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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의 대표 출판소, 봉정사

안동의 봉정사(鳳停寺)는 천등산에 위치한 사찰로 672년에 창건되었다고 전해진다. 전설에 따르면 의상대사의 제자인 능인이 도력(道力)으로 종이로 만든 봉황을 날렸는데, 종이 봉황이 앉은 곳에 절을 짓고 이름을 ‘봉황이 앉은 자리’라는 뜻으로 봉정사라 지었다고 한다. 그러나 전설로 사찰 창건 시기를 가늠하기는 힘들며, 극락전의 해체 수리 과정에서 발견된 묵서명(墨書名)에 1363년(공민왕 12)에 사찰이 중수(重修)되었다는 기록이 있어 고려 시대에 이미 모습을 갖추고 있었던 사찰임을 알 수 있다.

봉정사는 현재 안동시 서후면에 있다. 서후면에는 봉정사뿐만 아니라 천등산의 개목사(開目寺), 학가산의 광흥사(廣興寺) 등 인근 사찰과, 학봉 김성일(金誠一, 1538-1593)의 종택(宗宅), 풍산부원군(豊山府院君) 류중영(柳仲纓, 1515-1573)의 재사(齋舍)인 숭실재(崇室齋), 배상지(裵尙志)・이종준(李宗準)・장흥효(張興孝)의 학문을 추모하기 위해 1686년(숙종 12)에 창건한 경광서원(鏡光書院) 등이 두루 자리하고 있다. 즉 봉정사는 불교 문화와 유교 문화가 고르게 서려 있는 환경에 있다. 이 같은 배경에서인지 조선 시대 봉정사에는 사대부, 승려 가리지 않고 많은 이들의 방문이 이어졌고, 안동 지역에서 다양한 서적을 출판한 대표 출판소로 자리매김하였다.


안동 봉정사 대웅전 (출처: 문화재청)



조선 시대 사찰은 목판으로 책을 출판하기에 적합한 환경에 있었다. 사찰은 목판의 재료를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산지에 있고, 출판 작업을 할 수 있는 넓은 공간을 가지고 있다. 대다수 사찰은 종이를 제작해서 왕실‧관청 등에 바쳐야 하는 지역(紙役)을 감당해왔고, 사찰에는 목재를 다듬고 판각을 전문으로 하는 각승(刻僧)도 머물고 있었다. 조선 시대 전국의 사찰에서는 오랜 기간 불서를 출판해 왔고, 사찰에 따라서 지역의 요구에 부응하여 문집, 족보 등 서적을 출판하기도 하였다. 언제부터 봉정사가 지역의 출판소로서 기능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현존하는 사료를 통해서 볼 때, 18세기부터 지역 사회에서 주목하는 출판 공간이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안동의 문집 출판 공간, 봉정사


안동은 유교 문화의 전통이 뿌리내린 대표적인 지역 중 하나이다. 안동에서는 유교 서적인 문집, 족보, 성리서 등을 오랜 기간 관청, 서원, 사가 등에서 출판하였는데, 봉정사에서도 안동 지역 사대부의 저술, 문집을 출판하였다. 사료에 따르면 봉정사의 문집 출판은 모두 18세기 이후로 확인된다.

봉정사에서는 문집 출판과 관련한 다양한 작업이 이루어졌다. 김성일의 문집 『학봉선생속집(鶴峯先生續集)』의 교감 작업이 있었고, 이상정(李象靖, 1711-1781)의 문집 『대산집(大山集)』의 책판 제작을 위한 판목을 찌는 작업도 있었다. 또한 『근사록집해(近思錄集解)』는 봉정사에서 증삭(增刪)하는 작업도 진행되었다.


『번암집』 책판(출처: 한국국학진흥원 목판아카이브)



봉정사에는 책의 간행을 위한 간역소도 설치되었다. 『무신창의록(戊申倡義錄)』의 인쇄를 위해 간소(刊所)가 설치되었고, 류태좌(柳台佐, 1763-1837)의 저술인 『천휘록(闡揮錄)』도 봉정사의 간역소에서 출판되었다. 이황의 문집인 『퇴계선생문집』의 중간(重刊)은 봉정사 앞 명옥대에 설치된 간역소에서 이루어졌다. 그리고 채제공(蔡濟恭, 1720-1799)의 문집인 『번암집(樊巖集)』도 봉정사의 간역소에서 출판되었는데, 이 사실은 『번암집』의 간역소에서 1824년(순조 24) 4월 20일부터 6월 28일까지 있었던 일의 전말을 기록한 일기인 『간소일기(刊所日記)』를 통해서 자세히 알 수 있다. 한편 봉정사에서는 김상헌(金尙憲, 1570-1652)의 문집 『청음선생집(淸陰先生集)』의 책판을 비롯한 지역의 책판 보관처로도 기능하였다.




