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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판에 새긴 이름, 편액

무진장(無盡藏) 이어질 기억 저장소,
장판각(藏板閣)

‘학교 도서관 학부모 도서 도우미 자원봉사자 모집 안내’


아이들이 다닌 초등학교에서 4년간 학부모 도서 도우미 자원봉사 활동을 했다. 학부모 도서 도우미는 청소와 서가 정리, 도서 대출·반납과 약간의 돌봄 서비스 업무를 지원했다. 봉사 첫날, 학교 도서관이 ‘총체적 난국’이라는 것을 알았다. 복본 도서, 파손 도서, 분실 도서는 말할 것도 없고 RFID 미부착 도서도 많았다. 우리는 학교와 협의하여 잠시 도서관을 휴관하고 도서관 활성화를 위해 팔을 걷어붙였다.

먼저 인근 도서관에서 운영하는 ‘찾아가는 현장 방문 학교 도서관 지원’ 서비스를 신청하여 장서 관리를 위한 점검, 서가 정리와 도서관 운영에 대한 지침을 안내받았다. 다음으로 우리는 폐기할 도서를 선별했다. 장서 목록에 없는 도서, 출판된 지 5년을 넘긴 도서, 파손 도서, 인기 없는 도서 등을 골랐다. 도서 폐기 전, 소장하고 싶은 도서는 학생들이 자유롭게 가지고 갈 수 있도록 했다.

이제 서가 정리가 남았다. 한국십진분류표를 기준으로 한 기본 서가와 함께 그림책과 경북 e-독서 친구, 학습만화, 신간 도서 등 별도의 서가도 두었다. 수천 권 이상의 도서를 닦고 옮겼다. 그리고 신간 도서에 대한 도서 장비 작업과 학년별 경북 e-독서 친구 도서를 찾아 스티커 부착을 했다. 도서 담당 선생님께서 도서대출증 발급과 도서관 운영에 관한 규칙을 마련해 주셨다. 이렇게 학교 도서관 재개관을 위한 준비가 끝났다.




서적 간행의 시작, 공론화


만약 출판사가 당신에게 십 년 후, 혹은 당신의 사후에 책이 출간될 수 있다는 조건으로 집필 제안을 한다면, 당신은 이 조건을 수락할 수 있을까? 백 년 전, 이 땅에 살았던 우리의 선조들은 나무에 수를 놓듯 글자를 새겨 책을 만들었다. 책 한쪽을 목판에 새기는 시간만 사흘이 족히 걸렸다. 책을 다 만들고 나면 그 책판을 보관하기 위한 건물도 지었다. 오랜 시간 많은 사람들의 공력(功力)이 모여 완성한 책과 책판 이야기를 시작한다.

최근 ‘1인 출판’에 도전하여 책의 기획과 저술, 사업자 등록 및 편집, 검수와 교열, 인쇄와 제본, 유통과 배본, 마케팅까지 출판의 전 과정을 혼자 해내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이는 혼자서도 가능한 오늘날의 출판 시스템 덕분일 것이다. 하지만 조선은 ‘공동체 출판’ 시스템을 통해 책을 펴냈다.

1817년 1월 5일, 연초에 도산서원에서 세배 당회(堂會)를 개최할 때 퇴계선생문집을 개간하기 위해 공론을 모았다. 도산서원 원장 이이순(李頤淳) 등 58명이 모여 의논하기를 “왕(순조)의 어람(御覽)을 위해 퇴계 선생의 문집 한 질을 올리라는 홍문관(弘文館)의 관문(關文)에 의해 문집을 인출하려 했으나 책판이 더러 마모된 것을 알았고, 이에 개간을 위해 의논을 모으자”는 논의가 있었다. 이에 도산서원에 모인 58명 전원이 동의하고, 원장 이이순이 퇴계선생문집의 개간은 서원의 대사(大事)로 마땅히 향중의 여러 원로들의 공론을 모아야 한다고 결정하였다. 이에 2월 13일에 다시 모임을 열어 논의하여 간역을 결정하였다.

『퇴계선생문집개간일기(退溪先生文集改刊日記)』 중에서


『퇴계선생문집개간일기』는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의 문집을 개간(改刊)할 때의 일을 기록한 것으로, 저자의 문집 발간을 위해 서적 간행에 관한 여론 수렴 과정을 거쳤다. 서적 간행의 공론화를 위해 먼저 저자와 혈연·지연·학연 등으로 연결된 사람들에게 통문[通文, 조선 시대에 민간단체나 개인이 같은 종류의 기관 또는 관계가 있는 인사 등에게 공동의 관심사를 통지하던 문서]을 보냈다. 통문을 받은 사람들이 모여 서적 간행을 결정하면 본격적인 간행사업이 시작된다. 자료의 수집과 교정, 목판 제작 및 반질[頒帙, 책을 배포함] 등에 필요한 업무 분장을 하고, 간행 비용 등을 논의한다.

