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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판에 새긴 이름, 편액

도끼와 흰 도포 자락에 담긴 신하의 마음,
직방재(直方齋)

“전하, 시정기를 감찰하시겠다는 뜻을 거두어 주시옵소서. 뜻을 거두지 않으시겠다면, 이 도끼로 신의 머리부터 쳐 주시옵소서. (중략) 부디 어명을 거두어 주시옵소서!”

바람조차 불지 않는다. 결의에 찬 민우원의 흰 도포 자락이 소리 없이 흔들린다.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그의 눈빛은 울분을 넘은 간절함이 서려 있다. 햇빛에 반사된 날 선 도끼 한 자루 앞에 두고 민우원은 임금을 향해 절을 한다. 그리고 그는 왕을 향해 외친다. 흰 도포에 흰 갓을 쓴 유생들의 곡소리가 이어진다.


드라마 〈신입사관 구해령〉 중 지부상소(持斧上疏)하는 민우원(출처: MBC)



비 내리는 어린이날, 초등학생 딸과 나는 〈신입사관 구해령〉 다시 보기를 했다. 딸은 유치원 때부터 한복을 좋아해 사극도 좋아하게 되었다. 그래서 딸은 사극을 볼 때마다 한복을 꺼내입고 마치 자신이 조선 시대 여인이 된 듯 몰입하며 본다. 딸은 작년 어린이날 고모가 선물해주신 한복을 입고 구해령이 의금부로 끌려가 옥에 갇히는 장면을 넋 놓고 본다.

이어 예문관 봉교(藝文館奉敎) 민우원이 국왕이 시정기(時政記)를 감찰(監察)한다는 어명에 지부상소(持斧上疏) 하는 장면이 나왔다. 딸은 〈미스터 션샤인〉에도 지부상소 장면이 나온다고 아는 척했다. 극 중 ‘애기씨’라 불리는 고애신의 할아버지, 고사홍이 일본의 만행을 알리는 지부상소를 올린 장면은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난다. 고사홍은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 1833~1906)을 모티브로 한 인물이었다.

흰 상복과 도끼, 어울리지 않는 이 둘이 만나 임금을 향한 신하의 충심이 되었다. 목숨을 건, 올곧은 신하의 직언이 바로 지부상소의 모습으로 표현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도끼를 들고 목숨을 담보로 상소할 생각을 한 사람은 누구였을까?

『고려사열전(高麗史列傳)』 등 기록으로 남아있는 최초의 지부상소 주인공은 고려 후기 유학자 역동(易東) 우탁(禹倬, 1263~1342) 선생이다.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은 우탁의 학문과 절의(節義)를 높게 평가하여 그를 제향하는 역동서원(易東書院)을 건립했다. 그래서 이번 편액 이야기에서는 우탁의 삶을 반추하며 역동서원의 직방재(直方齋) 편액 의미를 되새겨 본다.




백의를 입고 도끼를 든, 우탁


조복 대신 백의로 갈아입고朝衣換著白 홀 꽂는 대신 도끼를 잡았네搢笏易持斧 (중략)


성호(星湖) 이익(李瀷, 1681~1763)은 장편 악부시를 지어 우탁의 군자다운 모습을 칭송했다. 제시한 부분은 24구로 구성된 악부시의 첫 구이다. ‘조복 대신 백의로 갈아입고’에서 조복은 고려 시대 백관이 왕을 접견할 때 입었던 옷이다. 관모인 양관(梁冠)을 쓰고, 소매가 넓은 대수포(大袖袍)를 입고 손에는 홀(笏)을 드는 것이 조복 차림이다. 우탁은 왕을 만나러 간 자리에 대수포를 입는 대신 흰 옷을 입고, 홀을 꽂는 대신 도끼를 둘러맸다.

예로부터 우리 민족을 백의민족(白衣民族)이라 불렀다. 흰옷을 즐겨 입는 풍습은 부족 국가와 삼국, 고려와 조선 등 오랜 세월 이어져 온 전통이지만 국가적 차원에서 흰옷 금지를 명령한 때도 있었다.

충렬왕(忠烈王) 원년에 태사국(太史局)이 아뢰기를, “동방은 목(木)에 속하여 마땅히 푸른빛을 숭상함이 옳은데, 나라의 풍속이 흰빛을 숭상하니, 이는 목이 금(金)에 절제를 받는 상징입니다. 청컨대 백의(白衣)를 금지하시옵소서.” 하니, 그를 좇았다.

이익, 『성호사설(星湖僿說)』 제3권, 수근목간(水根木幹) 중에서


고려의 충렬왕과 공민왕 때 백의(白衣)를 금지했다. 조선의 영조와 정조 때도 성리학과 풍수를 이유로 백의를 금지했지만 이익은 이 풍습이 기자조선 때부터 있었던 아름다운 풍속이라고 긍정했다.

