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풍경은 꿈에서만 볼 수 있다. 갈 수 없는 곳이어서가 아니다. 장소가 의미 있는 것은 시간과 또는 상황과 결합해 있기 때문이다. 내가 어릴 때 뛰어놀았던 허름하고 좁은 골목, 누군가와 갔던 눈 덮인 산사(山寺), 자칫 위험한 상황에 빠질 뻔했던 바닷가. 이런 기억들을 뗀 장소가 추억의 장소가 될 리 없다.
분단된 뒤로 북한과의 관계가 좋아질 때마다 우리는 지금껏 막혀 있었던 북한의 명소들을 가볼 수 있게 되지 않을까 기대한다. 중국 북송대 문인 소동파도 한 번 보는 게 소원이었다는 금강산, 이렇게 더울 때면 여름 휴양지로 가고 싶은 개마고원, 곱고 부드러운 모래와 해당화로 유명한 원산의 명사십리. 자연경관만이 아니다.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과 지금 수도인 평양도 가보기를 고대한다. 그런데 막상 그곳에 가면 우리가 보고 싶은 풍경이 펼쳐져 있을까. 쉽게 변하지 않는 자연경관과는 달리 도시는 끊임없이 변화한다. 예전 사람들이 평양이 얼마나 멋진 곳인지 이야기했을 때 그 아름다움은 높은 빌딩으로 가득한 현대적 도시의 모습은 아니었을 것이다.
우리가 보고 싶은 평양은 어쩌면 조선 시대의 평양의 이미지일지도 모른다. 조선 시대 평양은 화려하고 풍요로운 도시로 명성이 높았고, 사람들은 평양의 여러 명소에 대해 수많은 글을 썼다. 조선 시대에 제작된 평양 지도를 보면 지금 우리에게도 낯익은 ‘연광정’, ‘부벽루’, ‘을밀대’, ‘모란봉’ 같은 지명을 찾아볼 수 있다. 평양은 중국 사신들이 한양에 왕래하면서 잠시 쉬던 곳이었기 때문에 둘러 볼 만한 명소들이 곳곳에 산재해 있었다. 만약 우리에게 딱 하루만 평양에 갈 기회가 주어진다면 평양의 여러 명소 중에서 어디를 둘러봐야 할까. 어디든 나름의 정취가 있겠지만, 그래도 평양 하면 꼭 가야 하는 곳이 있다. 그곳의 진면목을 놓치지 않도록 하루 일정을 짜보았다.
[해동지도]평양부 지도, 규장각 소장
조선 시대 나온 평양 지도는 전체 모습이 지도마다 약간씩 다른데, 그 이유는 평양 지형이 약간 특이하기 때문이다. ‘평양도 10폭 병풍’(서울대 박물관 소장)에서 평양성은 가로로 길게 펼쳐져 있지만, 실제로 평양의 지형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해동지도]이다. [해동지도]의 평양부 지도를 보면 대동강은 강동현(江東縣)에서 서남쪽으로 흘러내려 오다가 능라도를 지나는 지점에서 남쪽으로 굽어 흐르고 다시 성을 따라 서쪽으로 흐르다가 바다로 들어갔다. 평양 내성(內城)은 사각형이지만 아랫지방에서 평양으로 올라갈 일반적인 경로는 중화현(中和縣)을 거쳐 영제교(永濟橋)를 지나 강가에 뻗어 있는 긴 숲인 십 리 장림(十里長林)을 통과하여 들어가는 것이다. 장림은 두 줄로 뻗어 있기 때문에 장림을 가는 동안 바로 옆에 흐르는 대동강은 수풀 때문에 잘 보이지 않는다. 그 사잇길로 가는 동안 왼쪽의 수풀 사이로 물새가 날고 배가 떠가는 대동강 풍경이 언뜻언뜻 보일 뿐이다. 십 리 길, 다소 긴 이 숲을 지나면서 부푼 마음을 갖게 되더라도 숲이 끝나고 펼쳐진 풍경은 분명히 기대 이상일 것이다. 그제야 푸른 대동강이 펼쳐지고 강 너머 하얀 평양성이 보인다. 배를 타고 대동강을 건너 도착한 이 층 누각이 있는 대동문은 평양성의 동문(東門)이다.
