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씨전》을 처음 읽은 건 아마도 고등학생 때 수능 공부를 하면서였을 것이다. 부끄럽지만 사실 그때는 이 이야기가 쓰인 배경에 관해서 공부하기보다는 수능 대비 객관식 문제를 맞히기 위해 ‘작자 미상’, ‘조선시대 소설’, ‘여성 서사’, ‘한글 소설’, ‘전지적 작가 시점’과도 같은 키워드를 외우기에 급급했던 것 같다. 그렇게 수능과 함께 내 기억 속에서 사라진 ‘박씨전’을 다시 만난 건 대학로의 한 카페였다.
〈규장각 소장 《박씨전》〉 (출처: 규장각한국학연구원)
《박씨전》을 모티브로 한 뮤지컬을 만들고 싶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땐 속으로 ‘100분짜리 뮤지컬로 만들기엔 이야기도 짧고, 마지막엔 너무 판타지스러워서 유치하지 않을까?’란 걱정이 있었다. 하지만 ‘박씨전 스토리 자체에 집중하기보단 박씨전이 쓰인 배경에 대해 집중하면 어떨까?’란 생각이 들었고, 그날부터 병자호란 이후 조선시대 여성들의 삶에 대해서 자료조사를 시작했다.
그동안 병자호란 때 많은 여인이 청에 끌려갔다는 사실만 알고 있었는데 그들이 조선에 돌아온 이후에 받았던 처참한 대우에 관해선 잘 알지 못했다. 돌아온 여인들에게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사죄하기는커녕 오랑캐에게 정절을 잃었다며 이혼을 요구하고, 자결을 강요했다는 사실을 알고서는 눈물이 났고 분해서 잠이 오지 않았다.
그 당시 바다에 몸을 던진 여인들의 머릿수건이, 마치 연못에 떠 있는 낙엽이 바람을 따라 떠다니는 것처럼 많았다는 기록을 읽었다. 눈을 감고 상상했다. 깊고 어두운 밤, 바람이 부는 절벽 위에서 눈물을 흘리는 여인들을.
청에서 참담한 일을 겪고도 죽지 않았던 건 고향에 있는 사랑하는 사람들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들에게 돌아갈 날만 기다리며 버티고 또 버텨 고향에 돌아왔건만 ‘환향녀’라고 손가락질당하고, 죽음을 강요당했을 때의 그 마음을 어찌 헤아릴 수 있을까. 자신이 갈 곳은 오직 바다뿐이라고 생각하며 그 차디찬 바닷물에 몸을 던졌을 수많은 여인을 생각하니 마음이 묵직하게 아파졌다. 그러고 나니 유치하다고 생각했던 《박씨전》의 마지막 판타지 장면이 왜 쓰였는지 한 번에 이해가 갔다. 무능력한 사대부들을 비판하고, 오랑캐라고 업신여기던 그들에게 당한 치욕을 글 속에서나마 통쾌하게 갚아주고 싶었을 것이다. 아마 내가 《박씨전》의 작가라도 그리 썼을 테니까. 그 마음이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나에게도 생생히 전해지자 어떻게 대본을 써야 할지 감이 잡히기 시작했다.
〈뮤지컬 《여기, 피화당》의 포스터〉 (출처: ㈜홍컴퍼니)
그렇게 뮤지컬 《여기, 피화당》을 쓰게 되었다. 《박씨전》을 쓴 ‘작자 미상’의 작가가 청에서 돌아온 여인들이었을 거란 상상을 시작으로 오랑캐에게 정절을 잃었다 하여 이혼을 당한 ‘가은비’, 가은비의 몸종 ‘계화’, 그리고 자결을 거부한 자신을 죽이려는 시댁을 피해 도망 다니는 ‘매화’가 탄생했다. 이 여인들은 ‘피화당’이라고 이름 지은 동굴 속에서 살아가며 사랑 소설을 써서 저잣거리에 내다 팔면서 생계를 겨우겨우 꾸려 나간다. 그런 그녀들에게 최명길의 양아들 최후량과 그의 노비 황 강아지가 찾아온다.