한국국학진흥원의 ‘옛 일상 속 인간관계, 고문서’ 홈페이지(https://doc.ugyo.net/)에서 제공하고 있는 도산서원 통문 가운데 ‘1819년 2월 5일에 청송향교 명의로 도유사 서고 등 15명이 도산서원에 보낸 통문’이 있다. 이 통문에 의하면 안동 및 도산서원에서 진행되고 있는 『심경(心經)』 판본의 간행사업을 축하하면서 책 출간을 위한 재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과 석채례(釋菜禮) 하는 날에 맞춰 간행이 완성되기를 바란다는 의견을 개진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1621년 윤2월 26일, 비가 내렸다. 김령의 여러 벗들이 향교 재사에 모여있었는데, 한강의 편지를 모으기 위해서였다. (중략) 한강의 편지를 모으는 작업은 6월까지도 계속되었고, 이듬해 7월에도 모은 편지를 편집하고 베껴 쓰는 작업이 계속되었다.

계암(溪巖) 김령(金坽,1577~1641)의 『계암일록(溪巖日錄)』 중에서


김령의 이 일기는 한강(寒岡) 정구(鄭逑, 1543~1620)의 『한강집(寒岡集)』 발간을 위해 그의 벗들이 한강의 편지를 수집·필사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처럼 조선 시대 문집은 대부분 저자의 사후에 그의 자손이나 문인들에 의해 발간된다. 그래서 저자의 자손이나 문인들은 고인의 시와 편지 등의 저작(著作)을 수집·정리하고 고인의 세계·성명·관향·자손록 및 평생의 언행 등을 서술한 행장을 쓴다.

수집된 저작은 가편집하여 초고(草稿)를 만든 후 교정을 한다. 교정은 한 사람이 아닌 다수의 사람이 공동으로 참여한다. 이황의 문인록 간행 과정을 기록한 『급문록영간시일기(及門錄營刊時日記)』에 “이번 교감은 모두 세 차례나 하여 털끝만큼도 사사로움이 없으니, 이 같은 정본이면 어찌 공정하지 않겠는가.”라고 하며, 공정함을 교정의 기본 원칙으로 삼아 정고본(定稿本)을 완성한다.




목판의 제작 과정


서적 간행에 관한 여론을 형성하고 간행 조직을 꾸려 원고에 대한 교정작업까지 끝나고 나면, 이제 본격적인 출판 작업이 시작된다. 조선 시대 서책의 목판본 간행은 주로 관아나 서원, 향교, 서당, 사찰 등에서 이루어졌는데, 문중의 사가(私家)에서 간행되기도 했다. 이때 책판의 실질적 간행 공간을 간역소(刊役所)라고 한다. 간역소는 원고를 교정하고 문장을 확인하는 유사, 판각하는 사람, 마구리를 제작하는 사람, 인출하는 사람, 표지를 만들어 책 매는 사람, 매일의 지출과 작업량을 기록하는 사람 등이 생활하는 공간으로 책판 간행을 위한 공간과 이들의 숙식이 가능한 공간까지 필요했다.

대계(大溪) 이주정(李周禎, 1750~1818)의 문집을 간행하기 위하여 후손들이 원고를 모아 정리하고 정서(淨書)하여 문집 간행의 준비는 끝이 났으나, 판각을 위한 비용의 마련이 어렵게 되었다. (중략) 후손들은 많은 비용이 필요한 간역소의 설치를 생략하고 각수와 직접 계약을 맺어 각수가 판각한 만큼의 공임과 비용을 지불하기로 결정하였다.

『대계집간역시일기(大溪集刊役時日記)』 중에서


하지만 간역을 위한 별도의 장소를 마련할 수 없을 때는 인근의 서원이나 서당, 사찰에 간역소를 만들어 서적을 간행하기도 했다. 위 일기처럼 간역소를 설치하지 않고 각수와 직접 판각 계약을 하기도 했는데, 간역소를 설치하는 것보다 간행 비용을 절약할 수 있다.

조선 시대의 서책은 필사본, 활자본, 목판본, 석인본이 있는데, 목판본으로 문집을 간행할 경우, 그 처음은 나무를 구하는 일이다. 너무 무르지도 단단하지도 않은 적당한 강도를 가진 활엽수 계통의 산벚나무, 돌배나무, 자작나무, 단풍나무 등을 적당한 크기로 토막을 낸 후 1~2년 정도 결을 삭힌다. 결을 삭히는 과정이 끝나면 5cm 정도의 두께로 판자를 켠다. 판자의 수분이 마르기 전 소금물로 삶아 진액을 제거하는데, 이 과정을 팽판(烹板)이라고 한다. 소금물에 삶는 것은 나무속의 진액을 제거하여 나무의 변형을 막기 위해서이다. 이 과정을 잘못하면 나무가 갈라지거나 틀어지고 휘어진다.

1817년 2월 24일, 퇴계선생문집 개간에 필요한 판재를 준비하던 중 전 도산서원 별임을 지낸 소암 김진동이 퇴계선생의 문집 개간을 위해 미리 준비해 둔 판재가 청량사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가보았다. 막상 보관된 판재 100판 중 좀 먹고 썩은 것이 52판이나 되고 쓸 만한 판재는 48판 밖에 남지 않았다고 하였다.

