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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데믹, 전통 역사축제의 새판을 짤 때

코로나시대, 비대면 축제의 시작


2020년 누구도 짐작하지 못했던 감염병의 등장은 우리 일상의 모든 것을 흔들었다. 전세계에는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이 공식 선언되었고, 사회적 거리두기가 강화되면서 각종 지역축제는 전면 취소되었다. 축제는 본래 지역민을 화합시키고 지역의 정서를 촉매하는 감성적 역할을 한다. 팬데믹으로 인한 대면 축제의 중단은 사회 전반을 침체로 빠뜨리고 말았다. 이러한 팬데믹 속에서 축제는 변화를 시도했다. 바로 온라인 채널 구축을 통한 중계를 시작한 것이다. 비대면 방식의 축제는 언택트(untact) 콘텐츠, 즉 오프라인으로는 담을 수 없는 다양한 정보들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며 축제를 이어나갔다.


언택트로 진행한 17회 횡성한우축제(출처: 횡성문화재단)



축제 현장의 전문가들은 다양한 아이디어를 동원해 비대면 축제를 만들어 왔다. 특히 드라이브 인(Drive-in) 방식의 축제와 관객들이 아파트 베란다에서 공연을 감상할 수 있도록 하는 찾아가는 발코니 콘서트 등이 탄생하며 주목받았다. 뿐만 아니라 ‘3차원 가상 세계’,즉 메타버스(metaverse)를 활용한 축제도 늘어나면서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축제에 참여할 수 있고 코로나 걱정 없이 즐길 수 있어 호응을 얻기도 했다. 디지털 플랫폼 구축과 라이브커머스 방송은 채팅앱과 네이버 등 글로벌 언택트 플랫폼을 통해 전 세계인과 만나는 시공간의 확장을 시도하면서 코로나시대 비대면 축제 콘텐츠로 자리 잡았다.




엔데믹 시대, 축제의 향방은?


엔데믹과 함께 드디어 지난 3년간 코로나19로 멈췄던 전 세계 축제들이 속속 재개되고 있다. 우리나라도 전국적으로 지역축제가 부활하면서 여기저기서 축제 소식이 차고 넘친다. 그런데 코로나 종식과 함께 디지털 기반의 비대면 축제 방식과 하이브리드(온-오프라인 융합) 축제에 대한 사회적 니즈가 일시에 사라지고 있다. 이제 대면은 당연한 것이고 온라인과 거리두기 대신 오프라인 집객을 위한 경쟁이 더욱 치열해지고 있는데, 팬데믹 현실에서 지난 3년간 우리가 쌓아온 기회의 문이 닫히는 것 같아 안타까울 정도다. 방안에 갇힌 대중을 상대로 시공간의 확장과 테크놀로지(5G, VR, AR, XR, AI, 로봇, 드론 등) 신기술을 활용한 초연결성(Hyper-Connectivity)을 부르짖던 엊그제 상황과는 너무 대조적이다. 과연 언택트 축제의 노하우를 버리고 우리는 다시 코로나 이전으로 돌아갈 것인가? 이제 본격적인 축제의 계절 여름과 가을 축제를 준비하면서 축제의 향방을 지켜보는 것도 하나의 관전 포인트다.

2022년 문화관광축제 빅데이터 분석에 의하면 코로나 사태로 중지되었던 축제가 오랜만에 다시 개최되기 시작한 작년 하반기는 억눌렸던 여행에 대한 욕구가 상승하면서 축제 기간 총방문객 수가 2019년 대비 19.7%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올해는 경기침체와 물가상승 등 소비심리가 위축될 것으로 예상되어 축제마다 방문객 유치를 위한 차별화 포인트가 필요해 보인다. 특히 방문 트렌드를 살펴보면 주로 30~70km 이내 근거리 유입이 늘고 50대 이상 장년층 방문객 비율이 높은 점도 고려되어야 한다. 또한 2023년 국내관광 트렌드 조사 응답자의 42%가 로컬관광 관심 테마로 ‘지역 역사 전통문화 체험’을 선택한 것으로 보아 지역 고유 콘텐츠에 관심이 높은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지역별 조선의 축제가 깨어나다


