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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어둠 속에 있지만 언젠가는 :
뮤지컬 《여기, 피화당》을 쓰며

《박씨전》을 처음 읽은 건 아마도 고등학생 때 수능 공부를 하면서였을 것이다. 부끄럽지만 사실 그때는 이 이야기가 쓰인 배경에 관해서 공부하기보다는 수능 대비 객관식 문제를 맞히기 위해 ‘작자 미상’, ‘조선시대 소설’, ‘여성 서사’, ‘한글 소설’, ‘전지적 작가 시점’과도 같은 키워드를 외우기에 급급했던 것 같다. 그렇게 수능과 함께 내 기억 속에서 사라진 ‘박씨전’을 다시 만난 건 대학로의 한 카페였다.


〈규장각 소장 《박씨전》〉 (출처: 규장각한국학연구원)


《박씨전》을 모티브로 한 뮤지컬을 만들고 싶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땐 속으로 ‘100분짜리 뮤지컬로 만들기엔 이야기도 짧고, 마지막엔 너무 판타지스러워서 유치하지 않을까?’란 걱정이 있었다. 하지만 ‘박씨전 스토리 자체에 집중하기보단 박씨전이 쓰인 배경에 대해 집중하면 어떨까?’란 생각이 들었고, 그날부터 병자호란 이후 조선시대 여성들의 삶에 대해서 자료조사를 시작했다.

그동안 병자호란 때 많은 여인이 청에 끌려갔다는 사실만 알고 있었는데 그들이 조선에 돌아온 이후에 받았던 처참한 대우에 관해선 잘 알지 못했다. 돌아온 여인들에게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사죄하기는커녕 오랑캐에게 정절을 잃었다며 이혼을 요구하고, 자결을 강요했다는 사실을 알고서는 눈물이 났고 분해서 잠이 오지 않았다.

그 당시 바다에 몸을 던진 여인들의 머릿수건이, 마치 연못에 떠 있는 낙엽이 바람을 따라 떠다니는 것처럼 많았다는 기록을 읽었다. 눈을 감고 상상했다. 깊고 어두운 밤, 바람이 부는 절벽 위에서 눈물을 흘리는 여인들을.

청에서 참담한 일을 겪고도 죽지 않았던 건 고향에 있는 사랑하는 사람들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들에게 돌아갈 날만 기다리며 버티고 또 버텨 고향에 돌아왔건만 ‘환향녀’라고 손가락질당하고, 죽음을 강요당했을 때의 그 마음을 어찌 헤아릴 수 있을까. 자신이 갈 곳은 오직 바다뿐이라고 생각하며 그 차디찬 바닷물에 몸을 던졌을 수많은 여인을 생각하니 마음이 묵직하게 아파졌다. 그러고 나니 유치하다고 생각했던 《박씨전》의 마지막 판타지 장면이 왜 쓰였는지 한 번에 이해가 갔다. 무능력한 사대부들을 비판하고, 오랑캐라고 업신여기던 그들에게 당한 치욕을 글 속에서나마 통쾌하게 갚아주고 싶었을 것이다. 아마 내가 《박씨전》의 작가라도 그리 썼을 테니까. 그 마음이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나에게도 생생히 전해지자 어떻게 대본을 써야 할지 감이 잡히기 시작했다.


〈뮤지컬 《여기, 피화당》의 포스터〉 (출처: ㈜홍컴퍼니)


그렇게 뮤지컬 《여기, 피화당》을 쓰게 되었다. 《박씨전》을 쓴 ‘작자 미상’의 작가가 청에서 돌아온 여인들이었을 거란 상상을 시작으로 오랑캐에게 정절을 잃었다 하여 이혼을 당한 ‘가은비’, 가은비의 몸종 ‘계화’, 그리고 자결을 거부한 자신을 죽이려는 시댁을 피해 도망 다니는 ‘매화’가 탄생했다. 이 여인들은 ‘피화당’이라고 이름 지은 동굴 속에서 살아가며 사랑 소설을 써서 저잣거리에 내다 팔면서 생계를 겨우겨우 꾸려 나간다. 그런 그녀들에게 최명길의 양아들 최후량과 그의 노비 황 강아지가 찾아온다.


