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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테마파크를 쓰다

『용사일기(龍蛇日記)』, 용의 해에서
뱀의 해로 이어지는 이야기

임진왜란은 조선 건국 이후 최대 규모의 전쟁으로, 수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상처를 주었다. 전쟁 중에도 당대인들은 자신들의 경험을 잊지 않고 후세에 전하고자 여러 기록을 남겼다. 예컨대, 관찬서인 『조선왕조실록』에는 국난의 위기에서 필사적으로 일본군과 맞서 싸우고자 한 왕 및 고위 관리들의 분투가 남아 있다. 관찬서 이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생생한 경험을 기록해 남겼는데, 『용사일기(龍蛇日記)』 역시 그중 하나다.


〈한국국학진흥원 소장 『용사일기』〉 (출처: 한국국학진흥원)


『용사일기』의 ‘용사’란 간지(干支)를 나타내는 것으로, 용은 임진년(壬辰年)인 1592년을, 사는 계사년(癸巳年)인 1593년을 말한다. 제목만 보자면 1592~93년의 사건을 일기로 남긴 것이라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으나, 반드시 1592~93년의 일만 기록된 것은 아니다.

『용사일기』라고 하면 임진왜란 초기에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을 보좌하며 그의 행적을 남긴 송암(松巖) 이로(李魯)의 『용사일기』가 많이 언급되는 편이며, 한국국학진흥원에도 그가 쓴 『용사일기』의 판본이 기탁되어 있다. 이로 이외에도 암곡(巖谷) 도세순(都世純), 약포(藥圃) 정탁(鄭琢),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등의 인물이 같은 제목으로 저마다의 전쟁 경험을 녹여낸 글을 기록으로 남겼다. 이들은 모두 경상도에 기반을 둔 인물로, 이들이 남긴 『용사일기』는 당대 경상좌·우도의 학문적 역량 및 실천의 실상을 보여주는 소중한 기록유산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학봉 김성일을 배향한 임천서원의 입도문〉 (출처: 스토리테마파크)


모든 『용사일기』를 언급하는 것은 어려우므로 이 글에서는 한국국학진흥원에 소장된 송암 이로의 『용사일기』의 내용에 대해서 서술해보고자 한다. 이로의 본관은 고성(固城)이며 의령 출신이고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김성일과는 막역한 사이였으며,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초유사(招諭使)로 임명된 김성일을 보좌하며 그의 행적을 정리하여 『용사일기』를 썼다. 이로의 『용사일기』는 임진왜란 초기 경상도 지역의 전황, 의병 활동, 관군과 의병 간의 갈등과 초유사 김성일의 갈등 조정 양상 등을 알려주는 매우 중요한 사료다.

『용사일기』의 구성은 판본에 따라 내용이 조금씩 다를 수 있지만 대체로 서문·본문, 이상정(李象靖)의 발문(跋文), 「촉석루삼장사시(矗石樓三壯士詩)」로 구성되어 있다. 이 중 ‘삼장사’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연구자들 사이에서 완전히 일치된 의견은 보이지 않으나 대체로 김성일과 조종도(趙宗道), 이로를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된다. 이외에도 이로가 아닌 곽재우(郭再祐)가 ‘삼장사’ 중 한 명이라는 의견도 있으며, 1593년 제2차 진주성 전투와 연결시켜 당시 전투에 참여한 의병장 최경회(崔慶會), 김천일(金千鎰), 고종후(高從厚) 혹은 황진(黃進)이 ‘삼장사’의 일원이라는 등 다양한 주장이 존재한다. 이에 대한 사실관계는 추후 연구를 통해 좀 더 보완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임진왜란 당시 사용했던 활의 모습을 3D로 구현하였다.〉(출처: 스토리테마파크) 더보기


이로의 『용사일기』는 초유사 김성일의 활동을 기록한 내용이므로 임진왜란 초기의 전황과 관련된 내용이 많으며, 그 이후의 기록은 상대적으로 소략한 편이다. ‘초유(招諭)’는 글자 그대로 해석한다면 불러서 타이르고 설득한다는 것으로, 전쟁 지역의 이반된 민심을 진정시키기 위해서는 김성일처럼 지방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명망 있는 사대부가 필요했다. 경상우도 지역은 전쟁 초기에 일본군의 침입을 가장 많이 받은 곳이었으므로, 조선 조정에서는 특별히 그를 임시로 경상우도초유사(慶尙右道招諭使)에 임명하여 이반된 민심을 위무하고, 의병 창의를 독려하도록 하였다.