『퇴계선생문집개간일기』 중에서


소금물에 삶은 후 음지에서 1~3년을 건조하면 변형이 적은 판자를 얻을 수 있다. 나무를 건조하는 과정이 잘못되면 준비한 판자를 사용하지 못할 수도 있다. 이 일기는 판자의 수급과 제작의 어려움을 보여준다. 준비한 판자의 반 이상이 썩었기 때문에 서적 간행 비용도 추가되었을 것이다. 건조가 끝난 판목용 목재는 대패질로 판면을 고르게 다듬은 후 판목의 형태에 맞게 마름질한다. 마름질이 끝나면 마구리를 연결한다.

마구리는 목판에 사용한 나무와 상관없이 주변에서 구하기 쉬운 소나무와 잣나무 등을 주로 사용한다. 마구리는 목판의 관리를 위해 목판의 양옆에 끼우는 틀로, 목판의 손잡이라 부르기도 한다.

1817년 4월 26일 다시 간역을 시작하였다. 책판을 점검해 보니 이미 각자는 하였으나 아직 마구리를 하지 않은 것은 양 머리가 벌써 갈라졌고, 이미 깎았으나 아직 각인하지 않은 것 또한 갈라진 것이 많았다.

『퇴계선생문집개간일기』 중에서


이 일기는 마구리가 단순히 책판의 손잡이가 아니라 책판의 원형 보존에 큰 역할을 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마구리는 목판을 보관할 때 판면이 직접 부딪쳐 손상되는 것을 방지하고 판과 판 사이의 통풍을 원활하게 하며, 목판의 뒤틀림을 방지하는 역할을 한다. 마구리 표면에는 책의 제목과 권수, 면수 등을 묵서(墨書)하여 필요한 책판만 판가에서 꺼낼 수 있도록 했다. 또한 마구리는 각수(刻手)의 이름, 문집 간행에 참여한 제자들이나 문중 사람들의 이름, 교정의 흔적 등이 기록되어 있어 인출본이나 목판에는 없는 정보를 제공한다.

판목이 준비되면 원고에 해당하는 판하본(板下本)을 판면에 뒤집어 붙인 후 판각에 들어간다. 본격적인 판각에 앞서 테두리인 광곽(匡郭)의 윤곽을 새기고, 계선(界線)을 가늘고 얇게 새겨 행을 구분 짓는다. 광곽은 인쇄 면의 바깥 테두리로 굵고 진하게, 계선은 세로줄 노트처럼 가늘게 인쇄되어 본문의 줄 사이를 구분한다. 내용을 모두 판각하면 판면의 중심인 판심에 책의 제목과 권차(권수), 장차(쪽수)를 새겨 마무리한다.

1817년 3월 6일 도도감(都都監)이 들어와 도각수(都刻手)를 불러서 품삯을 정하였다. 1판에 1냥 1전, 간본(刊本)은 서원에 보관된 것 중 본집을 가지고 자획이 바르고 깨끗한 것은 잘라내어 붙이고, 조금 결함이 있는 것은 획을 보완하였으며, 아주 심한 것은 다시 썼다. 이휘녕과 이만수가 글씨 쓰는 일을 주관하여 인출한 본을 검사하며 아직 미진함이 있는 것은 다시 판본을 열람하여 가려내었다.

『퇴계선생문집개간일기』 중에서


조선 시대에서 각수와 계약을 할 때는 각수의 총책임자인 도각수와 계약을 하고 도각수가 제각수(諸刻手)와 재계약을 하여 판각에 임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판각이 끝나면 도각수에게는 기본 판각 공임 외에 별도의 공임을 추가 지급하는 것이 상례라 할 정도로 도각수의 역할이 중요했다. 목판 제작의 핵심 인력인 각수의 임금은 목판 제작 인건비 중 30% 이상을 차지했고, 임금 이외에 각수의 식비, 담뱃값, 술값 등 소소한 비용이 추가로 더 들었다. 판각이 끝난 책판의 마구리에 각수의 이름을 기록하여 임금 지급 근거로 삼았다.

판각이 끝나면 인출을 하고 책을 완성한다. 인출은 볏짚의 이삭 부분을 모아 만든 먹솔이나 먹비로 골고루 먹물을 바른 후 그 위에 종이를 덮고 말총이나 사람 머리카락을 밀랍과 섞어 만든 인체(人髢)로 가볍게 문질러 인출한다. 9월 2일부터 11월 12일까지 한국국학진흥원 유교문화박물관과 도산서원에 가면 퇴계 선생의 좌우명을 새긴 목판 인출 체험을 할 수 있다. 목판 인출 체험은 쉬운 듯하나 결과물은 생각과 달랐다. 마치 재생 토너를 넣은 프린터기로 출력한 것처럼 한쪽은 진하게 한쪽은 연하게 인출되었다.