〈뮤지컬 《여기, 피화당》의 한 장면〉 (출처: ㈜홍컴퍼니)


뮤지컬 여기, 피화당 '나 같은 사람이 쓴 이야기도'
(출처: YouTube 바데라이트)   더보기


후량은 전쟁을 멈추기 위해 항복문서를 써서 비난받는 자신의 아버지를 위해 가은비에게 백성보다 대의를 중요시한 사대부를 비웃는 소설을 써달라 요청한다. 가은비는 글을 씀으로써 혹여라도 자신들의 정체가 드러나 위험해질까 두려워하지만 동시에 ‘자신과 같은 처지의 여인들을 글로써 위로해 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작은 소망으로 ‘박씨전’을 집필하기로 마음먹는다. 이때 가은비가 부르는 넘버(뮤지컬 안에서 배우가 부르는 노래)가 ‘나 같은 사람이 쓴 이야기도’이다.

(가은비)

하지만 나
우리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
하지만 나
우리의 목소리를 들려주고 싶어
너무 아파서 피하고 싶고
기억을 지우고 싶지만

나 같은 사람이 쓴 이야기도
세상에 남겨질 수 있다면
나 같은 사람이 쓴 이야기도
누군가에게 위로가 될 수 있다면
그럴 수 있다면


뮤지컬 《여기, 피화당》에는 총 세 번의 극중극이 나온다. ‘박씨전’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을 가은비, 매화, 계화, 후량, 강아지가 맡아서 맛깔나게 연기를 하는데, 두 번째 극중극이 끝나고 피화당 여인들은 또다시 습격을 받게 된다.


〈뮤지컬 《여기, 피화당》의 한 장면〉 (출처: ㈜홍컴퍼니)


새로운 동굴로 거처를 옮겨야만 하는 가은비, 매화, 계화는 가는 길에 홍제원을 지나간다. 오랑캐에게 정절을 잃은 며느리가 어찌 조상의 제사를 지내냐며 이혼을 요구하는 사대부의 상소가 빗발치자, 임금은 홍제원 냇물에 몸을 씻으면 정절을 회복시켜 준다고 약조한다. 그래서 많은 여인들이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홍제원 냇물에 몸을 씻었지만, 사대부 가문에서는 여인들을 받아주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화는 청에서 생긴 손등의 상처를 계속 홍제원 냇물에 강박적으로 씻는다. 마치 이 상처가 사라지면 자신과 가은비에게 일어났던 끔찍한 일들이 다 사라지기라도 할 것처럼. 하지만 이제 계화도 안다. 아무리 몸을 씻어도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이때 세 명이 함께 부른 넘버가 ‘홍제원 냇물에 몸을 씻고 씻고 또 씻어도’이다.

(매화, 계화, 가은비)

환향녀
그토록 그리던 고향으로 돌아온 여인들을 뜻하던 말이
이젠 욕이 되어 남겨지네
어두운 밤, 차가운 바다에 몸을 던져
죽어야만 끝이 날까

나라가 지키지 못한 여인들을
다시 한번 버린 조선
홍제원 냇물에 몸을 씻고 씻고 또 씻어도
바뀌는 건 없어


새로운 동굴로 후량과 강아지가 찾아온다. 후량은 안전한 곳을 마련했으니 같이 떠나자고 하지만 가은비는 조선 땅 그 어디에도 자신들에게 안전한 곳은 없다고 말하며 거절한다. 후량은 쓰다가 멈춰진 ‘박씨전’이 쓰인 종이를 두고 가지만 가은비는 글로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자신이 어리석었다며 더 이상 글을 쓰지 않겠다고 한다. 그런 가은비를 보며 계화와 매화가 가은비 대신 붓을 집는다. 이야기 속에서만큼은 자신들이 강하고 도망 다니질 않길 바라는 마음으로 멈춰진 ‘박씨전’을 이어 나간다. 그 마음이 가은비에게도 전해져 가은비도 붓을 들고, 그렇게 세 사람은 함께 박씨전을 써 내려가며 가장 판타지답고 통쾌한 마지막 극중극이 펼쳐진다.


〈뮤지컬 《여기, 피화당》의 한 장면〉 (출처: ㈜홍컴퍼니)


용울대가 피화당에 있는 여인들을 겁탈하려고 들어가자, 피화당의 사면이 칼날 같은 바위로 변해 하늘 높이 치솟고, 계화가 칼을 들어 용울대의 머리를 친다. 아우의 소식을 들은 용골대가 분을 이기지 못하고 피화당에 불을 지르자, 초당을 둘러싸고 있던 수목들이 징과 북을 치며 함성을 지르고 천지가 진동해 장졸들이 정신을 차리지 못해 서로 밟혀 죽는다. 수만 명의 군사들이 여인들에게 활을 쏘지만, 그 누구도 맞히지 못하고, 이를 보던 박 씨가 자신은 여기 앉아서도 만 리 밖을 볼 수 있으니 잘못한다면 모두를 함몰하겠노라고 외친다.