조선 후기 대규모 불서 출판이 있었던 봉정사


봉정사는 종교적인 공간답게 불서도 출판하였다. 특히 조선 후기 18세기에는 대규모 불서 출판이 있었다. 조선 후기 사찰에서는 승려 간 불법을 전수하고, 제자는 스승을 기리고, 망자의 명복을 비는 각종 의식 설행과 대중의 신앙 활동을 위해 여러 종류의 불서를 출판하였다. 불서는 한두 종만 소량으로 출판하기도 하지만, 사찰의 운영에 필요한 여러 성격의 불서를 모아서 한 번에 대량으로 출판하기도 한다. 대량 출판이 있었을 때는 출판 불서 중에 승려 간의 교육, 의식 설행, 신자의 신앙과 관련한 다양한 불서가 혼재된 경향이 크다.

1769년(영조 45) 봉정사의 불서 출판도 이와 같은 흐름과 함께 한다. 봉정사에서는 당시 상당한 규모의 출판 불사가 진행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출판 불서는 15종으로 『상교정자비도장참법(詳校正慈悲道場懺法)』, 『범망경로사나불설심지법문품보살계본(梵網經盧舍那佛說心地法門品菩薩戒本)』, 『사분계본여석(四分戒本如釋)』, 『보살계의소(菩薩戒儀疏)』, 『기신논소필삭기(起信論疏筆削記)』, 『불설천지팔양신주경(佛說天地八陽神呪經)』, 『조왕경(竈王經)』, 『산왕경(山王經)』, 『신중작법청문(神衆作法請文)』, 『수계문(受戒文)』, 『비구계칠취대목(比丘戒七聚大目)』, 『사미계(沙彌戒)』, 『계율연기(戒律緣起)』, 『위의초록(威儀抄錄)』, 『지공범본(誌公梵本)』이다. 이 불서들은 모두 전래하지는 않으나 현존하는 불서에 수록된 발문에서 전체 불서 목록을 확인할 수 있다. 출판된 서적을 승려 교육, 계율, 의식 설행, 민간 신앙 등 다양한 성격의 불서다.

사찰의 불서 출판은 신앙을 바탕으로 한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불사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한쪽에서 목재를 다듬고, 경판을 판각, 인쇄하고, 교정을 반복하여 불서를 간행하는 동안, 다른 한쪽에서는 염불하고, 다라니를 외고, 등촉을 밝히고 향을 사르면서 예배를 올리는 불공이 진행되었다. 따라서 사찰에서 불서를 출판할 때는 상당한 비용이 필요했고, 이름난 승려가 권선문(勸善文), 모연문(募緣文) 등을 가지고 사찰과 속세를 왕래하며 불서 간행에 필요한 비용을 마련하는 권선 활동이 수반되었다. 봉정사의 불서 출판 현장은 당시 출판된 서적과 현존하는 현판 두 점에서 확인할 수 있다.


모연문(출처: 국립중앙박물관)



먼저 현존하는 불서는 사찰의 불서 출판이 체계적인 조직에서 진행되었는지 보여준다. 불서에는 일반적으로 책의 마지막 부분에 불서 출판 참여자의 역할과 이름, 시주자 명단이 수록되어 있다. 이들의 역할을 볼 때 봉정사의 불서 출판 불사는 크게 불사 총괄, 불공 집전, 출판 작업으로 업무 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불사 총괄’은 불사를 주도하고 재정을 담당한 화주(化主), 불사를 감독하는 도감(都監), 불사가 잘 마무리되었음을 증명하는 증사(證師), ‘불공 집전’은 기도를 올리는 지전(持殿)과 송주(誦呪), 공양물을 준비하는 공양(供養), 별좌(別座), 숙두(熟頭), ‘출판 업무’는 판을 새기는 각수(刻手), 내용을 바로잡는 교정(校正), 판에 새길 원고를 작성하는 서사(書寫), 나무를 다듬는 목수(木手), 목판을 만드는데 필요한 금속을 다듬는 야장(冶匠) 등 각각의 업무 영역에서 불사가 진행되었다.