충렬왕이 금지한 백의를 입고 나타난 우탁, 그가 입은 흰옷은 바로 자신의 상복(喪服)을 의미한다. 동양의 전통사상 중 하나인 ‘심신일원론(心身一元論)’의 관점에서 도끼를 들고 상소를 올린다는 것은 목숨을 내놓겠다는 것으로 내 주장에 대한 확고한 신념 없이는 할 수 없는 행동이다. 왕명을 거역한 신하에게 남는 것은 죽음이다. 운 좋게 살아남는다 해도 가문이 몰락하고 삭탈관직(削奪官職) 당하게 된다. 우탁이 흰옷을 꺼내 입은 것은 내 모든 것을 걸고 싸우겠다는 굳은 각오와 절의(節義)의 다른 이름이다. 왕의 잘못을 지적하고 바로잡기 위해 흰옷을 입고 도끼를 들 생각을 한 그의 은유가 새삼 놀랍다.

‘春山에 눈노긴 람 건 듯 불고 간 업다 / 져근 듯 비러다가 불리고쟈 마리 우희 / 귀 밋  무근 서리를 노겨 볼가  노라’ 의 「탄로가(嘆老歌)」에 보이는 해학과 기발함은 절대 하루아침에 생긴 것이 아니다.


역동 우탁 선생 시조비(안동대학교)



우탁이 지부상소를 올리고 궐 밖에 엎드려 곡소리를 내며 시위를 할 수 밖에 없었던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충선왕(忠宣王, 1275~1325)의 잘못된 만남


아버지 충렬왕(忠烈王, 1236~1308) 상중(喪中),
숙창원비(淑昌院妃)와 간음한 충선왕!


충선왕이 21세기에 살았다면 아마도 증권가 지라시에 소문이 돌다가 자극적인 인터넷 뉴스 기사를 장식하고 네이버 실시간 검색어 1위에 올랐을 것이다. 어떻게 아버지의 부인과 아버지의 상중에 간음을 할 수 있었을까?

고려 말의 원 간섭기, 고려 왕 이름 앞에는 ‘충(忠)’ 자가 들어갔다. ‘원나라에 충성을 맹세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고려는 형제의 이름에 공통으로 들어가는 항렬자(行列字)처럼 ‘충렬왕, 충선왕, 충숙왕(忠肅王, 1294~1339), 충혜왕(忠惠王, 1315~1344), 충목왕(忠穆王, 1337~1348), 충정왕(忠定王, 1337~1352)’까지 6대 88년간 원으로부터 ‘충’을 강요당했다. 이 시기의 고려 왕들은 의무적으로 원의 공주와 혼인까지 해야 했다.

고려 제26대 충선왕은 1275년, 충렬왕과 몽골 세조 쿠빌라이의 딸인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 1259~1297)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가 살았던 시기의 고려는 몽골의 반식민지로 아버지 충렬왕보다 어머니 제국대장공주의 권력이 더 막강하던 때였다.

3살의 나이에 세자로 책봉된 충선왕은 상당히 오랜 기간 몽골에서 생활했다. 그는 고려를 위한 임금으로 살지 않았다. 그는 몽골과 몽골 황제와의 관계를 이용해 자신의 왕권 강화에만 신경을 썼다. 결국 충선왕 때 고려는 제도적, 의례적인 면에서 몽골 제후국으로 위상이 격하되었다.

충선왕은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충렬왕이 자주 사냥을 나가고 연회를 즐기며 방탕한 생활을 했는데 그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은 탓인지 제국대장공주는 39살의 젊은 나이에 죽었다. 충선왕은 충렬왕이 1308년 7월 13일 7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8월 28일, 고려의 왕이 되었다.

1308년 10월 8일 충선왕은 김문연(金文衍, ?~1314)의 집에 가서 숙창원비와 노닥거렸다. 김문연은 숙창원비의 오빠로 고려의 실권이 충선왕에게 돌아가게 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숙창원비 김씨는 충렬왕의 계비(繼妃)다. 사실 충선왕과 숙창원비는 그녀가 충렬왕의 비(妃)가 되기 전부터 알던 사이였다.

제국대장공주가 죽은 후 충렬왕이 행희(幸姬) 무비(無比)를 총애하자 충선왕은 무비의 목을 베었다. 그 후 충선왕은 충렬왕의 환심을 얻기 위해 과부였던 숙창원비를 궁으로 들여보냈다. 놀라운 사실은 이 두 사람이 서로 정을 나누던 연인이라는 것이다.