이 장면을 대본으로 쓸 때는 어딘가 꽉 막혀 있던 속이 풀리는 시원한 느낌이었는데, 연습실에서 배우들이 음악과 함께 이 장면을 연기하는 걸 보는데 눈물이 났다. 찢어지고 해진 옷을 입고 당당하게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는 그녀들이 너무 기특하고 또 가련해서 눈물이 계속 흘렀다. ‘박씨전’을 다 쓰고 계화가 “마지막에 말도 안 되는 일들이 많이 벌어져서 이 글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겠어요.”라고 말하자 매화가 “시간이 흘러 언젠가 우리를 이해해 주겠지. 이렇게 말도 안 되는 힘이 없었다면 지금을 살아낼 수 없었던 우리를.”이라고 대답한다.

가은비는 후량에게 완성된 ‘박씨전’을 건네며 책으로 내달라고 하고, 후량은 꼭 가은비의 이름을 세상에 알리겠다고 하지만 가은비는 자신들이 썼다는 걸 알면 아무도 읽지 않을 테니 부디 작자미상으로 남겨달라고 부탁하며 ‘아무도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다 해도’라는 넘버를 부른다.

(가은비)

아무도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다 해도 괜찮아
이야기 속에 담긴 우리의 마음이
누군가에게 닿을 수만 있다면

아무도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다 해도 괜찮아
시간을 건너 어느 미래에서도
우리 목소릴 들을 수만 있다면


〈뮤지컬 《여기, 피화당》의 한 장면〉 (출처: ㈜홍컴퍼니)


뮤지컬 여기, 피화당 '종이 위에 쓰여진 마음 여기, 피화당에서'
(출처: YouTube 바데라이트)   더보기


《여기, 피화당》은 병자호란 이후의 조선 시대 배경과 청에 끌려갔다 돌아온 여인들이 주인공이지만 극 전반적인 분위기는 따뜻하다. 처참한 현실에 집중하기보단 ‘희망’에 집중했기 때문이다. 가은비, 매화, 계화가 동굴 속에서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언젠간 집에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이라고 생각했기에 이들이 애써 웃으며 오늘 하루도 살아내는 모습으로 그려냈다.

피할 수 없는 불행 속에서 인간인 우리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건 ‘희망을 품는 일’ 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뮤지컬 《여기, 피화당》의 오프닝 넘버(뮤지컬이 시작되면서 부르는 노래)와 피날레 넘버(뮤지컬이 끝나며 부르는 노래)의 가사를 똑같이 썼다. 그 시절 캄캄한 동굴 같은 현실을 살고 있던 여인들이 희망을 버리질 않길 바라며.

지금은 어둠 속에 있지만
언젠가는
우리의 이야기가 반짝이길
지금은 어둠 속에 있지만
언젠가는
우리의 삶이 반짝이길





집필자 소개

김한솔 작가
김한솔
[뮤지컬]
〈천개의 파랑〉〈여기, 피화당〉〈라흐 헤스트〉〈달 샤베트〉〈태양의 노래〉
〈인사이드 윌리엄〉〈너를 위한 글자〉
  제8회 한국뮤지컬 어워즈 극본상 수상 (〈라흐 헤스트〉)
[연극]
〈맥베스 레퀴엠〉 〈일의 기쁨과 슬픔〉
“오랑캐가 압록강을 넘어왔다는 소식을 듣다”

김령, 계암일록, 1627년 1월 20일

1627년 1월 20일, 김령은 조카 김광적에게 새로운 소식을 들었다. 김광적이 아버지인 김호의 묘를 옮기는 일 대문에 안동 관아에서 감사와 만나고 온 길이었다. 감사가 산송 문제로 당사자들에게 사실을 확인하고 있는데, 갑자기 선전관이 말을 달려 관아에 당도하였다. 그리고 말하기를 ‘서북쪽 오랑캐 수만 명이 의주를 포위하고 또 선천에 들어왔으니, 감사는 군마를 불러 모으고, 호패어사 또한 머물지 말고 급히 서울로 돌아오라는 명령이다’ 라고 하였단다. 정말로 놀라운 일이었다.