봉정사에는 흥미로운 기록 두 점이 있다. 바로 1769년(영조 45)에 제작된 「경상좌도안동서영천등산봉정사대장경루판부수급인출체례규모기(慶尙左道安東西嶺天燈山鳳停寺大藏經鏤板部數及印出体例規模記)」와 1770년(영조 46)에 제작된 「안동부서영천등산봉정사고법당대장판전등촉헌답기(安東府西嶺天燈山鳳停寺古法堂大藏板殿燈燭獻畓記)」 현판이다. 두 현판은 다음과 같이 봉정사의 불서 출판 현장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경상좌도안동서영천등산봉정사대장경루판부수급인출체례규모기
(慶尙左道安東西嶺天燈山鳳停寺大藏經鏤板部數及印出体例規模記)」
(출처: 산사세계유산등재추진위원회)



봉정사의 불서 출판은 사찰에 머물렀던 이름난 승려의 주도로 진행되었다. 봉정사에는 이름난 두 승려 월암 지한(月岩旨閒)과 설월 관성(雪月觀性)이 있었다. 현판에는 ‘雪月과 月岩이라는 두 승려가 주도하여 시주를 받아서,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공력으로 귀신과 같이 일해서 5월에서 12월까지 주변을 막고 한데 모여서 크게 불사를 일으켜 밤낮없이 일하는 것이 새로 불상을 만드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름난 승려가 불서 출판을 주도하면 인근 사찰의 승려, 지역의 사대부 가리지 않고 많은 참여가 이루어진다. 봉정사에서는 이들의 노력으로 '엽자(葉字) 70답 중 11복 5속 5두락, 진자(辰字) 17전 중 18복 9두락, 의자(宜字) 8전 중 11복 6속 6두락'과 같이 사찰 운영에 도움 될 수 있는 자산인 전답을 마련할 수 있었다.

봉정사에는 당시 인출사업을 진행할 때의 지침 또한 마련되어 있었다. 간단한 내용이지만 지침을 통해서 봉정사의 출판 현장을 추론해 볼 수 있다.

하나. 본 사찰의 승려가 인쇄 시 총괄하여 썩거나 깨진 것을 점검한다.
하나. 인쇄 담당자는 승통(僧統)에 작은 일이라도 고해서 폐단이 없도록 한다.
하나. 인쇄 시 지성(至誠)이 많든 적든 간에 불(佛), 신중(神衆), 성중(聖衆)에게 공양을 드려야
       한다.
하나. 봄, 가을 양 계절에 인쇄한다.
하나. 몇 권(卷), 몇 장(丈)인지 제목만 보면 모두 다 알아야 한다.
하나. 판을 뒤집을 때는 찬찬하고 자세하게 하며, 던져서 깨트리고 상하게 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 작은 것을 버리거나 들이는 등의 물정을 갖추는 일에도 삼가 덕을 높이고 재난을 두렵게
       여겨 거행해야 한다.

간략한 지침이지만 이 내용을 통해서 봉정사의 불서 출판 현장을 그려볼 수 있다. 첫째, 인쇄는 봉정사의 승려가 총괄하고 있었다. 즉, 당시 불서 출판은 봉정사 승려 외 다수의 참여로 진행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봉정사에는 불서 출판을 위해 다양한 인력이 참여했을 것인데 책판을 만들고 글씨를 새기는 일에는 봉정사 승려가 특히 감독하고 있었다.

둘째, 인쇄는 봄, 가을 두 계절에만 이루어졌다. 이는 목판의 보존과 관리, 작업자를 고려한 지침으로 보인다. 봄과 가을은 일하기도 가장 적합한 계절이고 적절한 환경 속에서 보존 및 관리가 되어야 하는 목판은 이 시기가 온‧습도 영향을 가장 적게 받는 시기이기도 하다.

셋째, 인쇄할 때 담당자는 목판과 해당 불서의 체제를 이해하고 있어야 했다. 즉, 담당자는 내용을 완전히 이해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업무상 필요한 출판 대상 불서의 전반적인 체제는 철저하게 숙지하고 당시 업무에 임했던 것으로 보인다.

넷째, 목판은 조심스럽게 다루어졌다. 목판은 한 번 제작하는데 상당한 비용과 시간이 들었다. 목판의 가치를 짐작할 수 있으며, 목판이 깨지는 경우도 많았음을 알 수 있다.