충선왕은 10월 12일 충렬왕을 장사지내고 난 후 숙창원비와 함께 오랜 시간을 보냈다. 이때부터 사람들이 이 두 사람의 관계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10여 일이 지난 24일, 김문연의 집으로 거처를 옮긴 충선왕과 숙창원비는 서로 정을 통했다. 이후 숙창원비는 충선왕의 총애를 받아 숙비(淑妃)에 봉해졌으며 법회를 열고 잔치를 베푸는 등 위세를 떨쳤다. 아버지의 방탕한 생활을 싫어했던 충선왕이었으나 그의 부도덕하고 패륜적인 행위는 아버지를 능가했다.

충선왕의 이런 악행을 본 신하가 우탁 한 명만은 아니었을 텐데, 죽음이 두려워 모른척한 신하들과 목숨 걸고 직언한 우탁의 서로 다른 행보는 어디에서 온 것일까?




감찰 규정(監察糾正), 우탁


단양 우(禹)씨 시조 우현(禹玄)의 7대손인 역동 우탁은 1263년(원종 4)에 단산현 품달리 신원(지금의 충북 단양군 적성면 현곡리)에서 태어났다. 1278년 우탁은 충렬왕에게 발탁되며 홍문관 수찬에 임명되었고, 1290년 29세 때 문과에 급제하며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우탁의 생애는 자세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지만 기존 연구에 따르면 대략 세 가지 측면이 주목된다고 한다. 첫째는 우탁이 문과 급제 후 영해 사록(寧海司錄)이 되었을 때의 일이다. 당시 영해에는 팔령(八鈴)이라고 하는 신에게 제사 지내는 사당이 있었는데, 영해 주민들이 팔령신(여덟의 방울신)을 극진히 모시고 있었다. 제물을 바쳐 제사 지내지 않으면 화를 입을 수 있다는 두려움에 백성들은 어려운 형편에도 온갖 제물을 바치는 등 폐해가 심했다. 유학자 우탁은 음사[淫祠, 내력이 올바르지 않은 귀신을 모셔 놓은 집]를 부수어 바다에 버림으로써 영해 지방 사람들의 삶을 살폈다. 둘째는 우탁이 감찰 규정이 되었을 때 충선왕의 비행(非行)에 지부상소를 올리고 벼슬을 버린 후 예안으로 돌아온 것이다. 셋째는 우리나라에 『주역(周易)』이 전해졌을 때 이를 이해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우탁이 한 달여 동안 연구하고 해독하여 비로소 우리나라에도 역학이 시작되었다는 사실이다.

까마득히 미천한 일개 신하이나九級陛下一介臣 기세가 하늘을 찌르고 바람이 울부짖네直氣上干風號怒 끝내 신하는 탕확의 형벌에서 벗어나 畢竟臣從湯鑊來 고향에 은둔하니 이도 하늘의 운수라故山歸老亦天數 그대는 못 보았나 역동서원 사당을君不見易東瞽宗祠 하남의 학통이 우리나라에 전해졌음을河南一脈傳東土


성호 이익의 악부시 마지막 부분이다. 임금을 모시는 일개 신하일 뿐인 우탁이지만 충선왕의 허물을 꾸짖기 위해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대궐을 걸어 들어갔을 종6품 감찰 규정의 곧은 기개는 존경받아 마땅하다. 감찰 규정은 고려 시대 사헌부(司憲府)에 속하여 관리들을 규찰하고 제사·전곡·조회 등의 출납을 감찰하는 임무를 띤 대관(臺官)으로 조선 시대의 암행어사와 같은 직책이라 할 수 있다. 감찰 규정 우탁이 탕확[湯鑊, 죄인을 끓는 물에 삶아 죽이는 형벌]을 받지 않고, 들고 간 도끼에 척살(刺殺) 당하지 않고 살아남아 예안(禮安)으로 돌아가 은거 생활을 했다. 퇴계 이황은 왕의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 목숨을 건 우탁의 높은 지조, 『주역정전(周易程傳)』의 뜻을 밝혀 우리나라에 널리 알린 우탁의 학문을 기리기 위해 역동서원을 세웠다.


역동서원 상현사




이황과 역동서원


한국국학진흥원에서 안동 방면으로 1.4km, 자동차로 1분 거리에 ‘역동유허비(易東遺墟碑)’가 있다. 퇴근길, 이곳을 수없이 지나는데 차를 세우고 유허비를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역사에 대한 나의 무관심이 새삼 부끄럽다. 유허비는 선인들의 자취가 있던 곳에 그들의 삶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을 말한다. ‘역동유허비’는 거북 받침돌 위에 비 몸을 세우고, 맨 위에 머릿돌을 얹어 놓은 모습을 하고 있다. 1880년 고종 17년, 우탁의 옛 집터를 기념하기 위해 세웠는데 안동댐 건설로 다른 곳에 이전했다가 지금의 자리로 옮겨 세웠다.


