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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의 말

희망을 보는 일

김수영

웹진 제3호를 준비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전체 주제를 “짝, 그리고 결혼”으로 정한 후에, 주요 글 꼭지들의 청탁을 마치고 편집위원들이 웹진의 전반적인 구성에 대한 고민을 나누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 우리 사회를 뒤흔든 커다란 재난, 세월호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웹진 “담담”이 출범한지 얼마 되지 않았던 이 때 저희 편집위원들은 적지 않게 고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전통 문화를 우리 당대의 살아 있는 문맥과 연결시켜 오늘의 시선으로 과거를 다시 생생하게 살려낸다는 야심찬 의욕을 가지고 출발했는데, 이런 사건을 눈앞에 두면서도 남녀의 사랑에 대한 글들을 묶어 웹진을 내는 일이 적절해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편집위원들은 오랜 고민 끝에, 청탁이 완료된 상황에서 주제를 바꾸는 것은 어렵다고 판단하고 다음 적절한 기회에 이 주제에 대해서 다시 기획해서 독자 여러분들에게 보여드리기로 결정했습니다. 이번 웹진 “담談” 제26호는 이 약속에 대한 응답입니다.

이번 호의 주제는 “재난”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고통을 안기고 삶의 희망과 기대를 송두리째 꺽어버리는 사건, 그것을 우리는 재난이라 부릅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자연의 힘이 큰 규모로 우리를 공격하기도 하고 우리 스스로 허술하게 엮어놓은 시스템에서 균열이 발생하면서 엄청난 비극이 생기기도 합니다. 이는 오늘날에도 그러하고 예전에도 그러했습니다.

재난은 항상 맹목적입니다. 특정한 대상을 향해서 돌진하지 않습니다. 여름날의 폭우처럼 갑자기 찾아와서 모든 이들의 머리 위에 쏟아집니다. 그러나, 과거를 돌이켜 보면, 자신을 지켜줄 안전한 보호수단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보통의 백성들에게 재난은 더욱 가혹했습니다. 일상의 삶을 이어가는 일도 힘겨운 법인데 예상치 못했던 불행한 일들은 삶의 기반을 뿌리채 뒤흔들어 놓기 일쑤였습니다.

재난을 뜻하는 영어 단어 중 하나인 disaster 는 부정을 뜻하는 접두어 dis와 별을 의미하는 astron이 합쳐져서 만들어진 말입니다. 자연적 재해를 예측하기 어려웠던 옛날, 하늘에 떠 있는 별들의 움직임을 관찰하면서 무엇인가 비정상적인 운행이 눈에 띄면 그것으로 재난의 도래를 추측하곤 했죠. 물론 과학적인 근거는 없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재난을 피하려는 열망, 그리고 그것을 극복하려는 열정이 얼마나 강했으면 하늘의 별들의 움직임에 의존했겠습니까? 여기서 우리는 재난에 대한 공포 그리고 그에 대한 극복의 의지를 읽습니다.

우리는 그간 계속해서 재난과 싸워왔습니다. 우리의 역사는 재난의 역사입니다. 그러나 또한 우리의 역사는 재난 극복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재난에서 희망을 보는 일, 한 겨울에 봄을 상상하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가 늘 하고 있는 일이고 또한 늘 해야 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봄입니다. 눈앞에 펼쳐진 희망을 봅니다. “담談”을 늘 아껴주시는 여러분께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세곡선이 난파되면 뒷감당은 모두 불쌍한 백성들의 몫이다”

조재호, 영영일기(嶺營日記),
1751-07-10
1751년 7월 10일, 쌀과 콩을 합하여 1872섬 13말 6되 3홉 8작을 실은 배가 김해(金海) 명지도(明旨島) 아래 웅천(熊川) 정거리 위에 도착했을 때 풍랑을 만나 난파되었다. 두 고을에서 건져 올린 것이 쌀이 1101섬, 콩이 45섬이고 건져 올리지 못한 것은 쌀이 419섬 1말 4되 4홉 2작이고 콩이 307섬 2말 1되 9홉 6작이니 사분의 일의 손실을 본 것이다. 조재호는 법령에 따라 하룻길 거리에 있는 밀양부(密陽府) 백성들에게 건져 올린 건열미(乾劣米)를 개색(改色)하도록 하였으며, 가을에 다시 받자[捧上]하라 하고 건져 올리지 못한 쌀의 수량만큼은 기간을 정하셔서 거두어 올릴 것이며, 건열미와 아울러 같은 시기에 상납하도록 하겠음을 장계로 써서 올렸다.

