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제작된 연극, 뮤지컬, 춤, 오페라, 마당극, 발레까지 다양한 무대 장르에서 전통 소재를 다루는 것은 특별한 일이 아니라 당연한 일이다. 가장 많은 것은 고전 속의 인물을 차용하거나 주인공으로 삼는 경우인데, 무대 위에서 과거를 배경으로 하는 시대를 구현하기는 쉽지 않다. 춤이라면 무용수들이 춤을 출 안전하고 넓은 공간이 필요하고 연극이나 뮤지컬이라면 장면이 바뀔 때마다 배경을 바꿔야 한다는 고충이 따른다. 때문에 대부분 전통은 인물과 그 인물이 입은 의상을 통해 구현되고 스토리텔링을 따라가며 관객들은 과거의 어느 시대라는 극적 약속을 따르기 마련이다. 때문에 무대 위의 전통 이야기를 쓰는 연재에서도 좀 더 피상적인 주제를 떠올렸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일은 그렇게 쉽게 가지 않는 법이다. 첫 회의 주제가 양반가의 인테리어라니.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작품들은 대부분 배경으로 기와집을 짓거나 기둥을 세우거나 하지만 인테리어라니, 정말로 대부분의 경우 인테리어는 생략되기 마련이다. 심지어 집 안, 안방이 배경이라 해도 그러하다. 그러니 차근차근 작은 것부터 시작해 보기로 하자.
우선 화초장(花草欌)이 있다. 놀부가 첫눈에 반했던 바로 그 화초장이다.
“화초장, 화초장, 화초장, 화초장, 하나를 얻었다. 얻었네, 얻었네, 화초장 하나를 얻었다.” 도랑을 건너뛰다 “아차 내가 잊었다 초장, 초장? 아니다. 방장, 천장, 아니다. 고추장, 된장? 아니다. 송장, 구들장? 아니다” 이놈이 거꾸로 붙이면서도 모르것다. “장화초? 초장화? 아이고 이거 무엇이냐? 갑갑허여서 내가 못살것다. 아이고 이것이 무엇이냐?”
흥부가 다음날 아침 하인에게 들려 보내겠다고 해도 꼭 저 같은 심보로 그 말을 믿지 못하고 당장 짊어지고 가겠다며 도랑을 건너고 엎어지고 자빠지며 땀을 바가지로 흘리며 지고 갈 만치 화초장은 아름다웠을 것이다. 게다가 부자로 알려진 놀부도 처음 보았을 정도로 화초장은 귀한 장이었다.
판소리 열 두 마당을 마당놀이로 먼저 배웠던 어린 시절에 본 극단 〈미추〉의 마당놀이 〈놀부전〉에서 놀부는 언제나 꼭두쇠였던 김종엽 배우였고 흥부는 얼굴만 봐도 웃음이 나오는 윤문식 배우였다. 그 둘이 연기하는 흥부와 놀부는 딱히 흥부가 더 착하지도 그렇다고 놀부가 더 못되지도 않았고 둘이 쉴 새 없이 주거니 받거니 하는 장면들은 웃다 지칠 정도로 즐거웠다.
마당놀이 놀부전의 한 장면(출처: 유튜브_국악TV_국악락락 7회)
지금 다시 생각해 보면 불면 날아갈 듯 연약하고 귀여운 아기 제비 다리를 인정사정없이 몇 마리나 꺾어 팽개친 놀부는 진짜 잔인한 사람이었다. 화초장은 문판에 꽃 그림을 그려 장식했으며, 장 안에는 해충의 침입을 막으려고 한지나 비단을 발라 둔 옷장이나 의걸이장(위는 옷을 걸게 되고 아래는 반닫이로 된 장)이다. 조선시대 사대부가의 안방에는 꼭 이 화초장이 있었다. 화초장은 화류목 또는 화초목이라고 부르는 모과나무의 목재로 만든다. 국립박물관에서도 볼 수 있는 화초장은 쇠뿔을 이용한 화각공예 기법으로 새긴 꽃 그림 장식의 화려한 무늬를 자랑한다. 그런 만큼 화초장은 화려함을 뽐내기를 지양하는 선비들의 공부방보다는 아녀자들의 방을 장식하는 존재였다. 하지만 눈이 있는 자라면 놀부가 그랬듯이, 다른 그 무엇보다도 화초장을 선택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화초장(출처: 경운박물관)
대체로 선비들의 장식이란 장식한 티를 내지 말아야 하는 법이었다. 하다못해 사방탁자도 옻칠을 하여 광을 내지 않고 태워서 광을 억제하고 단단함을 유지하는 식이었다. 그들의 멋내기란 지금으로 말하면 ‘꾸안꾸’라고나 할까. 꾸미지 않은 듯이 꾸미기 위해 몇 시간을 투자하듯이 선비들도 꾸미고 싶은 욕구를 필사적으로 누르며 서로 꾸안꾸 경쟁을 했다.
