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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대교린, 조선이 선택한 외교 공식

‘사대교린’, 조선 외교정책의 시작


조선의 외교 전략을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말이 ‘사대교린(事大交隣)’이다. ‘사대’는 큰 나라를 섬긴다는 뜻이고, ‘교린’은 이웃 나라와 교류한다는 의미인데, 이 두 단어는 단순한 수직·수평 관계를 넘어 조선 외교의 이중 전략을 상징한다.

사대교린은 『맹자』의 ‘어진 자만이 큰 나라로서 작은 나라를 섬겨낼 수 있고, 지혜로운 자만이 작은 나라로서 큰 나라를 섬겨낼 수 있다.’라는 구절에서 유래하였다. 조선은 건국 후 이를 바탕으로 외교의 기준을 세웠다. 중국과 같은 압도적인 강국에는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기는 사대의 태도를, 일본·여진과 같은 주변국에는 대등한 이웃 간의 교류를 원칙으로 하는 교린의 태도를 보였던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건, 조선이 명에게 맹목적으로 고개를 숙이거나 주변국에게 완벽히 동등한 예를 보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조선의 외교 전략 속에는 실리를 챙기면서도 자주성을 지키고, 한편 은혜를 베풀면서도 우월성을 내보이려는 정치적 계산이 내포되어 있었다.





명나라와의 외교, 국제질서의 보편성을 수용하다



〈《혼일강리역대국지도》〉 (출처: 규장각한국학연구원)


15세기 동아시아는 근대적인 주권국가 개념이 없던 시기로, 중국을 중심으로 한 책봉체제가 국제질서를 규정하고 있었다. 명나라는 조공제도를 통해 외교를 통제하며 동아시아 질서를 강화했고, 이에 참여하지 않는 국가는 경제적 이익이나 문화적 혜택, 심지어 안보 보장에서도 배제되는 현실에 직면했다.

조선에게 명은 정치·군사·경제적으로 가장 중요한 존재였을 뿐 아니라, 유교의 종주국이자 선진 문물의 중심지로 인식되었기에 조선은 별다른 저항 없이 이 질서를 수용하였다. 명나라가 재편한 국제질서를 인정한 조선에서는 일상적인 국가 의례부터 국왕과 관원의 복식까지 명나라에서 제정한 여러 제도를 수용하였다. 그리고 이를 조선의 상황에 맞도록 변형·적용하였는데, 사실상 이를 통해 건국 초기의 제도적 기반은 중국의 전례를 참고하며 손쉽게 마련되었다.

조선의 입장에서 명나라와의 관계 형성은 당시 국제질서의 보편성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방식이기도 하였다. 현재의 우리에게 미국 중심적인 글로벌 스탠더드가 있는 것처럼 말이다. 조선에게도 사대란 그런 것이었다. 선위(禪位) 사실을 명에 미리 알리지 않은 것에 대한 아래 태종(太宗, 1367~1422) 태도는 조선에서 인식한 ‘사대’의 의미를 잘 보여준다.

“우리나라는 중국 영토 안에 있는 나라[海內之國]가 아니니, 예로부터 반드시 아뢴 연후에 전위(傳位)하지는 아니하였다. 비록 이미 승습(承襲)하였더라도 황제가 반드시 노하지는 않을 것이다.”

-『세종실록』 권1, 세종 즉위년 8월 14일 신묘-





일본과의 외교, 교린으로 포장된 기미(羈縻)



조선의 사대외교를 펼치는 유일한 대상이 중국이었다고 한다면, 교린외교의 대상으로는 일본·유구·여진 등이 있었다. 교린의 외교의례적 개념은 ‘적국항례(敵國抗禮)’로서, 서로 필적할 만한 나라가 대등한 자격으로 교류한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동국삼강행실도』 속 왜구의 모습〉 (출처: 규장각한국학연구원)


하지만 조선은 일본과 완전히 대등한 외교관계를 유지했다고 보기 어렵다. 이는 일본이 중앙집권이 미약해 지방 호족을 통제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막부를 대신하여 조선과의 외교권을 호족인 대마도주에게 일임하였기 때문이다. 이들은 조선과의 교역에 경제적으로 의존하였고, 조선은 왜구(倭寇)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일본[대마도]을 문명에서 뒤떨어진 야만으로 인식하였다.

