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시대에 책은 비싼 물건이었다. 읽을 줄 아는 사람들은 일단 양반 신분이어야 했고 수요보다 항상 공급이 부족했다. 선비들끼리 책을 빌려 가서 먹어버린 이야기부터 빌려 간 책은 돌려주지 않는다는 이상한 규칙까지 오만가지 희한한 이야기들이 책을 둘러싸고 벌어지곤 한다. 책과 그 안에 담긴 지식이 귀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지식은 특권층의 것이었고 배움은 계급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하지만 조선에는 한글을 만든 세종대왕이 있었고 한글이 보급된 이후 양반이 아니어도 글을 읽을 수 있고 쓸 수 있게 되자 한글 소설들이 회자(膾炙)되기 시작했다. 아무리 한글이 한나절이면 배울 수 있다고는 해도 한글 역시 문자인지라 문맹률이 높았고 읽을 줄 안다고 누구나 책을 가질 수도 없었다. 어떻게 보면 책 읽어주는 직업인 전기수의 탄생은 필연이었다.
중국도 전기수와 비슷한 직업이 있었는데 이들은 설서인(設書人)이라 불렸다. 설서인들의 이야기는 전승되고 전승되어 방언 소설의 형식으로 남았다. 일본에도 이야기를 들려주는 직업으로 라쿠고가 있는데, 라쿠고가는 오늘날까지도 스승에게서 제자로 이어지면서 여전히 활동중이다. 2005년 조폭이 라쿠고에 반해 라쿠고가의 제자로 들어가 온갖 사고를 치면서 성장해 가는 드라마 〈타이거 & 드래곤(タイガー&ドラゴン)〉의 성공 이후 대중적인 장르로 성큼 성장하기도 했다. 이야기가 주는 매력은 동양과 서양을 나눌 수 없는 법이라 서양에서는 음유시인 바드(Bard)가 있다. 최근 게임이나 넷플릭스 드라마 〈와쳐〉 등에서는 주인공에게 빌붙어 광대와 다름없는 개그 캐릭터 정도로 취급되지만 사실 이들은 꽤 진지한 직업이었다. 바드의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은 역시나 지옥의 왕 하데스를 눈물짓게 한 오르페우스일 것이다. 하지만 오르페우스가 너무 멀리 갔다 싶으면 셰익스피어는 어떨까?
〈타이거 & 드래곤〉(출처: 왓챠피디아)
2015년 브로드웨이에 올라온 코미디 뮤지컬 〈썸씽 로튼(Something Rotten)〉에는 창작의 고뇌에 시달리다 못해 동료의 아이디어를 서슴없이 뽑아먹는 인물로 셰익스피어가 등장한다. 주인공은 셰익스피어를 시기하고 질투하며 그보다 더 멋진 연극을 만들고 싶어하는 닉 바텀. 하지만 승승장구하는 인기 극작가 셰익스피어의 그늘 아래 그의 공연은 손님이 들지 않아 파리만 날리고 좋은 극을 써야 한다는 강박감에 단어 하나 쓰지 못하는 나날들을 보내고 있다. 그의 아내 비아는 비상금까지 끌어다 쓰는 남편을 대신해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남장을 하고 곰의 배설물을 치우는 아르바이트까지 마다하지 않지만 닉은 셰익스피어를 뛰어넘는 이야기를 쓰고 싶다는 욕망 앞에서 눈이 먼다.
셰익스피어는 셰익스피어대로 인기 극작가이자 당대의 엔터테이너로 아이돌과 같은 인기를 누리지만 여태 쓴 작품보다 더 멋진 새 작품을 써야 한다는 압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다. 밖에서는 화려한 파티를 누리고 팬들의 환호를 받지만, 자신의 전쟁터인 책상 앞에만 앉으면 한없이 작아지는 셰익스피어의 노래 ‘Hard to Be the Bard(음유시인은 힘들어)’는 모든 창작자들의 마음을 코믹하게 드러낸 노래다.
〈썸씽 로튼〉 중 ‘Hard to Be the Bard’ 장면
(출처: 썸씽 로튼 인스타그램 https://www.instagram.com/rotten_korea/)
“히트작을 써내는 방으로 돌아오면
그곳엔 나와 맥주와 정줄 놓을 듯한 공포만 있지.
힘들어 힘들어 진짜 진짜 힘들어 바드로 사는 일”
비록 장면도 웃기고 가사도 웃기고, 웃기는 와중에 라임은 딱딱 맞지만, 내용은 어쨌거나 압박에 시달리는 창작자의 고통이다. 무명 작가인 닉도, 유명작가인 셰익스피어도 창작은 고통을 수반한다.
조선 시대의 소설 읽어주는 직업인 전기수를 다룬 한국 뮤지컬 〈금란방〉에는 책을 읽어주는 전기수가 자기의 이야기를 만들어 들려주는 인물로 등장한다. 전기수란, 조선 후기에 소설을 낭독하는 직업을 말한다. 한글 소설이 폭발적으로 양산되던 그 시절에는 심지어 책을 빌려주는 대여점인 세책가가 성행했다. 지식이 담긴 책을 천한 돈을 주고 사고파는 것을 꺼림칙하게 여겼던 시대는 지나갔다. 글은 지식이기도 했고 재미이기도 했다. 특히나 이야기는 더할 나위 없이 즐거운 오락거리였다. 긴 밤, 전기수가 들려주는 이야기가 얼마나 즐거웠을까. 전기수들은 단순히 책만 읽어주는 게 아니라 일인 다역의 퍼포머이기도 했다. 전기수는 주인공이기도 했고 악역이기도 했으며 듣는 사람을 웃기고 울리기도 했다.
