당
(寶白堂)
해서 안동김씨 보백당종중
(安東金氏 寶白堂宗中)
안동시 길안면 묵계리 60호
2 후조당
(後彫堂)
해서 광산김씨 후조당종가
(光山金氏 後彫堂宗宅)
안동시 와룡면 오천리 61호
3 경류정
(慶流亭)
전서 진성이씨 주촌문중
(眞城李氏 周村門中)
안동시 와룡면 주하리 62호
4 충효당
(忠孝堂)
전서 풍산류씨 충효당
(豊山柳氏 忠孝堂)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 62호
5 애일당
(愛日堂)
해서 영천이씨 농암종택
(永川李氏 聾巖宗宅)
안동시 도산면 가송리 63호
6 충효고가
(忠孝古家)
예서 원주변씨 간재종택
(原州邊氏 簡齋宗宅)
안동시 서후면 금계리 64호
7 도은구택
(陶隱舊宅)
해서 진주강씨 도은종택
(晉州姜氏 陶隱宗宅)
봉화군 법전면 척곡리 67호
8 경류정
(慶流亭)
해서 진성이씨 주촌문중
(眞城李氏 周村門中)
안동시 와룡면 주하리 75호
9 여재문
(如在門)
초서 인동장씨 여헌종택
(仁同張氏 旅軒宗宅)
구미시 인의동 77호
10 함집당
(咸集堂)
행서 선성김씨 함집당종택
(宣城金氏 咸集堂宗宅)
영주시 이산면 신암리 80호
11 쌍암정려
(雙巖精廬)
해서 진주강씨 국전공파
(晉州姜氏 菊田公派)
안동시 북후면 옹천리 84호
12 화경당
(和敬堂)
행서 풍산류씨 하회마을화경당
(豊山柳氏 河回마을和敬堂)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 85호
13 풍뢰헌
(風雷軒)
행서 의성김씨 학봉종택
(義城金氏 鶴峯宗宅))
안동시 서후면 금계리 86호
14 경수당
(慶壽堂)
해서 무안박씨 영해파경수당종택
(務安朴氏 寧海派慶壽堂宗宅)
영덕군 영해면 원구리 87호
15 독서종자실
(讀書種子室)
예서 성산이씨 응와종택
(星山李氏 凝窩宗宅)
성주군 월항면 한개마을 89호
16 만취당
(晩翠堂)
해서 안동김씨 만취당종택
(安東金氏 晩翠堂宗宅)
의성군 점곡면 사촌리 90호
17 송월재
(松月齋)
행서 전주이씨 송월재종택
(全州李氏 松月齋宗宅)
봉화군 법전면 풍정리 91호
18 용와
(慵窩)
행서 전주류씨 수곡파용와종택
(全州柳氏 水谷派慵窩宗宅)
구미시 해평면 일선리 97호


추모 공간


번호 명칭 서체 문중명 장소 담談
1 이상루
(履霜樓)
해서 안동김씨 태장재사
(安東金氏台庄齋舍)
안동시 서후면 태장리 69호
2 야계정
(也溪亭)
전서 성주도씨
(星州都氏)
예천군 효자면 용두리 96호




이 표는 담談에서 소개한 37편의 편액이야기를 정리한 것이다. 교육 공간(7점), 수양 공간(11점), 주거 공간(18점), 추모 공간(2점) 등 주요 편액 38점을 소개했다. 주거 공간과 관련된 편액을 가장 많이 소개했으며, 추모 공간과 관련된 편액은 2점이 소개되었다.

또한 경상북도 14개 지역에 있는 편액을 소개했다. 안동(15회), 봉화(5회), 예천(3회)을 소개하고. 구미, 영덕, 영주, 의성은 각 2회씩 소개했다. 달성, 상주, 성주, 영천, 청송, 칠곡, 포항은 각 1번씩 소개했다.

편액의 글씨를 쓴 인물로는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이 있다. 담談에 소개한 편액 중 퇴계의 작품은 후조당(61호), 월천서당(72호), 선몽대(72호), 고산정(73호), 경류정(75호), 경수당(87호) 등 모두 6점이다.


고산정 편액



또한 미수체(眉叟體)라고 하는 독보적인 글씨체를 남긴 미수(眉叟) 허목(許穆, 1595~1682)의 작품은 경류정(62호), 충효당(62호) 등 2점을 소개했다.


