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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포로 ‘은실’과 그 아비 ‘예남’
그리고 소실 ‘이병’의 이야기

유하령

1645년 4월 13일, 우리 사신단 일행은 만주인 40명의 호위를 받으며 송점松店을 지났다. 압록강을 건넌 지 이틀째였다. 나는 서울 사람으로 역관 장예하를 수행해 사신단에 들어갔다. 이웃 아저씨 예남禮男의 주선이 아니었으면 힘든 일이었다. 예남은 1643년부터 사신단을 따라 북경北京까지 갔다 왔다. 올해로 세 번째이다.

계절은 봄이라 들판에는 파종하는 이들이 무리지어 있었다. 우리 일행이 지나가자 오랑캐 여자들이 모여들었다. 예남이 내게 다가와 속삭였다.
“잘 둘러 보거라. 은실이 저 중에 있는지.”
멀리 언덕의 너른 바위에 한 여자가 기대서 이쪽을 슬프게 바라보고 있었다. 어느 틈에 예남이 그 여자에게 다가가서 말을 붙였다. 나도 급히 언덕 쪽으로 향했다. 예남이 되돌아오며 오지 말라고 손을 휘저었다.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예남은 지난 7년 동안 도대체 몇 번이나 은실일 거라는 희망으로 달려갔다가 실망하는 쓰라림을 당했을까. 치미는 아픔에 다가오는 예남을 외면했다.

옹후甕後 고개를 지나자 파종하던 여인들 중 둘이 호미를 내던지더니 갑자기 이쪽으로 달려왔다. 사신단 사이에서 “조선여자다!” 하고 탄식이 흘렀다. 예남이 눈을 부릅뜨고 여자들을 바라봤다. 멀리서 봐도 그중 누구도 은실은 아닌 듯했다. 조선관원이 다가온 여자들에게 “너희는 조선 여자가 아니냐?” 물었다. 한 여자가 답했다.
“저희는 황해도사람입니다. 여기 황해도사람은 없나요?”
황해도 출신 성이성이 듣고는 앞으로 나섰다.
“황해도 어디에 살았더냐?” 여자가 눈물을 줄줄 흘리며 답했다.
“서흥瑞興 검수檢水사람입니다. 심양에 잡혀온 사람들은 그나마 고향 소식을 들었으나 나 는 변방으로 잡혀와 가족이 살았는지 죽었는지조차 알지 못해요. 지금 근처의 사람을 만 나니 가족을 만난 듯하네요.” 여자들이 술을 가져와 일행에게 권했다. 성이성이 과일과 담배를 주었더니 여자들이 받고는 “이것은 조선 물건이네요.” 하면서 눈물만 흘렸다. 부사府使가 물었다.
“조선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느냐?” “돌아가고는 싶지만 이제는 어떻게 하겠습니까?” 여자가 체념한 듯 답했다. 1636년 병자년 전쟁 때 오랑캐 땅으로 끌려온 수많은 사람들이 오랑캐의 종으로 노역을 당한지 9년. 속환贖還해줄 가족이 없는 이들은 오랑캐 땅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여자가 흐느끼듯 물었다. “돌아가실 때도 이 길로 가시나요?” 여자는 술을 빚어 기다리겠다고 했다. 예남이 여자들에게 “혹 서울 처자 은실을 본 적 없냐?”고 물었다. 여자들은 “서울 사람이라면 대부분 심양瀋陽으로 잡혀갔고 거기 많지 않냐?”고 되물었다.

