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호, 『영남 선비들, 정조를 울리다』〉 (출처: 푸른역사)
A. ‘조선사의 현장으로’는 역사적 사건에 대해 가장 높은 배율의 현미경을 가지고 전체 그림을 복원하기 위한 기획입니다. 원래 창작자들을 대상으로 하여 특정 단위 장면을 복원하고 전통 시대가 가지고 있는 본래의 갈등 구조나 의미를 그들의 기록 속에서 톺아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용도에서 기획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전체 이야기를 복원할 수 있는 기록자료가 있어야 하고, 그 사건 자체가 창작자나 일반인이 볼 때 의미 있어야 했습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시리즈의 첫 책으로 4일간의 살인사건을 복원한 『1751년, 안음현 살인사건』을 선택했고, 두 번째 책으로 40일간의 상소 운동 전 과정을 복원하기 위해 이 책을 집필했습니다. 게다가 현재 한국국학진흥원에서 만인소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국제목록에 등재하기 위한 노력이 진행 중이었기에 여기에 힘을 실어 주려는 의도도 있었습니다.
A. 기존의 역사서와 달리 ‘조선사의 현장으로’ 시리즈는 장면이나 사건의 한 단위를 정확하게 복원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단위를 현미경으로 확대하고 보면, 그 안에는 그러한 사건을 만든 문화적 배경도 있고, 정치적 이유도 존재하며, 철학과 사상의 기반 위에서 행동이 만들어지곤 합니다. 게다가 경제적인 이유로 판단을 달리하는 경우도 있고, 지리적인 영향으로 사건 자체가 달라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일반적인 역사 연구는 문화사, 정치사, 사상사, 심지어 사회사나 복식사를 각각 따로 연구하면서 종적(縱的)으로 그 변화와 추이를 추적합니다. 그러나 이 책은 특정 단위 장면을 횡(橫)으로 잘라, 그 사건을 발생하게 만든 문화·사회·정치·경제·교육·철학 등을 종합해서 사안(사건) 자체를 복원해야 했습니다. 물론 이게 성공적이라고 말씀드리기는 어렵지만, 이 때문에 만인소 운동의 기본 스토리 속에 들어 있는 수많은 개별 주제 연구들을 모두 확인해야 했습니다. 예컨대 당시 종이의 가격은 얼마인지, 상소 운동의 경비는 어떻게 마련하고 어떻게 조직을 꾸렸는지, 상소 운동을 위해 한양까지 어떠한 경로로 이동했는지, 소청은 어떻게 꾸리고 회의는 어떻게 했는지 등은 모두 개별 연구를 필요로 하는 주제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상소 운동이라는 하나의 사건 위에서 위와 같은 내용을 종합하여 설명해야 했기 때문에, 기존의 연구 방법과 완전히 다른 방법론을 가지고 접근해야 하는 상황이 매우 힘들었습니다.
A. 2018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아시아·태평양 지역 목록에 등재되었는데, 당시 등재된 만인소는 조선시대에 있었던 7번의 만인소 운동 가운데 원본이 남아 있는 《1855년 사도세자 추존 만인소》와 《1884년 복제개혁 반대 만인소》입니다. 만인소 상소문 원본은 만 명(혹은 그에 준하는) 이상의 사람들이 연명한 상소이기 때문에 100m에 달하는 독특한 기록유산입니다. 이러한 특이성을 살려 등재를 추진하면서, 동시에 이것이 가진 세계적이고 역사적인 중요성을 어떻게 설명할지가 고민이었습니다. 이것이 지니는 가치가 우리나라에서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세계인들이 동의할 수 있어야 하기 더욱 그러했습니다. 이를 위해 오랜 전문가들과의 토론을 거쳐, 우리는 매우 제한된 공동체이기는 하지만, 그 속에 ‘현대적 개념의 민주주의 이념과 절차’가 살아 움직이고 있다는 점에 착안했습니다. 동아시아의 민주주의 원형을 조선이라는 전근대에서 찾음으로써 그 원형성의 가치가 제도로써 민주주의가 만들어지기 이전부터 중요하게 지켜지고 있다는 사실을 밝혔습니다. 이 부분이 매우 힘들었지만, 덕분에 RSC(등재심사소위원회)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는 실물 공개가 이루어지지 않아도 됩니다. 소장하고 있는 상황과 등재에 대한 권리, 그리고 접근성 및 보존성에 대한 기술 등을 통해 그 진본성과 완전성을 증명하기 때문입니다. 대상의 물리적 크기에 대해서는 등재 신청서에 기술하도록 되어 있어서 텍스트로 기술되었고, 일부 사진 이미지로 상태를 제공하도록 되어 있어서 일부만 사진으로 찍어서 등재 신청서에 첨부했습니다.