경류정 편액



앞에서 담談에 소개한 38점의 편액을 건축 목적에 따라 분류했고, 편액이 소개된 지역의 빈도수를 확인했다. 더불어 편액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서체도 살펴보았다. 주거 목적으로 지어진 건물의 편액, 안동 지역의 편액, 해서체 편액을 가장 많이 소개했다. 앞으로 쓰게 될 [나무판에 새긴 이름, 편액]에서는 상대적으로 소개가 미미했던 추모 공간의 편액과 경북의 다양한 지역의 편액, 다양한 서체의 편액을 소개할 계획이다.


[나무판에 새긴 이름, 편액]의 의미!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 너도 그렇다”

편액도 그렇다. 자세히 보아야 그 의미를 알 수 있다. 오래 보아야 그 소중함을 알 수 있다. 그냥 한 번 스쳐 지나듯 보면 거리의 수많은 간판들과 다르지 않다. 하지만 편액의 의미를 한 번에 알아차리기는 쉽지 않다. 편액은 한 편의 시라고 해도 될 정도로 3~5 글자에 압축하여 함축적이고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편액은 선조가 남긴 유훈이나 공자나 맹자를 비롯한 선현들의 가르침에서 글자를 선택하는 경우가 많아 그 배경을 알지 못하면 편액의 의미를 오롯이 이해하기 어렵다.

담談 85호에 소개한 ‘화경당(和敬堂)’ 편액은 선조의 유훈을 담고 있다.

학서(鶴棲) 류이좌(柳台佐, 1763~1837)는 그의 8대조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1542~1607)의 “권하노니, 자손들아 반드시 삼가라. 충효 이외의 다른 사업은 없는 것이니라.[勉爾子孫須愼旃 忠孝之外無事業]”의 유언시를 마음에 새겼다. 또 그의 아버지 류사춘(柳師春, 1741~1814)이 자식에게 “매사에 반드시 충효를 다하고, 매사에 반드시 화경을 다하라.[每事克盡忠孝 每事必要和敬]”고 하신 말씀을 기억하고자 했다. 그래서 그는 서애와 부친이 강조한 ‘충효’의 가르침을 ‘화경당(和敬堂)’ 편액에 녹여냈다.

“화(和)로써 어버이를 섬기면 효(孝)요,
경(敬)으로써 임금을 섬기면 충(忠)이다.
[和以事親則孝 敬以事君則忠]”

담談 98호에 소개한 ‘영귀정(詠歸亭)’ 편액은 『논어』, 「선진편」의 증점(曾點)이 한 말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공자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평소에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말하는데, 만약 누군가 너희를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 하겠느냐.”라고 물었다. 증점이 늦봄에 봄옷이 완성되면 관을 쓴 어른 대여섯과 어린 동자 예닐곱 명과 함께, “기수에서 목욕하고, 기수의 언덕인 무에서 바람을 쐬며 노랫가락을 읊조리다가 돌아오겠습니다[浴乎沂, 風乎舞雩, 詠而歸].” 라고 대답했다.

“노랫가락을 읊조리며 돌아가는 곳, 영귀정(詠歸亭)”

담談 89호에 소개한 ‘독서종자실(讀書種子室)’ 편액이 있다. ‘글을 읽는 씨앗’이 되라는 의미이다. [나무판에 새긴 이름, 편액]이 ‘편액종자실(扁額種子室)’이 되기를 꿈꿔본다.


한국국학진흥원 세계기록유산전시체험관 ‘한국의 편액’ 개방형 수장고


한국국학진흥원 세계기록유산전시체험관 ‘한국의 편액’ 개방형 수장고



[나무판에 새긴 이름, 편액], 소회!


웹진 담談이 100회를 맞이하는 동안 한국국학진흥원 콘텐츠정보팀 소속 7명의 선생님들이[나무판에 새긴 이름, 편액]을 써 주셨다. 그리고 권진호 국학기반본부장님과 김형수 유교문화박물관장님께서는 [나무판에 새긴 이름, 편액]의 자문을 맡아주셨다. 특히 권진호 본부장님께서는 2년이 넘는 시간 동안 자문을 해 주시고 계신다. 자문을 맡아주신 권진호 본부장님과 김형수 박물관장님, 그리고 집필을 해주신 여러 선생님들께 이 자리를 빌려 감사함을 전한다.