우리나라는 지난 30년 사이 매해 무수히 많은 지역축제가 전국 곳곳에서 새롭게 생성 개최되고 있는데, 이는 인구 절벽과 고령화로 인한 지방 소멸과 쇠퇴를 막고 외부 관광객 유치와 인구 유입을 위한 지역 생존 전략이라 할 수 있다. 그중에서도 근래에 들어 조선시대 읍성이 있던 지자체들이 복원을 통해 읍성이 가진 다양한 가치를 관광 자원화하고 도시 경관 개선에 이를 활용하고 있다. 언론에서도 언급하고 있듯이 상주읍성, 태안읍성, 언양읍성 등이 복원사업을 진행 중이며 당진시, 남원시, 안산시 등 조선시대 읍성이 위치한 대다수의 지자체가 읍성 복원과 축제 만들기를 역점 사업으로 추진하고 있다.

읍성을 배경으로 개최되는 역사축제의 생성 현황과 목적을 시기별로 살펴보면, 초창기 1950~60년대에 개발된 백제문화제(1955), 수원화성문화제(1964), 고창모양성제(1970) 등은 전쟁으로 파괴된 공동체 문화의 회복과 국가권력의 정당성 확보를 위한 공보 수단으로 개발된 향토문화축제라고 할 수 있으며, 이후 1995년부터 중앙정부가 실시한 문화관광축제 육성정책에 힘입어 지역축제가 전국으로 확산하면서 낙안읍성 민속문화축제(1994), 동래읍성 역사축제(1996), 서산해미읍성 축제(2000), 진주남강유등축제(2002) 등 지역관광 활성화의 일환으로 읍성 역사축제로 개발 분류되기 시작했고, 2009년 ‘역사적 건축물과 유적의 수리, 복원 및 관리에 관한 일반원칙’이 문화재청에 의해 고시된 이후 문화유산에 대한 체계적인 보존과 관리가 이루어지는 한편 경제적인 가치가 수반되는 활용정책으로 다른 축제와 차별화된 읍성 축제가 개발되면서 전통 역사축제의 증가세를 주도하고 있다. 이는 정부의 문화재 정책이 능동적이며 개방적인 방향으로 전환된 것과 도시 재생 정책과 연계해 읍성의 활용 방안을 모색하려는 지자체의 의지가 맞물린 데에서 기인한다.


진주남강유등축제 현장(출처: 진주문화예술재단)



이러한 도시들은 저마다 독특한 역사와 전통문화를 바탕으로 다른 지역과 차별화를 도모코자 축제 주제와 연관성이 높은 공연콘텐츠의 창⋅제작에 역점을 두고 있는데, 이는 개최 도시의 지역성을 부각하며 경쟁 도시와의 차별성을 담보하는 하나의 수단으로 ‘공연’을 선택한 것이다. 특히 읍성 역사축제에서 역사 야외극은 축제의 정체성을 제고하고 사람들에게 주제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방식으로 가장 적절한 핵심 콘텐츠라 하겠다. 이는 읍성 축제의 소재가 되는 역사 인물, 사건, 역사적 장소 등은 고정된 정보에 불과하지만, 여기에 문화적인 요소를 가미해서 연극, 영화, 드라마, 애니메이션과 같은 형태로 창작하게 되면 비로소 ‘문화콘텐츠’가 되는 것이고, 그중 연극은 축제와 동일한 양식을 사용하는 극적 매체라는 속성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읍성, 역사적 실제가 현존하는 사건의 현장


