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씨, 오늘 세책방에 가실 거죠?”
의녀 행덕이 방글방글 웃으며 산비에게 말을 걸었다.
“나들이라도 하고 싶은 게냐?”
“아가씨와 같이 가면 아니 좋을 수가 없죠.”
산비가 피식 웃어버렸다. 행덕의 속내가 맑은 시냇물처럼 빤히 들여다보였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새 언문 소설 들어오는 날이라고 가고 싶은 거겠지?”
“헤헤, 맞습니다요. 어제 보름이었으니까 새 책이 들어왔을 거예요. 늦으면 다른 사람들이 다 빌려 가 버린다고요.”
산비는 책을 빨리 보기 때문에 산비가 세책가에서 책을 빌려 얼른 읽은 뒤에 행덕이가 남은 기일 동안 소설을 읽고 있었다. 이렇게 하면 한번 빌린 값으로 두 사람이 보는 셈이니 어쩐지 크게 이득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 가자, 가.”
이렇게 해서 산비와 행덕은 단풍이 들기 시작한 가을날, 동네 한복판에 있는 세책가로 가게 되었다. 책을 빌려주는 곳으로는 딱 하나 있는 세책가였고, 요즘은 책을 판매하기도 하는 곳이어서 늘 사람들이 붐비는 곳이기도 했다.
조선 시대 세책가 모습(출처: EBS 역사채널e)
“여기 늘 사람이 붐비긴 하지만… 그렇게 보기에도 오늘은 사람이 많네?”
세책가 앞에 동네 사람들이 다 모인 것처럼 많이도 있었다.
“낭자도 오셨네요?”
정서린 도령이 산비를 보고 반색하며 인사를 건넸다. 산비는 공연히 쓰개치마를 더 눌러쓰면서 반쯤 몸을 돌렸다. 주변에 눈이 많으니 자연스럽게 내외를 하게 되었다.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저는 별일 없습니다. 별일은 세책방에 있네요.”
“무슨 일입니까?”
“도둑이 들었답니다.”
“도둑이요? 뭘 훔쳐 갔답니까?”
“그게… 훔쳐 간 건 없답니다.”
“네?”
“도둑이 들긴 했는데, 책만 망가뜨린 모양입니다.”
“책을 망가뜨려요? 훔쳐 간 게 아니고요?”
“그렇습니다.”
“무슨 책이었나요?”
“그게, 뭐라고 했더라. 『규방미담(閨房美談)』이라고 한 것 같네요.”
그 말에 행덕이 풋 하고 웃고는 말했다.
『규방미담』 (출처: 고려대학교 해외한국학자료센터)
“『규방미담』이라면 양반 아가씨들이 볼만 한 책인 것 같은데, 그런 책을 망가뜨렸다니 어디서 중신을 넣었다가 퇴짜라도 맞은 도련님 짓인가 보네요.”
서린 도령도 웃음을 머금고 말을 받았다.
“나는 아닐세. 퇴짜를 맞은 적이 없으니.”
산비가 두 사람의 농을 막았다.
“쓸데없는 소리들 그만하고, 한번 들어가 봐야겠다.”
세책가 주인 송씨는 울상을 하고 앉았다 일어났다 정신이 하나도 없는 얼굴이었다.
“아, 어제 들어온 새 책을 이 모양을 만들다니.”
“책이 어찌 되었기에 그리 울상입니까?”
“책을 이렇게 찢어놓았지 뭡니까. 대체 어느 놈 짓인지 잡기만 하면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
송씨가 책을 펼쳐서 보여주었는데, 과연 무작스럽게 책을 찢어놓은 것을 알 수 있었다.
“한 장만 이렇게 찢은 겁니까?”
“그렇네요. 그것도 다 같은 쪽을 골라서 찢어놓았지 뭡니까?”
“같은 책이 또 있나요?”
“그렇죠. 이 책이 꽤나 인기가 있어서 모두 여섯 권을 들여왔습니다. 어제 책쾌 조 영감이 주고 간 책인데 오자마자 두 권은 팔렸고 한 권은 하 진사 댁에서 빌려 갔고 세 권이 남아있었는데 이렇게 찢어발겨 놓았지 뭡니까?”
