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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의 말

새해, 희망을 품고

김수영


2017년 새해가 시작되었습니다. 새해를 가르는 기준은 시대마다 달랐고 또한 문화적인 전통에 따라 상이하지만, 적어도 낡고 묵은 것을 보내고 새로운 희망을 맞이하고 싶은 소망은 모두에게 공통인 듯합니다. 작년 힘든 한해를 보낸 우리 사회는 그 소망이 더욱 절실합니다.

돌이켜 보면 지난해 우리 사회는 감당하기 어려운 여러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 위기 중의 가장 무겁고 큰 것은 민주주의의 위기였습니다. 민주주의, 백성이 주인이라는 소중한 가치가 그 가장 근본적인 차원에서 위협받았습니다. 이에 백성들은 자기 자신을 지키고 자기 자신의 도덕적 이념인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 광장으로 나왔습니다. 민주주의는 광장에서 자라납니다. 사적인 이해와 사적인 계산을 넘어서 모두를 아우르는 공적 가치를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한 사람의 정치지도자나 하나의 정당에 대한 찬성과 반대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이들이 함께 설 수 있는 넓은 공간에서 우리의 공동체가 지향해야 할 정치적 가치에 대한 성숙한 논의가 계속된 것이 무엇보다 소중한 경험이었습니다.

이번 호 웹진 “담담”은 백성과 나라에 대한 이런 고민을 담기로 했습니다. 교수신문이 2016년 한 해를 규정하는 “올해의 사자성어”로 “군주민수(君舟民水)”를 선정했을 정도로, 백성과 나라가 서로 어떻게 관계 맺고 또한 어떻게 상호작용을 이어나가야 하는가의 문제가 지금 우리가 안고 있는 가장 중요한 화두라는 생각에서였습니다.

박원재 선생님은 “민심-백성의 마음이 움직이다”라는 제목의 글에서 “군주민수”의 출전인 “순자”의 텍스트를 분석하여 그 뜻을 밝히고 나아가 정치는 백성의 마음을 얻는가 얻지 못하는가에 따라 그 성패가 결정된다는 통찰이 가지는 깊은 의미를 잘 보여주셨습니다. 또한 이정철 선생님은 “민과 권력”이라는 글로 조선의 정치 이념과 현시대의 촛불을 비교하면서 우리 사회가 지향해야 하는 공동체적 가치에 대한 고민을 백성과 권력의 관계를 통해 풍요롭게 설명해주셨습니다. 두 분께 감사드립니다.

이제 11회째를 맞이하는 장순곤, 이승훈의 “요건 몰랐지?”는 암행어사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이 유쾌한 이야기를 읽으면서 우리는 정치를 감시하는 효율적 수단이었던 암행어사 제도가 여러 폐단에도 불구하고 어떤 이유에서 그토록 귀중한 역할을 수행했는지 잘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임세권 선생님의 4번째 후이저우 이야기는 “후이저우 마을의 랜드마크 패방(牌坊)”입니다. 마을의 대문이기도 하며, 국가나 사회에 큰 공을 세운 사람을 기리기 위한 상징물 패방을 통해 후이저우가 품은 이야기를 멋진 사진과 함께 담아주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스토리테마파크의 원천 자료인 일기와 그 저자를 소개하는 “선인의 일기”를 전합니다. 그 첫 번째 일기는 김령의 “계암일록”입니다. 김형수 선생님께서 “17세기 한 선비가 글로 그린 삶의 풍경화, 계암일록”이라는 글을 통해 계암일록의 가치와 저자 김령의 다양한 면모를 담아주셨습니다. 한편, 스토리테마파크에는 김령의 계암일록에서 추출한 이야기 소재 676건이 서비스되고 있습니다.