한국국학진흥원 유교문화박물관 목판 인출 체험




도산서원의 도서관, 광명실


서원의 전형적인 배치 형태는 앞쪽에 강학 공간, 뒤쪽에 제향 공간으로 이루어진 전학후묘(前學後墓)를 따른다. 도산서원은 이황이 생전에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며 제자들을 가르쳤던 도산서당 영역과 사후에 제자들이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지은 도산서원 영역으로 나눌 수 있다. 도산서원의 출입문인 진도문(進道門)의 좌우에 광명실(光明室)이 있다.


도산서원 광명실



오늘날의 도서관을 의미하는 광명실은 주희(朱熹)의 「장서각서주자호명(藏書閣書厨字號銘)」의 “만 권의 서적이 나에게 밝은 빛을 비추어준다[萬卷書籍 惠我光明]”라는 구절에서 따온 말이다. 광명실에는 주로 어떤 책을 보관했을까?

지난 번 전장기에 이어 4년 만에 정리한 것이다. 광명실에 소장된 각종 서책 현황의 기록이다. 8월 추향 때 추가로 기록한 서책 목록이다. 새로 편찬한 퇴계 연보 및 일반 문집의 목록을 정리했다. 그리고 1896년에 퇴계 종택에서 화재를 당한 이후 교서·홍패·백패·치제문·교지 등을 광명실로 옮겨와서 보관했다고 기록했다. 1899년에는 활인심방(活人心方)도 찾아내어 보관했다고 기록했다. 그리고 1900년에는 『퇴계서절요(退溪書節要)』도 이곳으로 옮겨와서 보관했다고 기록했다.

고문서 「갑오팔월추향시추록(甲午八月秋享時追錄)」에 대한 해설


위 자료는 광명실에 보관된 서책 현황을 기록한 것이다. 광명실 도서 목록을 살펴보면 지방 관아에서 도서를 간행하여 보낸 것과 도산서원에서 간행한 것과 구입한 것, 역동서원에서 옮겨온 전적들과 퇴계가 소장했던 서적 등이 보관되어 있다. 다시 동광명실에는 나라에서 만들어 임금이 내려주신 반사본(頒賜本)과 이황의 수택본[手澤本, 소장자가 가까이 놓고 자주 이용하여 손때가 묻은 책] 등을, 서광명실에는 이황의 제자와 여러 유학자들의 문집, 근래에 발간된 서적들을 보관했다. 최근에 광명실에 보관된 책들을 한국국학진흥원으로 전부 이관했다.

지금의 도서관은 사서가 장서 관리·감독을 하고 있는데 도산서원에도 이러한 업무를 담당한 사람이 있었을까? 시스템이 잘 갖추어진 지금의 학교 도서관 장서 관리도 쉽지 않다. 조금만 소홀하면 분실·파손된 책이 넘쳐나는데, 도산서원은 어땠을까?

광명실 소장 서책 목록인데, 전체 목록이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다. 퇴계 관련 문헌, 사서삼경 관련 서책, 성리학 저서, 역사서, 중국 역대 시·산문, 일반 문집 등이 차례로 정리되어 있다. 여러 명이 한 조가 되어 점검하고 서압[署押, 문서상에 초서로 성명을 쓰는 기호]했다. 기증 도서 현황도 정리했다.

고문서 「경술사월초육일전장(庚戌四月初傳六日傳掌)」에 대한 해설


1790년(정조 14) 4월 6일에 작성된 이 전장기[傳掌記, 전임자가 후임자에게 사무를 인계하기 위해 관장하던 물품을 기록한 장부]는 여러 명이 광명실의 서적을 점검하고 기증 도서 목록도 작성했음을 잘 보여준다. 도산서원원규의 총칙 ‘광명실개폐규정’에 “광명실은 반드시 삼임[三任, 원장, 별유사, 재유사]이 모두 모였을 때 개폐가 가능하고 한 두 사람으로는 광명실 출입을 할 수 없으며, 불가피한 사정이 있을 때는 원임에게 품의하여 처리토록 한다.”라고 되어 있다. 원칙적으로 도산서원의 서적을 밖으로 가져 나가는 것은 금지되어 있으나, 외부로 가져갈 때는 관리 기록을 남겼다고 하니, 지금 못지않게 철저히 서적 관리를 했음을 알 수 있다.




도산서원 장판각과 병산서원 장판각


지금까지 조선 시대 서적 간행과 서적의 관리에 대해 알아보았다. 서적 간행을 위한 공론을 모아 간역소를 설치하고, 각 지방의 서원과 후학들, 문중에서 문집 발간 비용을 갹출하고 문집에 수록할 글을 모아 정리하고 나면 판각이 이루어진다. 각수의 판각이 끝나면 종이에 인쇄해 서책을 간행하고 정해진 반질기에 따라 유포한다. 배포된 서적을 관리하는 곳이 장서각이라면 서적을 찍어낸 책판을 보관하고 보존하는 곳은 장판각(藏板閣)이다. 장판(藏板)이란 책판(冊板)을 보관한다는 뜻이다.