행덕이 송씨 말을 듣다가 끼어들었다.
“그 한 장 찢어간 거면 새로 베껴 적어서 끼워놓으면 되는 거 아닌가요? 뭐 그리 울상을 할 건 아닌 것 같은데요?”
“아, 그게 그렇게 쉽게 베낄 수가 없는 책이야. 의녀 주제에 뭘 안다고 끼어드냐?”
송씨의 말에 산비의 호기심이 더 일어났다.
“책 좀 보여주실 수 있어요?”
“본다고 뭔 수가 나는 건 아니지만…”
송씨는 그렇게 말하면서 앞에 놓여 있던 책을 건네주었다.
책은 목판으로 인쇄한 방각본이 아니고 손으로 직접 옮겨적은 필사본이었다. 손으로 옮겨적은 만큼 가격도 방각본보다 비쌌을 것이다.
무심히 책을 넘겨보던 산비가 가볍게 탄성을 내뱉었다.
“아, 이 책은 선기도(璿璣圖)군요.”
“그러니까요. 하필 제일 힘들게 그린 시 그림을 찢어버렸지 뭡니까?”
행덕이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시 그림이 뭐예요?”
산비가 책을 펼쳐서 행덕에게 보여주며 말했다.
“이게 뭐로 보이냐?”
행덕이 미간을 찌푸렸다.
“이게 한자가 적혀 있긴 한데 무슨 벌집 모양으로 이렇게 그려놓았네요?”
“이 한자들을 이리저리 조합하면 한시가 된단다. 그래서 이렇게 시를 그림처럼 만들어놓아서 시 그림이라고 하는 건데, 어려운 말로는 ‘선기도’라고 하는 것이다.”
“아이고, 어지러워라. 왜 굳이 이런 걸 그리는 건가요?”
“재미로 하는 거지. 앞으로 읽을 수도 있고, 뒤로 읽을 수도 있고 대각선이나 가로로 읽을 수도 있단다. 이렇게 앞으로도 읽고 뒤로도 읽는 걸 회문(回文)이라고 부르지.”
『선기첩(璿璣帖)』: 바르게 읽거나 거꾸로 읽어도 동일한 내용의 문장이 되는 직금회문(織錦回文) 시를 엮은 첩 (출처: 국립민속박물관).
『선기첩』의 선기도(璇璣圖): 가로 29자, 세로 29자(총 841자)를 적어 놓음 (출처: 국립민속박물관).
“회문은 또 뭔가요?”
“‘다시 올 이월이 윤이월이올시다’를 거꾸로 해보렴.”
“헤에? 다…시…올…이월이…윤…이월이…올…시다?”
행덕의 눈이 둥그레졌다.
“그것 참 신기하네요? 아하, 그렇게 앞으로 뒤로 똑같은 말을 회문이라고 하는 거군요.”
“한시는 앞뒤가 똑같이 읽히는 건 아니지만 거꾸로 읽어도 시가 되게끔 지으면 된다. 그렇게 지으면 회문시라고 부르는데 대단한 재주가 있어야 지을 수 있지.”
“그럼 대체 어떤 놈이 이걸 찢어갔을까요?”
행덕의 질문에 송씨가 대답했다.
“완전히 미친 놈이지. 요즘 선기도가 양반댁 마님들 사이에 유행이라 이런 책이 불티나게 나가는데 이렇게 남의 장사를 망쳐놓았으니. 거기다가 가져가지도 않았더라고. 찢은 책장을 버리고 갔어.”
여성이 한문을 배우지 않던 것도 옛말인 셈이었다. 배움의 욕구가 이제 여성들 사이에도 번져서 한문을 읽을 줄 아는 여성도 많이 늘어나고 있었다. 한시를 익히기에는 선기도 같은 책이 또 좋은 점이 있었다.
“에에? 버리고 갔다고요? 그럼 다시 붙이면 되지 않아요?”
