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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도 계속되는 삶

나라 안팎이 어지럽습니다. 세상 여기저기서, 각각 여러 이해관계에 얽혀 경쟁하거나 갈등하고 있는 모습들이 보입니다. 관계에서의 갈등이 전쟁으로 치닫게 되면 관계를 맺고 유지하게 했던 질서가 변합니다. 전쟁에는 극심한 피해와 희생, 고통이 뒤따릅니다. 이번 호에는 어지러운 세상 속에서 고통을 겪었던 사람들의 자취와 그 자취를 더듬었던 작품들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고 합니다.

16세기 말~17세기 전반기에 조선은 왜란과 호란이라고 하는 큰 전쟁을 겪었습니다. 일본이 명나라를 정벌하기 위한 길을 조선에게 빌려달라고 하면서 왜란이 일어났고, 여진[후금, 청]이 명을 정벌하기 이전에 배후의 조선을 견제하면서 호란이 일어났습니다. 두 나라의 명나라에 대한 도전으로 조선이 전쟁을 겪었다는 점에서 당시 조선의 외교정책이 궁금해집니다.

윤승희 선생님은 “사대교린, 조선이 선택한 외교 공식”에서 당시 조선의 외교정책에 대해 알기 쉽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조선은 건국 초부터 사대교린(事大交隣)을 외교정책으로 선택하여 명나라와는 조공책봉관계를 맺었고 일본․여진 등과는 교린관계를 맺었습니다. 여기에는 실리를 챙기면서도 자주성을 지키는 한편 은혜를 베풀면서 우월성을 내보이려던 조선의 정치적 계산이 내포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조선의 외교에서 ‘명과의 사대외교는 당시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보편성을 자발적 능동적으로 수용하는 과정이었고, 일본과 여진을 포함한 교린외교는 스스로를 또 다른 국제질서의 중심으로 자리매김하며 상대를 통제의 대상으로 삼는 행위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조선의 외교정책은 15세기 말부터 위기에 봉착하게 됩니다. 국력을 축적한 일본과 여진[후금, 청]이 국제 질서에 대해 무력으로 도발하게 되면서, 당시 국제 질서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던 조선을 침략하게 되었습니다. 왜란과 호란이라 명명되는 이 침략 전쟁의 참화는 기록에 남아 오늘날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습니다.

조인희 선생님은 “『용사일기(龍蛇日記)』, 용의 해에서 뱀의 해로 이어지는 이야기”란 글에서 송암(松巖) 이로(李魯) 선생께서 남긴 『용사일기』에 대해 설명해 주셨습니다. 여기에는 임진왜란 중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 선생의 행적을 전하고 있습니다. 같은 이름으로 임진왜란을 겪은 이들의 일기가 몇 종 더 있는데, 이와 같은 개인들의 기록은 실록과 같은 공적인 자료에서는 담아내지 못했던 그들의 목소리를 담고 있습니다. 호란과 관련해서는 『병자록(丙子錄)』, 『산성일기(山城日記)』와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이와 같은 기록들에도 불구하고 담지 못한 목소리들이 있습니다. 여성·아이·사회적 약자의 목소리입니다. 오늘날의 창작자들은 옛 기록의 행간에서 이들 목소리를 어렵게 찾아내어 작품에 녹여내고 있는데, 뮤지컬 《여기, 피화당》과 영화 《남한산성》, 《올빼미》, 드라마 《연인》, 《세작》이 그런 작품들입니다.

이수진 작가님은 “전쟁이 지나고 난 후”에서 영화 《남한산성》, 《올빼미》에 대해 말씀해 주셨습니다. 조선이 택한 외교정책의 결과로 전쟁이 불가피했었다고 해도, 그 정책을 세우고 수행한 위정자에게는 분명 책임이 있습니다. 《남한산성》 속의 인조는 그 책임을 회피하고 다른 이에게 전가하려 하였고, 그 결과 《올빼미》에서는 차마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한 아버지이자 왕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와 같은 작중 인조의 모습은, 오늘날의 우리가 조선시대 인조 임금님에게, 그리고 오늘날의 위정자에게 던진 질문이 아닐까 합니다. 이 질문에 대해 영화에서는 김상헌, 최명길 그리고 맹인 침술사 천경수가 답을 내어놓고 있는데, 그들의 답은 《남한산성》의 나루라는 아이이고, 《올빼미》의 눈 뜬 천경수입니다.