은실이 만주팔기군에게 붙잡힌 것은 양민으로서는 저항할 수 없는 불가항력의 전쟁 탓이었지 예남의 탓이 아니었다. 또 예남의 소실 이병 탓도 아니었다. 그러나 은실이 달려오는 말 위의 오랑캐에게 접힌 한지 모양으로 허리가 치켜들려진 순간 예남과 이병은 죄인이 되었다. 예남은 딸을 지키지 못한 못난 아비가 되었고 이병은 의붓딸 대신 살아남은 뻔뻔한 계집이 되었다. 예남이 날아온 화살에 이마를 빗맞고 피를 흘리지만 않았어도 흥건한 피로 눈을 못 뜨고 은실과 이병을 잡은 손을 헷갈리지만 않았어도 딸을 버리고 소실을 구했다는 죄의식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순간이었다. 말 탄 오랑캐가 달려왔을 때 예남이 몸을 방패로 구할 수 있는 목숨은 하나였다. 예남은 오른손을 잡아당겨 여린 생명을 자신의 몸으로 막고 엎드렸다. 그가 왼손의 생명과 오른손의 생명을 헷갈렸던 것은 순전한 운명의 희롱이었다. 말발굽에 채인 이후 정신을 차렸을 때 예남은 뜻밖의 결과에 오열했고 무남독녀 외동딸이었던 은실의 이름을 목놓아 불렀다. 은실을 낚아채간 오랑캐장수를 확인하려고 백방으로 적진을 살폈다.

예남은 자기 농토를 가진 양인이었다. 은실을 낳다 죽은 처는 예남과 금슬이 좋았고 지혜로웠고 부지런했다. 예남이 농토를 사들일 수 있었던 것은 처 덕분이었다. 예남은 갓난아기 은실을 젖어미까지 들이며 사가士家의 규수 못지않게 금지옥엽으로 키웠다. 이웃의 늙은 부부가 병으로 죽고 홀로 남은 딸이 이병이었다. 늙은 부부는 예남에게 딸을 맡긴다는 유언을 남겼다. 은실도 언니, 언니하며 이병을 따르던 차였다. 소실 이병과 은실은 의붓딸과 엄마가 아니라 친자매처럼 사이가 좋았다. 저녁이면 예남을 사이에 두고 앉아 야담野談이며 설화說話며 밤이 깊은 줄 몰랐다. 예남은 한쪽에는 은실이 한쪽에는 이병이 있는 보름달 같이 넉넉한 삶이 오래 계속되기를 바랐다.

마포나루, 삼전도나루. 포로들을 모아놓은 곳이라면 예남은 미친 듯이 은실을 찾아다녔다. 오랑캐들에게 모아놓았던 은전을 주며 한지에 그린 은실의 초상을 보여주었다.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시체들이 쌓인 곳도 떠돌았다. 은실을 봤다는 자가 없었다. 데려간 오랑캐장수도 찾을 수 없었다. 전쟁이 꿈인지 은실과 이병을 곁에 앉히고 오순도순 세월 가는 줄 몰랐던 한 때가 꿈이었는지 예남은 판단할 수 없었다.

오랑캐가 휩쓸고 간 서울은 밤이나 낮이나 귀신들이 출몰하는 거지, 부랑아, 도적떼의 소굴이었다. 대궐과 양반가는 문을 꼭꼭 닫아걸었다. 밤에 담을 넘은 도적들을 붙잡아 경치는 소리가 낮이면 또 담을 넘었다.

이듬해 여름이 지나자 심양에서 속환된 포로들이 속환사와 함께 돌아왔다. 육백 명 정도였다. 잡혀가기는 삼십만 명이 넘었는데 공식적으로 돌아온 것이 육백 명이라니 예남은 이 끔찍한 상황에 놓았던 정신을 오히려 다잡았다. 심양에서 속환된 양반가 부인이 은실의 소식을 가져왔던 것이다. 심양의 오랑캐 장수 집안에 은실과 함께 붙잡혀 있었고 자신이 속환될 때 은실은 농장의 관리인으로 배치됐다는 것이다. 예남은 죽은 은실이 눈앞에 나타나기라도 한 듯이 생기를 찾았다. 속환 비용을 마련하는 것이 문제였다. 양인 여자의 속환 비용은 은전 팔십량으로 치솟아 있었다. 풍비박산된 농토와 집으로는 당장 은전을 마련할 길이 없었다. 예남은 각지를 돌며 남초南草를 구해 팔아 은전을 마련하기로 했다.

그즈음 이병이 사라졌다. 또 은실의 소식을 가져온 사대부 집안 부인은 목을 맸다. 부인의 시가에서 포로로 더렵혀진 며느리가 낳은 자손을 인정할 수 없다고 이혼을 요구했고 조정에서는 허락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 남편이란 자가 화냥년이라며 불러온 부인의 배를 걷어찬 분개할 사건이 시가와 친정에 알려지고 갑론을박하는 사이에 부인이 목을 매 자살한 것이다. 수절과 절개라는 이념이 사람을 죽이는 사회였다. 예남은 그 집 문에 침을 뱉었다. 그리고 부인을 위해 외웠다. “나무관세음보살. 부인은 극락에 가셔서 아이를 잘 기르실 거외다.”