이 같은 기록들을 종합해 볼 때, 1769년 봉정사의 불서 출판 사업은 상당히 조직적인 업무 구조에서 진행된 대규모 사업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아쉽게도 이 밖의 불서 출판 사례는 확인되는 바가 없지만 1769년 봉정사의 불서 출판은 사찰의 출판 현장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몇 안 되는 귀중한 사례다.

전국적으로 볼 때, 유교, 불교 가리지 않고 이 정도 규모로 다양한 성격의 서적을 출판한 사찰은 많지 않다. 조선 후기 제한된 사료로 접근하였음에도 이처럼 많은 출판 사례를 확인할 수 있었으니, 당시 봉정사에서 얼마나 많은 출판이 있었을지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요컨대, 봉정사는 안동 지역의 대표 출판소로 조선 시대 책의 생산과 유통에 크게 이바지한 곳이라 할 수 있다.




집필자 소개

이상백
한국학중앙연구원 고문헌관리학 전공에서 조선 후기 사찰의 불서 간행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국립고궁박물관 학예연구사를 거쳐, 현재 부산대학교 문헌정보학과 조교수로 있다. 조선 시대 서적 출판 문화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고 있다.
“왕의 명령으로 영남 문인의 문집을 만들다”

노상추, 노상추일기,
1798-09-06 ~ 1798-10-12

무슨 바람인지 왕이 영남의 뛰어난 석학 중 가장 걸출한 인물의 옛 자취를 보고 싶으니 문적을 거두어 올리라는 명을 내렸다. 전갈을 받은 영남의 네 도호부와, 자신의 선조가 걸출한 석학이라 여기는 뜨르르한 집안들은 바빠졌다. 가장 일처리가 빠른 것은 안동도호부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노상추의 고향인 선산에서도 온갖 문적을 모두 모아서 도성으로 실어 왔다. 각 집에서 짧은 시간 내에 수정한 문서들이었기에 책자 꼴을 채 갖추지도 못했다. 그 허접한 모습에 노상추는 한탄하였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노상추의 집안 문적은 노상추가 몇 년 전 임금의 명에 따라 제출하기 위해 도성에 올려서 이미 수정해 놓았었다. 노상추는 남들이 필사적으로 문적을 교정보는 모습을 강 건너 불구경하듯 보았다. 노상추는 고향에서 올라온 집안 문적을 모두 다시 내려보내고는 이미 수정해 놓은 문적을 합하여 한 권의 책으로 만들었다. 그 책에는 송암공(松菴公)·역정공(櫟亭公)·학관공(鶴關公)·경암공(敬庵公)·죽월공(竹月公)의 문적이 모두 실려 있었다.

노상추는 책을 보기 좋도록 장황하기 위해 반계(泮界)에 있는 이원연(李元延)의 여관으로 들여보냈다. 이원연이 선산의 문적을 수합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노상추의 인척 집안들에서도 각기 자신의 5대조 이상 문적을 긁어모아 수정하고 있었다. 왕이 이미 알려진 명현 외에도 공훈이 있는 큰 인물과 탁월한 행실이 있는 선비도 동시에 조사하여 찾아내도록 했는데, 어쩌면 이번에 자신의 선조가 왕의 눈에 들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니 다들 혈안이 되어 집안 문적을 긁어모아 올 수밖에. 노상추가 보기에 구차한 문적도 많았다. 또 소문을 듣고 올라온 시골 사람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이렇게 모인 영남의 문적은 모두 49권이었다. 이 문적을 모두 수합한 것은 채제공이었다. 채제공이 왕에게 영남 문적을 올리니 왕은 다시 편차를 수정하라고 하교를 내리면서 제목도 함께 내려 주었다. 그 제목은 ‘영남인물고’였다. 전해 듣자니 왕의 하교에 따라 남인 재상들이 모두 군기시에 모여 오류를 바로잡고 글을 다듬어 수정하게 되었다고 한다.

“닭이 울 때까지 베껴쓰고, 추위와 더위에도 베껴쓴다 - 조선 선비들의 독서법”

임재일기, 서찬규,
1845-03-26 ~ 1859-01-01

1845년 3월 26일, 서찬규는 덕우가 선산에 가는 것을 전송하였다. 그가 이번에 가는 것은, 『주자이동조변』 등사하는 일을 마치지 못하였기 때문인데, 장마와 더위를 피하지 않으니 그 정성을 알 만하다. 6월 8일, 덕우가 왔다. 『주자이동조변』을 등사하는 일을 마쳤으니, 그 애쓴 마음을 알 만하다.