이에 조선은 중국이 주변 이민족을 다뤘던 것처럼 일본을 기미(羈縻)의 대상으로 보았다. ‘기미’란 말의 굴레와 소의 고삐를 의미한다. 관계의 끈을 팽팽하게 잡고 놓지 않음으로써 견제하면서도 단절하지 않고 영향력을 행사하는 방식의 외교관계를 말한다. 특히 세종 원년(1419) 대마도정벌 이후 조선은 대명관계에서 체득한 황제의 외교질서를 대마도를 향해 시도하며 양자 사이의 위계질서를 분명히 하였다.





여진과의 외교, 회유에서 통제 그리고 정벌까지



여진족은 일본보다도 더 다루기 어려운 대상이었다. 중앙집권 국가가 아니었기 때문에, 조선은 여진 각 부족장과 개별적으로 교섭해야 했고, 이들은 때로는 조공을 바치며 조현(朝見)을 청했다가 기근이나 내부 갈등 시에는 조선을 침입해 약탈하기도 하였다.


〈조선 태조 어진〉 (출처: 경기전 어진박물관)


조선 건국 초기에는 여진을 향해 회유 정책을 시도하였다. 곡물이나 물자를 보내며 교류를 유도했고, 이를 통해 조선 국경의 안정을 꾀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의(仁義)가 부족하여 금방 승냥이의 마음을 품는’ 여진에 대해 조선은 몇 차례의 정벌도 마다하지 않았다. 세종대에는 북방 변경을 방어하고 6진을 개척하며 여진을 압박했고, 군사력과 외교력을 동시에 사용하는 방식으로 통제를 강화해 갔다.

조선의 외교정책은 언제나 주체적이었다. 명과의 사대외교는 당시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보편성을 자발적·능동적으로 수용하는 과정이었고, 일본과 여진을 포함한 교린외교는 조선이 스스로를 또 다른 국제질서의 중심으로 자리매김하며 상대를 통제의 대상으로 삼은 행위였다. 사대는 질서에의 참여였고, 교린은 질서의 재편이었다.




집필자 소개

윤승희
윤승희
숙명여자대학교에서 조선전기 한·중관계사 전공으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동국대학교 문화학술원 HK연구교수로 재직 중이다. 대표 저서 및 논문으로는 「조선 초 迎勅儀禮의 성립과정과 그 특징」, 「조선 건국 초 왕자의 명 사행과 그 배경」, 「15세기 대마도 물품 수여에 담긴 조선의 의도」 등이 있다. 조선시대 외교 활동의 제도적·예제적 측면을 통해 조선이 꿈꿨던 국제질서의 모습을 밝혀보고자 공부하고 있다.
“오랑캐가 압록강을 넘어왔다는 소식을 듣다”

김령, 계암일록, 1627년 1월 20일

1627년 1월 20일, 김령은 조카 김광적에게 새로운 소식을 들었다. 김광적이 아버지인 김호의 묘를 옮기는 일 대문에 안동 관아에서 감사와 만나고 온 길이었다. 감사가 산송 문제로 당사자들에게 사실을 확인하고 있는데, 갑자기 선전관이 말을 달려 관아에 당도하였다. 그리고 말하기를 ‘서북쪽 오랑캐 수만 명이 의주를 포위하고 또 선천에 들어왔으니, 감사는 군마를 불러 모으고, 호패어사 또한 머물지 말고 급히 서울로 돌아오라는 명령이다’ 라고 하였단다. 정말로 놀라운 일이었다.

그 뒤 자세한 내막을 들으니 오랑캐가 이달 13일에 압록강을 건너 의주를 포위하였는데, 의주성은 매우 공고하여 방어할 준비가 다 되었으나 안에서 내통하여 문이 열렸다고 한다. 그리하여 의주부윤 이완은 스스로 불에 타 죽고, 의주 판관 최몽량은 피살되었으며, 한명련의 아들 한윤 및 박난영 같은 이들은 모두 돌아왔다고 한다. 우리나라 장수와 군사들 중 저들에게 투항한 자들도 많이 왔는데, 그 가운데 강홍립도 있었다고 한다. 적의 군사들이 무인지경으로 우리나라를 침입하고, 또 안주를 함락시켰으며, 여섯 가지 항목을 들어 조선에게 죄를 물었다고 한다. 그리고 오랑캐들 스스로 대금이라 칭하고 황제를 자처하였다고 한다.