[나무판에 새긴 이름, 편액]을 쓸 때, 담談의 전체 주제에 맞는 편액을 찾는 것이 쉽지 않다. 예를 들면 이런 경우다. 담談 79호의 전체 주제는 “머리를 볼작시면”이다. 그래서 모자에 대한 이야기, 갓에 대한 이야기를 실었다. 이때 소개한 편액은 ‘경렴당(景濂堂)’ 이다. 경렴당은 청백리로 알려진 곽안방(郭安邦)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한 이양서원에 있는 강당 편액이다. 갓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언급한 편액은 찾을 수 없어, 갓을 쓰고 벼슬하는 사람의 청렴함을 우러러 사모하고 기리는 편액을 찾아 쓰게 된 것이다. 또 담談 99호의 전체 주제는 “조선판 부부의 세계”이지만 부부의 사랑이나 믿음에 대한 편액을 찾지 못해, 가정의 화목과 부모에 대한 효, 그리고 형제의 우애를 알 수 있는 ‘칠인정(七印亭)’ 편액을 소개했다.

이처럼 담談의 주제와 꼭 맞는 편액을 찾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편액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유의미한 삶의 가치를 전하기에 우리는 앞으로도 편액 소개를 부지런히 할 것이다.

편액 속에 담긴 충효의 정신, 선현에 대한 그리움, 가족 간의 화목, 형제간의 우애는 몇 백 년 전의 선조들 역시도 지금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는 고민을 했다는 방증이다. 글귀로 새겨 마음에 담아 두고 그곳을 지나다닐 때마다 들여다보며 다짐했을 편액의 주인공들! 그 만큼 그들의 삶도 지금의 우리처럼 녹록치 않았던 것이다.

과거의 그들이 속세에서 벗어나 안빈낙도의 삶을 노래할 때, 21세기의 우리 역시 삶이 지치고 버거울 때, 산이나 바다를 찾아가서 답답한 속을 달래고 온다. 알고 보면 사람 사는 모습은 세월이 지나도 닮은꼴이다. 만약[나무판에 새긴 이름, 편액]에서 소개한 편액을 찾아가게 된다면, 경치 좋은 곳을 배경으로 인생 샷도 찍고 더불어 편액의 의미도 아로새기길 바란다.


다시, 편액의 문을 열고…


정자에 올라 편액을 본다. 그곳을 다녀간 문인들의 시판들도 본다. 산들바람 건 듯 불어 스르륵 잠이 들면 퇴계 이황, 성재 금난수와 조우할 지도 모르겠다. 내가 머물고 있는 곳에 이름을 지어주는 순간, 그곳은 더 이상 예전의 그곳이 아니리라. 조선의 ‘공간크리에이터’인 편액의 주인공들께 감사함을 전하며, 댓돌 위의 신발을 신는다.

“이리 오너라~~”


한국국학진흥원 세계기록유산전시체험관




세계기록유산 전시체험관은
한국국학진흥원이 소장한 세계기록유산을
최적의 상태로 보관하고
관람객에게 쾌적한 전시관람 환경을 제공하고자 만들어졌습니다.

현판 전문 개방형 수장고와 유교책판 전문 개방형 수장고,
AR/VR체험관, 2개의 전시실로 구성된 이 공간에서는
누구나 편하게 세계기록유산의 실물을 대면할 수 있습니다.

‘한국의 편액’이 궁금하다면,

한국국학진흥원 세계기록유산 전시체험관으로 오세요~~!!




정      리
이복순 (한국국학진흥원)
자      문
권진호 (한국국학진흥원)
사진촬영
한국국학진흥원
참      고
1. 한국국학진흥원 기록유산센터, 『한국의 편액』, 한국국학진흥원, 2020.
2. 권진호, 『안동의 유교현판』, 민속원, 2020.
3. 한국의 편액 (https://pyeonaek.ugyo.net) 더보기
4. 스토리테마파크 (https://story.ugyo.net) 더보기
5. 유홍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 남도답사 일번지』, 창비, 2011.
6. 나태주, 『꽃을 보듯 너를 본다』, 지혜, 2019.
“무료한 틈에 계사년과 갑오년의 일기를 다시 읽어보다”

오희문, 쇄미록, 1597-07-04 ~

1597년 7월 4일, 벌써 올해 정유년도 절반이 지나갔다. 요사이 밤기운이 서늘하여 싸늘한 바람이 때로 불어 와서 아침저녁으로는 겹옷을 입지 않으면 안되었다. 심신이 상쾌하니, 가을 바람에 몸의 병이 나아가는 것을 스스로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요즘은 특별한 일이 없어 무료한 날이 많은데, 심심함을 이기려고 계사년과 갑오년의 일기를 꺼내어 다시 읽어보는 중이다. 전란을 피해 떠돌아다니며 병을 앓고, 추위와 굶주림에 지치며 고생한 내용을 다시 읽자니, 그때의 기분이 생생히 기억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때는 슬하의 7남매가 모두 무고히 살아 있었으니, 비록 때로 끼니를 잇기 어려운 탄식이 있었어도 비통하고 마음 상하는 일은 없었다.