하지만 예외는 있었으니 선비들의 필수품인 책이다. 정조는 책을 강조해서 책 그림도 무척 사랑했는데 어좌 뒤에 일월오봉도 대신에 책가도 병풍을 펼쳐놓을 정도였다. 왕이 책가도를 이 정도로 강조하자 관직에 있던 양반으로부터 퍼진 책가도 열풍이 거의 이백 년 동안 유행을 탔다. 화선으로 불렸던 김홍도 역시 책가도를 매우 잘 그렸다고 하지만 현재까지 남은 게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고 하며 19세기 화가 이형록이 이름을 떨쳤다. 이형록이 남긴 책가도 병풍은 유니버셜 발레단의 〈발레 춘향〉의 무대 배경막에도 영향을 미쳤다.
〈발레 춘향〉의 배경막 “책가도 병풍”의 작화과정
(출처: 유튜브 무대미술TV [무대작화] “책가도 병풍” 배경막 그리기)
2007년 초연한 유니버셜 발레단(이하 UBC)의 〈발레 춘향〉은 UBC 창단 30주년을 기해 음악부터 차이코프스키의 곡들로 바꾸면서 새로운 버전으로 재탄생 했는데 이즈음에 임일진 무대 디자이너가 디자인한 무대 위에서 잠시지만 배경막으로 책가도가 등장한다. 무대 배경막인 만큼 모든 장면에 등장하는 게 아니라 양반가의 서재로서 기능하는데 거대하게 그려진 책가도를 통해 공간에 대한 말이 필요 없는 간결한 설명과 분위기를 형성했다. 2022년 봄에 다시 공연된 〈발레 춘향〉에서는 무대막을 거의 사용하지 않고 최근의 추세인 LED를 사용해 그린 공을 생각하면 아쉬움이 남지만, 미래를 향한 의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발레 춘향〉은 발레에 적합하지 않다고 여겨졌던 한복을 재해석을 하여 한복의 원형과 아름다움을 유지하면서도 복잡한 발레 안무를 드러낼 수 있게끔 디자인해 무대는 물론 장르와도 잘 어우러져 감탄이 절로 난다.
〈발레 춘향〉(출처: 유니버셜발레단)
화초장과 책가도가 그야말로 방 안의 인테리어의 일부분이라면 무대 위에 아예 집을 지은 작품이 있다. 서울역 뒤편에 자리 잡은 국립극단의 백성희 장민호 극장의 개관작이었던 〈3월의 눈〉은 관광지가 된 오래된 한옥에서 마지막까지 버틴 장오의 이야기다. 아니, 장오와 그의 아내 이순의 이야기다. 전쟁을 비롯해 온갖 현대사를 함께 지나온 그들의 이야기는 시대와 함께 굴곡지고 찢어지면서도 일상을 살아낸 세대의 이야기다. 공연을 보기 위해 객석에 앉으면 어떤 작품은 막을 올리지 않은 채로 관객의 기대를 끌어올리는 반면 어떤 작품은 첫 장면을 그대로 드러내면서 작품 속으로 관객을 미리 끌어들인다.
손진책이 연출하고 배삼식이 쓰고 박동우가 무대를 디자인했는데 이 작품에는 다른 작품에 없는 한옥 제작이라는 파트가 있고 그 옆에는 목수 조전환의 이름이 있다. 그만큼 한옥 한 채를 무대 위에 짓는 일에 진심이었던 작품이다. 한옥의 마루 아래, 댓돌 뒤 등 틈새마다 오랜 세월을 지내온 소품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어 현실감을 더한다. 그 한옥에는 장오와 이순의 평생의 삶이 새겨진 집이자 그들이 살기 이전에도 그들만큼이나 혹은 그들보다 더 고달팠을지도 모른 선조들의 삶이 고스란히 새겨져 있으니, 집 자체가 이 작품의 숨겨진 주인공이기도 하다. 이 작품을 보기 위해 객석에 앉아 무대를 마주 보는 첫 순간에, 어떠한 무대 전환도 없을 예정이라고 무대에 지어진 한 채의 한옥이 이미 말해주고 있었다.
