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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인의 이야기, 오늘과 만나다

전쟁이 지나고 난 후

우리는 지금 전쟁이 전 지구적인 유행이 된 시대를 살고 있다. 실시간으로 전쟁을 목격하는 것은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충격이다. 바로 얼마 전 핵보유국인 인도와 파키스탄이 전쟁을 시작했다가 화들짝 놀라 멈췄고, 팔레스타인은 마치 지구상에 원래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처참하게 사라져 가고 있다. 엄청난 화력의 차이로 며칠이면 끝날 것처럼 보였던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내전까지 포함한다면 지구상에는 더 많은 국가들이 전쟁 중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내 나라는 1953년 7월 27일 이후 내내 북한과 휴전 중이고 지구상 유일한 분단국가다.

새로 선출된 교황 레오 14세는 그가 집전한 첫 번째 일요일 미사에서 더 이상의 전쟁은 없어야 한다며 평화를 강조했다. 세상 모두가 평화를 원하는 것 같지만 어딘가에서는 전쟁이 반드시 일어나고, 때로 그것은 한 국가 안에서 일어나기도 한다. 지나온 역사에서 인간이 눈곱만큼이라도 교훈을 얻었다면 전쟁 같은 것은 없어져 마땅한데도 여전히 전쟁은 현재진행형이다. 오늘날의 전쟁은, 전쟁을 일으킨 자들이 전장에 나갈 필요가 거의 없기 때문일까, 위정자들은 자신들의 욕망만으로 전쟁을 일으킬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일까? 대체 왜일까. 위정자가 되어 본 적이 없으니 그 속을 도무지 알 도리가 없다. 여기 그 위정자들의 속내를 조금이라도 짚어보고자 한 영화가 있다.


〈영화 《남한산성》과 영화 《올빼미》 포스터〉 (출처: CJ ENM / ㈜NEW)


하나는 《남한산성》(2017)이고 다른 하나는 《올빼미》(2022)다. 《남한산성》은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으로 피신했다가 결국 처참하게 패해 청나라 칸에게 고개를 조아렸던 시기의 인조를, 《올빼미》는 그로부터 8년 후의 인조를 그를 둘러싼 다양한 인물들을 통해 그린다.

두 영화의 인조는 배우만 다른 게 아니라 행동에 대한 해석도 다르지만, 공통점이라면 이해가 될 듯하다가도 도무지 알 수 없는 면모가 있다는 부분이다. 《남한산성》에서는 그러한 부분이 우유부단함으로 주로 드러나고 《올빼미》에서는 지독한 자격지심으로 표현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래서는 안 되는 최고통수권자로서의 모습이라는 점에서는 한결같다. 그리고 영화 《남한산성》이 원인이고 영화 《올빼미》는 그 결과다. 박해일이 유해진이 되기까지의 8년 동안, 그 안에서는 지독한 악마가 자라난다.


〈영화 《남한산성》에서의 인조〉 (출처: CJ ENM)


영화 《남한산성》은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으로 피신한 인조와 그를 둘러싼 대신들, 산성 안에 함께 갇힌 백성들의 저마다의 주장과 입장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1636년, 인조는 강화도로 피신하려다 청의 선공으로 실패하여 남한산성으로 들어간다. 남한산성에는 약 두 달 정도를 버틸 식량이 있었지만, 대신들과 노비들의 입이 합세하자 식량은 간당간당했단다. 게다가 하필 계절은 엄동설한이요, 먹을 것도 마땅치 않은 산성 위에서 대신들은 명과 청 사이에서 첨예하게 대립한다. 청과 화친을 바라는 이조판서 최명길은 살아야 미래도 있다고 주장하는 실익을 따지는 인물이고, 그 반대에는 명분을 중시하는 예조판서 김상헌이 청과의 결사항전을 주장한다.