중화현에서 왼쪽으로 길을 내어 대동강을 건넌 다음에 남문(南門)으로 가지 않고 왜 오른쪽으로 돌아 동문으로 가는 길이 발달하였을까. 아마도 대동강 하류라면 강폭이 더 넓기 때문일 것이다. 대동강은 서해와 가까이 있어 밀물과 썰물을 영향을 받는 감조하천(感潮河川)이었고, 대동문 근처에 있는 바위에 ‘덕암(德巖)’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도 우뚝 솟아서 홍수가 날 때 물을 막아낼 수 있기 때문에 약간 우회하기는 하지만 십 리 장림을 통과한 뒤에 배를 타고 동문인 대동문으로 건너는 것이 좀 더 수월했을 것 같다. 이렇게 보이는 대동문 바로 오른쪽에 연광정(練光亭)이 있다. 연광정은 성벽 위에 세운 누각이고, 덕암 바로 위에 있다.
평양에서는 대동강 가에 있는 누각이 특히 유명한데, 그 이유는 아름다운 풍경을 볼 수 있는 조망처이기 때문이다. 잔치를 열어 기생들의 공연을 보고 술을 마시는 풍류남이 아니더라도 연광정에서 이렇게 오랜 시간을 보내는 이유는 이곳의 풍경이 너무나 아름답기 때문이다. 성벽 위에서 아래를 굽어볼 수 있는 연광정에서는 성 안 전체를 조망할 수 있다. 그리고 성 밖을 보면 앞에 가로로 펼쳐진 대동강과 능라도(綾羅島)의 백은탄(白銀灘), 대동문에 오기 전에 거쳤던 십 리 장림, 맞은 편의 겹겹이 솟은 산도 볼 수 있다. 그래서였는지 명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은 연광정에 올라 풍광에 감탄하면서 ‘제일강산(第一江山)’ 네 글자를 썼고 연광정 편액에 그 글자가 걸려 있었다고 한다.
[연광정도], 출처, 박은순 외, [왜관수도원으로 돌아온 겸재정선화첩], 국외소재문화재재단, 2013.
연광정이나 부벽루 같은 성벽 위의 누각에서 예전 사람들은 밤에 잔치를 벌이며 풍류를 누렸다지만, 이런 곳은 높은 곳에 있어서 아름다운 풍광을 볼 수 있다는 큰 장점이 있기 때문에 올 기회가 별로 없다면 낮에 와서 그 풍경을 보는 쪽이 낫다. 이제 연광정에서 부벽루로 가기 위해서는 보통 배로 가는 것이 일반적이다. 성벽을 따라간다면 거리가 멀다는 점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가파른 절벽 길을 올라가야 하기 때문이다. 이제 연광정에서 내려와 대동문 밖에서 배를 타고 대동강 상류 쪽으로 물결을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면 연광정에서는 제대로 보이지 않았던 덕암을 볼 수 있다. 조금 더 배를 타고 청류벽을 지나 능라도 근처에서 배를 대고 성문을 들어가 오른쪽 성벽 위 누각으로 올라가면 부벽루에 도착하게 된다.
부벽루도 성벽 위에 세운 누각이기는 하지만, 여기서 볼 수 있는 풍광은 연광정과는 전혀 다르다. 부벽루에 있는 성은 북성(北城)인데 1714년에 처음 만들어졌다. 북성은 내성의 을밀대(乙密臺) 서쪽 모퉁이에서 금수산의 모란봉(牡丹峯)을 둘러 부벽루를 지나 내성의 동쪽 암문까지 이어져 있다. 북성 안에는 고구려 동명왕이 기린마를 길렀다고 하는 다소 짙은 신화적 성격을 가진 기린굴과 고구려 동명왕의 구제궁(九梯宮)이 있었다는 곳에 영명사(永明寺)가 있다.
