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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ver Story

민과 권력

이정철


민과 권력의 관계가 현실 문제가 된 연원은 서양보다는 중국과 한국에서 훨씬 길다. 다스려야 할 민의 수가 많지 않을 때 권력의 원천은 신탁(神託)이나 폭력인 경우가 많았다. 서양에서 고대에서 중세에 이르기까지 사제나 무인집단이 지배층을 형성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에 반해서 중국과 한국은 민과 권력의 관계에 관해 오랜 역사를 지닌다. 중국은 이미 기원전에, 그리고 한국도 기원 전후로 왕조국가의 전통을 가지고 있다. 아무리 낮추어 잡아도 중국에서 당나라(618~907)와 우리의 고려시대(918~1392)부터는 오늘날의 민과 권력의 관계에 대한 담론이 나타나고 있다.

조선시대에 왕의 공부기관인 경연(經筵)에서 많이 강론되던 책으로 『정관정요(貞觀政要)』가 있다. 당나라를 반석 위에 올려놓았던 태종이 재상들과 나눈 문답을 기록한 책이다. 제왕학의 교과서로 알려진 책이다. 그 전부터 있었던 말이지만 이 책에 실려서 더욱 유명해진 말 중에 임금과 백성, 다시 말해서 권력과 민의 관계를 갈파한 구절이 있다. “임금은 배요 백성은 물이다. 물은 배를 띄우지만 배를 뒤집을 수도 있다.”(君者舟也 庶人者水也. 水則載舟,水則覆舟.)는 말이 그것이다. 성공적인 정치 운영의 요체는 백성과의 관계에서 결정된다는 뜻이다.

조선은 처음부터 유학을 통치 원칙으로 천명하며 세워진 나라이다. 유학에서는 정치의 정당성을 신(神)이나 폭력이 아닌 ‘위민’(爲民)에서 찾는다. 말하자면 백성이 권력 정당성의 토대인 것이다. 물론 예나 지금이나 권력의 정당성을 백성들 삶에 둔다는 원칙이 공동체 성원의 일상적 삶에서 늘 관철되었던 것은 아니다. 오늘날 헌법정신이 모든 사람과 모든 사안에서 늘 관철되지 않는 것과 다르지 않다. 다만 그 원칙은 많은 흔들림과 이탈 속에서도 민과 권력의 관계가 끊임없이 되돌아오는 무게중심 역할을 했다.

임진왜란 중 이원익의 발언이 이를 잘 보여준다. 이원익은 임진왜란 중인 선조 28년(1595) 6월에 경상‧전라‧충청‧강원 4도 도체찰사에 임명되어 남쪽 지방으로 내려갔다. 당시 왜군이 남쪽지방에 포진한 채 조명연합군과 대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남쪽 지방 전체가 전장(戰場)이었던 셈이다. 그에 따라 민생(民生)은 말이 아니었다. 도체찰사는 말 그대로 비상한 시기에 왕을 대신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이원익은 1년 넘게 남쪽 지방 전장을 누비며 활동하다가 다음해 9월에 서울로 복귀했다. 선조에게 보고하는 자리에서 이원익은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에게 삶을 즐거워하는 마음이 있은 후에야 윗사람을 친애하고, 그들을 위해 목숨이라도 버리는 법입니다. 백성들에게 항심(恒心)이 없으면 아무리 그들을 엄중한 법으로 묶어두려 하여도 모두 떠나버릴 계획을 하고 정착해 있지 않을 것입니다. 백성의 생활이 곤궁하고 어렵다는 말을 선비들은 입버릇처럼 합니다. 주상께서도 아마 이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계실 것입니다. 지금 신이 지방 사정을 직접 자세히 보고 왔습니다. 왜가 물러간다 해도 국가의 근본이 이 지경이 되었으니 크게 걱정스럽습니다.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것을 염두에 두소서. 백성만이 국가의 근본입니다. 조정은 이 점을 절실하고 급박한 임무로 삼아야 합니다. 기타 일들은 부수적인 일일 뿐입니다.”