왕명에 따라 초유사에 부임한 김성일은 즉시 임무에 착수하였다. 혼란한 민심을 진정시키고 창의를 촉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대의와 충의에 입각하여 격문을 작성해 사대부들과 백성들을 위로하고, 그들의 궐기를 촉구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목적에서 작성된 것이 「초유일도사민문(招諭一道士民文)」과 「통유현풍사민문(通諭玄風士民文)」과 같은 격문들이다. 이러한 격문들은 『용사일기』와 『학봉집』 등에 실려 있다.

「초유일도사민문」을 보면 그는 사대부들과 백성들이 좀처럼 의병을 일으키지 않는 모습을 개탄스럽게 여기며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지금 지사(志士)는 실로 창을 베고 잘 때이며, 충신은 나라를 위해 순국할 때다. 그러나 67개 고을 중 아직 창의한 사람이 없다. 오히려 남들보다 먼저 도망쳐 목숨을 부지하지 못할까, 입산한 곳이 깊지 못할까 걱정하고 있다. 어찌 탄식을 금할 수 있겠는가?

-이로, 『용사일기』, 「초유일도사민문」-


이러한 말로 사람들을 격동시킨 뒤 김성일은 군신 간의 의리라는 유교적 가치에 입각하여 뭇 사람들을 격동시키고 있다.

아아, 군신 간의 대의는 천지간에 영원히 변치 않는 도리로, 이른바 사람이 지켜야 하는 떳떳한 이치라 할 수 있다. 무릇 이 땅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으로서, 앉아서 군부가 몽진(蒙塵)하고 종묘사직이 무너져 만백성들이 어란(魚爛)의 위기에 처했는데도 아무런 관심도 없어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천지간에 변치 않는 의리에 대해 어떻겠는가.

-이로, 『용사일기』, 「초유일도사민문」-


김성일은 위와 같은 말로 사람들을 격동시켜 의병을 창의하고, 또 관군을 초모하여 어려움을 수습하고자 했다. 이와 같은 그의 노력은 결실을 거두어, 훗날 의병도대장이 되는 김면(金沔), 곽재우 등 경상우도의 많은 의사들이 창의하여 일본군에 맞서 경상도 지역을 수복해 나갔다. 또한 관군도 차츰 정비 태세를 갖추어 빼앗겼던 곳을 하나씩 수복해 나갔다. 이러한 과정이 이로의 『용사일기』에 하나하나 기록되어 있다.

임진년 용의 해는 조선 사람들에게는 가혹한 시련으로 다가왔으나, 어려운 와중에도 사람들은 꿋꿋하게 외세의 침략에 맞서나갔다.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발자국과 숨소리는 『용사일기』와 같은 당대인들의 글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 이와 같은 옛사람들의 발자취를 발굴하여 끊임없이 역사를 재구성하는 것이 연구자의 소임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집필자 소개

조인희
연세대학교에서 『임진왜란기 조선의 대외교섭과 조일 국교 회복에 대한 연구』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국국학진흥원 책임연구위원으로 재직 중이다. 대표 저·역서 및 논문으로는 『에도의 독서회』(공역), 「임진왜란 초기 일본군의 군량, 물자 조달과 가와세[爲替]의 활용」, 「17세기 초 임진·정유재란의 공신 선정에 대한 고찰」 등이 있다.
“오랑캐가 압록강을 넘어왔다는 소식을 듣다”

김령, 계암일록, 1627년 1월 20일

1627년 1월 20일, 김령은 조카 김광적에게 새로운 소식을 들었다. 김광적이 아버지인 김호의 묘를 옮기는 일 대문에 안동 관아에서 감사와 만나고 온 길이었다. 감사가 산송 문제로 당사자들에게 사실을 확인하고 있는데, 갑자기 선전관이 말을 달려 관아에 당도하였다. 그리고 말하기를 ‘서북쪽 오랑캐 수만 명이 의주를 포위하고 또 선천에 들어왔으니, 감사는 군마를 불러 모으고, 호패어사 또한 머물지 말고 급히 서울로 돌아오라는 명령이다’ 라고 하였단다. 정말로 놀라운 일이었다.