지금 지내는 산속 고을로 들어온 이후로는 양식과 반찬을 조달하는 데는 어려움이 없고, 또 종종 맛난 반찬도 얻어다가 어머님을 봉양하고 아랫사람들도 먹일 수 있으니, 가히 근심이 없다고 할만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매번 좋은 음식을 앞에 두면 문득 슬피 울기를 그치지 않으니, 얼마전 죽은 딸 단아 때문이었다.

갑오년 봄과 여름에 굶주려 곤궁한 중에도 막내딸과 추자 놀이를 하면서 무료한 회포를 보낸 대목에 이르러서는 더더욱 막내딸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쳐 애통한 마음이 치솟았다. 일기를 읽어 내리던 오희문은 눈가가 촉촉이 젖어왔다.

“종이가 모자라 일기를 쓰지 못하다”

장흥효, 경당일기,
1621-08-21 ~ 1621-08-22

1621년 8월 21일, 일기는 장흥효에게 있어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면서 성찰의 기회가 될 수 있는 자신만의 공간이었다. 그의 일기는 다른 어떤 것에도 구애되지 않으면서 자기가 추구한 성리학적인 삶을 완성하는 하나의 경전과도 같았다. 공자의 논어와 맹자의 맹자, 주자의 사서집주(集註)가 있다면 장흥효에게는 일기가 있었다. 그만큼 그에게는 어떠한 것보다도 소중한 보물이었다.

그런데 종이가 모자랐다. 일기를 작성하기 위해서는 지속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기록할 종이가 공급되어야 했다. 물론 제자들이 공부를 배우는 대가로 종이를 가져오기도 하였고 친지들이나 아는 관원들이 종이를 지급해 주기도 하였다. 유력 양반이라면 사찰에서 질 좋은 종이를 공급받을 수 있었지만, 장흥효의 형평상 그렇게 하지는 못했다.

결국 종이가 모자라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장흥효는 심지어 20여 일 동안 종이가 없는 상태로 일기를 작성하기도 했다. 그러한 날이면 그는 날짜, 간지, 날씨만을 기록하기도 했다. 그래야 어찌 되었든 일기를 이어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천신만고 끝에 종이를 구했지만 문제는 모두 다 기록을 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있었다. 너무 오래되어 기억이 나지 않았다. 매일매일 쓰지 않으면 기억이 사라지는 나이가 된 것이다.

“서울 소식 전해주는 신문, 조보(朝報)”

김광계, 매원일기,
1634-01-17 ~ 1644-04-11

예나 지금이나 시골 사람들의 생활은 도시보다 단조롭기 마련이다. 김광계의 일상 역시 늘 읽던 책을 또 읽고 항상 만나던 사람을 다시 만나는 일의 연속이었지만 그렇다고 새로운 사건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1634년 1월 중순, 김광계는 ‘경보(京報)’를 읽었다는 기록을 일기에 남겼다.

경보란 조선시대 승정원에서 매일의 소식을 적어 발행하던 조보(朝報)를 의미한다. 김광계처럼 지방에 거주하던 양반들은 서울 소식이라는 뜻에서 조보를 경보라고도 불렀다. 조보를 읽으면 새로 바뀌는 세금 정책이나 조정의 정치적 논쟁, 당장 다음 달에 올 신임 수령의 인선까지 알 수 있었으니 지방 양반들에게 조보는 중요한 소식 창구였다.

현대의 종이 신문은 구독을 신청하면 매일 아침마다 집으로 배달받아 간편하게 볼 수 있지만 조선시대의 조보는 그렇지 않았다. 승정원에서 매일 조보를 발행하면 각 지방 관청의 서리들이 일일이 손으로 베껴 발송하는 식이었다. 따라서 관직이 없는 지방 양반들은 거주지의 수령에게서 빌려 읽거나 서울에서 오는 인편에 조보를 가져다 줄 것을 부탁하는 등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조보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서울에서 발행된 조보가 지방까지 오려면 시차가 생길 수밖에 없었고 매일 나오는 조보를 지방에서 그때그때 챙겨 읽기란 불가능했으므로, 보통 지방 양반들은 며칠이나 몇 달치 조보를 한 번에 얻어다 읽곤 했다. 김광계의 재종숙부 김령의 일기에는 예안 현감에게서 조보를 빌려 읽었다는 기록이 자주 등장한다. 열성 구독자로 거의 달마다 조보를 구해 읽고 그 내용도 상세히 적어 놓은 김령과 달리 김광계는 조보 읽기에 큰 흥미를 보이지 않고 어쩌다 들어오면 읽어 보는 수준이었던 듯하다. 번다한 세상사에 관심을 갖기보다 스스로의 공부와 수양에 더 마음을 쏟은 것이 김광계의 성품이었다.