김상헌은 대를 위해서는 소를 희생할 수 있다고 믿었던 인물이다. 그는 청나라 군대에게 얼음길을 알려줄 수 있다는 이유로 자신을 도와준 순박한 나루터 영감을 단칼에 베어버리는 인물이다. 영감을 베고 떠나는 그의 결연한 표정에는 자신의 행동에 일말의 후회도 없는 초연함이 드러난다. 그는 신념을 쫓는 인물이라, 어전회의가 열리는 방문을 활짝 열어젖혀 청과의 화친을 권하는 최명길의 목을 베라고 벼락같이 소리 지르는 인물이다. 발이 얼고 손이 어는 추위에도 끄떡 않던 그의 신념은 바로 위기에 봉착한다.


〈영화 《남한산성》에서의 김상헌과 나루, 그리고 최명길〉 (출처: CJ ENM)


그가 죽인 나루터 영감의 하나 남은 피붙이인 어린 손녀 나루가 돌아오지 않는 할아버지를 찾아 산성으로 올라오면서 그의 책임이 되었기 때문이다. 분명 픽션인 나루가 김상헌을 살아있는 인물로 만든다. 어린 나루 앞에서 김상헌은 처음으로 말을 더듬는다. 본인 행동의 결과인, 고아가 된 어린 나루의 모습은 마치 아무 잘못도 없이 전쟁통에 던져져 가진 걸 모두 잃은 민중 그 자체다. 그런데 심지어 나루의 할아버지를 없앤 것은 청나라 군사가 아니라 자신이다. 그는 자신의 행동에 대해 이때 비로소 처음으로 깊이 의심을 품는다.

그와 의견은 다르지만 그에 못지않게 꼿꼿하게 자신의 신념을 관철시키려 하는 인물인 최명길은 언제 목이 잘릴지 모르는 위험한 청의 진영으로 몇 번이나 자진해서 찾아가 피해를 최소화하려 노력한다. 이 두 사람이 저마다의 신념을 위해 매진하는 인물이라면 영의정 김류는 그저 명분만을 내세우며 청나라 군의 압도적인 우세에는 눈 감고 그저 고장 난 시계처럼 청을 오랑캐로 비하하는 ‘통촉’ 머신이다. 하지만 그랬던 그도 최명길과 함께 사자가 되어 거대한 청군의 실체를 눈으로 확인하자 은근슬쩍 최명길의 입장에 올라타 목숨을 부지하려 든다.

하지만 그도 인조도 끝까지 미루고 싶은 것은 ‘책임’이다. 대신들에게 끝없이 의견만 묻는 인조에게 김류는 비굴하게 조아리며 자신은 신하이니 임금은 물을 게 아니라 시키면 그저 따르겠다고 결국 마지막 공을 인조에게 넘긴다. 인조라고 투항이라는 답을 모르는 바가 아님에도 훗날 돌아올 책임을 미룰 누군가가 필요했다.

춥고 좁은 방안을 떠돌던 뜨거운 감자를 덥석 받아 든 것은 결국 최명길이다. 인조는 최명길과 독대했을 때 최명길이 훗날 받게 될 고초를 두 번 세 번 확인한다. 그때 마치 인조는 최명길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함과 힘없는 자신에 대한 절망이 모두 담긴 복잡다단한 감정을 내비치지만 대사 그 자체만으로 보자면 자신의 투항을 모두 최명길의 탓으로 미룰 수도 있음을 정확하게 언급하고 있다.

영화 《남한산성》에는 실존인물로 기록된 서흔남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듯한 대장장이 날쇠와 성벽을 지키는 숱한 ‘백성들’과 어린 나루 등의 생생한 인물들이 있지만, 결국 이 영화는 인조와 최명길과 김상헌 그리고 하나로 뭉그러진 백성의 이야기다.

백성은 거들뿐. 영화의 말미에서 인조는 청나라 칸 앞에 무릎을 꿇고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를 올린다. 이게 바로 초등학생도 안다는 인조의 삼전도비의 굴욕이다. 삼배구고두례란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법으로 한 번 절할 때마다 세 번씩 머리를 바닥에 닿도록 조아리기를 세 번 거듭하는 것이다.

