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지금 전쟁이 전 지구적인 유행이 된 시대를 살고 있다. 실시간으로 전쟁을 목격하는 것은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충격이다. 바로 얼마 전 핵보유국인 인도와 파키스탄이 전쟁을 시작했다가 화들짝 놀라 멈췄고, 팔레스타인은 마치 지구상에 원래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처참하게 사라져 가고 있다. 엄청난 화력의 차이로 며칠이면 끝날 것처럼 보였던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내전까지 포함한다면 지구상에는 더 많은 국가들이 전쟁 중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내 나라는 1953년 7월 27일 이후 내내 북한과 휴전 중이고 지구상 유일한 분단국가다.
새로 선출된 교황 레오 14세는 그가 집전한 첫 번째 일요일 미사에서 더 이상의 전쟁은 없어야 한다며 평화를 강조했다. 세상 모두가 평화를 원하는 것 같지만 어딘가에서는 전쟁이 반드시 일어나고, 때로 그것은 한 국가 안에서 일어나기도 한다. 지나온 역사에서 인간이 눈곱만큼이라도 교훈을 얻었다면 전쟁 같은 것은 없어져 마땅한데도 여전히 전쟁은 현재진행형이다. 오늘날의 전쟁은, 전쟁을 일으킨 자들이 전장에 나갈 필요가 거의 없기 때문일까, 위정자들은 자신들의 욕망만으로 전쟁을 일으킬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일까? 대체 왜일까. 위정자가 되어 본 적이 없으니 그 속을 도무지 알 도리가 없다. 여기 그 위정자들의 속내를 조금이라도 짚어보고자 한 영화가 있다.
〈영화 《남한산성》과 영화 《올빼미》 포스터〉 (출처: CJ ENM / ㈜NEW)
하나는 《남한산성》(2017)이고 다른 하나는 《올빼미》(2022)다. 《남한산성》은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으로 피신했다가 결국 처참하게 패해 청나라 칸에게 고개를 조아렸던 시기의 인조를, 《올빼미》는 그로부터 8년 후의 인조를 그를 둘러싼 다양한 인물들을 통해 그린다.
두 영화의 인조는 배우만 다른 게 아니라 행동에 대한 해석도 다르지만, 공통점이라면 이해가 될 듯하다가도 도무지 알 수 없는 면모가 있다는 부분이다. 《남한산성》에서는 그러한 부분이 우유부단함으로 주로 드러나고 《올빼미》에서는 지독한 자격지심으로 표현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래서는 안 되는 최고통수권자로서의 모습이라는 점에서는 한결같다. 그리고 영화 《남한산성》이 원인이고 영화 《올빼미》는 그 결과다. 박해일이 유해진이 되기까지의 8년 동안, 그 안에서는 지독한 악마가 자라난다.
〈영화 《남한산성》에서의 인조〉 (출처: CJ ENM)
영화 《남한산성》은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으로 피신한 인조와 그를 둘러싼 대신들, 산성 안에 함께 갇힌 백성들의 저마다의 주장과 입장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1636년, 인조는 강화도로 피신하려다 청의 선공으로 실패하여 남한산성으로 들어간다. 남한산성에는 약 두 달 정도를 버틸 식량이 있었지만, 대신들과 노비들의 입이 합세하자 식량은 간당간당했단다. 게다가 하필 계절은 엄동설한이요, 먹을 것도 마땅치 않은 산성 위에서 대신들은 명과 청 사이에서 첨예하게 대립한다. 청과 화친을 바라는 이조판서 최명길은 살아야 미래도 있다고 주장하는 실익을 따지는 인물이고, 그 반대에는 명분을 중시하는 예조판서 김상헌이 청과의 결사항전을 주장한다.
김상헌은 대를 위해서는 소를 희생할 수 있다고 믿었던 인물이다. 그는 청나라 군대에게 얼음길을 알려줄 수 있다는 이유로 자신을 도와준 순박한 나루터 영감을 단칼에 베어버리는 인물이다. 영감을 베고 떠나는 그의 결연한 표정에는 자신의 행동에 일말의 후회도 없는 초연함이 드러난다. 그는 신념을 쫓는 인물이라, 어전회의가 열리는 방문을 활짝 열어젖혀 청과의 화친을 권하는 최명길의 목을 베라고 벼락같이 소리 지르는 인물이다. 발이 얼고 손이 어는 추위에도 끄떡 않던 그의 신념은 바로 위기에 봉착한다.