“40여 년 동안 쓴 『해주일록(海洲日錄)』은 전감으로 삼을 만하다”

남붕, 해주일록, 1930-06-05

1930년 6월 5일, 남붕은 며칠 동안 읽은 『중용혹문(中庸或問)』 등사본의 후지(後識)를 작성하려다가 붓을 멈췄다. 등사했던 날짜를 쓰려고 했는데 기억이 나지 않아서였다. 남붕은 날짜를 확인하기 위해 『해주일록(海洲日錄)』을 가져 와 꼼꼼히 살펴보았는데, 아들 원모(元模)가 죽기 전인 기유년(1909) 봄에 난고정(蘭皐亭)에서 원모가 등사한 것임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남붕은 아들이 등사한 『중용혹문』에 발문을 짓고 점심 때 발문을 다시 베껴 썼다.

이렇게 오래 전의 일이 기억나지 않을 때 『해주일록』을 살펴보면 마치 어제 일처럼 기억이 역력하니 40여 년 동안의 기록이 지난 일을 살피고 증거로 삼을 수 있으니 여간 큰 도움이 되는 게 아니었다.

한 달 정도 지난 윤6월 4일 아침을 먹은 뒤에 남붕은 『해주일록』을 처음 쓰기 시작한 병술년(1886) 조 부터 살펴보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40여 년이고 해마다 기록한 것이 거의 50여 권이니, 전감(前鑑)이 될 만하다고 생각되었다.

“세월이 흘러도 『동소만록』은 썩지 않고 전해질 책이다”

남붕, 해주일록,
1926-03-06 ~ 1930-11-02

1926년 3월 8일. 남붕은 이틀 전에 우현(禹玄) 족조를 찾아갔다가 빌려 온 『동소만록(桐巢漫錄)』을 읽고 있었다. 남붕은 『동소만록』을 쓴 남하정(南夏正)이 조야의 고사를 수집하여 사건마다 평론을 붙여 마치 옛날의 『사기史』의 사례와 같이 글을 쓴 것에 관해 감탄하였다. 또한 남인(南人)과 노론(老論)이 벌인 당론의 시비에 대하여 더욱 분명하게 분석하여 놓았으니, 실로 남인의 보배이고 서인에게는 눈엣가시임이 분명했다고 생각했다.

남붕은 『동소만록』을 눈에서 떼지 못할 정도로 푹 빠져있었다. 누가 찾아오기라도 하면 함께 보거나, 책 속의 사건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족제 호의(浩義)가 왔을 때도 함께 보았고, 백우길이 찾아왔을 때도 책을 보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늘 빠짐없이 밤마다 경문을 외우는 일도 그만두고 『동소만록』을 보았다.

11일에는 8대조 통덕랑공(通德郞公)의 묘소, 부곡(釜谷)의 조부 부군의 묘소, 도동(道洞)의 부모님의 묘소를 참배하고, 뒷산의 여러 묘소와 위 봉우리 뒤 증조부 묘소까지 찾아 가 참배를 하기 위해 집을 나섰는데, 그 행낭 속에도 『동소만록』 1책을 챙겨 넣었다. 2~3일간 오고 가는 짬짬이 아직 다 보지 못한 것을 보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길을 나선 남붕은 긴 고개에 이르러 아들의 묘소를 둘러본 후 8대조 통덕랑공(通德郞公)의 묘소를 참배하고, 부곡(釜谷)으로 가서 조부 부군의 묘소를 참배하고, 정오에 도동(道洞)에 도착하여 부모님의 묘소를 참배한 후 그날 밤에 재사에서 잠을 잤다. 잠들기 전까지 『동소만록』을 보다가 자려고 하였는데, 금계(金溪) 종숙이 찾아와서 또 함께 이 책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음 날 아침에 뒷산의 여러 묘소와 증조부 묘소를 참배하고 재사에 머무르며 드디어『동소만록』을 다 보았다. 그리고 오후에는 금계 족숙의 집에서 머무르며 다시 『동소만록』을 보았다.

남붕은 몇 년이 지난 후 『동소만록』을 또다시 보았는데, 다시 보아도 이 책에서 기록한 국가와 조정의 고사나 의론은 정밀하고 분명하며 문장이 간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책이야말로 참으로 썩지 않고 오래도록 전해질 글이라고 생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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