1847년 7월 10일, 연일 사보(詞譜)를 베꼈다. 8월 13일, 『장릉지』를 빌려 보았다.

1850년 4월 5일, “사서(四書)는 익숙하게 읽고, 『근사록』은 상세하게 익히지 않았는가? 그러면 모름지기 『격몽요결』을 읽어라. 『근사록』은 곧 송(宋)나라 때 하나의 경전이고, 『격몽요결』은 곧 우리나라의 한 경전이니 배우는 자는 마땅히 먼저 마음을 다해야 한다. 예전에 중봉 조헌 선생이 여행하던 밤에 한 서생을 만나 등불 아래에서 『격몽요결』 한 책을 베꼈는데, 닭이 울고 비로소 다 썼다. 마침내 받아서 힘써 읽으니 모두 수록한 것이 간략한 요점을 친절하게 기록하여 습속이 같게 되고 눈과 귀가 미치게 될 것이다.” 4월 6일, 아침 일찍 선생을 모시고 앉았을 때, 마침 비가 조금 내리고 온화한 바람이 서서히 불어왔다. 선생께서 창문을 열고 무릎을 꿇고 정좌하여 천히 도연명 시의 ‘가량비가 동으로부터 오니 좋은 바람 더불어 함께하네.’ 라는 구절을 읊으시고 말씀하시기를,
“좋은 비가 그때에 맞게 오면 만물이 함께 영화를 누린다. 사물을 관찰하면 생각이 일어나니 사람으로 하여금 정신과 기운을 상쾌하게 한다.”

라고 하셨다. 이날 열락재로 물러나 앉아 『소화외사』(오경원 지음)를 거의 저녁 무렵까지 읽었다.

1851년 5월 14일, 『성학십도』와 『격몽요결』을 등사하는 일을 끝마쳤다.

1852년 2월 19일, 선생을 가서 배알하였다. 근래에 『노주잡지』 한 권을 베꼈다.

1855년 11월 4일, 고조모의 기제사를 지냈다. 처사 한문오씨가 노량진에서 찾아왔고, 박참봉이 『근재 선생집』 16책을 보내왔다. 감사하고 감사하였다. 울산의 고세중이 내방하였다. 12월 5일, 은암에 올라가서 선생의 유고를 등사하고 『중용』을 읽었다.

1857년 3월 16일, 책을 싸서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가신 스승의 유고를 등사하니 20책이 되었다. 4월 26일, 화장사로 가서 빼고 넣는 일을 시작하였다. 이날 밤에 『근사록』을 강론하였다.

4월 27일, 낮에는 유집을 교열하고 밤에는 어려운 경서와 『심경』을 강론하니, 이번 일은 진짜로 우리 생애에 쉽게 가질 수 없는 좋은 순간이었다. 여의정사로 고개를 돌려보니, 또한 옛날 생각이 많이 났다.

1858년 8월 11일, 안영집(자는 선응)·이군·조성권·김옥중의 편지에 답장을 보냈다. 청송의 족친 어른 원모씨의 편지를 받았는데, 겸해서 『매야집(邁埜集)』을 부쳐왔다. 12월 18일, 배로 백마강을 건너고 규암에서 아침을 먹었다. 논치를 지나 30리를 가서 홍산(지금의 부여읍)에 당도하여 점심을 먹었다. 20여 리를 가서 어두울 무렵 삼계에 당도하여 숙재 조공을 배알하니, 매우 기뻐하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진정으로 아껴주시는 마음에 감격하였다. 이어 가지고 간 『사익전(明史翼箋)』 6책을 올렸다. 이는 일찍이 베껴서 보내달라던 부탁이 있었다.

1859년 1월 1일, 객지에서 해가 바뀌니 어머님을 떠나 있는 마음이 더욱 말로 하기 어렵다. 오후에 노호를 출발하였다. 광주의 박이휴(자는 양보)가 그 방선조의 문집인 『사암집(思菴集)』 한 질을 주었다.

