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너무나도 편리하게 온라인으로도 쉽게 구할 수 있는 서적과 문화의 공간으로 자리 잡은 서점. 우리나라에서 서적의 유통과 서점의 등장은 그리 오랜 역사가 아니다. 중국의 경우 당대(唐代)에 이미 오늘날 서점에 해당하는 서사(書肆)가 있었고, 송대(宋代)에는 방각본(坊刻本)이 성행하여 서사를 통해 민간에서도 구하지 못할 서적이 없을 정도로 책의 유통이 활발하였다고 한다. 방각본은 개인이나 서사가 판매를 위해 별도로 제작한 책을 이른다.
조선의 경우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방각본이 1576년(선조 9)에 간행된 『고사촬요(故事撮要)』인 점을 감안한다면, 방각본의 출현은 명종 대 후반이나 선조 초기로 추정된다. 사실 중종 대에 서적의 원활한 유통을 위해 서사를 설치해야 한다는 논의가 대두되었다. 1519년(중종 14) 6월 시강관 한충(韓忠)이 서사 설치를 공식적으로 제안하였고, 중종은 이를 받아들여 서사의 설치에 대해 대신들에게 의론을 부쳤다. 그러나 훈구세력들의 서사 설치에 대한 부정적 견해로 인해 결국 서사의 설치는 보류되었다. 당시 지방 관학인 향교에서도 유생들이 읽을 책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한 상황이었다고 하니, 당시 서적 유통의 현황을 가늠할 수 있다.
『고사촬요(故事撮要)』(출처: 국립중앙박물관)
이후 서사의 설치에 대한 재 논의로 서사 설치 절목이 마련되었으나, 20여 년이 지난 1538년(중종 33)까지도 서사는 설치되지 못하였다. 당시 중종은 서사 설치를 반대하는 대신들의 의견에 대한 절충안으로, 서사를 설치하되 민간이 아닌 관에서 매매하는 방식으로 서적의 보급과 유통을 활성화하려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서의 설치는 명조 대 초반까지도 그 성과를 이루지 못하였다.
그렇다면 왜 훈구세력들은 서적의 대중적 유통이 가능한 서사의 설치를 반대한 것일까? 서적의 유통은 지식과 정보의 유통을 의미하는 것이고, 서사의 설치는 필연적으로 지식과 정보의 확산을 가져오게 마련이다. 그 때문에 지식 권력의 독점과 양반 중심 사회의 체제 유지를 위해 서사의 설치를 저지하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교육에 대한 국가의 지배권 강화와 이데올로기의 통일성 확보를 통한 권력의 중앙집권화를 영속화 시키려는 의도가 투영된 것이라 하겠다.
‘세책방’이 배경으로 나온 영화 〈음란서생〉의 한 장면 (출처: CJ ENM)
조선 시대 서적의 유통이 이처럼 제한적이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우리가 흔히 초학교재로 너무나 쉽게 언급한 『천자문(千字文)』 교육조차 서적 유통의 대중화가 실현되기 이전까지는 사회의 소수자가 누릴 수 있는 교육적 특권이었다. 조선 후기 돈을 받고 책을 빌려주는 세책방(貰冊房)과 책을 사고 팔 수 있는 서사의 등장은 지식의 대중화와 신분제의 와해에 커다란 기폭제가 되었다. 이것은 교육에 대한 국가의 지배력 약화를 의미하는 것이었고, 중세적인 지식체계가 근대적인 지식체계로 변모되는 과정이기도 하였다.
조선 시대 서적의 출판과 반포는 교서관에서 관장하였다. 일명 교서감(校書監) 또는 운각(芸閣)이라고도 불린 교서관은 1392년(태조 1)에 설치되어 정부 수요의 서적을 인출하고 출판하는 업무를 관장하였다. 수요가 많은 주요 서적의 경우 교서관에서 인출하여 인본(印本)을 지방 감영에 보내어 판각하게 한 후 이를 다시 진상하게 하기도 하였다. 교서관의 서적 보급은 임금이 내려주는 반사의 형식을 취하였기 때문에 서적의 인출과 반사는 항상 왕명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반사의 대상에서 제외된 신하들과 유생들의 경우 인출한 서적들을 현물로 교환하거나 구입하고자 하였기 때문에, 태종 대에는 주자소에서 인출한 서적의 판매를 허가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수요에 비해 서적의 공급은 원활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중종 대에 와서 서사의 설치에 대한 논의가 대두되었던 것이다.
