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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y Issue

제3회 스토리테마파크 창작 콘텐츠
공모전 수상작 피칭영상


이번 호 스토리이슈는 2018년도 제4회 스토리테마파크 창작 콘텐츠 공모전을 시작하기에 앞서, 2017년도 공모전 수상 작품 소개와 최종심사 피칭영상을 소개합니다. 스토리테마파크의 이야기 소재에 대학생들의 상상력과 열정이 더해진 매력적인 콘텐츠를 각 팀의 색깔과 이야기를 담아 전합니다.



작품명 내용
구화당(救火黨) : 조선의 불을 멸하라 조선시대 멸화군을 소재로 활용한 추리활극으로 젊은 소방관이 우연히 조선으로 가게 되어 특별화재수사팀(구화당)에 들어가 도성 내 연쇄방화와 살인사건을 파헤치는 이야기로 8부작 드라마로 기획한 작품.
낭설 백성에게 사기 치는 나라. 그런 나라에 분노한 진짜 사기꾼들이 움직인다. 병자호란 이후, 불안한 민심의 인조시대를 배경으로 사기꾼 여인이 권력자의 음모에 휘말렸으나 환향녀와 손잡고 음모를 뒤집는 복수극을 영화로 기획한 작품.
빙허각 조선의 질서 체제를 유지해야 했던 정조, 세상을 바꾸고자 칼을 든 노비, 주체적으로 살기를 꿈꾸던 조선의 여인 빙허각.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던 세 사람의 이야기를 영화로 기획한 작품.
코드네임:대동 혼자만의 세상이 익숙한 해커 솔. 우연히 ‘조성당일기’를 통해 조선시대로 타임슬립하게 된다. 그곳에서 세상을 바꾸기 위해 노력하는 죽림칠우를 만나고, 그들과 함께 은밀한 작전을 수행하며 더불어 살아가는 가치를 깨닫게 되는 성장 스토리를 영화로 기획한 작품.
이연 역대 가장 찌질한 왕으로 그려지고 있는 선조. 조선의 14대 왕이 아닌 한 사람 ’이연‘이라는 인물로 조명. 기축옥사를 배경으로 아무도 믿지 못해 눈 먼 괴물이 되어버린 주인공 이연과 그를 지키는 한 소년의 이야기를 영화로 기획한 작품.
구순골 1670~1671년 조선 최악의 기근으로 백성의 이성이 마비되어가는데, 살기 위해 살인자가 되어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아버지를 구하고 마을을 구하는 두 청년의 이야기를 영화로 기획한 작품.
성성 도세순의 <용사일기>, 정경운의 <고대일록> 등 임진왜란 시기에 작성된 일기자료를 활용해 성(城)의 방어와 함락을 놓고 벌이는 3인칭 VR 대전게임을 기획한 작품.
신!경성 우리나라 최초의 국립극장이자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시작을 알렸던 ‘협률사. 이 공간에 담긴 숨은 욕망과 투쟁의 이야기를 판소리 오페라로 기획한 작품.

스토리테마파크 창작 콘텐츠 공모전은 올해로 4회째를 맞이합니다. 2015년부터 시작된 공모전을 통해 지금까지 총 26개의 작품이 수상작으로 선정되었습니다. 이 중, 제1회 공모전에서 특별상을 받았던 ‘엥콜’ 팀의 ‘네가 연애를 아느냐’는 15회(회당 15분) 분량의 웹드라마로 제작되어 네이버 TV캐스트에 방영되었고, 제2회 공모전에서 대상을 받은 ‘Hell.로’ 팀의 ‘헬조선:노비신분사기극’은 영화사 더퀸AMC와 제작 계약을 맺고 시나리오 작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성과는 예비창작자들의 기획력 및 창작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5개월간의 멘토링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교육형 공모전이라는 특별한 방식으로 운영되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멘토링은 기획과 스토리텔링을 담당하는 창작자들의 창작 교육과 역사 기록의 올바른 이해와 활용을 위해 국학진흥원 연구원들이 역사 교육을 비롯해 기획내용과 스토리의 매력을 입체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피칭 교육 등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역사 기록 자료에 담긴 옛사람들의 삶과 이야기가 궁금하고, 옛 기록을 통해 오늘을 사는 우리들의 이야기를 만들어 보고 싶고, 그 이야기를 많은 사람에게 매력적으로 전달해보고 싶다면. 제4회 스토리테마파크 창작 콘텐츠 공모전에 참여해 보는 건 어떨까요?

제4회 스토리테마파크 창작 콘텐츠 공모전은 오는 4월, 스토리테마파크 공모전 사이트를 통해 공고할 예정입니다. 많은 관심과 참여 부탁드립니다.


※ 공모전 역대 수상작은 <스토리테마파크 사이트 열린마당>에서 확인해볼 수 있습니다.
※ 공모전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스토리테마파크 공모전 블로그>를 참고해주세요.


