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심하게 부는 소리라 생각했다. 낡은 문짝이 바람에 흔들리며 귀신 우는 소리 같은 걸 낸다고 생각했다. 아니었다.
“으, 대체 뭐야?”
목금은 눈을 비비며 베개 위로 손을 올려 옷부터 찾았다. 어둠 속에서 옷을 꿰어 입은 뒤 등잔불에 불을 붙였다. 문고리가 덜컥거렸다.
“누구야?”
대답은 들리지 않고 바람 소리만 거세게 났다. 하지만 잘 귀를 기울이니 그 안에 어떤 소리가 섞여 있었다.
“크… 은… 일… 저… 어… 언… 재… 앵….”
큰일? 전쟁? 갑자기 정신이 쨍하고 들었다. 목금이 후다닥 달려가 방문을 열어젖혔다.
“누구야? 어딨어?”
고함을 질렀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사립문 밖으로 흐릿하게 사라지는 검은 그림자가 얼핏 보인 것 같았다.
“뭐야? 전쟁이란 말만 하고 가버리면 어떡해? 어쩌라고?”
그때였다. 손목의 팔찌가 부르르 떨더니, 뱀으로 모양을 바꾸었다.
“초록이…?”
초록이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문지방을 넘었다.
“따라오라는 거야?”
초록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목금이 짚신을 꿰차고 초록이 뒤를 따라갔다. 초록이는 망허산으로 올라가는 길로 접어들었다.
“목금아!”
“어? 백이야?”
먼저 보인 건 불의 신 양수의 새 불돌이었다.
“너도?”
둘이 같은 말을 내뱉었다. 백이도 이상한 소리에 잠을 깼더니 불돌이가 따라오라고 해서 쫓아왔다가 목금이와 초록이를 보았다는 거였다. 목금이 물었다.
“그러니까… 전쟁?”
백이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두 소녀는 서로가 있어 다행이라 생각하며 손을 꼭 붙잡고 초록이와 불돌이 뒤를 따라 망허산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이리로 가면 망허정 나오는 거 아냐?”
백이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목금이 고개를 끄덕였다. 날이 따뜻해진 지 오래였지만 산속은 여전히 추워서 손발이 덜덜 떨렸다. 평소보다도 더 추운 것 같았다.
망허정에 불이 켜져 있는 것 같았다. 불빛이 비치는데 조금 이상해 보이기도 했다. 불빛이 가만있지 않고 많이 흔들리는 것 같았는데, 바람이 심하니까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지만… 사실은 바람은 전혀 불지 않았다. 더구나 그 불빛은 흔들리는 게 아니라 움직이는 중이었다. 백이가 목금의 손을 꽉 쥐었다.
(출처: Google 이미지 검색)
“도깨비불 아냐?”
“그런가 보다.”
백이가 소곤거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그때 수풀 속에서 검은 그림자 하나가 불쑥 나타났다. 하마터면 고함을 지를 뻔한 백이는 간신히 두 손으로 입을 막는 데 성공했다.
“더 가면 안 된다.”
검은 그림자는 조금씩 형체를 갖추기 시작했는데, 소금장수 모양을 하고 있었다. 목금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기, 윤 초시네 소금장수예요, 아니면…”
“윤 초시는 누군지 모른다. 넌 전에 날 보지 않았니? 평서대장군에게 죽은 갑돌이다.”
윤 초시네 소금장수는 몸만 여우 귀신에 빙의되었으니 아닐 것 같긴 했다. 일전에 망허산 초입에서 한 사또와 함께 만났던 홍경래 난리 통에 죽은 무사귀신이었다. 그때 다른 무사귀신은 악귀인 그슨대로 변해서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었다.
“아저씨가 우리 집에 왔었어요?”
백이의 물음에 소금장수 귀신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큰일 났다. 저기 불빛 보이지? 저거 다 도깨비불인데 지금 우리 마을로 쳐들어온 거다.”
“도깨비불이요? 왜요?”
“도깨비불은 도깨비들이 날아다닐 때 변해서 되는 건데…”
목금이 급히 소금장수 귀신의 말을 끊었다.
“그러니까 도깨비들이 왜 우리 마을로 온 건데요?”
“그건 여기 망허정 때문이야.”
“네?”
점점 더 알 수 없는 말들이었다.
(출처: Google 이미지 검색)
“이럴 때가 아니야. 도깨비들이 망허정을 차지하면 마을 사람들에게도 난리가 난다. 도깨비들은 세상 물정을 모르는 장난꾸러기들이고, 특히 저 도깨비들은 평서대원수 난리 통에 생긴 것들이어서 더 사납거든.”