정조의 즉위(1776년) 후 교서관은 규장각에 편입되었다. 이후 규장각을 내각(內閣)이라 하고, 교서관을 외각(外閣)이라 하였는데, 1778년(정조 2)에는 규장각의 관원이 교서관의 관원을 겸임하게 되었다. 규장각은 원래 역대 왕들의 친필·서화·고명(顧命)·유교(遺敎)·선보(璿譜) 등을 관리하기 위해 설치하였으나, 차츰 학술 및 정책 연구기관으로 변모하였고, 종국에는 승정원과 홍문관의 일부 기능까지 담당함으로써 정조가 추진한 혁신정치의 중추 기구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교서관이 규장각으로 편입되면서 규장각은 서적의 출판과 유통까지 관장하게 된 것이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서적의 유통은 거의 모든 경우 임금이 내려주는 반사의 형식을 취하고 있었기 때문에 반드시 임금의 재가(裁可)를 거쳐야 했다. 이렇게 재가를 거쳐 반사된 책을 반사본(頒賜本) 혹은 내사본(內賜本)이라고 하였다. 서적의 반사는 세종 때부터 승정원의 승지들이 담당하였으나, 정조 대 이후 규장각의 관원이 교서관의 관원을 겸임하게 됨으로써 직각(直閣)·대교(待敎) 등 각신이 담당하게 되었다.
서적 반사의 절차를 살펴보면, 먼저 책을 인쇄한 후에 몇 책을 봉안하고, 몇 책을 진헌하며, 몇 책을 반사할 것이지 여쭈어 결정한다. 봉안본은 규장각과 규장각의 부속기관인 서고(西庫), 그리고 묘향산·오대산·태백산·적상산·마니산·정족산 등 사고(史庫)에 보관하였다. 반사본의 경우에는 검서관이 분담하여 ‘명제사은(明除謝恩)’이라 적고, 규장각 관료가 서명한 다음 ‘규장지보(奎章之寶)’를 임금에게 청하여 받아다가 책머리에 찍는다. 반사본의 수령은 서울에 있는 신하는 모두 규장각에 가서 직접 수령하되, 규장각 아전이 가지고 가서 전하라는 명령이 있는 경우에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지방에 있는 신하의 경우에는 규장각 아전이 가지고 가서 전달하거나 파발편으로 내려보냈다.
‘규장지보(奎章之寶)’가 찍힌 『번암고(樊巖稿)』 (출처: 수원특례시)
서적의 반사 대상은 규장각·교서관·홍문관·장서각·존경각·승정원·예조기거주실(禮曹起居注室)·오대사고·사부학당 등이었다. 그리고 전·현직 대신, 규장각의 관원, 2품 이상의 고위 관료, 홍문관·사헌부·사간원·예문관·승정원의 관원과 각 읍의 향교 및 사액서원 등에 반사하도록 하였다. 이처럼 반사의 대상은 주로 국가의 주요 기관과 사고(史庫), 특정 문신과 관원 그리고 각 교육기관 등이었다. 반사라는 형식으로 국가가 서적의 유통을 주도한 이유는 이데올로기의 통일성을 확보하고 교육에 대한 국가의 지배력을 강화시키려 하였기 때문이다.
세자시강원, 성균관, 사부학당, 향교, 사액서원 등은 반사의 대상이 된 교육기관이었다. 이들 교육기관은 온전한 강학 활동을 위해서라도 서적의 확보와 장서의 관리가 매우 중요하였다. 홍문관은 경연을, 세자시강원은 서연을 주관하는 기관이었으므로 왕과 왕세자를 위한 별도의 도서관을 운영하고 있었으며, 궐내 각사와 신료들은 융문루와 융무루의 도서관을 이용하였다. 세자시강원의 경우 장서각 외에 승화루와 대축관 또한 서연을 대비해 서적을 보관하고 관리하던 곳이었다.
융문루 편액
융문루는 경복궁 근정전 동행각의 누각으로 경복궁을 창건할 때 처음 지어졌다.
이곳에 궁중의 서적 등을 보관하여 왕의 열람에 대비하였다 (출처: 국립고궁박물관).