역동유허비



고려좨주역동우선생유허




조선 시대에 우탁을 제향한 서원은 안동 예안의 역동서원(易東書院), 영해의 단산서원(丹山書院), 단양의 단암서원(丹巖書院), 안동의 구계서원(龜溪書院)이 있다. 역동서원은 우탁이 관직을 사임하고 내려와 거주했던 곳, 단산서원은 우탁의 첫 부임지, 단암서원은 우탁의 고향, 구계서원은 우탁이 노후에 활동했던 곳이다.

우탁을 제향한 서원 중 최초로 사액을 받은 역동서원은 원래 낙동강 상류, 지금의 안동시 예안면 부포리 오담에 있었다.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된 역동서원은 1969년 지금의 위치에 이전 복원되었는데, 이후 송천동이 안동대학교의 교지로 편입되면서 대학 내에 서원이 있게 된 것이다. 조선의 지방 사립대학과 현대의 지방 국립대학이 한자리에 있으니 감회가 새롭다.


역동서원 입도문



이황은 지부상소 이후 예안으로 퇴거하여 학문 연구와 후진양성에 전념한 우탁을 높이 평가했다. 1567년(명종 22) 명나라 사신인 한림원 검토관 허국(許國)과 병과 급사중 위시량(魏時亮) 등이 동방에 공자와 맹자의 학문을 아는 자가 있는지 물었을 때, 이황은 “고려의 우탁(禹倬)·정몽주(鄭夢周)와 본조(本朝)의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조광조(趙光祖)·윤상(尹祥)·이언적(李彥迪)·서경덕(徐敬德)”이 있다고 하며 덧붙여 말했다.

고려 말년에 이르러 정자와 주자의 글이 조금씩 동방으로 들어오자 우탁과 정몽주 같은 이가 성리학을 연구하게 되었고, 본조에 이르러서는 중국 조정에서 나누어 주는 사서, 『오경대전』, 『성리대전』 등의 서적을 얻어 본조에서도 과거를 설행하여 선비를 뽑았고, 또 사서삼경을 환히 아는 사람들이 선발되었습니다.

이황, 『퇴계집』, 언행록 5, 「유편(類編)」


우탁은 지부상소 이후 관직을 떠나 단양에 낙향하여 학문에 전념했다. 그 후 성균관 좨주로 승진하여 성균관 유생들에게 정주[程朱, 중국 송나라의 유학자 정호(程顥)·정이(程頥) 형제와 주희를 아울러 이르는 말]의 성리학을 연구해 밝히는 등 고려 말의 신유학 진흥에 힘썼다. 그러나 벼슬에 뜻이 없었던 우탁은 예안으로 내려왔다. 우탁의 곧은 절의와 전원에 은거한 삶은 이황이 바라던 삶의 모습이기도 했다. 그래서 이황은 역동서원 건립을 위해 노력했다.

1558년(명종 13) 3월, 이황의 제자인 금난수(琴蘭秀, 1530~1604)와 조목(趙穆, 1524~1606)에 의해 우탁을 제향하는 서원 창건에 대한 공식적인 논의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당시 예안 지역의 사족들이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않았고 그곳 백성들 역시 곤궁한 삶을 살았기에 서원 건립을 당장 시행할 수 없었다.

1566년(명종 21) 관아를 짓고 남은 기와 9천 장을 서원 건립에 사용하기로 했다. 그리고 예안 사족들은 취학 연령의 자제가 있는 집마다 재력에 따라 차등적으로 물력(物力)을 보탰다. 지방관과 재지 사족들의 적극적인 협조로 1567년(명종 22) 4월에 강당과 동재·서재가 완성되었다.

앞줄의 여섯 칸[楹]을 명교당(明敎堂)이라 하고, 동서로 각각 온돌방(溫突房)이 있어 동쪽은 정일재(精一齊)라 하고 서쪽은 직방재(直方齋)라 하였다. 직방재의 북쪽 장서각(藏書閣)을 광명실(光明室)이라 하고, 당(堂)의 뒤 조금 동쪽에 사묘(祠廟) 세 칸을 지어 상현사(尙賢祠)라 하였다. 앞줄의 동서 양재(兩齋)는 각 세 칸으로 하여 동쪽을 사물재(四勿齋), 서쪽을 삼성재(三省齋)라 하고, 그 남쪽에 대문을 세워 입도문(入道門)이라 하였다. 서재(西齋)의 서쪽에 주방과 창고를 세우고 전체를 이름하여 역동서원(易東書院)이라 하였는데, 모두 퇴계 선생이 이름을 정하였다.