평서대원수는 소금장수를 죽인 병사들의 우두머리인 홍경래를 가리킨다. 지금부터 20년쯤 전에 일어났던 난리였다. 저 멀리 북변은 모두 평서대원수 손에 들어갔고 그 난리 통에 사람들이 수없이 죽었다고 했다.
“그때 사람들이 뿌린 피가 묻은 물건들이 도깨비가 되었어. 그래서 그렇게 사나운 거야.”
목금이 다시 물었다.
“망허정이 그렇게 중요한 곳이에요? 저길 차지하면 마을 사람들에게도 피해가 간다고요?”
소금장수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저긴 원래 음기가 가득한 곳이라 요괴와 정령들이 모이는 곳이야. 삼한 시대에는 저기에 소도라는 게 있었대.”
“소도요?”
“응응. 소도에는 큰 나무가 있는데, 거기에 방울과 북을 달아놓고 귀신을 섬겼대. 귀신들이 해코지를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미리 치성을 드리는 거야.”
“섬기는 방식이 따로 있었어요?”
“응. 춤을 췄대. 이렇게 땅을 한 번 밟았다가 들어 올리고 손뼉을 치고 다시 땅을 밟고… 그러면서 둥글게 맴을 도는 거야.”
소금장수는 갑자기 신난 듯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깜짝 놀란 백이와 목금이 소금장수를 주저앉혔다.
“지금 춤출 때가 아니잖아요. 도깨비들이 다 쳐다보겠어요.”
“아참, 그렇지. 그래서 지금 망허산의 영괴들이 모두 모이는 중이야. 저것들을 막아야 하거든.”
〈도깨비 형상의 기와〉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쿵 소리가 나더니 홀연히 노루 요괴인 장선생이 등장했다.
“너희 도깨비들은 듣거라. 어찌 우리 땅에 나타나 소란을 피우고 있는 것이냐? 썩 물러가지 못할까?”
도깨비불 하나가 흔들리더니 험악한 모습의 도깨비가 되어 나타났다. 장대처럼 커다란 키, 퉁방울 같은 눈, 커다란 귀, 큼지막한 입을 가지고 있었다. 푸른 옷을 입고 커다란 절구공이를 들고 있었다.
“무슨 권리로 우리에게 떠나라는 거야?”
“나는 이 산 영괴들의 우두머리다. 썩 물러가라.”
“여긴 소도고 소도에 온 이는 내쫓기지 않는 법이다. 그것도 모르는 주제에 우두머리 행세를 하는 거냐?”
“소도…?”
장선생은 정말 소도가 뭔지 모르는 것 같았다. 오래 산 걸 자랑하는 염소 요괴가 얼른 달려가 장선생에게 귓속말을 했다.
“음… 음… 그러니까 천오백 년 전에 있던 거라고? 이것들이 어디서 옛날 고릿적 이야기를 들고 와서 소란이야?”
장선생이 다시 한번 쿵 하고 발을 구른 뒤에 고함을 내질렀다.
“인간들이 만들었던 소도 같은 건 없어진 지 천 년도 넘었다. 이제 와서 헛소리하지 말고 빨리들 꺼져라.”
장선생의 말에 도깨비불들은 하나둘 사람 형체를 갖추기 시작했다. 도깨비들은 자기들끼리 웅성대기 시작했다.
“소도가 없다니, 그게 무슨 소리냐?”
“여기 오면 안전하다고 해서 온 거 아니었냐?”
“그럼 우리 지금 속은 거야?”
“어차피 이판사판이야. 이제 와서 어쩔 거야? 여길 차지하는 수밖에 없어.”
뿔이 나 있는 도깨비가 여기를 차지하자는 말을 하자 도깨비들이 그 말에 따르려는 것 같았다.
“맞아. 갈 데도 없잖아. 여긴 음기가 충만해서 우리 살기 좋은 곳인 것 같아.”
“무주공산이라고 했잖아. 이제부터 우리가 주인하면 되지.”
장선생이 듣다가 못 참겠다는 듯이 꽥 소리를 질렀다.
“지금 무슨 소리들 하는 거냐! 썩 꺼져라.”
도깨비들이 일제히 장선생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우선 텃세 부리는 저 노루부터 때려잡자.”
“때려잡자!”