영화 속 인조의 머리에는 맨땅의 흙이 묻는다. 최명길은 그 옆에서 느껴 운다. 울음을 참을 수가 없는 것이다. 누구보다 울고 싶은 사람은 인조이지만 그 울음마저도 인조는 마음껏 울 수가 없다. 통곡마저도 최명길의 것이지, 인조의 것이 되지 못한다. 그리고 이 인조의 마음에 새겨진 수치는 그대로 고통이 되어 날이 갈수록 커진 뒤 인조를 삼키는 어둠이 된다. 그 이야기가 바로 영화 《올빼미》이다.


〈영화 《올빼미》 속 인조와 소현세자〉 (출처: ㈜NEW)


《올빼미》의 주인공은 주맹증을 앓고 있는 맹인 침술사 천경수지만 그의 모든 행동은 인조의 결정에 의해 휘둘린다. 낮에는 안 보이지만 밤에는 시력이 조금 돌아오는 주맹증 환자인 천경수는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병세를 설명하지 않고 그저 맹인으로 알려져 있다. 눈이 불편한 대신 다른 감각이 비상하게 발달했고 특히 청력이 뛰어나다. 영화는 모든 빛이 사라진 후 비로소 볼 수 있는 그의 약점인 주맹증 설정을 공격적으로 활용하며 초반에는 코믹하게 후반에는 몸의 털이 오소소 설 정도의 스릴러로 이용하여 영화적 재미를 끌어낸다. 허나 이 글에서 초점을 맞추는 인물은 생각보다 많이 등장하지 않으면서도 만악의 근원인, 그러나 악마라고 하기에는 지극히 쪼잔하고 치졸한 인물이 되어버린 인조다.

삼전도의 굴욕 이후 그의 내부에서 자란 악마가 아들인 소현세자마저 적으로 돌리는 적이 되어 튀어나온다. 사실 그의 내부에서 자란, 자기 자신에 대한 수치심으로부터 비롯된 먹이를 먹고 자란 이 악마에게 있어서 권력은 누구도 빼앗아갈 수 없는 절대적인 가치다. 후궁인 소용 조 씨의 꼬드김이나 청나라 사신의 모욕은 권력에 대한 집착에 불을 끼얹는 촉매제이자 핑계다. 인조의 대척점에 서는 인물이 앞 못 보는 평민 침술사 천경수라는 점이 의미심장하다.


〈영화 《올빼미》의 임금 인조와 맹인 침술사 천경수〉 (출처: ㈜NEW)


천경수는 비록 남들이 보는 때에는 볼 수 없으나 어둠 속에서 눈을 떠 처음 써 내린 것이 하나뿐인 동생에게 보내는 편지일 정도로 우애가 깊은 인물이다. 세상천지에 하나뿐인 혈육에 대한 그의 애틋함은 아비이자 할아비인 인조의 무자비하고 병적인 권력욕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상식선 너머의 괴물이자 없애고 싶은 거대악이다. 자신의 아들을 죽일 수 있는 자가 백성을 살릴 것이라고 누가 믿겠는가.

그러나 침술사인 그도, 최명길도, 김상헌도, 날쇠도 알 수 없는 것이 주상의 속마음인 것이다. 나라의 모든 것을 책임지는 자리에 오른 자의 무게, 책임이라고는 지지 않고 오로지 즐기고만 싶은 그 마음, 그러나 그렇게 놔두지 않는 자리의 고통. 가져보지 않은 자는 결코 알 수 없는 심연이 그곳에 있다.

영화를 만든 자들은 그 무게를 감히 가늠해 본다. 그러나 그 무게에 연민은 실리지 않는다. 최고책임자의 책임지지 않는 행태가, 그저 권력만을 탐하고자 하는 행태의 결말은 가장 낮은 자로부터의 거부다.