임진년 왜구들이 조선 산하를 한바탕 피로 물들인 것이 30년도 되지 않았는데, 다시금 이런 병란을 겪게 되다니... 김령은 이러한 전란을 초래한 조정의 무능력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명과 여진의 대립, 변화하는 국제 정세와 간신들 탓에 어지러운 조선”

김령, 계암일록, 1618년 8월 1일

1618년 8월 1일, 도성이 술렁거렸다. 모두 큰 난리가 일어날 것이라고 하며 백성들이 다 도망쳐 나가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사대부의 집들도 줄을 이어 성을 빠져 나오니 성은 이미 비어 어찌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누르하치가 명나라와 대치하고 있어서 조선에는 금방 닥칠 급한 일이 없을 텐데도, 백성들의 불안한 마음은 달랠 도리가 없었다.

성 안은 모두 비었고 교외 강가는 사람들로 가득 차 분잡한데, 재물로 부녀를 바치거나 혹 절취당하기도 했다고 한다. 임금 또한 행행(行幸)을 8월 13일에 나가려다가 아직 못나갔는데 27일에 나갈 것이라고 모두들 말하였다. 이 소문의 근원은 대체 어디란 말인가. 상황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권세를 가진 간신들이 나라를 그르친 죄를 이루 다 벌할 수가 없다.

“위아래를 가리지 않는 전란중의 굶주림”

금난수, 성재일기, 1593년 3월 2일

임진왜란이 일어난 후, 전 국토는 황폐화되고 농민들은 전란의 화를 피하기 위해 이리저리 도망 다녀야 했다. 그 덕분에 농토는 모두 버려져 농작물이 자라지 못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다음 해인 1593년 봄, 춘궁기가 되자 굶는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보리를 심으려 해도 남자들은 왜적을 막기 위한 군대에 차출되어 나아가고, 향촌에 남은 것은 지난 전염병 유행에서 근근이 살아남은 노인과 아이들, 그리고 여성들뿐이었다. 금난수의 집은 그나마 조금 사정이 나았다. 비록 향병으로 나아간 사람들을 위해 군량미를 대느라 전처럼 풍족하지는 못하였지만 적어도 굶지는 않을 정도였다.

이런 금난수의 집 대문을 두드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개령(開寧, 현 경북 김천)에서부터 온 김익휘(金益輝)는 염치불구하고 그의 어버이를 위해 양식을 나누어 달라 청하였다. 자기 한 몸을 위해서가 아니라 연로한 어버이를 위해서라는 말에 금난수는 빠듯한 살림을 나누어 주었다. 어찌 이런 전란 중에 홀로 배불리 먹을 수 있었겠는가. 하지만 여름이 되어도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춘궁기에 종자까지 모두 먹어버린 사람들은 농사를 지을 수 없었고, 자연히 수확할 것 자체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그나마 형편이 나은 사람들의 곡식을 훔치는 좀도둑도 발생하여 문제가 되었다.

결국 8월 3일에는 관아의 창고를 열어 진휼미(賑恤米)를 분배하였다. 관아의 곡식은 곧 나라의 재산이었기 때문에 이에 대해 보고서를 작성해 순찰사에게 올려야 했다. 구휼을 하기는 했으나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일 뿐이었다. 농민들을 정착시켜 농사를 짓게 한다고 해도 당장의 양식을 구하기란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었다.

결국 한 해 동안 충분한 양식을 재배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다음 해인 1594년 봄에는 사족들도 굶기 시작하였다. 금난수의 처남 조목은 자신의 서자 조수붕을 보내와 자신의 궁색함을 구휼해 달라고 청하였다. 처남의 성격을 생각해 보았을 때 체면을 고려하여 한참 동안 굶으며 참다가 가솔들을 위하여 겨우 청한 것일 터였다. 금난수는 그를 딱하게 여기며 곡식을 보내 주었다.