조목, 『월천집』 제5권, 「역동서원 사실(易東書院事實)」 중



역동서원 명교당



역동서원 편액



명교당 편액



이황은 중국 한(漢)나라 때 정관(丁寬)이 전하(田何)에게 『주역』을 다 배우고 동쪽 낙양으로 갈 적에 전하가 ‘『주역』이 이제 동으로 가버렸다’고 한 정관의 고사에서 인용하여 ‘역동(易東)’이라는 이름을 따왔다. 이황은 역동서원의 편액을 쓰고 서원의 기문을 작성할 만큼 역동서원 건립에 진심이었다. 이황과 많은 예안 지역 사람들의 노력 덕분에 1683년(숙종 9) 10월 역동서원은 사액서원이 되었다. 안동대학교 박물관에서 역동서원을 바라보니 그 옛날 서원 건립을 위해 애쓴 선조들의 마음이 느껴졌다. 많은 사람들의 공력(功力)이 450여 년 동안 이어져 지금의 역동서원이 되었다고 생각하니 숙연해졌다.


안동대학교 박물관에서 바라본 역동서원




내면과 외면의 조화, 직방재


역동서원에 있는 많은 편액 중, 명교당 위에 걸린 ‘직방재’ 편액의 의미를 생각해 본다. ‘직방(直方)’은 자신의 행실을 바르게 한다는 의미로, 『주역』 「곤괘(坤卦)·문언(文言)」에 “군자는 경(敬)으로 안을 곧게 하고, 의(義)로 밖을 방정하게 하여, 경과 의가 확립되면 덕이 외롭지 않다.[君子敬以直內 義以方外 敬義立而德不孤]”라고 한 데서 유래한 말이다.


역동서원 직방재 편액



송나라의 성리학설을 분류 집대성하여 편집한 책인 『성리대전(性理大全)』에 “안으로 망령된 생각이 없게 하고, 밖으로는 망령된 행동이 없게 해야 한다[只是內無妄思,外無妄動].”는 구절이 있다. 경(敬)은 유가 사상에서 빼놓을 수 없는 마음의 자세로 인간이 도덕적인 삶을 살 수 있게 하는 기준을 제시한다. 그래서 경은 인간이 인간으로서 바로 설 수 있도록 조화와 균형을 유지 시켜 주는 삶의 태도이다.

의(義)는 무엇일까? 공자가 말한 인간의 본래 모습인 인(仁)을 회복해 사회적 질서를 확립하기 위한 실천 방안이 바로 의(義)이다. 삼강오륜(三綱五倫) 중 군신유의(君臣有義)가 있는데, 임금과 신하 사이에는 의리가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임금은 신하와 백성의 안락한 삶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고, 신하와 백성은 그 임금에게 충성해 공동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서로 노력해야 하는 관계이다. 만약 임금이 자신의 의무를 다하지 않아 백성들의 삶을 곤궁하게 한다면 신하는 도끼를 들고 분연히 앞으로 나아가 임금의 잘못을 고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의로운 행동이다.

이황은 신하로서, 학자로서, 자연인으로서의 우탁을 경애(敬愛)하고 존경(尊敬)했다. 또한 이황은 우탁이 의인(義人)으로서 정의(正義)롭고 도리(道理)에 맞는 의리(義理)를 실천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직방재’는 이황의 우탁을 향한 마음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편액이다.




빨래를 널며


빨래가 다 되었다. 5월의 눈부신 햇살은 빨래 널기에 더없이 좋다. 빨래 바구니에 가득 찬 옷들을 하나씩 탁탁 털어 빨래 건조대에 널었다. 빨래를 널며 우리 가족이 생활하며 어쩔 수 없이 묻혀온 더럽고 지저분한 것이 깨끗하게 씻겨나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매일 아침 가족들은 각자 자신만의 옷을 입고 학교와 일터로 향한다. 우리가 입고 있는 이 옷이 매일 어떤 특별한 의미를 담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때로 우리가 입는 옷은 T.P.O(시간, 장소, 상황)에 따라 백 마디 말보다 더 강한 인상을 남기기도 한다.

일제가 우리 민족이 즐겨 입는 백의를 금지했던 이유는 흰색이 가지는 순수함, 완벽함, 고결함, 숭고함, 저항이 두려워서 그랬던 것은 아닐까? 우탁이 정갈한 흰 도포 자락을 휘날리며 도끼를 들고 나서던 그 충절과 우국(憂國) 정신이 지금,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하단 생각을 해본다.