영화 《남한산성》의 마지막 장면을 장식하는 것은 흙바닥에 머리를 조아리는 인조가 아니라 봄을 맞는 어린 나루다. 미래는 인조의 머리통에 있지 않고 성(姓)도 없는 아이 나루에게 있다. 영화 《올빼미》에서 마지막에 눈을 뜨는 것은 인조가 아니라 천경수다. 헤아릴 수 없는 최고책임자의 책임에 대한 무게를 이해하나, 사람이 해서는 안 되는 짓을 해서는 안된다고, 늘 ‘백성’은 말해왔다.

대부분의 영화는 전쟁이 끝나면 모든 게 끝난다. 하지만 이 두 영화는 보여준다. 그 이후의 삶이, 꼭대기부터 바닥까지 모두 위태롭게 흔들린다는 것을. 그것도 아주 오랫동안, 파멸에 이르기까지 전쟁은 누구 한 명 비켜가지 않는다.




집필자 소개

이수진
뮤지컬 〈지킬앤 하이드〉, 〈그리스〉, 〈넌센스〉, 〈에비타〉 등 번역하고, 뮤지컬 〈신과 함께 가라〉 등을 썼습니다.〈뮤지컬 스토리〉 저자 / 더 뮤지컬 어워드 심사위원 역임 등
“오랑캐가 압록강을 넘어왔다는 소식을 듣다”

김령, 계암일록, 1627년 1월 20일

1627년 1월 20일, 김령은 조카 김광적에게 새로운 소식을 들었다. 김광적이 아버지인 김호의 묘를 옮기는 일 대문에 안동 관아에서 감사와 만나고 온 길이었다. 감사가 산송 문제로 당사자들에게 사실을 확인하고 있는데, 갑자기 선전관이 말을 달려 관아에 당도하였다. 그리고 말하기를 ‘서북쪽 오랑캐 수만 명이 의주를 포위하고 또 선천에 들어왔으니, 감사는 군마를 불러 모으고, 호패어사 또한 머물지 말고 급히 서울로 돌아오라는 명령이다’ 라고 하였단다. 정말로 놀라운 일이었다.

그 뒤 자세한 내막을 들으니 오랑캐가 이달 13일에 압록강을 건너 의주를 포위하였는데, 의주성은 매우 공고하여 방어할 준비가 다 되었으나 안에서 내통하여 문이 열렸다고 한다. 그리하여 의주부윤 이완은 스스로 불에 타 죽고, 의주 판관 최몽량은 피살되었으며, 한명련의 아들 한윤 및 박난영 같은 이들은 모두 돌아왔다고 한다. 우리나라 장수와 군사들 중 저들에게 투항한 자들도 많이 왔는데, 그 가운데 강홍립도 있었다고 한다. 적의 군사들이 무인지경으로 우리나라를 침입하고, 또 안주를 함락시켰으며, 여섯 가지 항목을 들어 조선에게 죄를 물었다고 한다. 그리고 오랑캐들 스스로 대금이라 칭하고 황제를 자처하였다고 한다.

임진년 왜구들이 조선 산하를 한바탕 피로 물들인 것이 30년도 되지 않았는데, 다시금 이런 병란을 겪게 되다니... 김령은 이러한 전란을 초래한 조정의 무능력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명과 여진의 대립, 변화하는 국제 정세와 간신들 탓에 어지러운 조선”

김령, 계암일록, 1618년 8월 1일

1618년 8월 1일, 도성이 술렁거렸다. 모두 큰 난리가 일어날 것이라고 하며 백성들이 다 도망쳐 나가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사대부의 집들도 줄을 이어 성을 빠져 나오니 성은 이미 비어 어찌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누르하치가 명나라와 대치하고 있어서 조선에는 금방 닥칠 급한 일이 없을 텐데도, 백성들의 불안한 마음은 달랠 도리가 없었다.

