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의 봉정사(鳳停寺)는 천등산에 위치한 사찰로 672년에 창건되었다고 전해진다. 전설에 따르면 의상대사의 제자인 능인이 도력(道力)으로 종이로 만든 봉황을 날렸는데, 종이 봉황이 앉은 곳에 절을 짓고 이름을 ‘봉황이 앉은 자리’라는 뜻으로 봉정사라 지었다고 한다. 그러나 전설로 사찰 창건 시기를 가늠하기는 힘들며, 극락전의 해체 수리 과정에서 발견된 묵서명(墨書名)에 1363년(공민왕 12)에 사찰이 중수(重修)되었다는 기록이 있어 고려 시대에 이미 모습을 갖추고 있었던 사찰임을 알 수 있다.
봉정사는 현재 안동시 서후면에 있다. 서후면에는 봉정사뿐만 아니라 천등산의 개목사(開目寺), 학가산의 광흥사(廣興寺) 등 인근 사찰과, 학봉 김성일(金誠一, 1538-1593)의 종택(宗宅), 풍산부원군(豊山府院君) 류중영(柳仲纓, 1515-1573)의 재사(齋舍)인 숭실재(崇室齋), 배상지(裵尙志)・이종준(李宗準)・장흥효(張興孝)의 학문을 추모하기 위해 1686년(숙종 12)에 창건한 경광서원(鏡光書院) 등이 두루 자리하고 있다. 즉 봉정사는 불교 문화와 유교 문화가 고르게 서려 있는 환경에 있다. 이 같은 배경에서인지 조선 시대 봉정사에는 사대부, 승려 가리지 않고 많은 이들의 방문이 이어졌고, 안동 지역에서 다양한 서적을 출판한 대표 출판소로 자리매김하였다.
안동 봉정사 대웅전 (출처: 문화재청)
조선 시대 사찰은 목판으로 책을 출판하기에 적합한 환경에 있었다. 사찰은 목판의 재료를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산지에 있고, 출판 작업을 할 수 있는 넓은 공간을 가지고 있다. 대다수 사찰은 종이를 제작해서 왕실‧관청 등에 바쳐야 하는 지역(紙役)을 감당해왔고, 사찰에는 목재를 다듬고 판각을 전문으로 하는 각승(刻僧)도 머물고 있었다. 조선 시대 전국의 사찰에서는 오랜 기간 불서를 출판해 왔고, 사찰에 따라서 지역의 요구에 부응하여 문집, 족보 등 서적을 출판하기도 하였다. 언제부터 봉정사가 지역의 출판소로서 기능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현존하는 사료를 통해서 볼 때, 18세기부터 지역 사회에서 주목하는 출판 공간이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안동은 유교 문화의 전통이 뿌리내린 대표적인 지역 중 하나이다. 안동에서는 유교 서적인 문집, 족보, 성리서 등을 오랜 기간 관청, 서원, 사가 등에서 출판하였는데, 봉정사에서도 안동 지역 사대부의 저술, 문집을 출판하였다. 사료에 따르면 봉정사의 문집 출판은 모두 18세기 이후로 확인된다.
봉정사에서는 문집 출판과 관련한 다양한 작업이 이루어졌다. 김성일의 문집 『학봉선생속집(鶴峯先生續集)』의 교감 작업이 있었고, 이상정(李象靖, 1711-1781)의 문집 『대산집(大山集)』의 책판 제작을 위한 판목을 찌는 작업도 있었다. 또한 『근사록집해(近思錄集解)』는 봉정사에서 증삭(增刪)하는 작업도 진행되었다.
『번암집』 책판(출처: 한국국학진흥원 목판아카이브)
봉정사에는 책의 간행을 위한 간역소도 설치되었다. 『무신창의록(戊申倡義錄)』의 인쇄를 위해 간소(刊所)가 설치되었고, 류태좌(柳台佐, 1763-1837)의 저술인 『천휘록(闡揮錄)』도 봉정사의 간역소에서 출판되었다. 이황의 문집인 『퇴계선생문집』의 중간(重刊)은 봉정사 앞 명옥대에 설치된 간역소에서 이루어졌다. 그리고 채제공(蔡濟恭, 1720-1799)의 문집인 『번암집(樊巖集)』도 봉정사의 간역소에서 출판되었는데, 이 사실은 『번암집』의 간역소에서 1824년(순조 24) 4월 20일부터 6월 28일까지 있었던 일의 전말을 기록한 일기인 『간소일기(刊所日記)』를 통해서 자세히 알 수 있다. 한편 봉정사에서는 김상헌(金尙憲, 1570-1652)의 문집 『청음선생집(淸陰先生集)』의 책판을 비롯한 지역의 책판 보관처로도 기능하였다.