그 뒤 자세한 내막을 들으니 오랑캐가 이달 13일에 압록강을 건너 의주를 포위하였는데, 의주성은 매우 공고하여 방어할 준비가 다 되었으나 안에서 내통하여 문이 열렸다고 한다. 그리하여 의주부윤 이완은 스스로 불에 타 죽고, 의주 판관 최몽량은 피살되었으며, 한명련의 아들 한윤 및 박난영 같은 이들은 모두 돌아왔다고 한다. 우리나라 장수와 군사들 중 저들에게 투항한 자들도 많이 왔는데, 그 가운데 강홍립도 있었다고 한다. 적의 군사들이 무인지경으로 우리나라를 침입하고, 또 안주를 함락시켰으며, 여섯 가지 항목을 들어 조선에게 죄를 물었다고 한다. 그리고 오랑캐들 스스로 대금이라 칭하고 황제를 자처하였다고 한다.

임진년 왜구들이 조선 산하를 한바탕 피로 물들인 것이 30년도 되지 않았는데, 다시금 이런 병란을 겪게 되다니... 김령은 이러한 전란을 초래한 조정의 무능력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명과 여진의 대립, 변화하는 국제 정세와 간신들 탓에 어지러운 조선”

김령, 계암일록, 1618년 8월 1일

1618년 8월 1일, 도성이 술렁거렸다. 모두 큰 난리가 일어날 것이라고 하며 백성들이 다 도망쳐 나가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사대부의 집들도 줄을 이어 성을 빠져 나오니 성은 이미 비어 어찌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누르하치가 명나라와 대치하고 있어서 조선에는 금방 닥칠 급한 일이 없을 텐데도, 백성들의 불안한 마음은 달랠 도리가 없었다.

성 안은 모두 비었고 교외 강가는 사람들로 가득 차 분잡한데, 재물로 부녀를 바치거나 혹 절취당하기도 했다고 한다. 임금 또한 행행(行幸)을 8월 13일에 나가려다가 아직 못나갔는데 27일에 나갈 것이라고 모두들 말하였다. 이 소문의 근원은 대체 어디란 말인가. 상황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권세를 가진 간신들이 나라를 그르친 죄를 이루 다 벌할 수가 없다.

“위아래를 가리지 않는 전란중의 굶주림”

금난수, 성재일기, 1593년 3월 2일

임진왜란이 일어난 후, 전 국토는 황폐화되고 농민들은 전란의 화를 피하기 위해 이리저리 도망 다녀야 했다. 그 덕분에 농토는 모두 버려져 농작물이 자라지 못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다음 해인 1593년 봄, 춘궁기가 되자 굶는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보리를 심으려 해도 남자들은 왜적을 막기 위한 군대에 차출되어 나아가고, 향촌에 남은 것은 지난 전염병 유행에서 근근이 살아남은 노인과 아이들, 그리고 여성들뿐이었다. 금난수의 집은 그나마 조금 사정이 나았다. 비록 향병으로 나아간 사람들을 위해 군량미를 대느라 전처럼 풍족하지는 못하였지만 적어도 굶지는 않을 정도였다.

이런 금난수의 집 대문을 두드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개령(開寧, 현 경북 김천)에서부터 온 김익휘(金益輝)는 염치불구하고 그의 어버이를 위해 양식을 나누어 달라 청하였다. 자기 한 몸을 위해서가 아니라 연로한 어버이를 위해서라는 말에 금난수는 빠듯한 살림을 나누어 주었다. 어찌 이런 전란 중에 홀로 배불리 먹을 수 있었겠는가. 하지만 여름이 되어도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춘궁기에 종자까지 모두 먹어버린 사람들은 농사를 지을 수 없었고, 자연히 수확할 것 자체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그나마 형편이 나은 사람들의 곡식을 훔치는 좀도둑도 발생하여 문제가 되었다.

결국 8월 3일에는 관아의 창고를 열어 진휼미(賑恤米)를 분배하였다. 관아의 곡식은 곧 나라의 재산이었기 때문에 이에 대해 보고서를 작성해 순찰사에게 올려야 했다. 구휼을 하기는 했으나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일 뿐이었다. 농민들을 정착시켜 농사를 짓게 한다고 해도 당장의 양식을 구하기란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었다.

결국 한 해 동안 충분한 양식을 재배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다음 해인 1594년 봄에는 사족들도 굶기 시작하였다. 금난수의 처남 조목은 자신의 서자 조수붕을 보내와 자신의 궁색함을 구휼해 달라고 청하였다. 처남의 성격을 생각해 보았을 때 체면을 고려하여 한참 동안 굶으며 참다가 가솔들을 위하여 겨우 청한 것일 터였다. 금난수는 그를 딱하게 여기며 곡식을 보내 주었다.