어제 영명사를 들렸다가, 잠시 부벽루에 올랐네.
빈 성엔 한 조각 달, 오래된 바위엔 천고의 구름.
기린마를 가서 돌아오지 않는데, 천손은 어디에서 노니는가.
길게 휘파람 불면서 돌계단에 기대니
산을 부르고 강은 절로 흐르네
고려 후기의 문신 이색(李穡)의 「부벽루(浮碧樓)」 시를 보면 이색이 기린굴과 영명사를 본 다음에 부벽루에 올랐고, 뒤로 보이는 모란봉과 앞에 보이는 대동강을 보면서 감회에 젖는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다.
북성 일대에 남아있는 유적에서 사람들이 보는 것은 옛 왕조의 흔적이다. 이 풍요롭고 화려한 도시의 한 쪽에 이곳이 옛 왕조의 도읍지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유적들을 보면서 사람들은 복잡한 심경이었을 것이다. 너무나 아름답고 화려하고 현실의 고민을 잊을 법한 곳이지만, 이것도 영원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자각을 문득 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현세는 덧없지만, 바로 그런 이유로 현세를 즐겨야 하는 것이다.
기린굴과 영명사를 둘러보며 잠시 옛날 생각을 하다가 부벽루에 오른다. 이곳에서 보는 풍경이 매우 아름다웠다는 것을 전해주는 몇 가지 일화가 있다. 가장 유명한 것은 고려 시대 김황원(金黃元)이라는 사람이 이곳에 올라 “긴 성 한 면엔 일렁이는 물, 큰 들 동쪽엔 점점이 산.” 두 구를 지었다가 이 절경에 어울릴 만한 표현을 찾지 못해서 하루 종일 난간에서 고심하다가 결국 적절한 표현을 생각해 내지 못해 통곡하고 떠났다는 이야기이다. 명나라 사신인 허국(許國)이 부벽루의 승경을 중국의 소주와 항주에 견주면서 소주와 항주는 인공적이지만 부벽루와 청류벽, 섬과 봉우리는 모두 하늘이 만들어 낸 것이라 훨씬 낫다고 감탄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허국이 부벽루에서 본 섬은 능라도이고, 봉우리는 뒤에 우뚝 솟은 모란봉이었다. 금수산 모란봉은 산색이 좋아서 사람들이 봄놀이를 가는 명소였고, 능라도도 비단을 뜻하는 ‘능라(綾羅)’라는 이름처럼 멋진 유람처였다.
[모란대 부벽루], 사진엽서, 부산광역시립박물관 소장(e뮤지엄 웹사이트)
배를 타고 북성 일대를 돌아보고 마지막으로 부벽루 위에 올라가서 성 안과 성 밖의 모습을 보았다면 이제 본격적으로 대동강 뱃놀이를 즐겨야 한다. 풍류객들은 배에 술과 기생을 태우고 악기 연주를 들으면서 흥취에 젖었지만, 배를 타고 봐야 할 멋진 풍광들이 있다는 점도 잊으면 안 된다. 대동강을 기점으로 상류 일대를 둘러보는 코스도 있고 하류 일대를 둘러보는 코스도 있었지만, 일반적으로는 강물을 거슬러 상류로 올라가서 그 일대를 둘러보는 코스를 택했다. 절경으로 유명한 청류벽(淸流壁)과 부벽루, 능라도 같은 명소들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부벽루 앞에서 다시 배를 타고 상류로 더 올라간다. 부벽루 바로 앞에는 큰 섬 능라도가 있기 때문에 술이 바위틈으로 흘러나왔다는 전설을 간직한 주암(酒巖)까지 간 다음에 능라도를 거쳐 내려올 것이다. 