“귀국길에 오르자마자 굶주린 백성들을 보다”

이기헌, 연행일기계본, 1802년 2월 8일 ~

1802년 2월 8일, 이기헌(李基憲)은 고국으로 돌아가기 위한 여정에 있었다. 동지사로 청나라에 들어와 주어진 임무를 마치고 그리운 고국을 향해 가던 길이었다. 이틀간 길을 따라오니 반산이란 곳을 지나게 되었는데, 이곳은 바로 청나라의 중흥을 이근 강희제와 건륭제 두 황제의 능이 있는 곳이었다. 멀리 푸른 소나무 사이로 궁전같은 건물이 비쳤는데 바로 청나라의 별궁(別宮)이었다.

저녁 무렵에 계주란 곳에 이르러 유숙하였다. 이 고장은 중국 역사의 곳곳에 자취를 남기고 있는 유명한 고을이었다. 진나라와 한나라 시대는 어양군에 속했고, 위나라와 진나라 시대는 유주에 속하였다. 당나라 천보 연간에 다시 명칭을 어양군으로 고쳤다. 금나라 때는 이곳을 중도(中都)로 삼아 매우 번성했던 곳이었다. 한나라 광무제 때 반란을 일으킨 팽총도 이곳을 근거로 했고, 당나라 현종 때 반란을 일으킨 안녹산과 사사명도 이곳을 근거로 난을 일으켰다. 이곳 여양의 돌기병은 매우 용맹하여 천하무적으로 소문난 병사들이었다.

계주 성 북쪽에는 전설 속의 통치자인 황제(黃帝)가 광성자란 사람에게 도를 물어본 곳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이 계주성을 들어올 때 성 밖에는 굶주린 백성들이 들판에 가득하였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 그릇을 들고 나와 있었다. 그곳 사람 이야기가 매일 500~600명에게 식량을 나누어주는데, 그 양이 매우 많다고 하였다. 청나라 수도와 이틀거리이고, 한때 천하의 중심이기도 하였으며, 숱한 영웅호걸들이 낳다가 사라진 땅이건만 정작 배고픈 백성들을 구원해 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과거의 찬란한 영광이 저 백성들에게 무슨 소용이겠는가. 이런 생각이 미치자 이기헌은 씁쓸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통신사 부사 임수간의 배포”

조선통신사병풍(강호성내응접도)
(출처: 부산광역시립박물관)
엄경수, 부재일기, 1712년 3월 1일

1712년 3월 1일. 작년 일본으로 떠났던 통신사 일행이 돌아왔다. 그런데 조선과 일본 사이에 피휘와 관련된 시비가 발생했고, 사신단은 그 일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했다는 것으로 귀국과 함께 조사를 받게 되었다.

그럼에도 통신사의 부사였던 임수간은 상당한 기개를 보여주었다. 정사가 탄 배는 무사히 일본에 도착하였으나, 부사가 탄 배는 떠날 때 바다 한가운데에서 배가 부서져 거의 뒤집힐 뻔하여 일본 사람들이 급히 작은 배를 불러 부사에게 옮겨 타게 하였는데, 이때 부사 임수간이 “내가 한 번 동요하면 배에 탄 수백 명 모두는 살 수가 없다.”라고 말하며 완강히 거부하였다고 한다. 그리고는 굳게 앉아 지휘하였는데, 겨우 배가 전복되지 않고 부산으로 돌아와 수리할 수 있었다고 한다.

부사의 고생은 일본에서 돌아올 때도 계속되었는데, 바다 한가운데서 비바람을 만났다고 한다. 깜깜하고 어두운 시간에 절영도에 급히 정박하려는데 날씨가 너무 어두워 도저히 정박할 곳을 찾지 못하였다고 한다. 배가 부서지려 하자 급히 사람을 시켜 물의 깊이를 살피게 하니 아주 얕았다고 한다. 등이 잠길 정도의 깊이임을 확인하고 일행을 모두 내리게 하였는데, 깜깜한데다 비가 강하게 쏟아부어 어디로 향할지 모르다가 겨우 길을 찾아 언덕에 오르고, 그길로 수십 리를 걸어서 비로소 인가를 찾아 폭풍을 피할 수 있었다고 한다.

날이 밝아서 살펴보니 겨우 몇 리 길을 한참 돌아온 것이었고, 배에 있던 물건은 모두 쓸려가 남은 것이 없었다. 그래도 절체절명의 순간 부사의 용기와 침착한 지휘로 사람은 한 명도 다치지 않았으니, 부사의 배포와 냉철함은 참으로 감탄할 만한 일이었다.