양란 이후 왕실 소장의 도서들도 많이 산실되었는데, 특히 시강원의 장서는 서연에서 제대로 참고할만한 서적이 없을 정도였기 때문에 홍문관과 승정원에 소장되어 있던 도서를 내어 충당하기도 하였다. 세자시강원에는 도서관 외에도 시강원책역소(侍講院冊役所)라는 서적을 출판할 수 있는 별도의 기관이 존재하였다. 현존하는 『시강원책역소일기』는 고종 대의 기록인데, 책의 출판과정은 물론 시강원 장서의 대출과 반납에 대한 사실들도 확인할 수 있다. 시강원책역소가 그 이전에도 설치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좀 더 상고해 보아야 한다.
성균관의 존경각 건립은 한양에 성균관이 건립되고 77년이 지난 1475년(성종 6)의 일이다. 이는 성균관에 소장 도서가 부족하여 유생들이 공부하는 데 불편을 겪고 있으며, 향교의 경우 교수들의 태만함과 수령의 무관심으로 교육은 물론 향교 건물과 서적이 제대로 관리되지 못하고 있다는 한명회의 진언에 기인한 것이다.
향교의 부실 경영에 대한 한명회의 진언 이후 향교의 건물과 서적은 해유(解由)에 기록하도록 의무화되었다. 해유는 관원들이 전직할 때 재직 중 제반 관재물(管財物) 관리에 탈 없이 책무를 완수하였음을 증명하여 주는 문서이다. 향교의 서적은 독립된 공간에 보관하였으며, 독립된 공간이 확보되지 못한 경우에는 동재(東齋)의 벽장에 보관하기도 하였다. 엄격한 관리를 위해 서적은 일절 향교 밖으로 대출하지 못하게 하였으며, 교생들이 와서 읽고자 할 때도 유사가 동행한 경우에만 출입이 가능하도록 그 관리를 엄격히 하였다.
서원의 반사본 지급은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이 사액서원이 되면서 시작되었다. 서원은 사액이나 자체 구입 혹은 기증을 통해 서적의 보유를 늘려나갔다. 비록 문집류가 주를 이루기는 했으나 자체적으로 서적을 출판하기도 하였다. 책이 출판되면 서원과 향교 그리고 유림들에게 통문을 보내어 지정한 날에 서원의 사묘(祠廟)에서 고유를 하고, 유림들은 물론 주변의 서원과 향교에 서적을 보냈다.
도산서원(陶山書院)의 도서를 보관하던 광명실(光明室)
서원은 지식의 최대 수요자이자 공급자인 사림들의 공동체이다. 사림은 서적의 최대 소비자 집단이었기 때문에 서원에서의 서적 확보는 중차대한 과업 중의 하나였다. 서원의 서적 관리는 원임(院任)이 담당하였고, 이들은 별도의 도서 목록을 만들어 서적의 출납을 엄격히 관리하였는데, 관리 규정들은 향교와 유사하였다. 향교와 마찬가지로 별도의 건물을 지어 서적을 보관하고 관리하였으며, 반사본의 경우 어서각(御書閣)·어필각(御筆閣) 등의 현판을 달고 특별히 관리하였다. 이처럼 각 교육기관은 교육과 향사 이외에도 도서관으로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제는 언제 어디서든 너무나 쉽게 책을 읽을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독서하는 사람들이 점점 줄어들어 통계청 조사에 의하면, 연간 책을 한 권도 읽지 않는 성인의 비율이 50%를 넘어섰다고 한다. 더욱이 10대 이후 연령이 올라갈수록 책 읽는 사람들의 비율이 줄어들고 있고, 90% 이상이 정보와 지식의 습득을 스마트폰에 의지하고 있다고 하니, 정말 사회적으로도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지식의 통제도 문제지만, 그릇된 지식과 편향된 정보의 양산은 사회적으로 더 큰 해악이 아닐 수 없다. 폭넓은 사고방식과 건전한 비판의식을 기르기 위해서는 올바른 지식과 균형된 정보가 전제되어야 한다. 건전한 독서문화는 바로 그 기반이 될 것이다. 이제 독서의 계절이라는 가을이다. 독서를 통해 ‘가지는 멋보다 풍기는 멋이 아름다운 사람’이 되어 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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