뮤지컬 《여기, 피화당》에서는 호란을 겪었던 여성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고전소설 『박씨전』이라는 모티브가 호란을 겪은 이들의 이야기를 담아낸 작품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작품을 집필하신 김한솔 작가님께서 “지금은 어둠 속에 있지만, 언젠가는 : 뮤지컬 《여기, 피화당》을 쓰며”에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전쟁 통에 나라의 보호를 받지도 못했고, 전쟁 후엔 배척까지 받았던 그녀들이 자신의 고통, 슬픔을 꾹꾹 눌러 담아 『박씨전』을 한 글자 한 글자 써 내려갔을 것을 떠올리니 가슴 한편이 저릿해옵니다.

공연 중 그녀들의 붓을 쥔 손에서 연대를 보았고, 그녀들의 발걸음에서 희망을 보았습니다. 고전소설 『박씨전』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는 것, 그로 말미암아 참화를 겪은 이들이 희망으로 계속 살아간다는 것을 보여주는 작품이 나오고 있다는 것에서, 그때나 지금이나 목소리를 내고자 하는 이들과 듣고자 하는 이들이, 공감으로 시공을 초월해 연대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이문영 작가님은 “망허산에 전쟁 날 뻔”이란 이야기에서 전쟁이 일어나게 되는 과정을 망허산에 도깨비들이 침략해 오는 모습을 통해 보여 주고 있습니다. 결국 백이와 목금, 망허산의 영괴들이 합심하여 방어하자 도깨비들은 떠나게 됩니다. 망허산을 침략한 도깨비가 다른 전쟁에서 뿌려진 피로 인해 생성된 도깨비라는 것, 이들을 멈추게 한 것이 목금이가 흘린 피라는 것은 전쟁이 또 다른 전쟁으로, 피해가 또 다른 피해로, 희생이 또 다른 희생으로 이어져 계속되리란 것을 보여 주는 것 같습니다.

왜란과 호란으로 당시 동아시아 국제질서는 요동을 쳤지만, 양란 후에 질서의 중심이 명나라에서 청나라로 바뀌었을 뿐 중국 중심의 세계질서는 계속되었고 조선의 사대교린이란 외교공식도 계속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국제관계와 질서에서 무엇을 구할 것인가에 대한 조선인의 고민들도 이어졌습니다. 조선후기 실학자 박제가 선생의 고민과 성과는, 서은경 작가님의 독선생이, 박제가 선생께 얻어온 고구마 화분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시대도, 처한 상황도 다르지만 오늘날에도 이 고민은 계속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편집자 소개

조경란
조경란
재밌는 이야기를 좀 더 많이 알고 싶어서, 서강대에서 역사 공부를 하였습니다. 박사과정(한국사전공)을 수료한 후 사단법인 세종대왕기념사업회에서 연구원으로 일하면서 계속 역사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공부하면서 알게 된 이야기들을 혼자만 알고 있는 게 아까워서 드라마 역사 자문에 응하게 되었습니다. 참여했던 작품이 《세작-매혹된 자들》, 《붉은 단심》, 《옷소매 붉은 끝동》, 《녹두꽃》, 《장영실》, 《징비록》, 《정도전》 등 20여 편 정도 됩니다
“오랑캐가 압록강을 넘어왔다는 소식을 듣다”

김령, 계암일록, 1627년 1월 20일

1627년 1월 20일, 김령은 조카 김광적에게 새로운 소식을 들었다. 김광적이 아버지인 김호의 묘를 옮기는 일 대문에 안동 관아에서 감사와 만나고 온 길이었다. 감사가 산송 문제로 당사자들에게 사실을 확인하고 있는데, 갑자기 선전관이 말을 달려 관아에 당도하였다. 그리고 말하기를 ‘서북쪽 오랑캐 수만 명이 의주를 포위하고 또 선천에 들어왔으니, 감사는 군마를 불러 모으고, 호패어사 또한 머물지 말고 급히 서울로 돌아오라는 명령이다’ 라고 하였단다. 정말로 놀라운 일이었다.