“서울 사람이 전한 전란 소식에 비통함에 빠지다”

오희문, 쇄미록, 1597년 8월 23일

1597년 8월 23일, 요사이 다시금 전란의 소식이 들려와 오희문은 종일 마음이 어수선 하였다. 얼마전 들으니 내 건너 안협 고을에 서울 사람이 와서 살고 있다 하여, 민시중, 김언실 등을 시켜 만나보고 적의 소식을 들어오게 하였다. 오늘 민시중과 김언실이 찾아와 서울 사람에게 들은 이야기를 전해 주었다. 이야기를 듣자니, 적은 이미 남원성을 함락시켰고, 중전은 장차 관서땅으로 피난을 간다고 한다. 비록 서울 사람에게 들은 이야기이지만 사실인지 여부는 확실하지 않았다.

만일 사실이라면, 이제 날씨가 점차 추워지고 있는데, 늙은 노모와 병든 아내를 데리고 깊은 산골짜기로 피난을 해야 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집안 식구들은 모두 옷도 변변치 않은데 반드시 추위와 굶주림에 고생할 것이 뻔하였다. 이런 생각이 미치니 오희문은 죽을 때까지 편안한 날이 없겠구나 싶어 하늘이 원망스러워졌다.

6년 동안의 전쟁에 백성들이 모두 파리해졌는데도 하늘이 화를 뉘우칠 줄 모르고 흉한 전란을 다시 만들어 호남과 호서의 백성들이 장차 도탄 속으로 들어가게 생겼으니, 참으로 탄식스러운 일이었다. 하늘은 어질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백성을 어루만지는 법이거늘, 어찌 조선의 백만 백성으로 하여금 모두 불타는 곳으로 몰아넣고 하나도 남기지 않으려 한단 말인가! 정녕 믿기 어려운 것이 하늘이 아니던가! 탄식한들 무엇 하겠는가!

“병자호란을 겪은 거지 이야기”

엄경수, 부재일기, 1714년 9월 1일

1714년 9월 1일. 오늘 엄경수의 집 앞에 헤진 갓을 쓰고 누더기를 걸친 사람이 지팡이를 짚고 문에서 구걸하였다. 몸은 구부정했고 목소리는 힘이 없었다. 안으로 들여 밥을 주며 살펴보니 일개 노인네였다. 밥과 함께 한기를 물리치도록 술도 조금 따라 주었다.

나이를 물어보니 “병자년 호란 때 강화도에서 포로가 되었다가 벗어났는데, 그때가 아홉 살이었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엄경수가 손으로 헤아려 보니 올해 여든일곱이었다. 말로만 듣던 호란을 직접 겪었다고 하니 궁금증이 일었다. 그리하여 그가 겪은 호란 이야기를 청해 들었다.

“성이 함락되고 우리 가족들은 갈대숲 속으로 달아나 사람마다 각각 한 곳을 찾아 숨도록 하여 집안 식구들이 온전하였지만 나만 포로가 되었습니다. 머물러 있을 때는 늘 군진에 구속되어 있었고, 행군할 때는 말을 타고 달렸는데, 어리고 약하여 안정에 붙어 있지를 못하고 곧잘 떨어지곤 하였습니다. 그렇게 오래 지내다 보니 싫어하여 오랑캐에게 다시 버려져 다행히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는 활쏘기에도 재주가 있어 효종 때 내금위에서 군졸을 하였고, 천인은 아니었으나 어떠한 일에 연좌되어 자리를 잃었다고 한다. 아내가 있었는데 20년 전에 죽고 흉년에 땅마저 팔게 되었으며 이후 걸식을 하며 목숨을 이어오고 있다고 한다. 다만 과거 군졸 생활 때 같이 생활하던 자의 손자가 옛일을 기억하고는 그에게 자주 음식과 잠자리를 내어주고 있다고 한다.

엄경수는 아직 병자호란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을 만나본 것도 신기하였지만, 한 사람의 인생역정이 너무나도 기구하여 그의 이야기에 한참 빠져들었다. 그리고 조부의 친구를 잊지 않고 돌보고 있는 사람 역시 참으로 어질다고 할 만하지 않은가? 엄경수는 이 이야기를 듣고 생각에 잠겼다가, 이를 이야기 형식으로 일기에 적어두곤 거기에 ‘거지전’이란 이름을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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