정      리
이복순 (한국국학진흥원)
자      문
권진호 (한국국학진흥원)
참      고
1. 한국의 편액 (https://pyeonaek.ugyo.net)더보기
2.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s://db.history.go.kr)더보기
3.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https://contents.history.go.kr)더보기
4. 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종합DB] (https://db.itkc.or.kr)더보기
5.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https://www.heritage.go.kr)더보기
6.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 (https://encykorea.aks.ac.kr)더보기
7. 황민기 외 4명, 『역동 우탁의 삶과 학문』, 안동시, 한국국학진흥원, 2022.
8. 국사편찬위원회, 『옷차림과 치장의 변천』, 두산동아, 2006.
9. 신창호, 『경이란 무엇인가』, 글항아리, 2018.
10. 조준하, 「易東 禹倬의 생애와 사상」, 『韓國思想과 文化』, 13호, 한국사상문화학회, 2001.
11. 이재희, 「고시조에 나타난 신체어 연구­우탁, 정몽주를 중심으로」, 『동아시아고대학』, 동아시아고대학회, 61호, 2021.
12. 최지희, 『조선후기 양반의 백의풍습(白衣風習) 인식에 관한 연구』,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2017.
“아이에게 상투를 틀어 갓을 씌워주다 - 아들의 관례”

김령, 계암일록,
1621-03-19 ~ 1621-03-20

1621년 3월 19일, 김령의 아들이 관례를 치르는 날이었다. 김령은 아들의 관례를 위해 여러 친지를 불러 모았다. 비가 내리는 가운데, 홀기를 베껴 쓰고, 오후가 되기 전에 관례가 치러졌다. 배원선(裴元善)이 찬자(賛者)가 되어주었다. 삼가례(三加禮)를 마치고 가묘(家廟, 한 집안의 사당)에 고유하고 잔을 올렸다. 의식이 끝나고는 손님에게 상을 들이고 술을 돌리며 조용히 술잔을 주고받아 저녁까지 이어졌는데 모두 취했다.

다음날에 김령은 아이를 데리고 방잠 가묘에 가서 배알(拜謁)하고, 선영(先塋, 조상의 무덤)에 성묘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벗의 집에 들르니, “한 말 술이 있으니 같이 마시고 싶습니다.” 하였다. 동상례를 치르고 남은 돈으로 빚은 술이었다. 김령은 술에 시달려 많이 마실 수 없음에도 여러 벗과 자리를 함께했다. 철쭉이 한창 피어나 즐길 만했다.

“연경에 다녀온 자들의 의관 - 한 벌의 봄옷과 갓과 띠, 세련되고 훌륭하다”

흑립(출처: 은평역사한옥박물관) 미상, 계산기정, 1804-03-12 ~

연경에 들어갔던 사람들이 돌아오게 되면 용만관(龍灣館)에 이르러 모두 옷을 갈아 입는데, 한 벌의 봄옷에다 갓을 쓰고 띠를 띠니 누구나 모두 의관이 매우 훌륭하고 행동이 자연스러워, 다시는 융복(戎服 군복) 차림으로 치달리던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
사신단 일행이 느지막에 진변헌으로 들어가 망신루(望辰樓)에서 투호(投壺) 놀이하는 것을 구경하는데, 마침 부윤(府尹)이 고을 유생(儒生)들에게 순제(旬題)를 내주어 한창 답안[試券]을 받아 평점(評點)하기로 나도 또한 참가하여 증좌하였다.
13일 아침 통군정으로 해서 다시 환학정(喚鶴亭)으로 올라갔다. 정자는 서문 성 모퉁이에 있는데, 자그마하게 지은 단아한 집으로서 겨우 두서너 사람이 앉을 만하였다.
서쪽으론 압록강에 임하고 남쪽으로는 학란봉(鶴卵峯)과 마주했는데, 학란봉은 형상이 마치 알을 품은 학과 같아 자세가 안온하게 펼쳐져 있다. 환학정이란 그 때문에 지어진 것이다. ‘환학정’이란 편액(扁額) 석 자 및 서쪽 처마의 편액 ‘편선루(翩躚樓)’라고 한 것은 판서(判書) 윤사국(尹師國)의 글씨이다. 노래와 춤을 구경하다가 어두워서야 파하였다.
14일 잠시 흐림. 용만관에서 떠나 소관관(所串館)까지 30리를 가서 점심을 먹고 용천(龍川)까지 50리를 가서 양책관(良策館)에서 잤다.
서장관은 으레, 연경(燕京)에 들어가는 일기(日記)와 듣고 본 사건을 써야 하는 책임이 있는데, 이제야 비로소 끝냈으므로 모두 압록강을 건넌다는 장계(狀啓)를 써서 띄웠다. 낮에야 떠나 용천관(龍川館)에 이르니, 희미한 달이 벌써 높이 떴다. 청류당에 기생 풍악을 차렸다가 다시 천연정(天淵亭)으로 올라갔다.
15일 아침 해가 뜨는 시각에 잠을 깨니 빗발이 부슬부슬하는데, 지다 남은 꽃과 여윈 꽃술이 암벽 사이에 윤기(潤氣)를 머금고 있어, 지난겨울의 풍경에 비하여 배나 아름다웠다. 잠시 천연정(天淵亭)에 올라가 풍악을 듣다가 떠났다.
차련관 앞에서 점심을 먹었다. 전에는 관 앞에 반송(소나무)이 있어 울창하고도 우툴두툴하며 높다랗게 우뚝하여 일산과 같았으므로, 명나라 가는 사신들의 시의 소재가 되는 일이 많았다. 동림성(東林城)을 지나다 보니 길에 아름드리 솔이 많은데 검푸른 빛이 하늘에 닿았으며 어둑하게 칙칙하고 그늘이 져, 지나가기가 마치 굴속을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별장(別狀) 정관(鄭觀)은 연경에 들어갈 때의 만상(灣上 : 의주)의 군관(軍官)이었는데 먼저 진(鎭)에 도달하였다가 길에서 맞아 절하고 이어 성으로 들어가기를 청하므로 드디어 장대(將臺)로 올라갔다. 대가 그다지 높지는 않은데 건물의 제작이 자못 든든하고 크며 편액을 ‘동림수대(東林帥臺)’라 하였다.
대체로 그 성가퀴는 산을 따라 빙 둘렀지만 그래도 요충(要衝)을 차지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식견 있는 사람들이 ‘성을 고쳐 쌓아 그 남쪽 부분을 넓히면 보장(保障)할 수 있는 요지가 될 것이다.’라고 하나, 애석하게도 건의하여 힘을 들이려는 사람은 없다.