《선조실록》29년 10월 갑신

위에서 이원익은 백성이 나라의 근본이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것 이외의 국가의 일은 모두 부수적인 일일 뿐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말이 큰 울림이 있는 것은 조선 건국의 원칙을 다시 한 번 말했기 때문이 아니라, 임진왜란 중에 이 말이 사실 그대로임을 이원익이 체감했기 때문이다. 군량을 조달하는 것도 백성이고, 왜군과 싸우는 주체도 백성이었다. 임진왜란은 나라의 근본 토대가 백성들임을 다시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우리는 간혹 현재의 사건과 시간 속에서 역사를 느낄 때가 있다. 2016년 광화문과 온 나라를 달군 촛불시위도 그런 예감을 갖게 하는 사건이다. 아마도 2016년 11, 12월은 우리 현대사의 큰 사건으로 기록될 가능성이 높다. 그것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촛불을 들어 올린 시민들


따져보면 현재의 촛불시위가 평균적인 한국인들의 직간접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아주 낯설지는 않다. 4.19가 그랬고, 1987년 6월이 그랬다. 그때도 사람들은 거리로 나왔고, 그 끝에는 권력의 구성과 내용에 변화가 있었다. 그러나 이번 촛불시위는 그 전과 다른 점들이 쉽게 눈에 들어온다. 가장 눈에 띠는 것은 지도부가 없다는 것이다. 현재의 한국사회를 움직이는 중요한 집단들이 촛불시위에서는 전혀 지도력을 발휘하고 있지 못하다. 어떤 유력한 정당도 눈에 띠지 않는다. 정당의 유력한 지도자들은 시민들 속에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뿐이다. 그들은 단지 거대한 촛불의 힘에 압도되어 끌려가는 형국이다. 거대기업의 강력한 노조들의 경우도 상황은 같다. 이번 촛불시위에서 노조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촛불시위에 나온 사람들은 그 노조들의 조직으로 동원된 사람들이 전혀 아니다.

무엇보다 의미심장한 것은 촛불시위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지식인의 역할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지식인은 늘 존중받았다. 기성 권력의 입장에서든, 그 권력에 반대하는 입장에서든 그것은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 촛불시위에서 지식인들의 역할을 찾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전대미문의 규모로 사람들이 모였고, 그들의 주장은 명료했고, 사람들의 군집에 따라 자연적으로 나타나게 마련인 폭력은 자제되었다. 심지어 시위 후 거리에 쓰레기도 남지 않았다. 이런 양상이 여러 차례 반복되고 있다. 우연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 중에 마침내 매우 낯선 구호가 등장하였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대한민국 헌법 1조이다. 대규모 시위에서 헌법 1조라니. 놀랍게도 그 구호의 외침에 따라 마침내 대통령이 국회에서 탄핵을 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더군다나 국회의원은 아직 임기를 3년도 더 남겨두고 있다.

조선시대 ‘성리학’의 등가물을 오늘에서 찾는다면 가장 비슷한 것은 ‘민주주의’이다. 각 시대가 상정한 가장 이상적인 공동체 운영의 원리를 조선은 성리학이라 했고, 지금 우리는 민주주주라 이름 붙였다.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지만, 민주주의가 단순히 사상이 아니듯 성리학도 단순히 사상이 아니었다.

조선왕조실록에 빈번히 나오는 말 중 하나는 선비가 국가의 ‘원기(元氣)’라는 말이다. 선비가 국가의 으뜸 되는 주체라는 말이다. 그런데 건국 초기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이 말이 현실성을 띠게 되었던 것은 나라가 건국되고 100여 년이 지난 뒤부터였다. 그때 비로소 조선은 우리가 아는 조선이 되었다. 선비는 글공부를 통해서 성리학적 인격과 사회적 공공성을 획득한 존재이다. 그가 관직에 있는가, 얼마나 높은 관직에 있는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 선비가 등장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그들이 사회적 공공성을 드러내려 할 때 정치적 탄압을 피할 수 없었다. 적어도 50년 이상 계속된 사화(士禍)가 그것이다. 선비들은 그것을 극복하며 마침내 공적 존재가 되었던 것이다.