예남은 이병을 찾아야 했지만 남초를 구하는 것이 급했다. 지방 각지를 도는데 1년이 걸렸다. 집에 와보니 주인 없는 집은 폐가가 되어 있었고 이병은 돌아오지 않았다. 예남은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심양으로 가서 은실을 구해오는 것이 먼저였다. 은실을 찾아오면 이병도 나타나줄 것이라 예남은 직감했다. 이병이 사라진 까닭은 자기대신 은실이 잡혀간 것에 죄책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했다.

1639년 예남은 심양까지 갔지만 은실을 찾지 못했다. 몽골인에게 팔려갔다는 둥 북경으로 팔려갔다는 둥 확실치 않은 헛소문만 있었다. 가져간 은전은 은실을 찾아다니느라 다 썼다. 서울로 돌아와서는 전쟁 때 다친 등을 펼 수 없어 한해를 방안에서만 맴돌았다. 한 달에 한번 정도 툇마루에 쌀자루와 찬거리 자루가 놓여있었다. 예남은 이병이 가져다 놓은 것이라 여기고 고맙게 먹었다. 어서 나아 심양에 가서 은실을 찾아와야 이병도 돌아올 것이었다.

1643년 전쟁난 지 7년째 되는 해. 예남은 역관 장예하 덕분에 북경까지 따라갈 수 있었다. 그러나 북경까지 가는 동안, 그리고 북경에서도 백방으로 수소문했으나 은실의 자취는 찾을 길 없었다. 의주에서 서울로 돌아오는 날 의주까지 도망 온 포로를 통해 은실이 심양에 살아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예남은 다시 희망을 품었다.

1644년 봄. 예남은 툇마루에 놓인 자루를 보았다. 무거웠다. 열어보니 은전다발이었다. 예남은 마을에서 떠도는 소문을 들었지만 믿고 싶지 않았었다. 이병이 마포 색주가에서 웃음을 팔고 몸을 팔아 큰돈을 모았다는 소문이었다. 예남이 아는 이병은 그런 여자가 아니었다. 여리고 순진하고 천진스런 은실과 자매 같은 여인이었다. 은전다발이 소문이 사실이라고 항변하고 있었다. 예남은 그 길로 마포 색주가로 향했다.

이병은 전쟁 전보다 더 맑아보였고 더 아름다워졌지만 태산준령을 휘감은 구름 같이 거역할 수 없는 기운을 만들고 있었다. 예남은 그때 들은 슬프고도 단단한 이병의 목소리를 잊지 못한다. “끌려갔다 돌아온 조선여자들이 화냥년이라 손가락질당하고 목을 매는 판인데 제 한 몸 팔아 딸을 구하는 것이 뭐 대수겠습니까.”

강을 8번 건넜다. 강가에는 배꽃이 만발하고 두견화도 아직 남아 있었다. 강가 길가에 3명의 오랑캐가 밭을 갈고 있었다. 예남이 “은실아, 은실아.” 부르며 달리기 시작했다. 흙을 부수던 여인이 일어나 마주 달려와 예남에게 안겼다. 둘은 서로 얼싸안고 통곡했다. 예남이 나를 불렀다. 나는 흐느끼는 채로 둘에게 다가갔다. 예남이 은실에게만 들리게 말했다.
“비록 남장을 하고 쫓아왔지만 봐라 네 어미 이병이다.” 은실이 나를 와락 얼싸안았다.

작가소개

유하령 소설가
유하령
병자호란 때 심양으로 끌려간 포로들을 형상화한 역사소설 <화냥년>을 썼다.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끌려간 포로여인을 소재로 한 역사소설을 집필 중이다.
조선 가부장사회가 통치수단으로 삼았던 ‘여성의 정절’과 오염된 여자라는 개념의 비칭 ‘화냥년’이 현대 한국여자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소설로 형상화하는 것을 숙제로 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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