A. 제가 전문 역사 연구자가 아니기 때문에 전후 상황에 대해 역사적 평가를 하는 일은 매우 조심스럽습니다. 특히 임오화변의 경우에는 좀 더 세밀한 연구와 관련 자료들이 필요한데, 이 부분은 여전히 조심스러운 측면이 있습니다. 다만 이 사안은 유학적 명분을 기준으로 판단할 때, 영남 남인 입장에서는 올바름이 무너진 상황으로 인식했습니다. 당연히 이를 바로잡다보면, 기호 노론에게 그 책임을 물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 사도세자에 대한 신원이 이루어지면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 갔던 기호 노론에게 그 책임을 물어야 하고, 이를 기반으로 유학적 이념에 기반한 올바름을 회복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죠. 이러한 생각은 이념의 틀 속에서 영남을 하나로 묶는 계기가 되었고, 이러한 이념은 단순한 이념을 넘어 구체적인 실천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이게 만 명 이상이 연명한 상소 운동으로 드러났고, 이러한 에너지는 이후 영남이라는 이념 집단이 촘촘한 네트워크 속에서 강력한 운동을 만드는 원동력으로 작동합니다. 만인소 운동에서 의병운동으로, 그리고 독립운동으로 이어지는 영남의 힘은 바로 여기에 있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힘의 발현을 이끌어 낸 사건이 바로 임오화변에 대한 비판에서 시작된 1792년 영남 만인소 운동이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 하고 있습니다.
〈도산서원 전경〉 (출처: 도산서원)
A. 많은 기록에서 볼 수 있듯, 조선의 ‘영남 남인’으로 일컬어질 수 있는 선비들은 매우 단단한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특히 경신대출척 이후 영남의 중앙정계 진출이 불가능해지면서, 영남은 지역 공동체를 기반으로 ‘치인(治人)’의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했는데 이는 혈연과 학연, 그리고 지연까지 하나로 묶여 있는 독특한 구조를 만듭니다. 이러한 그들의 네트워크는 주로 3가지 거점을 중심으로 드러나는데, 서원과 향교, 그리고 지역 향청이 바로 그것입니다.
서원을 통해 남인으로서의 정체성과 학문적 네트워크를 만들고, 지역 향교를 통해 국가가 인정하는 양반으로서의 지위를 공고히 했습니다. 이를 기반으로 지역 사족들의 모임인 향청을 통해 지역 사대부로서의 자기 위치를 확정하고, 지역 사회를 실제 지배하게 되는데요. 이 모두가 네트워크의 핵심 거점이 됩니다. 만인소 운동과 같은 일이 발생하면, 이러한 네트워크가 총동원되어 그 일을 효율적으로 진행합니다. 예컨대 1792년 만인소 운동의 경우 처음 연락을 받은 봉화의 삼계서원에서 만인소 운동에 대한 결의를 하고, 그 사안을 영남 전체의 수문 서원인 도산서원에 보냅니다. 그리고 각 지역 거점 서원들에 통문을 보내면, 그 거점 서원들은 그들과 연결되어 있는 서원을 담당하고, 각 서원에서는 관련 문중과 사람들을 모아 연명을 받아냅니다. 이러한 인적 네트워크는 ‘퇴계학’이라는 이념적 모델과 더불어, 그들이 실제로 움직일 수 있는 단단한 힘을 만들었습니다.