〈3월의 눈〉 무대 설치 장면(출처: 유튜브 무대미술TV [무대미술] 연극 “3월의 눈” set up 중에)
잔잔하면서도 한국어의 운율을 이용해 대사를 마치 노래처럼 구사하며 관객을 드라마로 훅 끌어들이는 배삼식 작가의 작품이지만 지루하면 어쩌나 했던 의구심은 느릿느릿 움직이는 ‘진짜’ 노인 배우 장민호와 백성희의 열연과 함께 저 멀리 날아갔다. 이후 이 작품은 출연하는 배우들이 그야말로 3월의 눈처럼 아슬아슬하여 재미없을 틈이 없는 작품이 되었다. 초연에 출연했고, 이 작품의 최초의 존재 이유였던 백성희, 장민호 배우가 3월의 눈처럼 이별을 고한지도 꽤 되었다.
〈3월의 눈〉(출처: 국립극단)
전쟁 통에 만난 장오와 이순은 평생을 살았던 집을 실종된 아들이 남기고 간 손자 내외의 생계를 위해 팔아버리고 요양원에 들어갈 참이다. 날이 밝으면 장오는 이순이 미처 못 다 떠준 붉은 웃옷을 입고 떠날 참이지만 그 하루 사이에 장오의 집에는 관광객부터 노숙자까지 마치 작별 인사처럼 찾아드는데, 그런 와중에도 장오는 내일이면 해체될 집의 문짝에 창호지를 새로 바른다. 내일 지구가 멸망해도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그런 거창한 신조가 있어서가 아니라, 깔끔한 성격의 아내 이순이 낡아버린 문의 창호를 남 앞에 보이기 싫어할 거라는 생각 때문이다. 두 사람이 문창호를 뜯어내고 다시 바르는 장면은 아마도 이 작품에서 관객들이 가장 즐겁게 보는 장면이기도 하다. 배우들은 실제로 입에 물을 머금고 문창호에 뿌려서 종이를 불려 뜯어내고 풀을 발라 새 창호를 바르며 오손도손 과거를 떠올리는데, 두 사람의 기억이 저마다의 인상에 따라 조금씩 다른 게 또 극의 묘미다. 실제로 무대 위에서는 어제 바른 창호는 오늘 뜯어내고, 오늘 바른 창호는 내일 뜯겨 나갈 것이다. 이들이 이렇게 오손도손 한지를 발랐던 문짝은 이내 통째로 뜯겨져 누군가의 식탁이 될 팔자다.
연극 〈3월의 눈〉 중, ‘장오(오른쪽, 오영수 분)’와 ‘이순(정영숙 분)’이 창호지를 새로 바르고 있는 모습
(출처: 뉴스컬쳐 2018.02.12)
한옥은 밀고 들어가는 집이라고 누군가 말했었다. 한옥은 또한 안과 밖이 모호한 집이다. 한여름에 창문을 걷어내 올리면 머리를 숙여야 지나갈 수 있는 네모난 문틀이 바람에 흔들리는 바깥 배경의 액자로 변한다. 밖이 안으로 들어와 인테리어가 되는 순간이다. 온갖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한옥을 매력적으로 느끼는 것은 이러한 다양한 순간들을 ‘문’ 안쪽으로 훅 들여오는 한옥의 확장성 때문일 것이다. 연극 〈3월의 눈〉은 연출가 손진책의 말에 따르면 3월에 살짝 내리고 속절없이 녹아 사라지는 눈처럼 그렇게 사라지는 삶에 대한 그리움과 속절없음이 담겨 있다고 했다. 무대도 언젠가는 사라지겠지만 잘 만든 공연은 잘 지은 한옥처럼 오랫동안 관객의 마음의 남는다. 이 작품에 사용된 한옥의 문틀 형태가 띠살인지 만살인지 장지문인지 판문인지 속속들이 얘기할 재량은 없으나 이제는 비워줄 때가 되었다던 그 집이 마음속으로 들어와 집을 지었다. 그 집이 한옥이라 참 좋다.
발레 춘향 무대 작화 책가도 그리기 (출처 : 무유의 무대미술 이야기)
연극 3월의 눈 한옥짓기 (국립극장 달오름) (출처 : 무유의 무대미술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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