그 뒤 자세한 내막을 들으니 오랑캐가 이달 13일에 압록강을 건너 의주를 포위하였는데, 의주성은 매우 공고하여 방어할 준비가 다 되었으나 안에서 내통하여 문이 열렸다고 한다. 그리하여 의주부윤 이완은 스스로 불에 타 죽고, 의주 판관 최몽량은 피살되었으며, 한명련의 아들 한윤 및 박난영 같은 이들은 모두 돌아왔다고 한다. 우리나라 장수와 군사들 중 저들에게 투항한 자들도 많이 왔는데, 그 가운데 강홍립도 있었다고 한다. 적의 군사들이 무인지경으로 우리나라를 침입하고, 또 안주를 함락시켰으며, 여섯 가지 항목을 들어 조선에게 죄를 물었다고 한다. 그리고 오랑캐들 스스로 대금이라 칭하고 황제를 자처하였다고 한다.

임진년 왜구들이 조선 산하를 한바탕 피로 물들인 것이 30년도 되지 않았는데, 다시금 이런 병란을 겪게 되다니... 김령은 이러한 전란을 초래한 조정의 무능력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명과 여진의 대립, 변화하는 국제 정세와 간신들 탓에 어지러운 조선”

김령, 계암일록, 1618년 8월 1일

1618년 8월 1일, 도성이 술렁거렸다. 모두 큰 난리가 일어날 것이라고 하며 백성들이 다 도망쳐 나가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사대부의 집들도 줄을 이어 성을 빠져 나오니 성은 이미 비어 어찌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누르하치가 명나라와 대치하고 있어서 조선에는 금방 닥칠 급한 일이 없을 텐데도, 백성들의 불안한 마음은 달랠 도리가 없었다.

성 안은 모두 비었고 교외 강가는 사람들로 가득 차 분잡한데, 재물로 부녀를 바치거나 혹 절취당하기도 했다고 한다. 임금 또한 행행(行幸)을 8월 13일에 나가려다가 아직 못나갔는데 27일에 나갈 것이라고 모두들 말하였다. 이 소문의 근원은 대체 어디란 말인가. 상황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권세를 가진 간신들이 나라를 그르친 죄를 이루 다 벌할 수가 없다.

“위아래를 가리지 않는 전란중의 굶주림”

금난수, 성재일기, 1593년 3월 2일

임진왜란이 일어난 후, 전 국토는 황폐화되고 농민들은 전란의 화를 피하기 위해 이리저리 도망 다녀야 했다. 그 덕분에 농토는 모두 버려져 농작물이 자라지 못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다음 해인 1593년 봄, 춘궁기가 되자 굶는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보리를 심으려 해도 남자들은 왜적을 막기 위한 군대에 차출되어 나아가고, 향촌에 남은 것은 지난 전염병 유행에서 근근이 살아남은 노인과 아이들, 그리고 여성들뿐이었다. 금난수의 집은 그나마 조금 사정이 나았다. 비록 향병으로 나아간 사람들을 위해 군량미를 대느라 전처럼 풍족하지는 못하였지만 적어도 굶지는 않을 정도였다.

이런 금난수의 집 대문을 두드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개령(開寧, 현 경북 김천)에서부터 온 김익휘(金益輝)는 염치불구하고 그의 어버이를 위해 양식을 나누어 달라 청하였다. 자기 한 몸을 위해서가 아니라 연로한 어버이를 위해서라는 말에 금난수는 빠듯한 살림을 나누어 주었다. 어찌 이런 전란 중에 홀로 배불리 먹을 수 있었겠는가. 하지만 여름이 되어도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춘궁기에 종자까지 모두 먹어버린 사람들은 농사를 지을 수 없었고, 자연히 수확할 것 자체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그나마 형편이 나은 사람들의 곡식을 훔치는 좀도둑도 발생하여 문제가 되었다.

결국 8월 3일에는 관아의 창고를 열어 진휼미(賑恤米)를 분배하였다. 관아의 곡식은 곧 나라의 재산이었기 때문에 이에 대해 보고서를 작성해 순찰사에게 올려야 했다. 구휼을 하기는 했으나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일 뿐이었다. 농민들을 정착시켜 농사를 짓게 한다고 해도 당장의 양식을 구하기란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었다.

결국 한 해 동안 충분한 양식을 재배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다음 해인 1594년 봄에는 사족들도 굶기 시작하였다. 금난수의 처남 조목은 자신의 서자 조수붕을 보내와 자신의 궁색함을 구휼해 달라고 청하였다. 처남의 성격을 생각해 보았을 때 체면을 고려하여 한참 동안 굶으며 참다가 가솔들을 위하여 겨우 청한 것일 터였다. 금난수는 그를 딱하게 여기며 곡식을 보내 주었다.