※ 공모전에 관해 궁금한 사항은 아래 연락처로 문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054-851-0754 / mokim@koreastudy.or.kr


“안동 유림의 거두 김대락, 망명 열차에 오르다”


김대락, 백하일기, 1911-01-06 ~
1911년 1월 6일, 날씨는 추웠지만 맑았다. 안동 유림의 거두 김대락(金大洛)은 67세의 노구를 이끌고 열흘 동안 서울의 한 허름한 여관에서 지내고 있었다. 서울에는 그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의 아내와 자식, 손자들과 조카, 심지어 자신의 집에 노비로 있었지만 자신이 직접 해방시켰던 몇몇 노비들까지 그와 함께 있었다. 그는 자신의 식솔들을 이끌고 강제로 일본땅이 된 조선을 떠나려 한다.
망명길, 그것은 조국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찾기 위한 길이다. 그 길을 위해 김대락은 식솔들을 이끌고 여관을 나섰다. 김대락과 그 부인처럼 잘 걷지 못하는 사람들은 모두 인력거를 탔다. 여관을 나선지 얼마 되지 않아 일행은 남대문 밖 정거장에 갈 수 있었다. 김대락은 조국을 떠나는 길에 어떠한 미련도 없었지만, 서울의 지인(知人) 판서 조종필(趙鐘弼)을 한 번도 찾아가지 않은 것만이 안타까웠을 따름이다.
김대락은 회한으로 가득 찬 채 열차에 올랐다. 열차는 출발하여 수색과 일산, 임진강을 건너 장단과 개성을 지났고, 오후에는 평양을 지났다. 열차에서 바라보는 조국의 모습은 아름다웠다. 아득히 넓은 모래사장과 햇빛이 은은히 얼비치는 산세를 본 김대락은 이곳은 반드시 명승지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잠시 후 교각을 주로 지나던 기차는 이제는 굴을 여러 차례씩 지나게 되었다. 금방 지색이 달라진 것이다. 열차가 굴을 들랑날랑 거리자 김대락은 어디가 어딘지 더 이상 구분할 수 없었다. 기차가 평안북도로 접어든 것이다.
밤 8시 열차는 의주 백마역(白馬驛)에 도착했다. 기차에서 내리자 사방은 온통 깜깜하였다. 일행은 여관을 찾았으나 여관을 찾지 못하였다. 하는 수 없이 불빛만 보고 촌가에 들어가 문을 두드려 주인을 부른 다음 돈까지 주어가면 간절히 애걸하여 머물 만 한 곳을 찾았다. 객관을 찾아 들어가 늦은 저녁식사 후 몇 시간이 흐르지 않아 새벽닭이 울었다.

“항도촌 첫 정착지에서의 생활”


김대락, 백하일기,
1911-01-15 ~ 1911-01-24
1911년 1월 15일, 김대락은 서간도의 첫 조선인 정착지인 항도촌에 도착했다. 하룻밤을 보내는데 방에는 커튼처럼 가리는 가리개도 없어 추위가 매우 심하였다. 다른 사람들, 특히 울진에서 온 사람들은 방 하나에 여러 사람이 기거하여 그 비좁음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이런 와중에 조선에서 온 사람들은 뜻이 통하면 가문과 성씨가 다르더라도 이제 더 이상 구분하지 않았고, 모든 일을 협동하여 처리하였다. 김대락이 보기에 이역 땅에서 이렇게 하는 것은 참으로 다행이었다.
그러나 이역의 중국 땅은 김대락이 보기에 예가 무너진 나라였다. 김대락은 우연히 결혼식을 보았다. 그들은 통소를 불면서 떠들썩하게 길을 지나가고 있었다. 이것은 신부의 결혼 행차를 앞장서서 이끄는 것이었다. 김대락에게는 이것이 이국의 낮선 풍경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예가 무너진 중국으로 보였다. 김대락은 전통의 유학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다시 옛날 도와 예가 행해지던 때를 그리워하였다.
낮선 땅에서 적적하고 궁색하게 지내던 김대락의 거처 동편 방에는 참판을 지냈던 정원하와 주사를 지냈던 이건승이 거처하고 있었다. 김대락은 그들을 만나자마자 예부터 알고 지내던 사람처럼 푸근하였다. 김대락은 정원하, 이건승과 정겹게 이야기를 나누고 단란한 가족처럼 지냈다. 하지만 1월 20일 마을에 학교를 세우자던 정원하와 이건승은 다른 곳으로 거처를 옮겼다. 김대락은 여러 날 그들과 벗처럼 지내다 보니 서운함이 끝이 없다. 그들이 거처를 옮긴 뒤 김대락은 쓸쓸히 집을 지키게 되었다. 게다가 23일은 큰 눈까지 내려 찬 기운이 엄습하여 사람을 지치게 하였다. 김대락은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외증손자의 이름에 고구려의 혼을 담다”