장판각은 습기로부터 책판을 보호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공기의 통풍이 원활하게 이루어지도록 지었다. 하지만 아무리 공기의 흐름을 잘 이용해 만든 장판각이라 하더라도 오랜 시간이 지나면 먼지가 쌓인다. 목판 표면에 쌓인 먼지는 세균이나 곰팡이 등이 번식하여 목판의 훼손에 영향을 미친다. 종이만 있다면 무진장 찍어낼 수 있는 책판의 보존을 위해 서원은 장판각을 짓고 사가에서는 사찰과 같은 곳에 위탁 보관하기도 했다.

1878년(고종 15) 도산서원을 방문했던 33살의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 1846~1919)은 도산서원의 장판각 앞에서 “번거롭게 쓰지 않아도 하루에 일천 장, 이것이 바로 유가의 무진장이네[不煩揮寫日千張 此是吾家無盡藏].”라고 시를 썼다. 그는 종이와 먹만 준비되면 대량 인출이 가능하고 필요할 때마다 수시 인출도 가능한 반영구적인 책판을 ‘다함이 없는 창고’라는 뜻의 불교 용어 무진장에 비유하여, ‘유가의 무진장’이라고 했다. 소동파가 「적벽부(赤壁賦)」에서 “강 위의 맑은 바람과 산간의 밝은 달은 귀로 들으면 소리가 되고 눈으로 보면 색을 이루어, 가져도 금하는 이가 없고, 써도 다함이 없으니, 이는 조물주가 준 다함없는 창고다.[惟江上之淸風 與山間之明月 耳得之而爲聲 目遇之而成色 取之無禁 用之不竭 是造物者之無盡藏也]”라고 하며, 청풍과 명월을 조물주가 준 무진장이라고 했는데, 장판각에 보관된 책판이야말로 선조가 우리들에게 남긴 무진장인 것이다. 2016년 『퇴계선생문집』의 초간 초쇄본을 찍은 목판이 보물 1894호로 지정된 것은 집단지성에 대한 찬사라 생각한다.


『퇴계선생문집』 책판, 한국국학진흥원 유교문화박물관


도산서원 장판각

『징비록(懲毖錄)』은 무엇인가? 임진왜란이 일어난 뒤의 일을 기록한 글이다. 그중에는 임진왜란이 발생하기 전에 있었던 일도 더러 기록하였으니, 그것은 왜란이 발발한 까닭을 밝히기 위함이다. (중략)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나는 지난 일을 경계하여 앞으로 후환이 생기지 않도록 대비한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내가 『징비록』을 지은 까닭이다.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1542~1607), 『징비록』 서문 중에서



『징비록』과 『징비록 책판』, 한국국학진흥원 유교문화박물관



병산서원(屛山書院)은 류성룡을 배향하기 위해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 1563~1633)를 위시한 제자들과 후손들이 건립한 서원이다. 출입문인 복례문(復禮門)과 만대루(晩對樓)를 지나면 서원 강당인 입교당(立敎堂)이 나온다. 유생들이 강학하던 입교당 뒤쪽 왼편에 장판각(藏板閣)이 있는데, 서원의 중요한 재산인 목판을 화재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다른 건물들과 떨어져 지었다. 국보 제132호로 지정된 『징비록』은 류성룡이 임진왜란의 전말을 기록한 책으로 16권본 목판 240장과 2권본 목판 2장이 현재 한국국학진흥원 장판각에 보관되어 있다.


병산서원 입교당에서 바라본 만대루와 병산

병산서원 장판각

부용대에서 바라본 하회마을




한국국학진흥원 장판각


한국국학진흥원에 입사한 첫날,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한국의 유교책판’이 보관된 장판각 견학을 했다. 세계가 인정한 우리의 책판, 그중에서도 유교책판을 직접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는데, 벅찬 감동에 살짝 코끝이 시큰거리기도 했다. 오랜 세월 동안 서원이나 사찰의 장판각 혹은 문중의 서실과 재실에서 잠자고 있던 책판이 세상에 나오던 날은 아마도 책판 한 장 한 장을 스쳐 간 수많은 사람들이 다시 깨어난 날이 아니었을까?

한국국학진흥원은 ‘한국의 유교책판’으로 선정된 305개 문중과 서원에서 기탁한 64,226장의 책판과 더불어 해마다 목판을 수집·보존하고 있다. 더불어 우리의 목판 인쇄 문화의 의의와 중요성을 알리기 위해 ‘목판아카이브’ 홈페이지(https://mokpan.ugyo.net/index.do)더보기 를 운영하여 목판 한 장 한 장에 대한 서지와 해제, 사진을 제공하고 있다.