그러나 읍성 역사축제의 괄목할만한 양적 성장에도 불구하고 아쉬운 점은 여전히 읍성 축제를 찾는 관객이 역사 야외극을 보며 과거 역사의 의미를 일방적으로 수용하고 해석하는 구경꾼으로 남겨져 있다는 사실이다. 읍성이 오래된 이야기를 재현하는 작품의 무대로서 하나의 장소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눈앞에 역사적 실제가 현존하는 사건의 현장으로 재구성될 필요가 있다. 그렇게 했을 때 관객은 현실이라는 일상과 연극이라는 상상의 세계가 겹쳐진 장소와 특별한 관계를 맺게 되고 관찰자에서 참여자로 전이되어 읍성을 새롭게 인식하고 재발견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고성(古城)을 활용해 공연관광 콘텐츠로 세계적인 성공을 거둔 프랑스의 역사 테마파크 ‘퓌뒤푸’ 사례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방데 전쟁으로 파괴된 주요 전쟁터인 성터에서 역사의 재현을 통해 프랑스를 대표하는 문화관광 명소로 위상을 얻을 수 있도록 토대를 만든 것은 무엇보다 기억문화 유산을 활용한 공연콘텐츠라고 할 수 있다. 이곳의 대표적인 공연콘텐츠인 ‘시네세니’의 스토리 구성과 공연 장치에 있어서 무대 배경이 되는 고성 터는 아주 중요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데, 퓌뒤푸 고성은 오랜 세월 폐허로 남아있는 잔해물을 허물고 이탈리아 르네상스 양식으로 재건축한 후 1978년 성터를 파노라마 형태로 복원하고 바로 그 장소에 역사 야외극이라는 새로운 문화콘텐츠를 탄생시켰다. 그리고 퓌뒤푸가 축제 속의 문화에 대한 가장 활력 넘치고 가장 상징적인 사례로 손꼽히는 이유는 20세기 초 전기‧조명의 보급이라는 기술적 성취를 놓치지 않고 빛을 활용해 볼거리를 만든다는 명확한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프랑스 퓌뒤푸 테마파크(출처: 연합뉴스 2020.08.19)



이렇게 퓌뒤푸는 역사 유적에 과학기술을 접목한 송에뤼미에르(조명‧음향쇼)를 계승해 세계적인 성공을 거둔 사례로 축제와 공연의 관계에 대한 깊은 고민을 통해 새판을 짠 성공사례이다. 또한 퓌뒤푸 성공의 요인을 이야기할 때 누구나 ‘장소성’을 언급한다. 그런데 방데 전쟁의 중심지였던 솔레나 낭트 등 몇몇 주요 도시도 장소성을 언급하지만, 퓌뒤푸 성과 같은 상징적이며 동시에 실체적인 공간이 존재하지 않는다. 퓌뒤푸 성은 전쟁에 대한 기억을 환기시켜 주는 가장 가시적인 매개물이다.

그래서 우리나라 각지에 외형적 규모감이 있는 읍성이 보존되고 복원되는 것은, 퓌뒤푸처럼 실체적이고 가시적인 매개물인 역사적 공간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역의 역사 자원인 읍성의 복원을 통해 역사 관광 코스를 만들고 역사성을 갖춘 휴식 공간을 시민들에게 제공하며, 더불어 읍성을 지역축제와 연계할 수 있어 새로운 관광자원으로 중요한 콘텐츠라고 인식하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관 주도의 복원사업에 대한 우려도 존재한다. 관광산업을 염두에 둔 성과주의와 화려한 외관에만 치중한다면 전국의 모든 읍성이 획일화되는 상황에 직면할 수도 있다. 이에 물리적인 건조물(建造物)뿐만 아니라 그 안에 담을 콘텐츠에 대한 고민과 탐구가 병행되어야 할 것이다.


고창모양성제(출처: 고창모양성보존회)



매년 10월이 되면 우리나라 각지의 읍성에서는 전통의 새로운 해석과 지역민 참여를 통한 다채로운 축제 프로그램이 펼쳐진다. 올해도 진주남강유등축제, 동래읍성 역사축제, 낙안읍성 민속문화축제, 수원화성문화제, 고창모양성제, 서산해미읍성축제 등이 동 시기에 개최를 준비하며 서로 관람객 유치를 위한 각축전을 벌이는 양상이다. 그러나 올해 축제는 코로나19라는 혼란기를 벗어나 개최되는 만큼 읍성 축제의 새로운 판을 짤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접근해야 한다. 코로나 이전의 관습에 이끌려 방문객 수에 연연해하고 외지 관광객을 유입하는 인기성 프로그램에 목매기보다는 축제 콘텐츠의 구현 방식과 관객과의 접점, 그리고 저마다 읍성이 가진 장소성을 확립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한 때다. 최근 일주일(7월 5일~7월 11일) 사이 광주‧전남 코로나 신규 확진자가 1만 1,816명이 발생해 코로나 재유행에 대한 경각심도 커지고 있다. 무작정 코로나 이전의 축제로 회귀할 것이 아니라 콘텐츠에 테크놀로지를 더하고 지난 3년간 구축했던 온라인 플랫폼을 과감하게 활용해 축제판을 새롭게 짜나가야 하겠다. 읍성이라는 장소 고유의 역사적 가치에 힙한 감성을 더하는 축제 콘텐츠로 연결해 나아가기 위해서는 지난 팬데믹에 영향을 받아 탄생한 다양한 언택트 콘텐츠를 융합해 콘텐츠 혁명을 완성하는 도구로 삼는 것이 바람직하다.