김대락, 백하일기,
1911-02-26 ~ 1911-02-27
오늘은 김대락의 외증손자가 태어난 지 엿새가 지났다. 이 때문에 손녀의 본댁에서 김대락을 초청하여 음식을 대접하였다. 친가와 외가의 친척들이 무릎을 맞대고 다정하게 모여 있으니, 이역 땅 중국에서 아이 때문에 웃음꽃을 피우며 근심을 잊고 쓸쓸함을 달랠 수 있었다. 외증손자의 이름을 일몽(馹蒙)이라고 하였다. 그것은 이전에 천리마에 대한 태몽 등의 조짐이 있었고, 또 바로 이곳은 고구려의 고주몽(高朱蒙)이 창업한 곳이기 때문이다.
다음날 외손자의 이름을 바꾸어 기몽(麒蒙)이라 하였다. 이것은 고주몽이 하늘에 조회하던 날 항상 기린마(麒麟馬)를 타고 다녔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유하현에 학교(신흥강습소)를 열다”

중국 길림성 신흥무관학교 터 (출처 : 국무령이상룡기념사업회)
김대락, 백하일기,
1911-04-23 ~ 1911-05-25
1911년 4월 23일, 중국 유하현 삼원포 이도구에 있는 김대락의 집에 이동녕과 장유순이 모였다. 그것은 원로 유학자 김대락에게 인사를 온 것이기도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자신들의 계획을 설명하기 위해서였다. 우선 그들은 김대락에게 단발의 필요성을 설명하였다. 그리고 학교를 건립해야 하는 일들을 설명하였다. 5월 6일 이동녕은 머리를 깎고 청나라 사람의 복장으로 다시 김대락을 찾아왔다. 이는 이미 자신들의 계획을 실행하고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이렇게 복색을 바꾸는 조선인들은 점차 많아졌다.
5월 10일은 김대락의 조카 김정식이 학교의 밭에 콩을 심는 일 때문에 오후에 윤일(尹一)과 함께 추가가(鄒家街)로 갔다. 이렇게 학교에 가서 농사를 짓는 까닭은 학교가 농막 하나를 사서 두고 사방에서 배우러 오는 사람들을 대접하기 위해서였다. 김대락은 이것이야 말로 횡거(橫渠) 선생이 “토지를 구획하여 곡식을 모으고, 학문을 일으켜 예를 이루려 하는 뜻”이라고 생각하였고, 이에 젊은 사람들이 하는 일을 매우 가상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꼭 김대락에게 좋은 일만은 아니었다. 전통의 유학자로서 못마땅한 점도 있었다. 아들 형식이 학교에서 머리를 땋고 청나라 사람의 복장으로 왔다. 김대락은 “이런 모양을 하고 무슨 낯으로 고향에 돌아갈꼬?”라고 되새기며 한탄스럽기 그지없었다.
5월 14일, 학교가 개소한다고 해서 손자와 함께 추가가로 향했다. 참석한 사람들의 옷은 이미 조선의 의복이 아니라 검게 물들인 의복이었다. 그러나 일편단심으로 나라의 우환을 헤쳐 갈 사람들이라 이렇게 된 모습을 탓하지 않았다. 다만 자신이 늙어 아무 일도 할 수 없음만을 탓하고 있었을 따름이었다. 돌아오는 길에 김대락은 이회영 형제의 집에 들렀다. 김대락과 이회영 형제들은 초수(楚囚)처럼 마주보면 눈물을 흘렸다. 한참을 그런 후에야 김대락은 집으로 돌아왔다.

“대한민국 초대 국무령, 변발을 하다”


김대락, 백하일기, 1911-06-01 ~
1911년 6월 1일, 중국 이도구(二道溝)로 온 김대락은 따라오지 못한 가족들 소식 때문에 영춘(永春)원으로 갔다. 그는 영춘원에서 처남인 이상룡의 집에 우선 머물기로 하였다. 오랜만에 만나는 이상룡은 그에게 큰 위안이 되었다.
그런데 6월 5일, 이상룡은 만리구(萬里溝) 순경국에 가야 할 일이 생겼다. 그런데 지금까지 이상룡의 복장은 조선 선비의 복장 그대로였다. 아무래도 관청에 가야 하는데, 복장이 거슬렸다. 조선의 복장은 아무래도 중국 사람들의 눈에는 이상하게 보일 것이 분명하다. 이상룡은 어쩔 수 없이 복색을 바꾸기로 하였다. 머리를 깎고 옷을 바꿔 입었다.
김대락의 눈에 비친 이상룡의 모습은 탄식 그 자체였다. 이미 넉넉한 선비의 모습은 아예 사라져 버렸다. 그러나 김대락과 이상룡은 모두 이 일이 마음 내켜 하는 일이 아님은 알았다. 그러나 망명하여 중국에서 살고, 일본과 투쟁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임은 분명하였다.
김대락은 이상룡을 다음과 같이 위로하였다.
“변발은 와신상담의 일환이오. 그러나 삼천 리 먼 곳으로 와서 나이가 이미 예순인데도 머리를 아이처럼 깎았소. 새 세상을 이루거든 다시 옛 시절 그 모습으로 바꿉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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