“귀국길에 오르자마자 굶주린 백성들을 보다”

이기헌, 연행일기계본, 1802년 2월 8일 ~

1802년 2월 8일, 이기헌(李基憲)은 고국으로 돌아가기 위한 여정에 있었다. 동지사로 청나라에 들어와 주어진 임무를 마치고 그리운 고국을 향해 가던 길이었다. 이틀간 길을 따라오니 반산이란 곳을 지나게 되었는데, 이곳은 바로 청나라의 중흥을 이근 강희제와 건륭제 두 황제의 능이 있는 곳이었다. 멀리 푸른 소나무 사이로 궁전같은 건물이 비쳤는데 바로 청나라의 별궁(別宮)이었다.

저녁 무렵에 계주란 곳에 이르러 유숙하였다. 이 고장은 중국 역사의 곳곳에 자취를 남기고 있는 유명한 고을이었다. 진나라와 한나라 시대는 어양군에 속했고, 위나라와 진나라 시대는 유주에 속하였다. 당나라 천보 연간에 다시 명칭을 어양군으로 고쳤다. 금나라 때는 이곳을 중도(中都)로 삼아 매우 번성했던 곳이었다. 한나라 광무제 때 반란을 일으킨 팽총도 이곳을 근거로 했고, 당나라 현종 때 반란을 일으킨 안녹산과 사사명도 이곳을 근거로 난을 일으켰다. 이곳 여양의 돌기병은 매우 용맹하여 천하무적으로 소문난 병사들이었다.

계주 성 북쪽에는 전설 속의 통치자인 황제(黃帝)가 광성자란 사람에게 도를 물어본 곳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이 계주성을 들어올 때 성 밖에는 굶주린 백성들이 들판에 가득하였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 그릇을 들고 나와 있었다. 그곳 사람 이야기가 매일 500~600명에게 식량을 나누어주는데, 그 양이 매우 많다고 하였다. 청나라 수도와 이틀거리이고, 한때 천하의 중심이기도 하였으며, 숱한 영웅호걸들이 낳다가 사라진 땅이건만 정작 배고픈 백성들을 구원해 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과거의 찬란한 영광이 저 백성들에게 무슨 소용이겠는가. 이런 생각이 미치자 이기헌은 씁쓸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통신사 부사 임수간의 배포”

조선통신사병풍(강호성내응접도)
(출처: 부산광역시립박물관)
엄경수, 부재일기, 1712년 3월 1일

1712년 3월 1일. 작년 일본으로 떠났던 통신사 일행이 돌아왔다. 그런데 조선과 일본 사이에 피휘와 관련된 시비가 발생했고, 사신단은 그 일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했다는 것으로 귀국과 함께 조사를 받게 되었다.

그럼에도 통신사의 부사였던 임수간은 상당한 기개를 보여주었다. 정사가 탄 배는 무사히 일본에 도착하였으나, 부사가 탄 배는 떠날 때 바다 한가운데에서 배가 부서져 거의 뒤집힐 뻔하여 일본 사람들이 급히 작은 배를 불러 부사에게 옮겨 타게 하였는데, 이때 부사 임수간이 “내가 한 번 동요하면 배에 탄 수백 명 모두는 살 수가 없다.”라고 말하며 완강히 거부하였다고 한다. 그리고는 굳게 앉아 지휘하였는데, 겨우 배가 전복되지 않고 부산으로 돌아와 수리할 수 있었다고 한다.

부사의 고생은 일본에서 돌아올 때도 계속되었는데, 바다 한가운데서 비바람을 만났다고 한다. 깜깜하고 어두운 시간에 절영도에 급히 정박하려는데 날씨가 너무 어두워 도저히 정박할 곳을 찾지 못하였다고 한다. 배가 부서지려 하자 급히 사람을 시켜 물의 깊이를 살피게 하니 아주 얕았다고 한다. 등이 잠길 정도의 깊이임을 확인하고 일행을 모두 내리게 하였는데, 깜깜한데다 비가 강하게 쏟아부어 어디로 향할지 모르다가 겨우 길을 찾아 언덕에 오르고, 그길로 수십 리를 걸어서 비로소 인가를 찾아 폭풍을 피할 수 있었다고 한다.

날이 밝아서 살펴보니 겨우 몇 리 길을 한참 돌아온 것이었고, 배에 있던 물건은 모두 쓸려가 남은 것이 없었다. 그래도 절체절명의 순간 부사의 용기와 침착한 지휘로 사람은 한 명도 다치지 않았으니, 부사의 배포와 냉철함은 참으로 감탄할 만한 일이었다.