성 안은 모두 비었고 교외 강가는 사람들로 가득 차 분잡한데, 재물로 부녀를 바치거나 혹 절취당하기도 했다고 한다. 임금 또한 행행(行幸)을 8월 13일에 나가려다가 아직 못나갔는데 27일에 나갈 것이라고 모두들 말하였다. 이 소문의 근원은 대체 어디란 말인가. 상황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권세를 가진 간신들이 나라를 그르친 죄를 이루 다 벌할 수가 없다.

“위아래를 가리지 않는 전란중의 굶주림”

금난수, 성재일기, 1593년 3월 2일

임진왜란이 일어난 후, 전 국토는 황폐화되고 농민들은 전란의 화를 피하기 위해 이리저리 도망 다녀야 했다. 그 덕분에 농토는 모두 버려져 농작물이 자라지 못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다음 해인 1593년 봄, 춘궁기가 되자 굶는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보리를 심으려 해도 남자들은 왜적을 막기 위한 군대에 차출되어 나아가고, 향촌에 남은 것은 지난 전염병 유행에서 근근이 살아남은 노인과 아이들, 그리고 여성들뿐이었다. 금난수의 집은 그나마 조금 사정이 나았다. 비록 향병으로 나아간 사람들을 위해 군량미를 대느라 전처럼 풍족하지는 못하였지만 적어도 굶지는 않을 정도였다.

이런 금난수의 집 대문을 두드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개령(開寧, 현 경북 김천)에서부터 온 김익휘(金益輝)는 염치불구하고 그의 어버이를 위해 양식을 나누어 달라 청하였다. 자기 한 몸을 위해서가 아니라 연로한 어버이를 위해서라는 말에 금난수는 빠듯한 살림을 나누어 주었다. 어찌 이런 전란 중에 홀로 배불리 먹을 수 있었겠는가. 하지만 여름이 되어도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춘궁기에 종자까지 모두 먹어버린 사람들은 농사를 지을 수 없었고, 자연히 수확할 것 자체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그나마 형편이 나은 사람들의 곡식을 훔치는 좀도둑도 발생하여 문제가 되었다.

결국 8월 3일에는 관아의 창고를 열어 진휼미(賑恤米)를 분배하였다. 관아의 곡식은 곧 나라의 재산이었기 때문에 이에 대해 보고서를 작성해 순찰사에게 올려야 했다. 구휼을 하기는 했으나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일 뿐이었다. 농민들을 정착시켜 농사를 짓게 한다고 해도 당장의 양식을 구하기란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었다.

결국 한 해 동안 충분한 양식을 재배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다음 해인 1594년 봄에는 사족들도 굶기 시작하였다. 금난수의 처남 조목은 자신의 서자 조수붕을 보내와 자신의 궁색함을 구휼해 달라고 청하였다. 처남의 성격을 생각해 보았을 때 체면을 고려하여 한참 동안 굶으며 참다가 가솔들을 위하여 겨우 청한 것일 터였다. 금난수는 그를 딱하게 여기며 곡식을 보내 주었다.

“귀국길에 오르자마자 굶주린 백성들을 보다”

이기헌, 연행일기계본, 1802년 2월 8일 ~

1802년 2월 8일, 이기헌(李基憲)은 고국으로 돌아가기 위한 여정에 있었다. 동지사로 청나라에 들어와 주어진 임무를 마치고 그리운 고국을 향해 가던 길이었다. 이틀간 길을 따라오니 반산이란 곳을 지나게 되었는데, 이곳은 바로 청나라의 중흥을 이근 강희제와 건륭제 두 황제의 능이 있는 곳이었다. 멀리 푸른 소나무 사이로 궁전같은 건물이 비쳤는데 바로 청나라의 별궁(別宮)이었다.