〈뮤지컬 《여기, 피화당》의 한 장면〉 (출처: ㈜홍컴퍼니)
뮤지컬 여기, 피화당 '나 같은 사람이 쓴 이야기도'
(출처: YouTube 바데라이트)
후량은 전쟁을 멈추기 위해 항복문서를 써서 비난받는 자신의 아버지를 위해 가은비에게 백성보다 대의를 중요시한 사대부를 비웃는 소설을 써달라 요청한다. 가은비는 글을 씀으로써 혹여라도 자신들의 정체가 드러나 위험해질까 두려워하지만 동시에 ‘자신과 같은 처지의 여인들을 글로써 위로해 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작은 소망으로 ‘박씨전’을 집필하기로 마음먹는다. 이때 가은비가 부르는 넘버(뮤지컬 안에서 배우가 부르는 노래)가 ‘나 같은 사람이 쓴 이야기도’이다.
(가은비)
하지만 나
우리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
하지만 나
우리의 목소리를 들려주고 싶어
너무 아파서 피하고 싶고
기억을 지우고 싶지만
나 같은 사람이 쓴 이야기도
세상에 남겨질 수 있다면
나 같은 사람이 쓴 이야기도
누군가에게 위로가 될 수 있다면
그럴 수 있다면
뮤지컬 《여기, 피화당》에는 총 세 번의 극중극이 나온다. ‘박씨전’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을 가은비, 매화, 계화, 후량, 강아지가 맡아서 맛깔나게 연기를 하는데, 두 번째 극중극이 끝나고 피화당 여인들은 또다시 습격을 받게 된다.
〈뮤지컬 《여기, 피화당》의 한 장면〉 (출처: ㈜홍컴퍼니)
새로운 동굴로 거처를 옮겨야만 하는 가은비, 매화, 계화는 가는 길에 홍제원을 지나간다. 오랑캐에게 정절을 잃은 며느리가 어찌 조상의 제사를 지내냐며 이혼을 요구하는 사대부의 상소가 빗발치자, 임금은 홍제원 냇물에 몸을 씻으면 정절을 회복시켜 준다고 약조한다. 그래서 많은 여인들이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홍제원 냇물에 몸을 씻었지만, 사대부 가문에서는 여인들을 받아주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화는 청에서 생긴 손등의 상처를 계속 홍제원 냇물에 강박적으로 씻는다. 마치 이 상처가 사라지면 자신과 가은비에게 일어났던 끔찍한 일들이 다 사라지기라도 할 것처럼. 하지만 이제 계화도 안다. 아무리 몸을 씻어도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이때 세 명이 함께 부른 넘버가 ‘홍제원 냇물에 몸을 씻고 씻고 또 씻어도’이다.
(매화, 계화, 가은비)
환향녀
그토록 그리던 고향으로 돌아온 여인들을 뜻하던 말이
이젠 욕이 되어 남겨지네
어두운 밤, 차가운 바다에 몸을 던져
죽어야만 끝이 날까
나라가 지키지 못한 여인들을
다시 한번 버린 조선
홍제원 냇물에 몸을 씻고 씻고 또 씻어도
바뀌는 건 없어
새로운 동굴로 후량과 강아지가 찾아온다. 후량은 안전한 곳을 마련했으니 같이 떠나자고 하지만 가은비는 조선 땅 그 어디에도 자신들에게 안전한 곳은 없다고 말하며 거절한다. 후량은 쓰다가 멈춰진 ‘박씨전’이 쓰인 종이를 두고 가지만 가은비는 글로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자신이 어리석었다며 더 이상 글을 쓰지 않겠다고 한다. 그런 가은비를 보며 계화와 매화가 가은비 대신 붓을 집는다. 이야기 속에서만큼은 자신들이 강하고 도망 다니질 않길 바라는 마음으로 멈춰진 ‘박씨전’을 이어 나간다. 그 마음이 가은비에게도 전해져 가은비도 붓을 들고, 그렇게 세 사람은 함께 박씨전을 써 내려가며 가장 판타지답고 통쾌한 마지막 극중극이 펼쳐진다.