그 뒤 자세한 내막을 들으니 오랑캐가 이달 13일에 압록강을 건너 의주를 포위하였는데, 의주성은 매우 공고하여 방어할 준비가 다 되었으나 안에서 내통하여 문이 열렸다고 한다. 그리하여 의주부윤 이완은 스스로 불에 타 죽고, 의주 판관 최몽량은 피살되었으며, 한명련의 아들 한윤 및 박난영 같은 이들은 모두 돌아왔다고 한다. 우리나라 장수와 군사들 중 저들에게 투항한 자들도 많이 왔는데, 그 가운데 강홍립도 있었다고 한다. 적의 군사들이 무인지경으로 우리나라를 침입하고, 또 안주를 함락시켰으며, 여섯 가지 항목을 들어 조선에게 죄를 물었다고 한다. 그리고 오랑캐들 스스로 대금이라 칭하고 황제를 자처하였다고 한다.

임진년 왜구들이 조선 산하를 한바탕 피로 물들인 것이 30년도 되지 않았는데, 다시금 이런 병란을 겪게 되다니... 김령은 이러한 전란을 초래한 조정의 무능력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명과 여진의 대립, 변화하는 국제 정세와 간신들 탓에 어지러운 조선”

김령, 계암일록, 1618년 8월 1일

1618년 8월 1일, 도성이 술렁거렸다. 모두 큰 난리가 일어날 것이라고 하며 백성들이 다 도망쳐 나가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사대부의 집들도 줄을 이어 성을 빠져 나오니 성은 이미 비어 어찌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누르하치가 명나라와 대치하고 있어서 조선에는 금방 닥칠 급한 일이 없을 텐데도, 백성들의 불안한 마음은 달랠 도리가 없었다.

성 안은 모두 비었고 교외 강가는 사람들로 가득 차 분잡한데, 재물로 부녀를 바치거나 혹 절취당하기도 했다고 한다. 임금 또한 행행(行幸)을 8월 13일에 나가려다가 아직 못나갔는데 27일에 나갈 것이라고 모두들 말하였다. 이 소문의 근원은 대체 어디란 말인가. 상황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권세를 가진 간신들이 나라를 그르친 죄를 이루 다 벌할 수가 없다.

“위아래를 가리지 않는 전란중의 굶주림”

금난수, 성재일기, 1593년 3월 2일

임진왜란이 일어난 후, 전 국토는 황폐화되고 농민들은 전란의 화를 피하기 위해 이리저리 도망 다녀야 했다. 그 덕분에 농토는 모두 버려져 농작물이 자라지 못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다음 해인 1593년 봄, 춘궁기가 되자 굶는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보리를 심으려 해도 남자들은 왜적을 막기 위한 군대에 차출되어 나아가고, 향촌에 남은 것은 지난 전염병 유행에서 근근이 살아남은 노인과 아이들, 그리고 여성들뿐이었다. 금난수의 집은 그나마 조금 사정이 나았다. 비록 향병으로 나아간 사람들을 위해 군량미를 대느라 전처럼 풍족하지는 못하였지만 적어도 굶지는 않을 정도였다.

이런 금난수의 집 대문을 두드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개령(開寧, 현 경북 김천)에서부터 온 김익휘(金益輝)는 염치불구하고 그의 어버이를 위해 양식을 나누어 달라 청하였다. 자기 한 몸을 위해서가 아니라 연로한 어버이를 위해서라는 말에 금난수는 빠듯한 살림을 나누어 주었다. 어찌 이런 전란 중에 홀로 배불리 먹을 수 있었겠는가. 하지만 여름이 되어도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춘궁기에 종자까지 모두 먹어버린 사람들은 농사를 지을 수 없었고, 자연히 수확할 것 자체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그나마 형편이 나은 사람들의 곡식을 훔치는 좀도둑도 발생하여 문제가 되었다.

결국 8월 3일에는 관아의 창고를 열어 진휼미(賑恤米)를 분배하였다. 관아의 곡식은 곧 나라의 재산이었기 때문에 이에 대해 보고서를 작성해 순찰사에게 올려야 했다. 구휼을 하기는 했으나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일 뿐이었다. 농민들을 정착시켜 농사를 짓게 한다고 해도 당장의 양식을 구하기란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었다.

결국 한 해 동안 충분한 양식을 재배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다음 해인 1594년 봄에는 사족들도 굶기 시작하였다. 금난수의 처남 조목은 자신의 서자 조수붕을 보내와 자신의 궁색함을 구휼해 달라고 청하였다. 처남의 성격을 생각해 보았을 때 체면을 고려하여 한참 동안 굶으며 참다가 가솔들을 위하여 겨우 청한 것일 터였다. 금난수는 그를 딱하게 여기며 곡식을 보내 주었다.