봉정사는 종교적인 공간답게 불서도 출판하였다. 특히 조선 후기 18세기에는 대규모 불서 출판이 있었다. 조선 후기 사찰에서는 승려 간 불법을 전수하고, 제자는 스승을 기리고, 망자의 명복을 비는 각종 의식 설행과 대중의 신앙 활동을 위해 여러 종류의 불서를 출판하였다. 불서는 한두 종만 소량으로 출판하기도 하지만, 사찰의 운영에 필요한 여러 성격의 불서를 모아서 한 번에 대량으로 출판하기도 한다. 대량 출판이 있었을 때는 출판 불서 중에 승려 간의 교육, 의식 설행, 신자의 신앙과 관련한 다양한 불서가 혼재된 경향이 크다.
1769년(영조 45) 봉정사의 불서 출판도 이와 같은 흐름과 함께 한다. 봉정사에서는 당시 상당한 규모의 출판 불사가 진행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출판 불서는 15종으로 『상교정자비도장참법(詳校正慈悲道場懺法)』, 『범망경로사나불설심지법문품보살계본(梵網經盧舍那佛說心地法門品菩薩戒本)』, 『사분계본여석(四分戒本如釋)』, 『보살계의소(菩薩戒儀疏)』, 『기신논소필삭기(起信論疏筆削記)』, 『불설천지팔양신주경(佛說天地八陽神呪經)』, 『조왕경(竈王經)』, 『산왕경(山王經)』, 『신중작법청문(神衆作法請文)』, 『수계문(受戒文)』, 『비구계칠취대목(比丘戒七聚大目)』, 『사미계(沙彌戒)』, 『계율연기(戒律緣起)』, 『위의초록(威儀抄錄)』, 『지공범본(誌公梵本)』이다. 이 불서들은 모두 전래하지는 않으나 현존하는 불서에 수록된 발문에서 전체 불서 목록을 확인할 수 있다. 출판된 서적을 승려 교육, 계율, 의식 설행, 민간 신앙 등 다양한 성격의 불서다.
사찰의 불서 출판은 신앙을 바탕으로 한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불사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한쪽에서 목재를 다듬고, 경판을 판각, 인쇄하고, 교정을 반복하여 불서를 간행하는 동안, 다른 한쪽에서는 염불하고, 다라니를 외고, 등촉을 밝히고 향을 사르면서 예배를 올리는 불공이 진행되었다. 따라서 사찰에서 불서를 출판할 때는 상당한 비용이 필요했고, 이름난 승려가 권선문(勸善文), 모연문(募緣文) 등을 가지고 사찰과 속세를 왕래하며 불서 간행에 필요한 비용을 마련하는 권선 활동이 수반되었다. 봉정사의 불서 출판 현장은 당시 출판된 서적과 현존하는 현판 두 점에서 확인할 수 있다.
모연문(출처: 국립중앙박물관)
먼저 현존하는 불서는 사찰의 불서 출판이 체계적인 조직에서 진행되었는지 보여준다. 불서에는 일반적으로 책의 마지막 부분에 불서 출판 참여자의 역할과 이름, 시주자 명단이 수록되어 있다. 이들의 역할을 볼 때 봉정사의 불서 출판 불사는 크게 불사 총괄, 불공 집전, 출판 작업으로 업무 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불사 총괄’은 불사를 주도하고 재정을 담당한 화주(化主), 불사를 감독하는 도감(都監), 불사가 잘 마무리되었음을 증명하는 증사(證師), ‘불공 집전’은 기도를 올리는 지전(持殿)과 송주(誦呪), 공양물을 준비하는 공양(供養), 별좌(別座), 숙두(熟頭), ‘출판 업무’는 판을 새기는 각수(刻手), 내용을 바로잡는 교정(校正), 판에 새길 원고를 작성하는 서사(書寫), 나무를 다듬는 목수(木手), 목판을 만드는데 필요한 금속을 다듬는 야장(冶匠) 등 각각의 업무 영역에서 불사가 진행되었다.