A. 이도현과 이응원 부자의 상소는 정조 즉위년에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잘 아시는 것처럼 정조는 영조의 비호 아래에서 세손으로 있을 때부터 이미 수많은 위기를 겪었고, 여전히 그의 친부가 신원되지 않은 상황에서 정당성에 대한 견제도 많았습니다.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조가 왕위에 올랐을 때 사도세자의 죽음에 관여했던 사람들이 처하게 될 위기의식 역시 적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은 당시 권력을 잡고 있었던 기호 노론의 지속적인 견제로 드러났고, 이는 비록 왕좌라 하더라도 왕권이 약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었습니다. 특히 사도세자의 문제는 정조와 기호 노론과의 관계에서 매우 예민한 문제이었고, 이를 알고 있었던 영조 역시 사도세자의 문제를 다루지 않는 선에서 기호 노론과 동행해야 한다는 상황을 주지시켰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아직 왕권이라고도 할 수 없는 즉위년에 사도세자 문제를 직접 건드린 상소가 올라왔으니, 정조로서도 여기에 힘을 실을 수 없는 상황이었겠죠. 이에 반해 기호 노론 입장에서는 여기에 대한 확실한 입장과 힘을 보여주어야 할 필요가 있었고, 이것이 바로 이도현·이응원 부자의 사형과 안동부에 대한 징계로 드러났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A. 사실 여기에 대한 정확한 기록이 없는 상황이어서, 이 책을 집필하면서도 여전히 쉽지 않은 문제였는데요. 그래서 당시 조정의 상황과 정조의 말들을 종합해서, 정조의 의중을 추론하는 선에서 이야기를 전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실제 당시 류성한에 대한 탄핵의 의지는 정조를 제외하고는 조정 전체의 공론일 정도로 비판의 강도가 강했습니다. 이는 류성한의 흉언과 도를 넘은 상소 내용이 문제가 되었던 건데, 정조는 이를 통해 사안을 좀 더 확대 재생산하기를 바랐던 것으로 보입니다. 즉 모두의 비판 속에서도 류성한을 보호함으로써, 오히려 그를 탄핵하려는 여론을 좀 더 크게 만들고, 나아가 왕의 사적 복수가 아니라 공론을 통해 류성한을 비롯한 기호 노론 전체를 견제하려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이 책에서도 1792년 만인소 운동은 정조와 채제공의 기획이었을 것으로 추론했는데요.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정조의 시도는 성공적이었다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닐 듯합니다. 실제 만 명이 넘는 선비들의 공론을 통해 사도세자의 신원이 요구되었고, 이를 십분 활용하여 정조는 자신의 왕권을 강화해 나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만인소가 올라간 1792년부터 정조가 사망한 1800년까지 일정 정도 영남이 당파의 이름으로 약진할 수 있는 길이 열리기도 했었죠.
A. 영남학파의 핵심은 영남 유림의 종장이었던 이황의 호를 딴 퇴계학을 기반으로 했죠. 잘 아시는 것처럼, 퇴계 이황은 사화 과정에서 희생된 자신의 형 이해와 그 이전 사림들의 실천성을 기리고 이를 성리학 이론 내에서 설명하려 했습니다. 그들에 대한 메모리얼은 ‘서원 부흥 운동’으로, 그리고 그들의 실천성을 성리학 이론 내에서 설명하는 과정에서 이른바 ‘퇴계학’이라고 하는 ‘마음 공부를 중심으로 한 강한 실천성’을 강조하는 철학을 만들었습니다. 이 때문에 퇴계학은 기존 유학 이론에 비해 유난히 마음 공부를 강조하고, 이것의 발현으로서 강한 실천을 주문한 학문으로 자리매김 했습니다. 따라서 퇴계학의 기본 모토는 머리로 아는 앎이 아니라, 실천으로 드러나는 앎을 강조했습니다. 이와 같은 그의 철학적 입장은 임진왜란을 통해 목숨을 건 의병운동으로 발현되었고, 중앙정계에 진출하지 못하게 된 이후로부터는 요소요소 목숨을 건 청원 운동을 통해 정치를 올바르게 만들려는 시도로 드러나게 됩니다.