“귀국길에 오르자마자 굶주린 백성들을 보다”

이기헌, 연행일기계본, 1802년 2월 8일 ~

1802년 2월 8일, 이기헌(李基憲)은 고국으로 돌아가기 위한 여정에 있었다. 동지사로 청나라에 들어와 주어진 임무를 마치고 그리운 고국을 향해 가던 길이었다. 이틀간 길을 따라오니 반산이란 곳을 지나게 되었는데, 이곳은 바로 청나라의 중흥을 이근 강희제와 건륭제 두 황제의 능이 있는 곳이었다. 멀리 푸른 소나무 사이로 궁전같은 건물이 비쳤는데 바로 청나라의 별궁(別宮)이었다.

저녁 무렵에 계주란 곳에 이르러 유숙하였다. 이 고장은 중국 역사의 곳곳에 자취를 남기고 있는 유명한 고을이었다. 진나라와 한나라 시대는 어양군에 속했고, 위나라와 진나라 시대는 유주에 속하였다. 당나라 천보 연간에 다시 명칭을 어양군으로 고쳤다. 금나라 때는 이곳을 중도(中都)로 삼아 매우 번성했던 곳이었다. 한나라 광무제 때 반란을 일으킨 팽총도 이곳을 근거로 했고, 당나라 현종 때 반란을 일으킨 안녹산과 사사명도 이곳을 근거로 난을 일으켰다. 이곳 여양의 돌기병은 매우 용맹하여 천하무적으로 소문난 병사들이었다.

계주 성 북쪽에는 전설 속의 통치자인 황제(黃帝)가 광성자란 사람에게 도를 물어본 곳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이 계주성을 들어올 때 성 밖에는 굶주린 백성들이 들판에 가득하였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 그릇을 들고 나와 있었다. 그곳 사람 이야기가 매일 500~600명에게 식량을 나누어주는데, 그 양이 매우 많다고 하였다. 청나라 수도와 이틀거리이고, 한때 천하의 중심이기도 하였으며, 숱한 영웅호걸들이 낳다가 사라진 땅이건만 정작 배고픈 백성들을 구원해 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과거의 찬란한 영광이 저 백성들에게 무슨 소용이겠는가. 이런 생각이 미치자 이기헌은 씁쓸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통신사 부사 임수간의 배포”

조선통신사병풍(강호성내응접도)
(출처: 부산광역시립박물관)
엄경수, 부재일기, 1712년 3월 1일

1712년 3월 1일. 작년 일본으로 떠났던 통신사 일행이 돌아왔다. 그런데 조선과 일본 사이에 피휘와 관련된 시비가 발생했고, 사신단은 그 일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했다는 것으로 귀국과 함께 조사를 받게 되었다.

그럼에도 통신사의 부사였던 임수간은 상당한 기개를 보여주었다. 정사가 탄 배는 무사히 일본에 도착하였으나, 부사가 탄 배는 떠날 때 바다 한가운데에서 배가 부서져 거의 뒤집힐 뻔하여 일본 사람들이 급히 작은 배를 불러 부사에게 옮겨 타게 하였는데, 이때 부사 임수간이 “내가 한 번 동요하면 배에 탄 수백 명 모두는 살 수가 없다.”라고 말하며 완강히 거부하였다고 한다. 그리고는 굳게 앉아 지휘하였는데, 겨우 배가 전복되지 않고 부산으로 돌아와 수리할 수 있었다고 한다.

부사의 고생은 일본에서 돌아올 때도 계속되었는데, 바다 한가운데서 비바람을 만났다고 한다. 깜깜하고 어두운 시간에 절영도에 급히 정박하려는데 날씨가 너무 어두워 도저히 정박할 곳을 찾지 못하였다고 한다. 배가 부서지려 하자 급히 사람을 시켜 물의 깊이를 살피게 하니 아주 얕았다고 한다. 등이 잠길 정도의 깊이임을 확인하고 일행을 모두 내리게 하였는데, 깜깜한데다 비가 강하게 쏟아부어 어디로 향할지 모르다가 겨우 길을 찾아 언덕에 오르고, 그길로 수십 리를 걸어서 비로소 인가를 찾아 폭풍을 피할 수 있었다고 한다.

날이 밝아서 살펴보니 겨우 몇 리 길을 한참 돌아온 것이었고, 배에 있던 물건은 모두 쓸려가 남은 것이 없었다. 그래도 절체절명의 순간 부사의 용기와 침착한 지휘로 사람은 한 명도 다치지 않았으니, 부사의 배포와 냉철함은 참으로 감탄할 만한 일이었다.