“귀국길에 오르자마자 굶주린 백성들을 보다”

이기헌, 연행일기계본, 1802년 2월 8일 ~

1802년 2월 8일, 이기헌(李基憲)은 고국으로 돌아가기 위한 여정에 있었다. 동지사로 청나라에 들어와 주어진 임무를 마치고 그리운 고국을 향해 가던 길이었다. 이틀간 길을 따라오니 반산이란 곳을 지나게 되었는데, 이곳은 바로 청나라의 중흥을 이근 강희제와 건륭제 두 황제의 능이 있는 곳이었다. 멀리 푸른 소나무 사이로 궁전같은 건물이 비쳤는데 바로 청나라의 별궁(別宮)이었다.

저녁 무렵에 계주란 곳에 이르러 유숙하였다. 이 고장은 중국 역사의 곳곳에 자취를 남기고 있는 유명한 고을이었다. 진나라와 한나라 시대는 어양군에 속했고, 위나라와 진나라 시대는 유주에 속하였다. 당나라 천보 연간에 다시 명칭을 어양군으로 고쳤다. 금나라 때는 이곳을 중도(中都)로 삼아 매우 번성했던 곳이었다. 한나라 광무제 때 반란을 일으킨 팽총도 이곳을 근거로 했고, 당나라 현종 때 반란을 일으킨 안녹산과 사사명도 이곳을 근거로 난을 일으켰다. 이곳 여양의 돌기병은 매우 용맹하여 천하무적으로 소문난 병사들이었다.

계주 성 북쪽에는 전설 속의 통치자인 황제(黃帝)가 광성자란 사람에게 도를 물어본 곳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이 계주성을 들어올 때 성 밖에는 굶주린 백성들이 들판에 가득하였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 그릇을 들고 나와 있었다. 그곳 사람 이야기가 매일 500~600명에게 식량을 나누어주는데, 그 양이 매우 많다고 하였다. 청나라 수도와 이틀거리이고, 한때 천하의 중심이기도 하였으며, 숱한 영웅호걸들이 낳다가 사라진 땅이건만 정작 배고픈 백성들을 구원해 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과거의 찬란한 영광이 저 백성들에게 무슨 소용이겠는가. 이런 생각이 미치자 이기헌은 씁쓸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통신사 부사 임수간의 배포”

조선통신사병풍(강호성내응접도)
(출처: 부산광역시립박물관)
엄경수, 부재일기, 1712년 3월 1일

1712년 3월 1일. 작년 일본으로 떠났던 통신사 일행이 돌아왔다. 그런데 조선과 일본 사이에 피휘와 관련된 시비가 발생했고, 사신단은 그 일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했다는 것으로 귀국과 함께 조사를 받게 되었다.

그럼에도 통신사의 부사였던 임수간은 상당한 기개를 보여주었다. 정사가 탄 배는 무사히 일본에 도착하였으나, 부사가 탄 배는 떠날 때 바다 한가운데에서 배가 부서져 거의 뒤집힐 뻔하여 일본 사람들이 급히 작은 배를 불러 부사에게 옮겨 타게 하였는데, 이때 부사 임수간이 “내가 한 번 동요하면 배에 탄 수백 명 모두는 살 수가 없다.”라고 말하며 완강히 거부하였다고 한다. 그리고는 굳게 앉아 지휘하였는데, 겨우 배가 전복되지 않고 부산으로 돌아와 수리할 수 있었다고 한다.

부사의 고생은 일본에서 돌아올 때도 계속되었는데, 바다 한가운데서 비바람을 만났다고 한다. 깜깜하고 어두운 시간에 절영도에 급히 정박하려는데 날씨가 너무 어두워 도저히 정박할 곳을 찾지 못하였다고 한다. 배가 부서지려 하자 급히 사람을 시켜 물의 깊이를 살피게 하니 아주 얕았다고 한다. 등이 잠길 정도의 깊이임을 확인하고 일행을 모두 내리게 하였는데, 깜깜한데다 비가 강하게 쏟아부어 어디로 향할지 모르다가 겨우 길을 찾아 언덕에 오르고, 그길로 수십 리를 걸어서 비로소 인가를 찾아 폭풍을 피할 수 있었다고 한다.

날이 밝아서 살펴보니 겨우 몇 리 길을 한참 돌아온 것이었고, 배에 있던 물건은 모두 쓸려가 남은 것이 없었다. 그래도 절체절명의 순간 부사의 용기와 침착한 지휘로 사람은 한 명도 다치지 않았으니, 부사의 배포와 냉철함은 참으로 감탄할 만한 일이었다.