오죽했으면 정조 때 온 나라에 명성이 자자했던 전기수 이업복은 자신의 재주가 화가 되어 죽음에 이르렀다. 이업복이 『임경업전』을 낭독하며 재주가 극에 달해 간신 김자점이 자신의 죄를 숨기기 위해 충신 임경업을 살해하는 장면에서 그만 듣고 있던 관객이 이업복을 김자점으로 착각해 분을 이기지 못하고 살해했다. 이 이야기는 정조실록에도 기록되어 생생하게 전해지는데 여기에는 정조가 어이없어했다는 반응도 남아있다.
뮤지컬 〈금란방〉에는 전기수이면서 여자인지 남자인지 모호한 인물인 이자상이 등장한다. 금주령이 내린 조선, 사람들은 찻집이라 이름 붙인 곳에서 각종 차라고 이름 붙인 술을 팔며 그곳에서 전기수의 낭독이 여흥으로 열린다. 눈이 잘 보이지 않는 임금은 저잣거리에 나갈 수가 없어 비밀을 엄수하는 대신에게 책을 읽게 하여 듣는데, 대신의 책 읽는 솜씨가 시리나 빅스비에 버금갈 정도로 감정이라고는 들어 있지 않으니 임금이 짜증을 낸다. 대신은 장안에 소문난 전기수인 이자상의 클럽에 들어가기 위해 딸의 옷을 훔쳐 입는데, 하필 그 딸도 이자상의 극렬팬이라 이자상의 낭독회에는 주요 등장인물들이 모두 모여 한바탕 소동이 일어난다.
뮤지컬 〈금란방〉(출처: 국립정동극장)
거기에 더해 이자상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액자로 펼쳐진다. 초연 때도 모든 출연배우들이 관객을 맞으며 신기한 클럽에 온 듯한 분위기를 자아냈다면 재연할 때는 본격적인 이머시브 스타일을 도입해서 이야기의 결말도 관객과 함께 풀어나가며 클럽에 관객들을 올려 함께 춤추고 즐기는 작품으로 거듭났다. 이 작품에서 창작자의 고뇌는 중요한 게 아니다. 그보다는 이야기를 대하는 조선인들, 아니 한국인들의 태도가 드러난다. 전기수가 돈을 벌려면 이야기가 한창 재밌을 때 딱 멈춘다고 한다. 그러면 청중은 너나없이 가지고 온 돈을 얹고, 목표한 돈이 모이기 전에는 입을 열지 않았다고 한다. 이러한 전기수의 이야기 진행과 돈 버는 방식은 유튜브나 브이로그 등의 다양한 플랫폼의 방식이 하루아침에 나온 게 아님을 보여준다. 심지어 이러한 방식으로 돈을 버는 방법을 요전법(邀錢法)이라고 이름까지 붙어 있을 정도다. 양반이나 부잣집에서 초빙받아 가면 이미 받기로 한 돈이 있으니 한창 재밌을 때 끊기지 않고 들을 수 있으니 그때나 지금이나 돈은 힘이 세다.
전기수를 주인공으로 한 작품은 〈금란방〉이 처음은 아니다. 〈판〉이라는 작품 역시 전기수를 소재로 했지만 사실 전기수라는 직업 자체보다는 두 작품 다 다른 할 말이 더 많은 듯하여, 전기수는 소재로 지나갈 뿐이라는 사실이 조금은 아쉽다. 어쨌거나 전기수들이 돈을 벌려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이야기이고 그 이야기가 담긴 것이 이다. 책과 전기수, 관객은 마치 연극의 삼요소처럼 반드시 필요한 요소다.
뮤지컬 〈판〉, 9월 19일부터 11월 26일까지 대학로 TOM 1관에서 공연 예정(출처: 아이엠컬처)
그런데 독서의 계절이라고 귀에 인이 박이도록 들어온 가을이 혹독했던 여름을 밀어내고 마침내 도착했건만 책이 어째 올해는 천덕꾸러기가 된 것처럼 보인다. 재정 건정성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국민독서문화 증진지원’ 사업예산 60억이 통째로 사라졌고 몇 도서관에서는 성평등에 관한 주제를 다룬 책들을 유해 도서로 지정해 내몰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조선 시대 전기수들이 들으면 통탄할 일이다. 더 읽으라고 해도 안 읽는 판에 읽지 말라고 하면 궁금해서라도 금서를 찾아 읽는 게 사람 심리다. 이렇게 되면 할 수 없이 책을 더 열심히 읽어야겠다는 오기가 도진다. 혹시 그걸 노렸을까? 차라리 그렇다고 믿고 싶다.
뮤지컬 〈썸씽 로튼(Something Rotten)〉 의 백악관 공연
퓨전 한복, 퓨전 스토리, 퓨전 전기수 뮤지컬 〈금란방〉
시기 | 동일시기 이야기소재 | 장소 | 출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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