만인소 운동은 바로 이러한 퇴계학의 실천 운동이 개인을 넘어 공동체의 집단적 운동으로 드러났음을 보여주는 증표로, 이러한 실천성은 더 이상 청원이 불필요한 시점이 되면 강한 무장 운동으로 발현됩니다. 이러한 점에서 영남에서 일어난 만인소 운동, 의병운동, 그리고 독립운동의 배경에는 이 같은 퇴계학의 실천성이 존재한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한국국학진흥원 소장 《1855년 사도세자 추존 만인소》〉 (출처: 한국국학진흥원)
A. 실제 만인소 운동이 진행되던 40일간의 기록에서 그들이 원하는 바를 정조가 바로 시행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후 정조가 재위하고 있는 동안, 영남에서 영남의 이름으로 대과 합격이 이루어지고 여기에서 많은 초계문신들이 탄생하기도 했습니다. 더불어 무관들의 경우에도 영남 출신들의 약진이 그 이전과 비교해서 눈에 띌 정도였습니다. 또한 만인소 이후 정조는 이를 기반으로 노론 벽파에 대해 강하게 견제할 수 있는 명분을 가졌고, 실제 이를 실천에 옮기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바로 원하는 바는 얻지 못했다고 해도, 이후 정조의 다양한 정책을 통해 그 효과가 드러났던 것은 사실입니다.
특히 전면적으로 원하는 바를 얻지 못했다고 해도, 이 영남 만인소를 통해 왕에게 직접 청원할 수 있는 매우 구체적인 방법을 가지게 됩니다. 만인소는 그 특성상 정부나 권력자에 대한 비판이 중심을 이룰 수밖에 없고, 이는 상소 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의 목숨이 위협받을 수 있는 상황을 만들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옳음을 위해 자발적으로 유사한 운동을 만들어 가고, 정부는 이들의 언로를 보장함으로써 비판과 소통 기능이 살아 움직이게 만들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이는 현대 사회에서도 여전히 통용되어야 하는 중요한 덕목으로, 만인소 운동은 이와 같은 민주적 가치의 중요성을 표방한 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A. 조정의 관점에서 볼 때, 자신들에 대한 비판이 특정 개인이나 특정 이익 집단을 통해 나왔다면, 그 정당성을 인정하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모두’를 상징하는 숫자인 ‘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의 비판과 정책 수정의 요구는 조정에서도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겠죠. 왜냐하면 수많은 사람들이 동의하는 바를 ‘공론’으로 받아들였던 조선에서, 공론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요구는 그만큼 파급력이 컸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여 명의 여론이 공론이 되려면, 개개인이 본인의 자발적 판단으로 함께 해야만 의미가 있지, 특정인에 의해 조정되거나 위조된 것이라면 정당성을 인정받기 어렵겠죠. 이 때문에 상소의 핵심은 청원자들의 자발적 참여가 중요하고, 또 자발적으로 참여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일 역시 매우 중요했습니다. 자발적 참여와 그것을 드러내는 방법으로서의 절차적 정당성은 그래서 중요합니다. 이 때문에 만인소 운동에서는 자발적 참여를 확인할 수 있도록 타인이 모방하는 것이 불가능한 자신만의 수결을 반드시 요구하고 있으며, 만인소 운동의 과정에서도 철저하게 민주적인 절차를 통해 전 과정을 밟아 가는 게 중요했습니다.
A. 큰 틀에서 보면, 의미상 큰 차이는 없다고 생각됩니다. 공동체 대부분이 옳다고 생각하는 게 여론이라면, 조선시대에는 이를 공론으로 불렀으니까요. 다만 공론은 유학적 이론에 기반해서 단순하게 ‘대다수 사람들의 생각’을 넘어, 유학적 이념을 수양하는 사람들 대다수가 옳다고 여기는 생각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공론은 ‘유학적 신념을 가진 선비들 대다수가 옳다고 생각하는 방향’을 의미하며, 유교 기반의 사회에서 공론은 ‘올바른 생각’이라는 의미가 더 강하다고 생각됩니다. 이 때문에 율곡 이이는 ‘공론에 따르는 것을 국시(國是)라고 한다’라는 말을 남겼는데, 여기에서 우리는 공론의 의미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상호, 『1751년, 안음현 살인사건』〉 (출처: 푸른역사)
A. 일단 제가 역사학자가 아니라서, 일반 역사서를 어떻게 써야 하는지 기준이 없는 것도 사실입니다. 다만 좋은 글은 처음에는 독자를 사로잡는 힘이 있어야 하고, 이를 기반으로 전체 이야기를 끌어가는 힘이 있어야 하며, 다 읽었을 때 전달되는 분명한 메시지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전문 학자들을 대상으로 쓴 책이 아니기 때문에, 일반인의 관점에서 어떻게 접근해야 이렇듯 관심 없는 이야기라도 흥미롭게 읽을 수 있을까를 고민했던 게 사실입니다. 첫 프롤로그는 그렇게 집필되었는데, 그러면서도 당시 만인소를 올리기 위해 출발하는 그 비장함도 함께 전달하고 싶었습니다. 게으른 탓에 특별한 작가 노트를 작성하지는 않습니다.