1월입니다. 새롭게 시작하려는 의지가 가득합니다. 새롭게 모두 다시 피어날 것이라는 희망 또한 가득합니다. 어둠과 그림자는 잠깐 스쳐 가는 이야기일 뿐, 종국에는 모두가 살아나고 모두가 일어서고 모두가 서로의 어깨를 다독이는 아름다운 광경이 펼쳐질 것입니다. 그런 희망을 가지고 한 해를 시작합니다. “담담”을 아껴주시는 독자 여러분들께도 인사드립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 뒷배 믿고 기고만장한 관노, 말에서 내릴 줄을 모르다 ”

저자미상, 을묘청의변, 시기미상
1859년 봄, 예안지역의 신유(新儒: 새로 유안에 편입된 유생)들이 김수근의 위패를 운계서원에 배향하였다. 서원 공사가 역시 광대하였지만, 예안 현감이 성심으로 돌보고 도와주었다. 예안 사람들은 김진형과 연관 되었다고 지목하였다. 예안 사람들의 말은 확실히 믿을 수가 없거니와, 관노(官奴) 이종릉(李鍾陵)은 운계서원의 공사에 상당한 노고가 있음으로 인하여 한양의 권력자들에게서 믿음이 적지 않았다. 예안 현감이 거꾸러지며 반가이 대우하니 이종릉이 그가 거꾸러지며 반가이 대우하는 것을 보고, 자기 눈앞에 거리낄 것이 없었다. 이휘녕의 장례를 봉성(鳳城)에서 치를 적에 관가의 말을 타고 의기양양하게 달려가다가 판중추부사 이효순(李孝淳)의 가마를 만나서 들이받을 뻔하여, 판중추부사가 일어나 지나갔는데, 조심할 줄을 몰랐다. 그리하여 고을 사람들이 그의 집을 헐어버리고 관내 다른 지역으로 쫓아버렸다. 그 사람이 한양으로 도망가서 사동 행랑채에 몸을 의탁하였다. 예안 현감이 매양 살뜰한 정을 다하여 돌보아 주었다. 예안 현감의 둘째 아들이 1861년(철종12, 신유) 봄에 문과에 급제를 하자 이종릉이 모든 일을 주관하였다. 둘째아들이 영광스럽게 고향에 돌아옴에 이르러 이종릉이 말을 나란히 타고 길에 올랐다. 예안 사람들이 직접 눈으로 보고 전하는 자가 많았다.

“ 서책을 찍을 종이를 백성들에게 거두어들이다 ”

김령, 계암일록, 1631-05-10 ~
1631년 5월 10일, 완연한 봄인데도 날이 흐리고 추웠다. 금처겸이 하회 마을에서 돌아와 그의 장인인 류계화의 편지를 전해주었다. 류계화는 김령과 오랜 친구 사이였는데, 얼마 전 합천 군수를 제수 받고 서울에 올라갔다가 돌아왔다. 이제 조만간 합천군으로 부임할 것이라 한다. 오랜 친구가 관직을 얻었다고 하니 김령은 마음이 흡족하였다.
그러나 흡족한 마음도 잠시, 오후에는 다소 언짢은 소식도 들었다. 이번에 나라에서 『태평어람(太平御覽)』과 『자치통감(資治通鑑)』을 인쇄하도록 경상도 감영에 명령하였던 모양이다. 감사 조희일이 이 서책을 인쇄하는 데 쓸 종이를 각 고을에 배정하여 거두어들었다. 우리 예안현에는 숙후지(熟厚紙) 6권, 후백지(厚白紙) 12권, 백지(白紙) 6권 등 총 24권을 내도록 하였다고 한다. 가뭄에 백성들의 요역이 더욱 많아졌으니 괴로운 마음을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태평어람』과 『자치통감』은 올바른 정치를 가르치는 역사책인데, 이런 책들을 백성의 고혈로 찍어내고 있으니 황당한 마음도 드는 김령이었다.