목판을 제작하는 것 이상으로 보존하는 것 역시 어려운 일이다. 목판 관람을 위해 사람들이 자주 드나들면 장판각 내부 습도가 올라가 항온항습을 유지하기 어렵고 호흡에 의한 이산화탄소와 먼지가 쌓여 목판 손상의 원인이 되기 때문에 일반인에 대한 장판각 개방은 쉽지 않다. 이러한 아쉬움을 조금이나마 해소하기 위해 한국국학진흥원 유교문화박물관 옆에 세계기록유산 전시체험관을 만들어 모든 사람이 관람할 수 있는 개방형 수장고를 만들었다. 유교책판이 궁금하다면 전시체험관 지상 1층, 현판이 궁금하다면 지상 2층으로 가면 된다.


한국국학진흥원 세계기록유산 전시체험관



지금 우리는 클릭 한 번으로 지식과 정보를 공유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하루에 수 만권의 책이 출판되고 유튜브와 각종 SNS 채널에 수십만 이상의 영상이 업로드된다. 이제 생성형 AI, ChatGpt가 사람을 대신해 소설을 쓰고 논문을 쓴다. 지식의 생성과 소멸 속도가 갈수록 빨라져 따라잡았다고 생각한 순간 새로운 것이 우리 눈앞에 와있다. 나는 이러한 과학 기술 발전의 시작은 책이고 책의 시작은 인쇄술의 발명이라 생각한다. 세계 최고의 목판 인쇄물인 신라의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이 조선의 ‘한국의 유교책판’으로 이어졌다. 아직 다락에서 잠자고 있는 목판이 무진장 이어질 지식의 보물 창고, 한국국학진흥원의 장판각으로 와 묵은 먼지를 털고 사람들을 만났으면 좋겠다.

※ 목판 인출 체험

1. 도산서원 : 2023년 9월 2일(금) ~ 11월 12일(일)
                 매주 토요일과 일요일 11:00 ~ 17:00까지
2. 한국국학진흥원 유교문화박물관 : 박물관 1층, 매주 월요일 휴관.




정      리
이복순 (한국국학진흥원)
자      문
권진호 (한국국학진흥원)
참      고
1. 한국의 편액 (https://pyeonaek.ugyo.net)더보기
2. 스토리테마파크 (https://story.ugyo.net)더보기
3. 옛 일상 속 인간관계, 고문서 (https://doc.ugyo.net)더보기
4. 목판아카이브 (https://mokpan.ugyo.net/index.do)더보기
5. 한국고전번역DB (https://db.itkc.or.kr)더보기
6. 민족문화대백과 (https://encykorea.aks.ac.kr)더보기
7. 정만조 외 6명, 『도산서원과 지식의 탄생』, 글항아리, 2012.
8. 남권희 외 6명, 『목판의 행간에서 조선의 지식문화를 읽다』, 글항아리, 2013.
9. 목판연구소, 『유교책판 나무에 繡를 놓다』, 한국국학진흥원, 2013.
10. 한국국학진흥원 기록유산센터, 『책판의 문화적 잠재력과 영향력』, 서재, 2022.
11. 류성룡 저, 오세진 외 2명 역, 『징비록』, 홍익출판사, 2019.
12. 육수화, 「조선 시대 서적의 보급과 교육기관의 장서관리」, 교육사학연구 제25집 2015.
“왕의 명령으로 영남 문인의 문집을 만들다”

노상추, 노상추일기,
1798-09-06 ~ 1798-10-12

무슨 바람인지 왕이 영남의 뛰어난 석학 중 가장 걸출한 인물의 옛 자취를 보고 싶으니 문적을 거두어 올리라는 명을 내렸다. 전갈을 받은 영남의 네 도호부와, 자신의 선조가 걸출한 석학이라 여기는 뜨르르한 집안들은 바빠졌다. 가장 일처리가 빠른 것은 안동도호부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노상추의 고향인 선산에서도 온갖 문적을 모두 모아서 도성으로 실어 왔다. 각 집에서 짧은 시간 내에 수정한 문서들이었기에 책자 꼴을 채 갖추지도 못했다. 그 허접한 모습에 노상추는 한탄하였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노상추의 집안 문적은 노상추가 몇 년 전 임금의 명에 따라 제출하기 위해 도성에 올려서 이미 수정해 놓았었다. 노상추는 남들이 필사적으로 문적을 교정보는 모습을 강 건너 불구경하듯 보았다. 노상추는 고향에서 올라온 집안 문적을 모두 다시 내려보내고는 이미 수정해 놓은 문적을 합하여 한 권의 책으로 만들었다. 그 책에는 송암공(松菴公)·역정공(櫟亭公)·학관공(鶴關公)·경암공(敬庵公)·죽월공(竹月公)의 문적이 모두 실려 있었다.