대의 북쪽에 별장(別將)의 일 보는 곳이 있는데 건물이 역시 정교하고 치밀하며, 또한 창고에 곡식이 만 곡(斛 한 섬)이 넘게 있는데, 선천부(宣川府)에서 관장한다. 성안의 민가는 열두어 호에 지나지 않으나 이익 내는 것이 박하기 때문에 하나도 모여드는 자가 없다. 앞으로 방수(防戍)하여 막아 내는 사람이 없게 된다면, 뜻하지 않은 변란이 생겼을 때, 적에게 식량을 제공하여 도와주는 결과를 가져올 우려가 될까 걱정스럽다.
정관이 음식 한 상을 차려 대접해 주었다.

“조선시대의 디자이너, 철학에 기초하여 옷을 짓다”

서찬규, 임재일기,
1849-06-15 ~ 1859-07-17

1849년 6월 15일, 안동의 신재기(申在箕)[자는 범여(範汝)]씨가 서찬규를 찾아와서 위문하고 제복(祭服)을 만들었다.
1853년 1월 19일, 안동의 신재기 씨가 내방하였다.
1854년 2월 24일, 춘당대에 국왕이 친림하는 인일제를 설하여 시제(詩題)에 내었는데 근래에 없던 것이었다. 과거에 응시한 후에 곧 노량진에 가서 선생의 제사상에 조문을 드리고 곧바로 성균관에 들어갔다. 구정로(자는 선) 씨가 남촌에 와 있다고 들었다. 경백과 함께 가서 위로하였다. 오후 늦게야 반으로 돌아왔다. 안동의 신범여 씨, 원북의 재원(자는 치효) 족 씨, 우성오씨 형제 등 모두가 찾아와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2월 27일, 이날은 정시가 있는 날이었다. 춘당대에 들어가서 의관이 자꾸 젖었지만, 시험을 보고 나왔다. 박해수(자는 백현) 씨, 신범여 씨, 진사 성진교, 구경백, 우성오, 이치옥, 박화중 씨 등이 찾아와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5월 18일, 신범여 씨가 내방하였다.
1857년 5월 16일, 송 공이 양곡의 한공한(자는 계응) 씨를 찾아가는데, 나도 따라가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주고받는 말이 심의를 만드는 문제에 이르자, 송 공이 속임구변의 설을 이야기하는데 나는 알지 못하는 이야기가 있었다. 모난 옷깃에 포의 무늬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말은 생각해 볼 만한 부분이었으며, 굽은 소매를 단다는 말은 특별히 이런 마름방식이 있었다. 이 부분에 대해서 논의할 바가 많았지만, 여행 중이라 좀 어수선하여 상세하게 다 살펴보지 못한 것이 안타까웠다. 저녁이 되어 말을 달려서 읍 안으로 돌아왔는데 양곡 한씨 어른도 와 있어서 함께 잤다. 송 공의 경주에 관한 절구 한 편이 있다는 것을 들었다.
1857년 윤 5월 7일, 신범여 씨가 내방했다. 심의 한 벌을 함께 만들었다.
1857년 6월 13일, 조모님의 제사인데 집에 걱정거리가 있는 까닭으로 술과 과일만 간단하게 차렸다. 신범여 씨가 내방하였다.
1859년 7월 16일, 안동의 신범여 씨가 내방하여 함께 구암서원에 가서 유숙하였다.
7월 17일, 신범여 씨가 작별하고 떠났다.