“ 7년 간 휘두른 영의정의 무소불위 권력, 서서히 막을 내리다 ”

김령, 계암일록,
1608-01-29 ~ 1608-03-29
1608년 1월 29일, 추웠다. 평보 형을 지나는 길에 만났다. 듣자하니, 이달 20일쯤에 전 참판 정인홍이 상소하여, 영의정 류영경(柳永慶)이 동궁을 모위했다고 탄핵하면서 그가 마음대로 자행한 정상을 극단적으로 말하였다고 한다.충주의 진사 이정원과 경상우도의 하성 등이 상소하여 류영경(柳永慶)의 죄를 논했는데, 이를 들은 자는 속이 시원해 했다고 한다.
영경이 나라 일을 담당한 것이 7년인데, 권세를 마음대로 휘두르고 자기 무리들을 포진시켜 재물을 탐내고 관직을 더럽히기를 거리낌이 없어서 뇌물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성품마저 교활하여 군왕에게 아첨을 잘하였는데, 이것 때문에 임금의 총애가 시들지 않고, 국혼을 빙자하여 왕실과 교분을 맺었다. 변방의 장수나 지방 수령들이 그에게 뇌물을 바쳐 벼슬자리를 얻지 않은 자가 없었다.

“ 성난 평양 백성들, 목숨 걸고 왕의 피난길을 막아서다 ”

정탁, 피난행록,
1592-05-07 ~ 1592-06-09
1592년 5월 7일, 선조는 왜적들의 난을 피해 평양에 도착하였다. 그 후 선조는 정치적으로 여러 인사를 단행하였다. 비록 여러 가지로 정세는 어수선했지만 선조는 평양에 머물며 백성들을 위로하는가 하면, 한편으로는 과거를 실시하여 군사들을 충원하려 하였다.
그런데 6월 1일 임진강 방어에 실패했다는 도순찰사(都巡察使) 김명원(金命元)의 장계가 이르렀다. 행재소의 경계는 삼엄해지고 급한 마음에 선조는 파직했던 유성룡(柳成龍)을 다시 불러들이기까지 하였다. 그럼에도 아직 여유로운 수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대동강이 적을 막아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선조는 마음을 놓을 수만은 없었다. 이에 6월 6일 내전(內殿)과 세자빈을 보다 안전한 함흥부(咸興府)로 곡절 끝에 보냈다. 또한 명나라에서 온 관료들을 맞이하여 조선의 상황을 설명하기도 하였다.

“ 규정을 위반한 좌수, 마을의 논의를 통해 파직되다 ”

김령, 계암일록,
1620-07-09 ~ 1620-11-20
온 동네가 좌수 이협(李莢)의 이야기로 어지럽다. 그의 죄상이 매우 심각했던 것이다. 지난 6월 15일에 여러 사람들이 도산에 모였는데, 고을에 문서를 돌려 그의 죄를 성토하고 내쫓기로 했으나 일단 유보하였다. 이협은 이 소문을 듣고서야 병을 핑계대고 문 밖을 나오지 않았다.
머지않아 이협은 좌수직에서 내려왔다. 김령은 침락정(枕洛亭)에서 물고기를 잡으며 이 소식을 들었는데, 이를 들은 자들이 모두 다행스럽고 시원해 하면서도 오히려 그의 죄를 바로 잡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겼다. 이협이 좌수직에서 내려온 지 며칠 지나지 않아 별감 황유문(黃有文)이 왔다. 좌수 자리에 누구를 천거할 것인가를 의논하러 온 것 같았다. 이 날은 향임들이 모여 그동안 사용한 대동포(大同布) 공물의 여러 가격을 조사해보았다. 그랬더니 이협이 항상 규정 이외로 백여 필을 소비한 것이다. 이밖에도 자잘하게 규정을 위반한 것이 실로 헤아릴 수 없다. 듣고 보니 놀랍고 분통 터지는 일이 아닌 것이 없었다.
겨울이 되었다. 별감 신진부(申盡夫)가 이협의 죄를 정하는 일 때문에 물으러 왔는데, 훼가출송(毁家黜送)은 심한 것 같았다. 그 밖의 벌은 어떤 벌도 괜찮다고 생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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