〈뮤지컬 《여기, 피화당》의 한 장면〉 (출처: ㈜홍컴퍼니)
용울대가 피화당에 있는 여인들을 겁탈하려고 들어가자, 피화당의 사면이 칼날 같은 바위로 변해 하늘 높이 치솟고, 계화가 칼을 들어 용울대의 머리를 친다. 아우의 소식을 들은 용골대가 분을 이기지 못하고 피화당에 불을 지르자, 초당을 둘러싸고 있던 수목들이 징과 북을 치며 함성을 지르고 천지가 진동해 장졸들이 정신을 차리지 못해 서로 밟혀 죽는다. 수만 명의 군사들이 여인들에게 활을 쏘지만, 그 누구도 맞히지 못하고, 이를 보던 박 씨가 자신은 여기 앉아서도 만 리 밖을 볼 수 있으니 잘못한다면 모두를 함몰하겠노라고 외친다.
이 장면을 대본으로 쓸 때는 어딘가 꽉 막혀 있던 속이 풀리는 시원한 느낌이었는데, 연습실에서 배우들이 음악과 함께 이 장면을 연기하는 걸 보는데 눈물이 났다. 찢어지고 해진 옷을 입고 당당하게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는 그녀들이 너무 기특하고 또 가련해서 눈물이 계속 흘렀다. ‘박씨전’을 다 쓰고 계화가 “마지막에 말도 안 되는 일들이 많이 벌어져서 이 글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겠어요.”라고 말하자 매화가 “시간이 흘러 언젠가 우리를 이해해 주겠지. 이렇게 말도 안 되는 힘이 없었다면 지금을 살아낼 수 없었던 우리를.”이라고 대답한다.
가은비는 후량에게 완성된 ‘박씨전’을 건네며 책으로 내달라고 하고, 후량은 꼭 가은비의 이름을 세상에 알리겠다고 하지만 가은비는 자신들이 썼다는 걸 알면 아무도 읽지 않을 테니 부디 작자미상으로 남겨달라고 부탁하며 ‘아무도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다 해도’라는 넘버를 부른다.
(가은비)
아무도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다 해도 괜찮아
이야기 속에 담긴 우리의 마음이
누군가에게 닿을 수만 있다면
아무도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다 해도 괜찮아
시간을 건너 어느 미래에서도
우리 목소릴 들을 수만 있다면
〈뮤지컬 《여기, 피화당》의 한 장면〉 (출처: ㈜홍컴퍼니)
뮤지컬 여기, 피화당 '종이 위에 쓰여진 마음 여기, 피화당에서'
(출처: YouTube 바데라이트)
《여기, 피화당》은 병자호란 이후의 조선 시대 배경과 청에 끌려갔다 돌아온 여인들이 주인공이지만 극 전반적인 분위기는 따뜻하다. 처참한 현실에 집중하기보단 ‘희망’에 집중했기 때문이다. 가은비, 매화, 계화가 동굴 속에서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언젠간 집에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이라고 생각했기에 이들이 애써 웃으며 오늘 하루도 살아내는 모습으로 그려냈다.
피할 수 없는 불행 속에서 인간인 우리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건 ‘희망을 품는 일’ 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뮤지컬 《여기, 피화당》의 오프닝 넘버(뮤지컬이 시작되면서 부르는 노래)와 피날레 넘버(뮤지컬이 끝나며 부르는 노래)의 가사를 똑같이 썼다. 그 시절 캄캄한 동굴 같은 현실을 살고 있던 여인들이 희망을 버리질 않길 바라며.
지금은 어둠 속에 있지만
언젠가는
우리의 이야기가 반짝이길
지금은 어둠 속에 있지만
언젠가는
우리의 삶이 반짝이길
시기 | 동일시기 이야기소재 | 장소 | 출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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