“서울 사람이 전한 전란 소식에 비통함에 빠지다”

오희문, 쇄미록, 1597년 8월 23일

1597년 8월 23일, 요사이 다시금 전란의 소식이 들려와 오희문은 종일 마음이 어수선 하였다. 얼마전 들으니 내 건너 안협 고을에 서울 사람이 와서 살고 있다 하여, 민시중, 김언실 등을 시켜 만나보고 적의 소식을 들어오게 하였다. 오늘 민시중과 김언실이 찾아와 서울 사람에게 들은 이야기를 전해 주었다. 이야기를 듣자니, 적은 이미 남원성을 함락시켰고, 중전은 장차 관서땅으로 피난을 간다고 한다. 비록 서울 사람에게 들은 이야기이지만 사실인지 여부는 확실하지 않았다.

만일 사실이라면, 이제 날씨가 점차 추워지고 있는데, 늙은 노모와 병든 아내를 데리고 깊은 산골짜기로 피난을 해야 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집안 식구들은 모두 옷도 변변치 않은데 반드시 추위와 굶주림에 고생할 것이 뻔하였다. 이런 생각이 미치니 오희문은 죽을 때까지 편안한 날이 없겠구나 싶어 하늘이 원망스러워졌다.

6년 동안의 전쟁에 백성들이 모두 파리해졌는데도 하늘이 화를 뉘우칠 줄 모르고 흉한 전란을 다시 만들어 호남과 호서의 백성들이 장차 도탄 속으로 들어가게 생겼으니, 참으로 탄식스러운 일이었다. 하늘은 어질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백성을 어루만지는 법이거늘, 어찌 조선의 백만 백성으로 하여금 모두 불타는 곳으로 몰아넣고 하나도 남기지 않으려 한단 말인가! 정녕 믿기 어려운 것이 하늘이 아니던가! 탄식한들 무엇 하겠는가!

“병자호란을 겪은 거지 이야기”

엄경수, 부재일기, 1714년 9월 1일

1714년 9월 1일. 오늘 엄경수의 집 앞에 헤진 갓을 쓰고 누더기를 걸친 사람이 지팡이를 짚고 문에서 구걸하였다. 몸은 구부정했고 목소리는 힘이 없었다. 안으로 들여 밥을 주며 살펴보니 일개 노인네였다. 밥과 함께 한기를 물리치도록 술도 조금 따라 주었다.

나이를 물어보니 “병자년 호란 때 강화도에서 포로가 되었다가 벗어났는데, 그때가 아홉 살이었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엄경수가 손으로 헤아려 보니 올해 여든일곱이었다. 말로만 듣던 호란을 직접 겪었다고 하니 궁금증이 일었다. 그리하여 그가 겪은 호란 이야기를 청해 들었다.

“성이 함락되고 우리 가족들은 갈대숲 속으로 달아나 사람마다 각각 한 곳을 찾아 숨도록 하여 집안 식구들이 온전하였지만 나만 포로가 되었습니다. 머물러 있을 때는 늘 군진에 구속되어 있었고, 행군할 때는 말을 타고 달렸는데, 어리고 약하여 안정에 붙어 있지를 못하고 곧잘 떨어지곤 하였습니다. 그렇게 오래 지내다 보니 싫어하여 오랑캐에게 다시 버려져 다행히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는 활쏘기에도 재주가 있어 효종 때 내금위에서 군졸을 하였고, 천인은 아니었으나 어떠한 일에 연좌되어 자리를 잃었다고 한다. 아내가 있었는데 20년 전에 죽고 흉년에 땅마저 팔게 되었으며 이후 걸식을 하며 목숨을 이어오고 있다고 한다. 다만 과거 군졸 생활 때 같이 생활하던 자의 손자가 옛일을 기억하고는 그에게 자주 음식과 잠자리를 내어주고 있다고 한다.

엄경수는 아직 병자호란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을 만나본 것도 신기하였지만, 한 사람의 인생역정이 너무나도 기구하여 그의 이야기에 한참 빠져들었다. 그리고 조부의 친구를 잊지 않고 돌보고 있는 사람 역시 참으로 어질다고 할 만하지 않은가? 엄경수는 이 이야기를 듣고 생각에 잠겼다가, 이를 이야기 형식으로 일기에 적어두곤 거기에 ‘거지전’이란 이름을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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