“필사를 전문적으로 해 주는
‘쾌가’의 등장”


18세기가 되면 조선에서도 전문적으로 책의 유통을 담당하는 부류가 성행하였다. 서적을 들고 다니며 판매하는 책쾌(冊儈, 혹은 서쾌書儈), 상설 점포를 차려놓고 책을 판매하는 쾌가(儈家), 그리고 책을 빌려주는 세책가(貰冊家)가 그것이다. 세책은 쾌가에서도 이루어졌다. 책은 목판과 금속활자로 인쇄되어 만들어지기도 했지만, 필사 역시 책을 만드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쾌가에서는 책의 판매와 대여 뿐 아니라 필사도 담당하였다. 수천 종의 책을 깨끗이 베껴 쓰고, 이것을 빌려주었던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서적의 유통경로와 시장의 동향에 밝아야 했기 때문에 일종의 유통 및 판매 기획자인 MD와도 같은 역량이 쾌가에게 필요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출판허가가 나지 않아 애태우다”

미상, 소눌집간소일록
(小訥集刊所日錄),
1933-03-19 ~ 1933-04-29

1933년 3월 19일, 소눌(小訥) 노상직(盧相稷, 1855~1931)의 문집을 판각하기 위해 공론을 모으고, 각수를 선발하는 등 준비를 다 하고 있으나, 경성(京城)에서 『소눌선생문집』의 판각에 대한 허가가 내려오지 않아 판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계속 허가를 기다렸으나 소식이 없자 3월 23일, 3월 27일에 경성에 거주하는 박순병(朴淳炳), 박순기(朴淳紀) 등에게 편지를 보내 알아보도록 하였고, 허가가 내려왔는지를 알아보기 위하여 해당 주재소(駐在所)로 사람을 보내 계속 알아보고 있었다.

계속 허가가 나오지 않자 4월 17일에는 경성에 전보를 쳐서 허가 여부를 알아보았으나 답이 없어 초조하고 답답한 심정을 토로하고 있다.

4월 21일, 이처럼 문집을 간행하기 위해 일본 총독부의 허가를 얻어야 일을 시작할 수 있지만, 이미 불러 모은 각수들을 놀릴 수 없어서 이미 출판 허가를 받은 『성리절요(性理節要)』를 우선 판각을 시작하였으나, 정작 『소눌선생문집』의 판각 허가를 얻지 못하여 노심초사하는 모습이 일기에 보인다. 주재소에서는 허가 없이 판각을 하는지 살피고 있는 도중에(4월 8일), 판각 허가가 아직도 나지 않았다는 박순병의 편지가 도착하였다.

4월 24일, 경성의 박순병에게 전보가 도착하였는데, 마침내 기다리던 문집 판각 허가가 났다는 전보였다. 다음 날 개를 잡고 술을 사와서 각수들에게 대접하였다. 4월 29일에는 판각의 허가가 났다는 일을 주재소에 알리면서 본격적이 판각이 시작되었다.

“승려가 책을 팔러 다니다”

금난수, 성재일기,
1578-02-03 ~ 1578-02-12

금난수의 큰아들 금경과 셋째 아들 금개는 도산서원에 들어가 공부를 하고 있었다. 아들들도 집에 없고, 눈이 많이 와서 누구를 만나러 갈 수도 없고, 어딘가 유람을 가기에도 어려운 무료한 나날이었다. 그러던 중, 반 자(약 15cm)가 넘게 쌓인 눈을 뚫고 누군가가 금난수의 집 대문을 두드렸다. 많은 짐을 지고 온 승려였다. 그의 머리와 어깨에서 눈이 후두둑 떨어졌다.

승려는 금난수의 눈앞에 자신이 지고 온 책을 늘어놓았다. 도산서원에서 오는 길인데, 금난수의 큰아들인 금경이 말하길 아버지가 분명 책을 지고 가면 좋아하실 테니 아버지가 원하는 책이 있으면 팔아드리라고 했다는 것이었다. 무료한 아버지의 마음을 아들이 읽어 주어 금난수는 흐뭇한 마음에 승려가 지고 온 책들을 기분 좋게 뒤적거렸다. 금난수가 읽을 만한 책은 눈에 띄지 않았으나, 막내인 금각에게 읽힐 만한 책은 있었다. 금난수는 『당음(唐音)』 9책을 구매하기로 하였다. 『당음』은 서당에서 주로 사용하던 한시 교재인데, 당시가 시기별로 구분되어 있고 중국어의 4성이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알 수 있어 유용하였다. 노래하듯 당시를 읽을 귀여운 아들 생각에 금난수는 승려에게 지불한 책값이 전혀 아깝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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