“서울 사람이 전한 전란 소식에 비통함에 빠지다”

오희문, 쇄미록, 1597년 8월 23일

1597년 8월 23일, 요사이 다시금 전란의 소식이 들려와 오희문은 종일 마음이 어수선 하였다. 얼마전 들으니 내 건너 안협 고을에 서울 사람이 와서 살고 있다 하여, 민시중, 김언실 등을 시켜 만나보고 적의 소식을 들어오게 하였다. 오늘 민시중과 김언실이 찾아와 서울 사람에게 들은 이야기를 전해 주었다. 이야기를 듣자니, 적은 이미 남원성을 함락시켰고, 중전은 장차 관서땅으로 피난을 간다고 한다. 비록 서울 사람에게 들은 이야기이지만 사실인지 여부는 확실하지 않았다.

만일 사실이라면, 이제 날씨가 점차 추워지고 있는데, 늙은 노모와 병든 아내를 데리고 깊은 산골짜기로 피난을 해야 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집안 식구들은 모두 옷도 변변치 않은데 반드시 추위와 굶주림에 고생할 것이 뻔하였다. 이런 생각이 미치니 오희문은 죽을 때까지 편안한 날이 없겠구나 싶어 하늘이 원망스러워졌다.

6년 동안의 전쟁에 백성들이 모두 파리해졌는데도 하늘이 화를 뉘우칠 줄 모르고 흉한 전란을 다시 만들어 호남과 호서의 백성들이 장차 도탄 속으로 들어가게 생겼으니, 참으로 탄식스러운 일이었다. 하늘은 어질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백성을 어루만지는 법이거늘, 어찌 조선의 백만 백성으로 하여금 모두 불타는 곳으로 몰아넣고 하나도 남기지 않으려 한단 말인가! 정녕 믿기 어려운 것이 하늘이 아니던가! 탄식한들 무엇 하겠는가!

“병자호란을 겪은 거지 이야기”

엄경수, 부재일기, 1714년 9월 1일

1714년 9월 1일. 오늘 엄경수의 집 앞에 헤진 갓을 쓰고 누더기를 걸친 사람이 지팡이를 짚고 문에서 구걸하였다. 몸은 구부정했고 목소리는 힘이 없었다. 안으로 들여 밥을 주며 살펴보니 일개 노인네였다. 밥과 함께 한기를 물리치도록 술도 조금 따라 주었다.

나이를 물어보니 “병자년 호란 때 강화도에서 포로가 되었다가 벗어났는데, 그때가 아홉 살이었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엄경수가 손으로 헤아려 보니 올해 여든일곱이었다. 말로만 듣던 호란을 직접 겪었다고 하니 궁금증이 일었다. 그리하여 그가 겪은 호란 이야기를 청해 들었다.

“성이 함락되고 우리 가족들은 갈대숲 속으로 달아나 사람마다 각각 한 곳을 찾아 숨도록 하여 집안 식구들이 온전하였지만 나만 포로가 되었습니다. 머물러 있을 때는 늘 군진에 구속되어 있었고, 행군할 때는 말을 타고 달렸는데, 어리고 약하여 안정에 붙어 있지를 못하고 곧잘 떨어지곤 하였습니다. 그렇게 오래 지내다 보니 싫어하여 오랑캐에게 다시 버려져 다행히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는 활쏘기에도 재주가 있어 효종 때 내금위에서 군졸을 하였고, 천인은 아니었으나 어떠한 일에 연좌되어 자리를 잃었다고 한다. 아내가 있었는데 20년 전에 죽고 흉년에 땅마저 팔게 되었으며 이후 걸식을 하며 목숨을 이어오고 있다고 한다. 다만 과거 군졸 생활 때 같이 생활하던 자의 손자가 옛일을 기억하고는 그에게 자주 음식과 잠자리를 내어주고 있다고 한다.

엄경수는 아직 병자호란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을 만나본 것도 신기하였지만, 한 사람의 인생역정이 너무나도 기구하여 그의 이야기에 한참 빠져들었다. 그리고 조부의 친구를 잊지 않고 돌보고 있는 사람 역시 참으로 어질다고 할 만하지 않은가? 엄경수는 이 이야기를 듣고 생각에 잠겼다가, 이를 이야기 형식으로 일기에 적어두곤 거기에 ‘거지전’이란 이름을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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