버리고 갔다는 말에 행덕이 물었다. 송씨가 고개를 흔들며 대답했다.
“그럼 좋게? 찢어서 집어던지고 갔는데 물 웅덩이에 들어가는 바람에 먹물이 번져서 다시 쓸 수가 없게 되었다고.”
산비의 눈이 반짝였다.
“그럼 어제 한밤중에 도둑이 든 거군요?”
“그렇지요. 쇤네가 2경(밤 10시)까지는 가게를 지켰으니까 한밤중에 든 게 분명하지요. 대체 순라는 뭘 하는 건지…”
송씨는 순라꾼을 탓하다가 산비가 사또의 딸이라는 생각이 들어 얼른 입을 닫았다. 산비는 그런 송씨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어제는 보름이었으니 책을 살펴보려고 가게 밖으로 나왔던 거군. 세 권을 모두 똑같은 곳을 골라 찢었으니 분명히 그 책장에 뭔가 있었던 거구나.”
산비가 송씨를 보고 물었다.
“그 책들 말고 거래 장부도 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나요?”
“아, 그건 또 어찌 알았습니까? 그런데 장부책은 찢어지진 않았어요.”
“좀 보여주세요.”
장부를 보니 책을 사간 곳은 향교의 학장과 황부자 집이었다. 산비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세책가를 나왔다. 서린 도령과 향덕이도 하릴없이 따라 나왔다.
“도련님은 향교 학장 어르신에게 가서 『규방미담』이 무사한지 살펴보시고, 행덕이 너는 황부자 댁에 가서 『규방미담』이 멀쩡한지 알아봐라. 나는 인화당에게 가서 『규방미담』을 살펴보겠다.”
“인화당 아씨한테는 왜요?”
“아까 하 진사 댁에서 책을 빌려 갔다고 했잖느냐.”
하 진사 댁 며느리가 인화당이었다. 행덕이는 인화당이 시집가기 전 이름인 효옥 아가씨라는 이름만 귀에 익어서 자꾸만 기억을 못했다.
“알겠습니다!”
*
산비는 분주하게 발을 놀려 인화당을 찾아갔다. 인화당이 마침 그 책을 보고 있던 중이었다.
“오랜만에 오셨네요.”
인화당이 산비를 반기며 말했다.
“아기는 잘 크지요?”
“그럼요. 얼마나 힘이 좋은지 모른답니다.”
“ 『규방미담』은 재미있으세요?”
인화당이 옆에 내려놓았던 책을 보고 미소를 떠올렸다.
“소설 내용은 별 재미가 없지만 선기도는 참 신통방통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겠더라고요. 어제 그만 꼬박 밤을 새워 시문을 짰지 뭡니까?”
“아하, 그럼 밤새 불을 켜놓으셨겠습니다?”
“당연하지요? 왜 그런 걸 물으시나요?”
“아니요. 참 잘하셨습니다. 그 책을 좀 볼 수 있을까요?”
“그럼요. 저는 볼 만큼 보았으니 가져가셔도 됩니다.”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산비는 책을 받아서 꼼꼼히 살펴보았다. 산비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산비가 웃으며 말했다.
“내가 인화당께 부탁할 것이 있습니다.”
“무슨 부탁이든 다 들어드리겠습니다. 우리 아기의 은인이신데요.”
“전혀 어려운 것이 아니니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산비가 귓속말로 속닥이자 인화당이 곧 고개를 끄덕였다.
*
서린 도령과 행덕이가 책을 살펴보고 와서 그 두 책도 그날 밤에 도둑이 들어 한 장을 찢어버렸다고 말했다. 다행히 두 집은 찢어진 종이가 물 웅덩이에 빠지지 않아서 다시 붙여서 사용할 수 있었다고.