노상추는 책을 보기 좋도록 장황하기 위해 반계(泮界)에 있는 이원연(李元延)의 여관으로 들여보냈다. 이원연이 선산의 문적을 수합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노상추의 인척 집안들에서도 각기 자신의 5대조 이상 문적을 긁어모아 수정하고 있었다. 왕이 이미 알려진 명현 외에도 공훈이 있는 큰 인물과 탁월한 행실이 있는 선비도 동시에 조사하여 찾아내도록 했는데, 어쩌면 이번에 자신의 선조가 왕의 눈에 들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니 다들 혈안이 되어 집안 문적을 긁어모아 올 수밖에. 노상추가 보기에 구차한 문적도 많았다. 또 소문을 듣고 올라온 시골 사람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이렇게 모인 영남의 문적은 모두 49권이었다. 이 문적을 모두 수합한 것은 채제공이었다. 채제공이 왕에게 영남 문적을 올리니 왕은 다시 편차를 수정하라고 하교를 내리면서 제목도 함께 내려 주었다. 그 제목은 ‘영남인물고’였다. 전해 듣자니 왕의 하교에 따라 남인 재상들이 모두 군기시에 모여 오류를 바로잡고 글을 다듬어 수정하게 되었다고 한다.

“닭이 울 때까지 베껴쓰고, 추위와 더위에도 베껴쓴다 - 조선 선비들의 독서법”

임재일기, 서찬규,
1845-03-26 ~ 1859-01-01

1845년 3월 26일, 서찬규는 덕우가 선산에 가는 것을 전송하였다. 그가 이번에 가는 것은, 『주자이동조변』 등사하는 일을 마치지 못하였기 때문인데, 장마와 더위를 피하지 않으니 그 정성을 알 만하다. 6월 8일, 덕우가 왔다. 『주자이동조변』을 등사하는 일을 마쳤으니, 그 애쓴 마음을 알 만하다.

1847년 7월 10일, 연일 사보(詞譜)를 베꼈다. 8월 13일, 『장릉지』를 빌려 보았다.

1850년 4월 5일, “사서(四書)는 익숙하게 읽고, 『근사록』은 상세하게 익히지 않았는가? 그러면 모름지기 『격몽요결』을 읽어라. 『근사록』은 곧 송(宋)나라 때 하나의 경전이고, 『격몽요결』은 곧 우리나라의 한 경전이니 배우는 자는 마땅히 먼저 마음을 다해야 한다. 예전에 중봉 조헌 선생이 여행하던 밤에 한 서생을 만나 등불 아래에서 『격몽요결』 한 책을 베꼈는데, 닭이 울고 비로소 다 썼다. 마침내 받아서 힘써 읽으니 모두 수록한 것이 간략한 요점을 친절하게 기록하여 습속이 같게 되고 눈과 귀가 미치게 될 것이다.” 4월 6일, 아침 일찍 선생을 모시고 앉았을 때, 마침 비가 조금 내리고 온화한 바람이 서서히 불어왔다. 선생께서 창문을 열고 무릎을 꿇고 정좌하여 천히 도연명 시의 ‘가량비가 동으로부터 오니 좋은 바람 더불어 함께하네.’ 라는 구절을 읊으시고 말씀하시기를,
“좋은 비가 그때에 맞게 오면 만물이 함께 영화를 누린다. 사물을 관찰하면 생각이 일어나니 사람으로 하여금 정신과 기운을 상쾌하게 한다.”

라고 하셨다. 이날 열락재로 물러나 앉아 『소화외사』(오경원 지음)를 거의 저녁 무렵까지 읽었다.

1851년 5월 14일, 『성학십도』와 『격몽요결』을 등사하는 일을 끝마쳤다.

1852년 2월 19일, 선생을 가서 배알하였다. 근래에 『노주잡지』 한 권을 베꼈다.

1855년 11월 4일, 고조모의 기제사를 지냈다. 처사 한문오씨가 노량진에서 찾아왔고, 박참봉이 『근재 선생집』 16책을 보내왔다. 감사하고 감사하였다. 울산의 고세중이 내방하였다. 12월 5일, 은암에 올라가서 선생의 유고를 등사하고 『중용』을 읽었다.

1857년 3월 16일, 책을 싸서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가신 스승의 유고를 등사하니 20책이 되었다. 4월 26일, 화장사로 가서 빼고 넣는 일을 시작하였다. 이날 밤에 『근사록』을 강론하였다.

4월 27일, 낮에는 유집을 교열하고 밤에는 어려운 경서와 『심경』을 강론하니, 이번 일은 진짜로 우리 생애에 쉽게 가질 수 없는 좋은 순간이었다. 여의정사로 고개를 돌려보니, 또한 옛날 생각이 많이 났다.

1858년 8월 11일, 안영집(자는 선응)·이군·조성권·김옥중의 편지에 답장을 보냈다. 청송의 족친 어른 원모씨의 편지를 받았는데, 겸해서 『매야집(邁埜集)』을 부쳐왔다. 12월 18일, 배로 백마강을 건너고 규암에서 아침을 먹었다. 논치를 지나 30리를 가서 홍산(지금의 부여읍)에 당도하여 점심을 먹었다. 20여 리를 가서 어두울 무렵 삼계에 당도하여 숙재 조공을 배알하니, 매우 기뻐하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진정으로 아껴주시는 마음에 감격하였다. 이어 가지고 간 『사익전(明史翼箋)』 6책을 올렸다. 이는 일찍이 베껴서 보내달라던 부탁이 있었다.