저녁 무렵에 계주란 곳에 이르러 유숙하였다. 이 고장은 중국 역사의 곳곳에 자취를 남기고 있는 유명한 고을이었다. 진나라와 한나라 시대는 어양군에 속했고, 위나라와 진나라 시대는 유주에 속하였다. 당나라 천보 연간에 다시 명칭을 어양군으로 고쳤다. 금나라 때는 이곳을 중도(中都)로 삼아 매우 번성했던 곳이었다. 한나라 광무제 때 반란을 일으킨 팽총도 이곳을 근거로 했고, 당나라 현종 때 반란을 일으킨 안녹산과 사사명도 이곳을 근거로 난을 일으켰다. 이곳 여양의 돌기병은 매우 용맹하여 천하무적으로 소문난 병사들이었다.

계주 성 북쪽에는 전설 속의 통치자인 황제(黃帝)가 광성자란 사람에게 도를 물어본 곳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이 계주성을 들어올 때 성 밖에는 굶주린 백성들이 들판에 가득하였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 그릇을 들고 나와 있었다. 그곳 사람 이야기가 매일 500~600명에게 식량을 나누어주는데, 그 양이 매우 많다고 하였다. 청나라 수도와 이틀거리이고, 한때 천하의 중심이기도 하였으며, 숱한 영웅호걸들이 낳다가 사라진 땅이건만 정작 배고픈 백성들을 구원해 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과거의 찬란한 영광이 저 백성들에게 무슨 소용이겠는가. 이런 생각이 미치자 이기헌은 씁쓸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통신사 부사 임수간의 배포”

조선통신사병풍(강호성내응접도)
(출처: 부산광역시립박물관)
엄경수, 부재일기, 1712년 3월 1일

1712년 3월 1일. 작년 일본으로 떠났던 통신사 일행이 돌아왔다. 그런데 조선과 일본 사이에 피휘와 관련된 시비가 발생했고, 사신단은 그 일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했다는 것으로 귀국과 함께 조사를 받게 되었다.

그럼에도 통신사의 부사였던 임수간은 상당한 기개를 보여주었다. 정사가 탄 배는 무사히 일본에 도착하였으나, 부사가 탄 배는 떠날 때 바다 한가운데에서 배가 부서져 거의 뒤집힐 뻔하여 일본 사람들이 급히 작은 배를 불러 부사에게 옮겨 타게 하였는데, 이때 부사 임수간이 “내가 한 번 동요하면 배에 탄 수백 명 모두는 살 수가 없다.”라고 말하며 완강히 거부하였다고 한다. 그리고는 굳게 앉아 지휘하였는데, 겨우 배가 전복되지 않고 부산으로 돌아와 수리할 수 있었다고 한다.

부사의 고생은 일본에서 돌아올 때도 계속되었는데, 바다 한가운데서 비바람을 만났다고 한다. 깜깜하고 어두운 시간에 절영도에 급히 정박하려는데 날씨가 너무 어두워 도저히 정박할 곳을 찾지 못하였다고 한다. 배가 부서지려 하자 급히 사람을 시켜 물의 깊이를 살피게 하니 아주 얕았다고 한다. 등이 잠길 정도의 깊이임을 확인하고 일행을 모두 내리게 하였는데, 깜깜한데다 비가 강하게 쏟아부어 어디로 향할지 모르다가 겨우 길을 찾아 언덕에 오르고, 그길로 수십 리를 걸어서 비로소 인가를 찾아 폭풍을 피할 수 있었다고 한다.

날이 밝아서 살펴보니 겨우 몇 리 길을 한참 돌아온 것이었고, 배에 있던 물건은 모두 쓸려가 남은 것이 없었다. 그래도 절체절명의 순간 부사의 용기와 침착한 지휘로 사람은 한 명도 다치지 않았으니, 부사의 배포와 냉철함은 참으로 감탄할 만한 일이었다.