“서울 사람이 전한 전란 소식에 비통함에 빠지다”

오희문, 쇄미록, 1597년 8월 23일

1597년 8월 23일, 요사이 다시금 전란의 소식이 들려와 오희문은 종일 마음이 어수선 하였다. 얼마전 들으니 내 건너 안협 고을에 서울 사람이 와서 살고 있다 하여, 민시중, 김언실 등을 시켜 만나보고 적의 소식을 들어오게 하였다. 오늘 민시중과 김언실이 찾아와 서울 사람에게 들은 이야기를 전해 주었다. 이야기를 듣자니, 적은 이미 남원성을 함락시켰고, 중전은 장차 관서땅으로 피난을 간다고 한다. 비록 서울 사람에게 들은 이야기이지만 사실인지 여부는 확실하지 않았다.

만일 사실이라면, 이제 날씨가 점차 추워지고 있는데, 늙은 노모와 병든 아내를 데리고 깊은 산골짜기로 피난을 해야 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집안 식구들은 모두 옷도 변변치 않은데 반드시 추위와 굶주림에 고생할 것이 뻔하였다. 이런 생각이 미치니 오희문은 죽을 때까지 편안한 날이 없겠구나 싶어 하늘이 원망스러워졌다.

6년 동안의 전쟁에 백성들이 모두 파리해졌는데도 하늘이 화를 뉘우칠 줄 모르고 흉한 전란을 다시 만들어 호남과 호서의 백성들이 장차 도탄 속으로 들어가게 생겼으니, 참으로 탄식스러운 일이었다. 하늘은 어질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백성을 어루만지는 법이거늘, 어찌 조선의 백만 백성으로 하여금 모두 불타는 곳으로 몰아넣고 하나도 남기지 않으려 한단 말인가! 정녕 믿기 어려운 것이 하늘이 아니던가! 탄식한들 무엇 하겠는가!

“병자호란을 겪은 거지 이야기”

엄경수, 부재일기, 1714년 9월 1일

1714년 9월 1일. 오늘 엄경수의 집 앞에 헤진 갓을 쓰고 누더기를 걸친 사람이 지팡이를 짚고 문에서 구걸하였다. 몸은 구부정했고 목소리는 힘이 없었다. 안으로 들여 밥을 주며 살펴보니 일개 노인네였다. 밥과 함께 한기를 물리치도록 술도 조금 따라 주었다.

나이를 물어보니 “병자년 호란 때 강화도에서 포로가 되었다가 벗어났는데, 그때가 아홉 살이었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엄경수가 손으로 헤아려 보니 올해 여든일곱이었다. 말로만 듣던 호란을 직접 겪었다고 하니 궁금증이 일었다. 그리하여 그가 겪은 호란 이야기를 청해 들었다.

“성이 함락되고 우리 가족들은 갈대숲 속으로 달아나 사람마다 각각 한 곳을 찾아 숨도록 하여 집안 식구들이 온전하였지만 나만 포로가 되었습니다. 머물러 있을 때는 늘 군진에 구속되어 있었고, 행군할 때는 말을 타고 달렸는데, 어리고 약하여 안정에 붙어 있지를 못하고 곧잘 떨어지곤 하였습니다. 그렇게 오래 지내다 보니 싫어하여 오랑캐에게 다시 버려져 다행히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는 활쏘기에도 재주가 있어 효종 때 내금위에서 군졸을 하였고, 천인은 아니었으나 어떠한 일에 연좌되어 자리를 잃었다고 한다. 아내가 있었는데 20년 전에 죽고 흉년에 땅마저 팔게 되었으며 이후 걸식을 하며 목숨을 이어오고 있다고 한다. 다만 과거 군졸 생활 때 같이 생활하던 자의 손자가 옛일을 기억하고는 그에게 자주 음식과 잠자리를 내어주고 있다고 한다.

엄경수는 아직 병자호란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을 만나본 것도 신기하였지만, 한 사람의 인생역정이 너무나도 기구하여 그의 이야기에 한참 빠져들었다. 그리고 조부의 친구를 잊지 않고 돌보고 있는 사람 역시 참으로 어질다고 할 만하지 않은가? 엄경수는 이 이야기를 듣고 생각에 잠겼다가, 이를 이야기 형식으로 일기에 적어두곤 거기에 ‘거지전’이란 이름을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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