집필자 소개

이영민
건국대학교 문화콘텐츠학과 겸임교수이자 공연연출가이다. 문화공방DKB(주)의 대표이사로서 다양한 축제, 전시, 박람회, 콘서트, 연극과 뮤지컬 등의 문화행사를 기획 및 제작·배급하였다. 주요 활동 축제로는 ‘명량대첩축제’,‘정남진장흥물축제’, ‘부안마실축제’, ‘관악강감찬축제’, ‘대한민국문화의 달 50주년’ 등이 있다.
한국국학진흥원이 주관한 전통 기록문화 활용 대학생 콘텐츠공모전의 축제 분야 멘토로 활동하며 대학생들의 문화콘텐츠 교육프로그램을 담당하였다.
“봄날의 제사는 꽃과 함께”

김광계, 매원일기, 1634-03-15

『가례』에서는 설․동지와 매달 초하루․보름마다 집안 사당(가묘, 家廟)에 지내는 제사를 참례(參禮)라고 부른다. 이 참례가 변하여 요즘에도 설과 추석에 올리는 차례가 되었다. 김광계 역시 집안 사당을 갖춘 양반으로서 매달 두 번씩 참례를 올렸으나, 참례를 올렸다는 이야기를 일기에 꼬박꼬박 쓰지는 않았다. 아마도 그에게는 너무나 당연하고 일상적인 일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1634년 봄 3월 15일의 참례는 다소 평소와 달랐으므로, 김광계는 친구와 친지들을 만난 일 외에 참례를 올렸다는 사실도 함께 기록해 놓았다. 그 날의 참례에는 ‘새 꽃을 따서 만든 전병’을 올렸던 것이다.

양력을 쓰는 현대인들에게 3월은 아직 추울 무렵이지만 김광계가 살던 조선시대의 음력 3월은 봄 날씨가 한창 따스하게 무르익을 때였다. 특히 음력 3월 3일인 삼월 삼짇날은 조선시대 여성들의 축제와도 같은 날로, 여성들은 그 날 하루만은 집안일을 그만두고 들로 나와 봄꽃을 따서 화전을 부쳐 먹고 노래를 부르며 즐길 수 있었다.

화전은 봄날의 화창함을 만끽하기에 딱 알맞은 음식이었다. 삼짇날이 지난 뒤라도 봄꽃이 피어 있는 동안에는 드물지 않게 상에 올랐을 것이다. 3월의 참례 혹은 여타 제사에 새 봄꽃으로 만든 화전을 올린 것은 김광계만이 아니라 같은 마을에 살던 김광계의 재종숙부 김령의 일기 『계암일록』에서도 몇 차례 확인된다. 1636년 김령은 이상 기후로 날씨가 너무 추워서 꽃이 피지 않아 화전을 올리지 못했다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는데, 이로 보아 평소에는 3월 제사에 화전을 올리는 것이 일반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아무리 양반가라 해도 예법과 격식만 깐깐하게 따져 상을 차리기보다는 때에 맞는 음식, 제사를 올리는 사람들 자신도 즐겁고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차려 올리는 것이야말로 조선시대 사람들이 조상에게 정성을 들이는 방식이었다.