〈영화 《남한산성》에서의 김상헌과 나루, 그리고 최명길〉 (출처: CJ ENM)
그가 죽인 나루터 영감의 하나 남은 피붙이인 어린 손녀 나루가 돌아오지 않는 할아버지를 찾아 산성으로 올라오면서 그의 책임이 되었기 때문이다. 분명 픽션인 나루가 김상헌을 살아있는 인물로 만든다. 어린 나루 앞에서 김상헌은 처음으로 말을 더듬는다. 본인 행동의 결과인, 고아가 된 어린 나루의 모습은 마치 아무 잘못도 없이 전쟁통에 던져져 가진 걸 모두 잃은 민중 그 자체다. 그런데 심지어 나루의 할아버지를 없앤 것은 청나라 군사가 아니라 자신이다. 그는 자신의 행동에 대해 이때 비로소 처음으로 깊이 의심을 품는다.
그와 의견은 다르지만 그에 못지않게 꼿꼿하게 자신의 신념을 관철시키려 하는 인물인 최명길은 언제 목이 잘릴지 모르는 위험한 청의 진영으로 몇 번이나 자진해서 찾아가 피해를 최소화하려 노력한다. 이 두 사람이 저마다의 신념을 위해 매진하는 인물이라면 영의정 김류는 그저 명분만을 내세우며 청나라 군의 압도적인 우세에는 눈 감고 그저 고장 난 시계처럼 청을 오랑캐로 비하하는 ‘통촉’ 머신이다. 하지만 그랬던 그도 최명길과 함께 사자가 되어 거대한 청군의 실체를 눈으로 확인하자 은근슬쩍 최명길의 입장에 올라타 목숨을 부지하려 든다.
하지만 그도 인조도 끝까지 미루고 싶은 것은 ‘책임’이다. 대신들에게 끝없이 의견만 묻는 인조에게 김류는 비굴하게 조아리며 자신은 신하이니 임금은 물을 게 아니라 시키면 그저 따르겠다고 결국 마지막 공을 인조에게 넘긴다. 인조라고 투항이라는 답을 모르는 바가 아님에도 훗날 돌아올 책임을 미룰 누군가가 필요했다.
춥고 좁은 방안을 떠돌던 뜨거운 감자를 덥석 받아 든 것은 결국 최명길이다. 인조는 최명길과 독대했을 때 최명길이 훗날 받게 될 고초를 두 번 세 번 확인한다. 그때 마치 인조는 최명길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함과 힘없는 자신에 대한 절망이 모두 담긴 복잡다단한 감정을 내비치지만 대사 그 자체만으로 보자면 자신의 투항을 모두 최명길의 탓으로 미룰 수도 있음을 정확하게 언급하고 있다.
영화 《남한산성》에는 실존인물로 기록된 서흔남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듯한 대장장이 날쇠와 성벽을 지키는 숱한 ‘백성들’과 어린 나루 등의 생생한 인물들이 있지만, 결국 이 영화는 인조와 최명길과 김상헌 그리고 하나로 뭉그러진 백성의 이야기다.
백성은 거들뿐. 영화의 말미에서 인조는 청나라 칸 앞에 무릎을 꿇고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를 올린다. 이게 바로 초등학생도 안다는 인조의 삼전도비의 굴욕이다. 삼배구고두례란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법으로 한 번 절할 때마다 세 번씩 머리를 바닥에 닿도록 조아리기를 세 번 거듭하는 것이다.
영화 속 인조의 머리에는 맨땅의 흙이 묻는다. 최명길은 그 옆에서 느껴 운다. 울음을 참을 수가 없는 것이다. 누구보다 울고 싶은 사람은 인조이지만 그 울음마저도 인조는 마음껏 울 수가 없다. 통곡마저도 최명길의 것이지, 인조의 것이 되지 못한다. 그리고 이 인조의 마음에 새겨진 수치는 그대로 고통이 되어 날이 갈수록 커진 뒤 인조를 삼키는 어둠이 된다. 그 이야기가 바로 영화 《올빼미》이다.