〈낙동강변에 세워진 솟대. 솟대는 소도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출처: 양산신문)
그러자 장선생 뒤에 있던 요괴들도 일제히 고함과 욕설을 내뱉으며 몸을 일으켰다. 숫자로는 전혀 밀리지 않는 상태였다.
“한판 하자면 쫄 줄 알았냐? 어디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내려고 해?”
이러다가 정말 크게 싸움이 벌어질 것 같았는데, 갑자기 백이가 벌떡 몸을 일으키더니 앞으로 뛰쳐나갔다. 목금은 전혀 생각도 못한 일이라 어어, 하다가 백이를 붙잡지 못했다.
“왜들 그렇게 싸우려고 그래요? 말로 해요.”
도깨비와 요괴들 모두가 깜짝 놀란 모양이었다.
“사람이다.”
“사람이 왜 여기 있어?”
그러거나 말거나 백이가 계속 말했다.
“듣자니 도깨비들은 씨름을 좋아한다면서요. 그럼 씨름을 해서 결정하는 게 어때요?”
도깨비들이 반색했다.
“씨름을 하자고? 좋지, 좋아.”
하지만 요괴들 얼굴은 좋지 못했다.
“안 돼, 안 돼. 그건 도깨비들한테만 좋은 거야. 저것들은 맨날 씨름만 한다고.”
쉽게 합의가 이뤄지지 않을 것 같았다. 목금은 기왕 이렇게 된 거 어쩔 수 없다 생각하고 백이 옆에 가서 섰다.
“도깨비 여러분들. 저 먼 북방에서 어쩌다 여기 망허산까지 오게 된 건가요?”
도깨비들이 서로 얼굴을 쳐다보다가 우물우물 이야기를 꺼냈다.
“그건… 누가 여기 가면 편히 살 수 있다고 해서… ”
“우리는 보통 도깨비가 아니야. 전쟁터에서 흘린 피로 만들어졌지. 성질이 급하고 난폭해서 웬만한 곳에선 살 수가 없거든.”
“깊은 산들 속에 있는 조용한 곳이 우리한테 필요해.”
“그래서 여우 누이가 알려준 곳에 온 거야.”
“소도가 있어서 가면 무사할 거라고 했지.”
“맞아, 맞아.”
목금이 깜짝 놀라 도깨비들의 말을 잘랐다.
“여우 누이라고요?”
〈AI로 생성한 망허산의 영괴들 이미지〉
폐가에서 달아난 여우가 도깨비들을 이리 보낸 것이 틀림없었다. 망허산에서 망허촌의 영괴들과 도깨비가 싸움을 벌여 어지러워지만 돌아올 속셈이었을 것이다.
“여우 귀신은 망허촌에서 나쁜 짓을 저지르다 내뺀 못된 요괴예요. 도깨비 여러분은 여우 귀신에게 속았네요.”
도깨비들이 그 말에 잘못을 알고 물러났으면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도깨비들은 잠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가 곧바로 화를 내기 시작했다.
“우리가 바보라는 거야? 속긴 뭘 속아!”
“여긴 우리가 살 수 있는 땅이야. 빼앗으면 그만이지.”
“노루니 염소니 저 딴 것들한테 질 것 같냐? 때려잡자고!”
도깨비들은 부지깽이니, 빗자루니, 절구공이니 하는 것들을 들어 올리며 포효를 내뱉었다. 금방이라도 큰 싸움이 벌어질 판이었다. 목금이 급히 손을 들어 올리더니 손가락을 콱 깨물었다.
“물러들나세요!”
목금이 외치면서 손을 홱 뿌리치듯이 흔들었다. 핏방울이 사방으로 튀었다.
“피다! 피야!”
도깨비들이 놀라서 뒤로 물러났다. 목금은 책에서 도깨비가 피를 무서워한다는 말을 본 적이 있었다. 다행히 그 말이 진짜였다.
“빨리 물러들 나세요. 손가락이 아직 아홉 개나 남았다고요!”
백이도 큰소리로 거들었다.
“내 손가락 열 개도 있어요!”
도깨비들은 분한 표정이었지만 피에 이길 수는 없었는지 도깨비불로 변해 날아가기 시작했다.
장선생이 두 소녀에게 다가와 치하를 했다.
“덕분에 우리 산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장선생 뒤의 요괴들도 다 같이 고개를 조아렸다.
“낭자들이 부탁하실 일이 있다면 언제든지 말씀해 주십시오. 꼭 보답하겠습니다.”
백이와 목금이 서로 쳐다보며 빙긋 웃었다. 두 소녀는 아무도 다치지 않았으니 참 다행이라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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