1859년 1월 1일, 객지에서 해가 바뀌니 어머님을 떠나 있는 마음이 더욱 말로 하기 어렵다. 오후에 노호를 출발하였다. 광주의 박이휴(자는 양보)가 그 방선조의 문집인 『사암집(思菴集)』 한 질을 주었다.

“필사를 전문적으로 해 주는
‘쾌가’의 등장”


18세기가 되면 조선에서도 전문적으로 책의 유통을 담당하는 부류가 성행하였다. 서적을 들고 다니며 판매하는 책쾌(冊儈, 혹은 서쾌書儈), 상설 점포를 차려놓고 책을 판매하는 쾌가(儈家), 그리고 책을 빌려주는 세책가(貰冊家)가 그것이다. 세책은 쾌가에서도 이루어졌다. 책은 목판과 금속활자로 인쇄되어 만들어지기도 했지만, 필사 역시 책을 만드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쾌가에서는 책의 판매와 대여 뿐 아니라 필사도 담당하였다. 수천 종의 책을 깨끗이 베껴 쓰고, 이것을 빌려주었던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서적의 유통경로와 시장의 동향에 밝아야 했기 때문에 일종의 유통 및 판매 기획자인 MD와도 같은 역량이 쾌가에게 필요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출판허가가 나지 않아 애태우다”

미상, 소눌집간소일록
(小訥集刊所日錄),
1933-03-19 ~ 1933-04-29

1933년 3월 19일, 소눌(小訥) 노상직(盧相稷, 1855~1931)의 문집을 판각하기 위해 공론을 모으고, 각수를 선발하는 등 준비를 다 하고 있으나, 경성(京城)에서 『소눌선생문집』의 판각에 대한 허가가 내려오지 않아 판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계속 허가를 기다렸으나 소식이 없자 3월 23일, 3월 27일에 경성에 거주하는 박순병(朴淳炳), 박순기(朴淳紀) 등에게 편지를 보내 알아보도록 하였고, 허가가 내려왔는지를 알아보기 위하여 해당 주재소(駐在所)로 사람을 보내 계속 알아보고 있었다.

계속 허가가 나오지 않자 4월 17일에는 경성에 전보를 쳐서 허가 여부를 알아보았으나 답이 없어 초조하고 답답한 심정을 토로하고 있다.

4월 21일, 이처럼 문집을 간행하기 위해 일본 총독부의 허가를 얻어야 일을 시작할 수 있지만, 이미 불러 모은 각수들을 놀릴 수 없어서 이미 출판 허가를 받은 『성리절요(性理節要)』를 우선 판각을 시작하였으나, 정작 『소눌선생문집』의 판각 허가를 얻지 못하여 노심초사하는 모습이 일기에 보인다. 주재소에서는 허가 없이 판각을 하는지 살피고 있는 도중에(4월 8일), 판각 허가가 아직도 나지 않았다는 박순병의 편지가 도착하였다.

4월 24일, 경성의 박순병에게 전보가 도착하였는데, 마침내 기다리던 문집 판각 허가가 났다는 전보였다. 다음 날 개를 잡고 술을 사와서 각수들에게 대접하였다. 4월 29일에는 판각의 허가가 났다는 일을 주재소에 알리면서 본격적이 판각이 시작되었다.

“승려가 책을 팔러 다니다”

금난수, 성재일기,
1578-02-03 ~ 1578-02-12

금난수의 큰아들 금경과 셋째 아들 금개는 도산서원에 들어가 공부를 하고 있었다. 아들들도 집에 없고, 눈이 많이 와서 누구를 만나러 갈 수도 없고, 어딘가 유람을 가기에도 어려운 무료한 나날이었다. 그러던 중, 반 자(약 15cm)가 넘게 쌓인 눈을 뚫고 누군가가 금난수의 집 대문을 두드렸다. 많은 짐을 지고 온 승려였다. 그의 머리와 어깨에서 눈이 후두둑 떨어졌다.

승려는 금난수의 눈앞에 자신이 지고 온 책을 늘어놓았다. 도산서원에서 오는 길인데, 금난수의 큰아들인 금경이 말하길 아버지가 분명 책을 지고 가면 좋아하실 테니 아버지가 원하는 책이 있으면 팔아드리라고 했다는 것이었다. 무료한 아버지의 마음을 아들이 읽어 주어 금난수는 흐뭇한 마음에 승려가 지고 온 책들을 기분 좋게 뒤적거렸다. 금난수가 읽을 만한 책은 눈에 띄지 않았으나, 막내인 금각에게 읽힐 만한 책은 있었다. 금난수는 『당음(唐音)』 9책을 구매하기로 하였다. 『당음』은 서당에서 주로 사용하던 한시 교재인데, 당시가 시기별로 구분되어 있고 중국어의 4성이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알 수 있어 유용하였다. 노래하듯 당시를 읽을 귀여운 아들 생각에 금난수는 승려에게 지불한 책값이 전혀 아깝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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