〈영화 《올빼미》 속 인조와 소현세자〉 (출처: ㈜NEW)
《올빼미》의 주인공은 주맹증을 앓고 있는 맹인 침술사 천경수지만 그의 모든 행동은 인조의 결정에 의해 휘둘린다. 낮에는 안 보이지만 밤에는 시력이 조금 돌아오는 주맹증 환자인 천경수는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병세를 설명하지 않고 그저 맹인으로 알려져 있다. 눈이 불편한 대신 다른 감각이 비상하게 발달했고 특히 청력이 뛰어나다. 영화는 모든 빛이 사라진 후 비로소 볼 수 있는 그의 약점인 주맹증 설정을 공격적으로 활용하며 초반에는 코믹하게 후반에는 몸의 털이 오소소 설 정도의 스릴러로 이용하여 영화적 재미를 끌어낸다. 허나 이 글에서 초점을 맞추는 인물은 생각보다 많이 등장하지 않으면서도 만악의 근원인, 그러나 악마라고 하기에는 지극히 쪼잔하고 치졸한 인물이 되어버린 인조다.
삼전도의 굴욕 이후 그의 내부에서 자란 악마가 아들인 소현세자마저 적으로 돌리는 적이 되어 튀어나온다. 사실 그의 내부에서 자란, 자기 자신에 대한 수치심으로부터 비롯된 먹이를 먹고 자란 이 악마에게 있어서 권력은 누구도 빼앗아갈 수 없는 절대적인 가치다. 후궁인 소용 조 씨의 꼬드김이나 청나라 사신의 모욕은 권력에 대한 집착에 불을 끼얹는 촉매제이자 핑계다. 인조의 대척점에 서는 인물이 앞 못 보는 평민 침술사 천경수라는 점이 의미심장하다.
〈영화 《올빼미》의 임금 인조와 맹인 침술사 천경수〉 (출처: ㈜NEW)
천경수는 비록 남들이 보는 때에는 볼 수 없으나 어둠 속에서 눈을 떠 처음 써 내린 것이 하나뿐인 동생에게 보내는 편지일 정도로 우애가 깊은 인물이다. 세상천지에 하나뿐인 혈육에 대한 그의 애틋함은 아비이자 할아비인 인조의 무자비하고 병적인 권력욕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상식선 너머의 괴물이자 없애고 싶은 거대악이다. 자신의 아들을 죽일 수 있는 자가 백성을 살릴 것이라고 누가 믿겠는가.
그러나 침술사인 그도, 최명길도, 김상헌도, 날쇠도 알 수 없는 것이 주상의 속마음인 것이다. 나라의 모든 것을 책임지는 자리에 오른 자의 무게, 책임이라고는 지지 않고 오로지 즐기고만 싶은 그 마음, 그러나 그렇게 놔두지 않는 자리의 고통. 가져보지 않은 자는 결코 알 수 없는 심연이 그곳에 있다.
영화를 만든 자들은 그 무게를 감히 가늠해 본다. 그러나 그 무게에 연민은 실리지 않는다. 최고책임자의 책임지지 않는 행태가, 그저 권력만을 탐하고자 하는 행태의 결말은 가장 낮은 자로부터의 거부다.
영화 《남한산성》의 마지막 장면을 장식하는 것은 흙바닥에 머리를 조아리는 인조가 아니라 봄을 맞는 어린 나루다. 미래는 인조의 머리통에 있지 않고 성(姓)도 없는 아이 나루에게 있다. 영화 《올빼미》에서 마지막에 눈을 뜨는 것은 인조가 아니라 천경수다. 헤아릴 수 없는 최고책임자의 책임에 대한 무게를 이해하나, 사람이 해서는 안 되는 짓을 해서는 안된다고, 늘 ‘백성’은 말해왔다.
대부분의 영화는 전쟁이 끝나면 모든 게 끝난다. 하지만 이 두 영화는 보여준다. 그 이후의 삶이, 꼭대기부터 바닥까지 모두 위태롭게 흔들린다는 것을. 그것도 아주 오랫동안, 파멸에 이르기까지 전쟁은 누구 한 명 비켜가지 않는다.
시기 | 동일시기 이야기소재 | 장소 | 출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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