“난파된 세곡선의 일로 세금을 징수하려는 것에 대해 법을 근거로 선처를 요청하다”

조재호, 영영일기(嶺營日記),
1751-09-30 ~
1751년 9월 30일, 호조(戶曹)에서 관문이 내려왔는데 그 내용인 즉, 병인년(1746)에 감관(監官) 신윤보(辛胤寶)와 색리(色吏) 김윤택(金允澤) 등이 납부할 것이 각각 쌀 34섬 8되 3홉과 콩 16섬 10말 9되라는 것이었다.

이에 조사하고 심문해 보니 감관 신윤보는 작년 3월에 전염병으로 온 집안이 몰사하였고, 색리 김윤택은 정묘년(1747) 5월에 대동미 실은 배에 탔다가 8월 22일에 남양(南陽) 경내의 창도(倉島) 앞바다에 이르러 배가 난파되어 사공과 격군 3명이 물에 빠져 죽었고 감관과 색리 및 격군 8명은 요행이 살아났으나 침몰한 곡물은 끝내 1섬도 건지지 못하는 일이 발생한 경우였다.

“잠수부를 많이 동원하여 시신을 건지도록 하였다”

조재호, 영영일기(嶺營日記),
1752-02-18 ~
1752년 2월 18일, 창원부 병선의 사공과 격군으로서 북관에 운반해갈 곡식으로 진주(晉州)의 곡식을 받아서 싣고 색리, 사공, 격군 모두 15명이 같이 배를 타고 출발하였다가 풍랑을 맞아 난파되어 곡물은 모두 물에 빠지고 8명은 죽고, 7명은 살아남게 되었다. 죽은 사람은 진주 색리 김순은(金舜殷) 나이 25세, 사공 물선군(物膳軍) 임악(林岳) 나이 42세, 격군 양인 유선(劉先) 나이 58세, 금위군(禁衛軍) 정정의(鄭正儀) 나이 43세, 사노(寺奴) 시돌이(時乭伊) 나이 43세, 칠장보(漆匠保) 김석제(金石諸) 나이 18세, 봉군(烽軍) 박선학(朴善鶴) 나이 32세, 봉군(烽軍) 장귀발(張貴發) 나이 25세 등 8명인데, 그 가운데 사노인 시돌이의 시신이 떠서 나왔기에 나룻가에 임시로 매장하였고 나머지 7명의 시신은 끝내 건져내지 못했기에 잠수부를 많이 동원하여 사방으로 흩어져 수색하고 건지도록 지시를 내린다.

“조선시대의 소방관, 도처의 화재에 대응하다”

서찬규, 임재일기(林齋日記),
1847-01-16 ~ 1858-02-09
1847년 1월 16일, 서찬규는 영천 은해사에 불이 났다는 것을 들었다.
1853년 12월 4일, 밤에 순영(巡營, 감영)의 방에서 불이 났다고 한다.
1858년 2월 9일, 정군백의 편지에 답장을 썼다. 요즘 도처에서 화재가 많으니 괴이하다.

“임금의 능에서 발생한 화재, 왕릉을 지키던 자 모조리 잡혀가다”

김종, 임진일록(壬辰日錄),
1592-03-24
1592년 3월 24일 저녁, 명종(明宗)의 능인 강릉(康陵)에서 화재가 발생하였다. 화재는 강릉을 감싸는 담장 안에서 발생하였는데, 왕릉에 입힌 무덤의 떼까지 태웠다. 다음날(3월 25일) 강릉을 지키고 있던 참봉(參奉) 이귀(李貴)가 궁으로 들어와 지난밤 화재를 아뢰었다. 선조(宣祖)와 조정에서는 이를 불미스러운 일로 받아들였다. 또 행여 왕실에 거역하는 무리가 있을까 하여 우선 왕릉을 지키고 있었던 사람들부터 잡아들였다. 이귀는 물론이고 능을 지키고 있던 수호군(守護軍)인 경국(敬國)과 그의 아비 홍순(洪順)을 모두 붙잡아 가두었다. 그리고는 선조는 조정의 당상관(堂上官)들과 예조의 당상관, 해당 관사의 제조(提調), 승지(承旨) 이정형(李廷馨)과 내관(內官)들을 파견하여 곧장 강릉으로 가서 왕릉을 살피도록 하였다.

“안동 태사묘만 화재를 면하다”

권상일, 청대일기(淸臺日記),
1721-03-23
1721년 3월 23일, 권상일이 들은 이야기였다. 안동에서 일주일 전 큰 바람이 일었다고 한다. 그런데 서문 밖에 어느 작은 집에서 불이 났는데 그로 인하여 불이 성 벽을 넘어 성 안쪽으로 옮겨 붙었다고 한다. 성안으로 옮겨진 불은 삽시간에 400여 채를 모두 불태우고 관아도 피해를 입어 객사와 공수청 이외에는 모두 불타 버렸다고 한다.

그런데 유독 태사묘(太師廟)만은 살아남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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