지난 수 십 년 동안에도 한국에서 큰 시위는 여러 번 있었다. 그 시위의 주체는 대개 개인적으로 한국사회의 선진적 인자이거나 그것이 아니면 조직된 집단이었다. 국민들은 그들을 응원했고, 그런 민의가 분출할 때마다 한국사회는 조금씩 발전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시위의 주체가 되었던 인자들이나 집단은 기성세력이 되었고, 민의에 반하는 양상을 보여주었다. 이번 촛불시위에서 사람들은 어떤 집단의 대의도 요청하지 않았다. 그들은 헌법 1조를 외치면서 스스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두고 보아야겠지만, 시민이 등장한 것 같다.




작가소개

이정철 (한국국학진흥원 책임연구위원)
이정철
고려대학교를 졸업했고, 같은 대학에서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UCLA에서 머물며 다른 나라 역사에 대한 수업도 듣고, 한국사 연구 성과를 영역화하는 작업을 했다. 현재는 한국국학진흥원에서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왜 선한 지식인이 나쁜 정치를 할까』(2016, 너머북스) 『언제나 민생을 염려하노니』(2013, 역사비평), 『대동법, 조선 최고의 개혁』(2010, 역사비평)이 있다.
“ 뒷배 믿고 기고만장한 관노, 말에서 내릴 줄을 모르다 ”

저자미상, 을묘청의변, 시기미상
1859년 봄, 예안지역의 신유(新儒: 새로 유안에 편입된 유생)들이 김수근의 위패를 운계서원에 배향하였다. 서원 공사가 역시 광대하였지만, 예안 현감이 성심으로 돌보고 도와주었다. 예안 사람들은 김진형과 연관 되었다고 지목하였다. 예안 사람들의 말은 확실히 믿을 수가 없거니와, 관노(官奴) 이종릉(李鍾陵)은 운계서원의 공사에 상당한 노고가 있음으로 인하여 한양의 권력자들에게서 믿음이 적지 않았다. 예안 현감이 거꾸러지며 반가이 대우하니 이종릉이 그가 거꾸러지며 반가이 대우하는 것을 보고, 자기 눈앞에 거리낄 것이 없었다. 이휘녕의 장례를 봉성(鳳城)에서 치를 적에 관가의 말을 타고 의기양양하게 달려가다가 판중추부사 이효순(李孝淳)의 가마를 만나서 들이받을 뻔하여, 판중추부사가 일어나 지나갔는데, 조심할 줄을 몰랐다. 그리하여 고을 사람들이 그의 집을 헐어버리고 관내 다른 지역으로 쫓아버렸다. 그 사람이 한양으로 도망가서 사동 행랑채에 몸을 의탁하였다. 예안 현감이 매양 살뜰한 정을 다하여 돌보아 주었다. 예안 현감의 둘째 아들이 1861년(철종12, 신유) 봄에 문과에 급제를 하자 이종릉이 모든 일을 주관하였다. 둘째아들이 영광스럽게 고향에 돌아옴에 이르러 이종릉이 말을 나란히 타고 길에 올랐다. 예안 사람들이 직접 눈으로 보고 전하는 자가 많았다.

“ 서책을 찍을 종이를 백성들에게 거두어들이다 ”

김령, 계암일록, 1631-05-10 ~
1631년 5월 10일, 완연한 봄인데도 날이 흐리고 추웠다. 금처겸이 하회 마을에서 돌아와 그의 장인인 류계화의 편지를 전해주었다. 류계화는 김령과 오랜 친구 사이였는데, 얼마 전 합천 군수를 제수 받고 서울에 올라갔다가 돌아왔다. 이제 조만간 합천군으로 부임할 것이라 한다. 오랜 친구가 관직을 얻었다고 하니 김령은 마음이 흡족하였다.
그러나 흡족한 마음도 잠시, 오후에는 다소 언짢은 소식도 들었다. 이번에 나라에서 『태평어람(太平御覽)』과 『자치통감(資治通鑑)』을 인쇄하도록 경상도 감영에 명령하였던 모양이다. 감사 조희일이 이 서책을 인쇄하는 데 쓸 종이를 각 고을에 배정하여 거두어들었다. 우리 예안현에는 숙후지(熟厚紙) 6권, 후백지(厚白紙) 12권, 백지(白紙) 6권 등 총 24권을 내도록 하였다고 한다. 가뭄에 백성들의 요역이 더욱 많아졌으니 괴로운 마음을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태평어람』과 『자치통감』은 올바른 정치를 가르치는 역사책인데, 이런 책들을 백성의 고혈로 찍어내고 있으니 황당한 마음도 드는 김령이었다.