“검푸른 두루마기, 대나무 갓, 글자를 수놓은 가사 - 지극한 이치가 갖추어진 승려들의 복식”

이옥, 중흥유기, 1793-08-22

1793년 8월 22일, 이옥은 북한산 유람 중이었다. 절들을 돌아보니 승려〔緇髡〕 12(十二則)
승려의 옷은 베로 만든 두루마기이거나 푸른 면포로 만든 두루마기이거나 또는 검은 베로 만든 직철(直綴, 윗옷과 아래옷을 하나로 합쳐 꿰맨 장삼) 두루마기였는데, 소매는 넓기도 하고 좁기도 하였다.
승려들의 갓은 대나무를 엮어 만든 것으로 단통모(短桶帽), 포량첨건(布梁簷巾), 폐양립(蔽陽笠, 패랭이) 등이 있고, 대나무 껍질을 짜서 만든 것으로 대립(籉笠)이 있는데, 거기엔 입첨(笠簷)이 있어 사립(絲笠, 명주실로 싸개를 하여 만든 갓)과 비슷하며, 위는 항아리 같은데 그 꼭대기는 병(缾)의 입 모양처럼 되어 있다.
승려들의 띠는 대체로 명주실로 땋은 것이다. 혹 명주실로 땋은 것 중에 붉은 끈을 맨 자는, 옥이나 금으로 만들어 망건의 당줄을 꿰는 작은 고리를 모자에 붙이기도 하였다. 또 아의(鴉衣)를 입고 털로 짠 벙거지를 쓰고, 벙거지 꼭대기에는 홍이(紅毦, ‘이’는 새의 날개에 여러 빛깔로 물들여 군복·말안장·투구·전립 등을 꾸미는 것, 속칭 상모)를 나부끼며, 허리에는 청금대(靑錦岱)를 늘어뜨려 엉치 부분에 이르고, 쟁그랑 쟁그랑 쇳소리를 내며 걷는 자도 있었는데 이들은 승려로서 군직(軍職)에 있는 자였다. 승려의 염주는 나무로 만들어 옻칠한 것이 많았는데 가난한 자들은 율무로 만든 것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가사는 모양이 보자기 비슷하지만, 타원형이며 비늘을 이어놓듯 만드는데, 옷의 좌우에 월광보살(月光菩薩)이라고 수놓은 글자를 붙였다.
월광보살이라는 글자에는 자주색, 녹색, 푸른색의 끈 세 개를 늘어뜨렸다.
승려의 말에, “이 옷을 꿰매는 데에는 법도가 있고, 길이는 정해진 치수가 있고, 만들 때는 기탁하는 바가 있어, 감히 잘못되게 할 수도 없고 감히 함부로 다룰 수도 없습니다. 여러 부처님이 비호해 주는 바요, 지극한 이치가 갖추어져 있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승가사에서 붉은 면포로 만든 가사를 한 번 보았다.

“나무 지팡이에서 비옷까지, 그러나 잊은 것이 꼭 하나 - 며칠 동안 행장을 꾸리다”

송민고 《나귀를 탄 선비》(출처: 국립중앙박물관) 이옥, 중흥유기, 1793-08-22

1793년 8월 22일, 행장〔行李〕2칙(二則)

이자(李子)는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멀리 교외로 나가는 자를 보니 계획을 거듭하고 돌아올 날짜를 망설이면서 며칠 동안 심신을 허비하여 행장을 꾸렸는데도 매양 미흡하게 여기는 사람이 많다.”
라고 하였으니, 나귀나 말 한 필, 동자로서 행구를 가지고 갈 종자 한 명, 철쭉나무 지팡이 하나, 호리병 하나, 표주박 하나, 반죽(班竹, 얼룩반점이 있는 대나무) 시통(詩筒) 하나, 통 속에는 우리나라 사람의 시권(詩卷) 하나, 채전축(彩牋軸, 시를 지어 쓰는 무늬 있는 색종이 묶음) 하나, 일인용(一人用) 찬합 하나, 유의(油衣, 비옷) 한 벌, 이불 한 채, 담요 한 장, 담뱃대 하나, 길이가 다섯 자 남짓한 담배통 하나를 준비하였다. 구부정한 모습으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문을 나섰다. 스스로 잘 정돈되었다고 여겨 흐뭇해했는데 5리쯤 가서 다시 생각해 보니 잊은 것이 붓과 먹과 벼루였다.

일행에게는 짧은 담뱃대 두 개, 허리에 차는 작은 칼 두 개, 담배주머니 셋, 화겸(火鎌, 불을 일으키는 도구) 세 개, 천수필(天水筆) 한 자루, 견지(蠲紙) 세 폭이 있었다.
사람마다 각자 갈아 신을 미투리 한 켤레씩을 신었으며, 손에 접는 부채 하나씩을 쥐었고, 주머니 속에는 상평통보(常平通寶) 오십 전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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