A. 사실 이 부분에 대한 고민이 좀 많습니다. 여전히 이러한 류의 글쓰기가 의미가 있는지, 그리고 이와 같은 방법론으로 역사 이야기에 접근하는 게 옳은 것인지에 대해서는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특히 이러한 글쓰기는 익숙하지 않는 주제의 논문 10여 편 이상 쓰는 노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학문적 글쓰기에 익숙한 저에게는 여전히 쉽지 않은 과제이기는 합니다. 다만, 누군가는 연구자와 콘텐츠 제작자 사이를 좀 더 가깝게 이어줄 수 있는 글쓰기를 해야 한다는 필요성은 충분히 인지하고 있고, 또 애초부터 그렇게 기획된 책이어서 좀 더 고민하면서 다음 주제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한국국학진흥원에서 제공하고 있는 《스토리테마파크》의 내용이 모든 주제 선택의 기준이 되고 있는데, 여기에서 주로 많이 다루었던 주제가 다음에 책으로 집필될 가능성이 높을 것 같습니다. 예컨대 번암 채제공 선생의 문집 발간 과정이나, 투장 사건, 세곡선 난파 사건 등은 주제 의식도 분명하면서 조선시대 일상을 다양하게 보여줄 수 있는 내용들이 아닌가 싶어서 준비하고 있습니다.
A. 원래 ‘조선사의 현장으로’으로는 전문가를 위한 책이 아니라, 창작자들을 대상으로 기획된 책입니다. 창작자 입장에서 특정 단위 사건에 대해 머릿속 그림을 그릴 수 있을 때까지 복원해서 보여주자는 게 이 시리즈의 기획 의도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의도치 않게 방법론적으로 미시사 연구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고, 자료 접근 및 내용 기술에 있어서도 다른 책들과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따라서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조선시대 특정 사건들에 대해 그 시대의 배경과 문제의식 속에서 왜 그렇게 사건이 전개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전후 사정을 이해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특히 창작자 입장에서는 이와 같은 기본 스토리 위에 자신이 생각하는 새로운 갈등이나 배경, 인물 등을 통해 좀 더 재미있는 스토리를 창작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A. 라디오 드라마는 안동 MBC의 트레이드마크로 자리잡을 정도고, 《만인소》가 벌써 5번째 라디오 드라마이기 때문에 극화나 연출의 수준도 높아진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매우 수준 높은 드라마가 제작되었는데요. 처음에 이 내용을 자문하면서, 드라마의 특성상 여성 주인공에 대한 요구가 있었는데, 거기에 전혀 부응할 수 없었던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이를 극화했던 작가는 아예 여성을 주인공으로 하는 드라마를 만들어서, 깜짝 놀랐던 기억이 있습니다. 양성평등의 시대에 조선시대 남성 중심의 기록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 지에 대한 많은 고민을 안겨 주었던 에피소드였습니다.
만인소 운동을 다루기 적절한 창작 장르에 대해서는 크게 생각해 보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각 장르별로 표현되는 방식도 다르고 접근하는 방식도 달라서, 만인소 운동을 대상으로 창작하는 사람들이라면 각자의 장르 전문가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가장 적절하게 표현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은 있습니다. 다만 매우 짧은 기록이기 때문에 호흡이 긴 드라마로서는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있어서, 좀 더 극적인 갈등을 추가한다면 영화 소재로서는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좀 더 창작력이 있는 분이 소설과 같은 장르로 만들어도 좋구요. 다큐멘터리의 경우는 어떤 관점에서 접근하는가의 문제이지, 제작의 적절성은 문제되지 않을 듯합니다.
시기 | 동일시기 이야기소재 | 장소 | 출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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