“ 7년 간 휘두른 영의정의 무소불위 권력, 서서히 막을 내리다 ”

김령, 계암일록,
1608-01-29 ~ 1608-03-29
1608년 1월 29일, 추웠다. 평보 형을 지나는 길에 만났다. 듣자하니, 이달 20일쯤에 전 참판 정인홍이 상소하여, 영의정 류영경(柳永慶)이 동궁을 모위했다고 탄핵하면서 그가 마음대로 자행한 정상을 극단적으로 말하였다고 한다.충주의 진사 이정원과 경상우도의 하성 등이 상소하여 류영경(柳永慶)의 죄를 논했는데, 이를 들은 자는 속이 시원해 했다고 한다.
영경이 나라 일을 담당한 것이 7년인데, 권세를 마음대로 휘두르고 자기 무리들을 포진시켜 재물을 탐내고 관직을 더럽히기를 거리낌이 없어서 뇌물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성품마저 교활하여 군왕에게 아첨을 잘하였는데, 이것 때문에 임금의 총애가 시들지 않고, 국혼을 빙자하여 왕실과 교분을 맺었다. 변방의 장수나 지방 수령들이 그에게 뇌물을 바쳐 벼슬자리를 얻지 않은 자가 없었다.

“ 성난 평양 백성들, 목숨 걸고 왕의 피난길을 막아서다 ”

정탁, 피난행록,
1592-05-07 ~ 1592-06-09
1592년 5월 7일, 선조는 왜적들의 난을 피해 평양에 도착하였다. 그 후 선조는 정치적으로 여러 인사를 단행하였다. 비록 여러 가지로 정세는 어수선했지만 선조는 평양에 머물며 백성들을 위로하는가 하면, 한편으로는 과거를 실시하여 군사들을 충원하려 하였다.
그런데 6월 1일 임진강 방어에 실패했다는 도순찰사(都巡察使) 김명원(金命元)의 장계가 이르렀다. 행재소의 경계는 삼엄해지고 급한 마음에 선조는 파직했던 유성룡(柳成龍)을 다시 불러들이기까지 하였다. 그럼에도 아직 여유로운 수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대동강이 적을 막아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선조는 마음을 놓을 수만은 없었다. 이에 6월 6일 내전(內殿)과 세자빈을 보다 안전한 함흥부(咸興府)로 곡절 끝에 보냈다. 또한 명나라에서 온 관료들을 맞이하여 조선의 상황을 설명하기도 하였다.

“ 규정을 위반한 좌수, 마을의 논의를 통해 파직되다 ”

김령, 계암일록,
1620-07-09 ~ 1620-11-20
온 동네가 좌수 이협(李莢)의 이야기로 어지럽다. 그의 죄상이 매우 심각했던 것이다. 지난 6월 15일에 여러 사람들이 도산에 모였는데, 고을에 문서를 돌려 그의 죄를 성토하고 내쫓기로 했으나 일단 유보하였다. 이협은 이 소문을 듣고서야 병을 핑계대고 문 밖을 나오지 않았다.
머지않아 이협은 좌수직에서 내려왔다. 김령은 침락정(枕洛亭)에서 물고기를 잡으며 이 소식을 들었는데, 이를 들은 자들이 모두 다행스럽고 시원해 하면서도 오히려 그의 죄를 바로 잡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겼다. 이협이 좌수직에서 내려온 지 며칠 지나지 않아 별감 황유문(黃有文)이 왔다. 좌수 자리에 누구를 천거할 것인가를 의논하러 온 것 같았다. 이 날은 향임들이 모여 그동안 사용한 대동포(大同布) 공물의 여러 가격을 조사해보았다. 그랬더니 이협이 항상 규정 이외로 백여 필을 소비한 것이다. 이밖에도 자잘하게 규정을 위반한 것이 실로 헤아릴 수 없다. 듣고 보니 놀랍고 분통 터지는 일이 아닌 것이 없었다.
겨울이 되었다. 별감 신진부(申盡夫)가 이협의 죄를 정하는 일 때문에 물으러 왔는데, 훼가출송(毁家黜送)은 심한 것 같았다. 그 밖의 벌은 어떤 벌도 괜찮다고 생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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