“서울 사람이 전한 전란 소식에 비통함에 빠지다”

오희문, 쇄미록, 1597년 8월 23일

1597년 8월 23일, 요사이 다시금 전란의 소식이 들려와 오희문은 종일 마음이 어수선 하였다. 얼마전 들으니 내 건너 안협 고을에 서울 사람이 와서 살고 있다 하여, 민시중, 김언실 등을 시켜 만나보고 적의 소식을 들어오게 하였다. 오늘 민시중과 김언실이 찾아와 서울 사람에게 들은 이야기를 전해 주었다. 이야기를 듣자니, 적은 이미 남원성을 함락시켰고, 중전은 장차 관서땅으로 피난을 간다고 한다. 비록 서울 사람에게 들은 이야기이지만 사실인지 여부는 확실하지 않았다.

만일 사실이라면, 이제 날씨가 점차 추워지고 있는데, 늙은 노모와 병든 아내를 데리고 깊은 산골짜기로 피난을 해야 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집안 식구들은 모두 옷도 변변치 않은데 반드시 추위와 굶주림에 고생할 것이 뻔하였다. 이런 생각이 미치니 오희문은 죽을 때까지 편안한 날이 없겠구나 싶어 하늘이 원망스러워졌다.

6년 동안의 전쟁에 백성들이 모두 파리해졌는데도 하늘이 화를 뉘우칠 줄 모르고 흉한 전란을 다시 만들어 호남과 호서의 백성들이 장차 도탄 속으로 들어가게 생겼으니, 참으로 탄식스러운 일이었다. 하늘은 어질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백성을 어루만지는 법이거늘, 어찌 조선의 백만 백성으로 하여금 모두 불타는 곳으로 몰아넣고 하나도 남기지 않으려 한단 말인가! 정녕 믿기 어려운 것이 하늘이 아니던가! 탄식한들 무엇 하겠는가!

“병자호란을 겪은 거지 이야기”

엄경수, 부재일기, 1714년 9월 1일

1714년 9월 1일. 오늘 엄경수의 집 앞에 헤진 갓을 쓰고 누더기를 걸친 사람이 지팡이를 짚고 문에서 구걸하였다. 몸은 구부정했고 목소리는 힘이 없었다. 안으로 들여 밥을 주며 살펴보니 일개 노인네였다. 밥과 함께 한기를 물리치도록 술도 조금 따라 주었다.

나이를 물어보니 “병자년 호란 때 강화도에서 포로가 되었다가 벗어났는데, 그때가 아홉 살이었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엄경수가 손으로 헤아려 보니 올해 여든일곱이었다. 말로만 듣던 호란을 직접 겪었다고 하니 궁금증이 일었다. 그리하여 그가 겪은 호란 이야기를 청해 들었다.

“성이 함락되고 우리 가족들은 갈대숲 속으로 달아나 사람마다 각각 한 곳을 찾아 숨도록 하여 집안 식구들이 온전하였지만 나만 포로가 되었습니다. 머물러 있을 때는 늘 군진에 구속되어 있었고, 행군할 때는 말을 타고 달렸는데, 어리고 약하여 안정에 붙어 있지를 못하고 곧잘 떨어지곤 하였습니다. 그렇게 오래 지내다 보니 싫어하여 오랑캐에게 다시 버려져 다행히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는 활쏘기에도 재주가 있어 효종 때 내금위에서 군졸을 하였고, 천인은 아니었으나 어떠한 일에 연좌되어 자리를 잃었다고 한다. 아내가 있었는데 20년 전에 죽고 흉년에 땅마저 팔게 되었으며 이후 걸식을 하며 목숨을 이어오고 있다고 한다. 다만 과거 군졸 생활 때 같이 생활하던 자의 손자가 옛일을 기억하고는 그에게 자주 음식과 잠자리를 내어주고 있다고 한다.

엄경수는 아직 병자호란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을 만나본 것도 신기하였지만, 한 사람의 인생역정이 너무나도 기구하여 그의 이야기에 한참 빠져들었다. 그리고 조부의 친구를 잊지 않고 돌보고 있는 사람 역시 참으로 어질다고 할 만하지 않은가? 엄경수는 이 이야기를 듣고 생각에 잠겼다가, 이를 이야기 형식으로 일기에 적어두곤 거기에 ‘거지전’이란 이름을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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