봉정사에는 흥미로운 기록 두 점이 있다. 바로 1769년(영조 45)에 제작된 「경상좌도안동서영천등산봉정사대장경루판부수급인출체례규모기(慶尙左道安東西嶺天燈山鳳停寺大藏經鏤板部數及印出体例規模記)」와 1770년(영조 46)에 제작된 「안동부서영천등산봉정사고법당대장판전등촉헌답기(安東府西嶺天燈山鳳停寺古法堂大藏板殿燈燭獻畓記)」 현판이다. 두 현판은 다음과 같이 봉정사의 불서 출판 현장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경상좌도안동서영천등산봉정사대장경루판부수급인출체례규모기
(慶尙左道安東西嶺天燈山鳳停寺大藏經鏤板部數及印出体例規模記)」
(출처: 산사세계유산등재추진위원회)
봉정사의 불서 출판은 사찰에 머물렀던 이름난 승려의 주도로 진행되었다. 봉정사에는 이름난 두 승려 월암 지한(月岩旨閒)과 설월 관성(雪月觀性)이 있었다. 현판에는 ‘雪月과 月岩이라는 두 승려가 주도하여 시주를 받아서,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공력으로 귀신과 같이 일해서 5월에서 12월까지 주변을 막고 한데 모여서 크게 불사를 일으켜 밤낮없이 일하는 것이 새로 불상을 만드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름난 승려가 불서 출판을 주도하면 인근 사찰의 승려, 지역의 사대부 가리지 않고 많은 참여가 이루어진다. 봉정사에서는 이들의 노력으로 '엽자(葉字) 70답 중 11복 5속 5두락, 진자(辰字) 17전 중 18복 9두락, 의자(宜字) 8전 중 11복 6속 6두락'과 같이 사찰 운영에 도움 될 수 있는 자산인 전답을 마련할 수 있었다.
봉정사에는 당시 인출사업을 진행할 때의 지침 또한 마련되어 있었다. 간단한 내용이지만 지침을 통해서 봉정사의 출판 현장을 추론해 볼 수 있다.
하나. 본 사찰의 승려가 인쇄 시 총괄하여 썩거나 깨진 것을 점검한다.
하나. 인쇄 담당자는 승통(僧統)에 작은 일이라도 고해서 폐단이 없도록 한다.
하나. 인쇄 시 지성(至誠)이 많든 적든 간에 불(佛), 신중(神衆), 성중(聖衆)에게 공양을 드려야
한다.
하나. 봄, 가을 양 계절에 인쇄한다.
하나. 몇 권(卷), 몇 장(丈)인지 제목만 보면 모두 다 알아야 한다.
하나. 판을 뒤집을 때는 찬찬하고 자세하게 하며, 던져서 깨트리고 상하게 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 작은 것을 버리거나 들이는 등의 물정을 갖추는 일에도 삼가 덕을 높이고 재난을 두렵게
여겨 거행해야 한다.
간략한 지침이지만 이 내용을 통해서 봉정사의 불서 출판 현장을 그려볼 수 있다. 첫째, 인쇄는 봉정사의 승려가 총괄하고 있었다. 즉, 당시 불서 출판은 봉정사 승려 외 다수의 참여로 진행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봉정사에는 불서 출판을 위해 다양한 인력이 참여했을 것인데 책판을 만들고 글씨를 새기는 일에는 봉정사 승려가 특히 감독하고 있었다.
둘째, 인쇄는 봄, 가을 두 계절에만 이루어졌다. 이는 목판의 보존과 관리, 작업자를 고려한 지침으로 보인다. 봄과 가을은 일하기도 가장 적합한 계절이고 적절한 환경 속에서 보존 및 관리가 되어야 하는 목판은 이 시기가 온‧습도 영향을 가장 적게 받는 시기이기도 하다.
셋째, 인쇄할 때 담당자는 목판과 해당 불서의 체제를 이해하고 있어야 했다. 즉, 담당자는 내용을 완전히 이해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업무상 필요한 출판 대상 불서의 전반적인 체제는 철저하게 숙지하고 당시 업무에 임했던 것으로 보인다.
넷째, 목판은 조심스럽게 다루어졌다. 목판은 한 번 제작하는데 상당한 비용과 시간이 들었다. 목판의 가치를 짐작할 수 있으며, 목판이 깨지는 경우도 많았음을 알 수 있다.
이 같은 기록들을 종합해 볼 때, 1769년 봉정사의 불서 출판 사업은 상당히 조직적인 업무 구조에서 진행된 대규모 사업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아쉽게도 이 밖의 불서 출판 사례는 확인되는 바가 없지만 1769년 봉정사의 불서 출판은 사찰의 출판 현장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몇 안 되는 귀중한 사례다.
전국적으로 볼 때, 유교, 불교 가리지 않고 이 정도 규모로 다양한 성격의 서적을 출판한 사찰은 많지 않다. 조선 후기 제한된 사료로 접근하였음에도 이처럼 많은 출판 사례를 확인할 수 있었으니, 당시 봉정사에서 얼마나 많은 출판이 있었을지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요컨대, 봉정사는 안동 지역의 대표 출판소로 조선 시대 책의 생산과 유통에 크게 이바지한 곳이라 할 수 있다.
시기 | 동일시기 이야기소재 | 장소 | 출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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