그날 밤이었다. 인화당의 방 불도 일찌감치 꺼졌다. 전날 밤새 책을 읽었으니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풀벌레 소리도 잠든 야반삼경에 검은 그림자 하나가 나타나 휙 월담을 했다. 몸이 날래기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검은 그림자는 조용히 인화당이 자고 있는 방문을 열었다. 보름이 하루 지났다 해도 여전히 달빛이 밝아서 방 안이 훤히 보였다. 인화당은 아무것도 모른 채 색색 자고만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검은 그림자는 사람에는 관심이 없는 모양이었다. 방 안을 둘러보고는 책이 쌓여있는 서가를 발견하자 얼른 그곳으로 가 책들을 몽땅 들고 방을 나왔다.
검은 그림자는 달빛에 책을 하나하나 비쳐 보다가 드디어 한 권의 책만 손에 쥐었다. 그가 책장을 넘기다 드디어 한 장을 찢어내려는 순간이었다.
“그만! 동작을 멈춰라!”
검은 그림자의 등 뒤에서 날카로운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검은 그림자가 흠칫 놀라더니 그대로 뛰어 달아나려고 했다. 하지만 그 순간 그의 배를 곤봉이 강타했다.
“억!”
검은 그림자가 배를 움켜쥐고 쓰러지자 갑자기 여기저기서 푸른 그림자가 솟아오르더니 순식간에 검은 그림자를 포박해버렸다.
“누, 누구냐? 왜 이러는 거냐?”
“누구긴. 나는 포천현 포교 유일삼이다. 대도 흑오를 오늘 내 손으로 잡았구나.”
흑오는 몸부림을 쳤지만 이미 옴짝달싹할 수 없는 몸이 되고 말았다. 방안에서는 인화당이 아니라 산비가 걸어나왔다. 인화당에게 하루 방을 빌려달라 청했던 것이다.
“네가 찾는 건 그 안에 없다. 내가 이미 챙겨놓았거든.”
산비가 종이 한 장을 흑오의 눈앞에 팔랑거렸다.
“송상(松商) 박 객주의 어음을 훔치다니 참으로 대담한 도둑이 아닐 수 없구나. 기찰에 걸릴까봐 같은 방 객잔에 묵은 책쾌의 책 속에 감춘 것도 대단한 발상이고.”
책은 본래 양면을 펼쳐서 글을 적은 뒤에 반으로 접어 묶어서 만든다. 그렇게 만들기 때문에 책장 사이에는 빈 공간이 생기게 마련이었다. 흑오는 그 속에 훔친 어음을 넣고 어음이 흘러나오지 않게 밥풀로 책장을 붙여놓기까지 했다.
그런데 책쾌의 발이 빠른데다가 자신은 기찰을 피해 오느라 반나절 늦게 도착하고 보니 이미 책이 모두 세책가에 팔린 뒤였다. 책이 나간 곳을 확인하고 모두 확인하고자 했으나 하필 인화당이 밤새 책을 보는 통에 바로 그 책을 확인하지 못했던 것이다.
“아, 진짜 재수 옴 붙은 날이네.”
산비가 픽 웃었다.
“재수 좋은 날이야. 그 책장 찢어버리게 놔둘 수도 있었는데, 그럼 책값도 변상했어야 하잖아?”
산비는 이를 뿌드득 가는 흑오의 어깨를 툭툭 쳤다. 그동안 한양과 경기 북부를 누빈 대도를 잡았으니 아버지 오 현감의 체면이 많이 설 터였다.
“내가 순순히 옥에서 썩을 줄 아느냐? 꼭 나와서 찾아가마.”
“이 놈이 어디서 흰소리를!”
유 포교가 흑오의 얼굴에 냅다 주먹을 날렸다.
“아아, 안 그래도 돼요.”
산비는 싱글싱글 웃으며 흑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대도라 이름을 날리고 있었지만 아직 소년 티를 못 벗은 앳된 얼굴이었다. 산비가 그 눈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찾아오렴. 기다리고 있을게. 심심해지기 전에 꼭 찾아와라.”
흑오는 이글거리는 눈으로 산비를 노려보았다. 산비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 눈길을 받아넘겼다. 어느덧 차갑게 느껴지는 바람이 둘 사이로 지나갔다.
시기 | 동일시기 이야기소재 | 장소 | 출전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