“현감과 함께 관등회를 하다”

김광계, 매원일기,
1644-04-05 ~ 1644-04-08

1643년 10월부터 예안 현감으로 부임한 황입신(黃立信)은 시시때때로 절기와 특별한 날을 즐기는 것을 좋아했던 것 같다. 4월 초파일이 가까워지자 그는 성리학을 공부하는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며칠 전부터 즐길 준비를 하면서 주위 사람들에게도 흥겨운 기분을 전파하려고 하였다. 4월 5일에 그는 김광계를 방문했다. 마침 김확(金確)과 김요형(金耀亨), 김익중(金益重) 등이 함께 따라와서 대낮부터 술을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술이 반쯤 취해 슬슬 흥이 올랐을 때에는 밖에 있는 판판한 돌 위에서 다시 술을 마시기 시작하였다. 해가 질 때쯤 하여 황입신이 비로소 가고, 모든 사람이 흩어졌다. 이날 술을 마신 것 때문에 김광계는 다음날 속도 좋지 않고 눈병도 더 심해져서 불편함을 느꼈다.

하루가 더 지나서야 김광계의 건강이 조금 나아졌는데, 현감 황입신은 김광계의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초파일의 관등회를 함께하자며 사람을 보내 청하였다. 김광계는 내키지 않았지만 별 수 없이 김확, 김요형과 함께 관아로 향하였다. 관아에 가니 관아에는 이미 등을 달아 놓고 관등회를 준비하고 있었다. 현감의 형도 오고, 류시원(柳時元)과 임지경(任之敬)도 와서 제법 떠들썩했다. 동헌에 모두 벌려 앉으니 다시금 술잔이 어지러이 오가고, 그 사이에 날이 저물어 비로소 등을 밝혔다. 등이 밝아서인지 밤이 깊도록 술을 마시다가 늦게 파하게 되었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중년 김령의 소회와 아이들의 구나(驅儺)”

김령, 계암일록, 1623-12-30 ~

바람이 세차게 부는 1623년의 마지막 날이었다. 김령은 여러 어른들에게 감사편지를 써드렸다. 그리고 정오 경에 부모님께 절제(節祭)를 올렸다. 늦은 오후에 집으로 돌아와 지인들과 술을 마시며 한 해의 마무리를 했다.

마을 아이들은 보잘것없으나마 구나(驅儺)를 하였다. 김령은 한 해의 끝을 보내며 점점 노경(老境)으로 접어드는 감회에 젖었다. 옛 추억이 엊그제 일 같아 스스로도 모르게 탄식이 흘러나왔다.

“나룻배가 완성된 날, 냇가에서 축제가 벌어지다”

김령, 계암일록,
1618-04-28 ~ 1618-04-09 (윤)

1618년 4월 28일, 흐리다가 간혹 비가 내렸다. 김령은 낮에 냇가에 나가 배 값을 의논하였다. 배를 만드는 작업이 한창이었는데, 마무리는 다음달 5일이나 6일 사이에 끝날 예정이었다. 드디어 윤 4월 6일, 배 만드는 일이 다음날 끝날 예정이라, 마을의 아래 윗사람 할 것 없이 술을 가지고 모두 모였다. 한편으로는 흥을 풀었지만, 한편으로는 논의할 사항이 있었다. 배 만드는 일은 다음날 마감되어야했지만, 오후에 미흡한 것을 조치하고 최종 완성은 9일로 물리기로 결정하였다. 7일에는 우선 먼저 몇몇만 모여 새로 만든 배를 시승해보기로 하였다.

윤 4월 7일, 완성된 배를 냇물에 띄우고 물길을 거슬러 올라갔다. 김령과 몇몇 친지들은 모두 술을 가지고 가 잔을 돌렸다. 맑은 시내에 떨어지는 노을이 취흥을 돋아 주었다. 시를 짓다가 달이 떠서야 비로소 돌아왔다.

윤 4월 9일, 모두가 냇가에 모였다. 동네 아랫것들은 남녀가 모두 모였는데 안주거리를 가지고 길에 즐비하게 줄줄이 이어져 보기에 매우 성대하였다. 장막을 치고 자리를 나누니 등급이 엄격하였으나, 상하가 같이 즐기고 호령함에 차이가 없었으니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김령은 배에 올라 다시 술을 마시며 달이 뜬 강을 거슬러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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