하류 쪽 능라도에는 여울의 물보라가 하얗다는 의미에서 이름이 붙여진 백은탄(白銀灘)이 있다. 백은탄은 능라도에서 갈라진 대동강 물길이 합류하는 지점이기 때문에 물놀이하기에도 좋고 천렵을 하기에도 좋아서 이곳에 그물을 걸어놓고 물고기를 잡아서 회를 쳐 안주 삼아 술을 마시는 경우도 있었다. 능라도는 능수버들로 유명해서 ‘능라’라는 이름도 능수버들이 마치 비단을 펼쳐 놓은 것처럼 아름답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것이다. 이곳을 지날 때는 섬에 배를 대고 올라가서 악기 연주를 들으면서 흥취에 젖는데, 이 장면은 ‘평양도 10폭 병풍’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대동강 뱃놀이에서 가장 중요한 장소는 청류벽이다. 청류벽은 맑은 물이 감돌아 흐르는 벼랑이라는 뜻으로, 높고 가파르지만 동시에 절경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석벽에는 ‘청류벽’ 세 글자가 새겨져 있고 청류벽과 물에 비쳐 흔들리는 모습이 마치 병풍을 친 것처럼 보인다. 이렇게 부벽루와 북성 일대, 주암, 능라도, 청류벽을 보면 이제 해가 질 무렵일 것이다. 저녁에 석양빛이 대동강에 비치고 여러 곳을 다 둘러보고 돌아올 때는 악기 연주를 들으면서 느긋한 기분에 젖을 것이다.
이제 날이 어두워졌다. 연광정이나 부벽루에서 날이 새도록 밤잔치를 열었다지만, 이 화려한 도시에도 달밤의 호젓한 정취를 가지고 있는 숨은 장소가 있다. 배를 타고 대동문까지 와서 다시 성문을 통과해서 오른쪽으로 가면 네모난 연못인 풍월지(風月池)가 나온다. 이 연못에는 연꽃이 있고 그 이름을 따 지은 애련당(愛蓮堂)이 있다.
네모난 연못의 한 가운데에는 작은 섬이 있는데 애련당은 그 섬에 지은 3칸짜리 작은 건물이다. 애련당으로 가기 위해서는 연못가에서 가운데 섬에 놓인 다리를 건너가야 한다. 사방이 뚫린 애련당에서는 사방에 핀 연꽃이 보인다. 그윽하고 한가한 정취가 절로 느껴질 것이다. 소나기가 지나가면 구슬이 흩어지는 소리가 들리고, 때때로 바람이 살랑거리며 불어온다. 연꽃은 햇빛을 받아 눈부시게 빛난다. 그러나 애련당과 가장 어울리는 때는 달빛 나리는 밤이다. 밝은 달빛에 이슬이 맺혀 있고 연꽃 향기가 진하게 스며드는 그때, 연못은 거울처럼 맑게 주변의 경물을 비춘다.
이곳은 크지 않기 때문에 몇몇 사람들과 작은 술자리를 열면 거문고 소리와 맑은 노랫소리로 세상과 떨어져 있는 느낌이 들 수 있었다. 애련당 하면 사람들이 낭만적으로 떠올리는 정경도 있었다. 18세기 인물 이의봉(李義鳳)이 1760년 중국에 사신으로 갔던 일을 기록한 북원록(北轅錄)을 남겼는데, 그때 평양 주민들이 애련당에 대해 한 이야기를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바야흐로 하늘에서 어여쁜 달이 드러나고 연꽃 향기가 풍길 때
어린 기생들이 노란 저고리에 붉은 치마를 입고
비단 닻줄을 끌거나 노를 두드리면서 노래와 춤을 추는데,
연못을 빙 두르면서 잎과 꽃 사이로 보였다 가려졌다 하는 것이
애련당의 멋진 풍광입니다.
평양은 산수도 아름답고 경제적으로도 풍요롭고 유명한 기생도 많은 화려한 도시였다. 그래서 어쩌면 낮이든 밤이든, 번화한 곳이든 한적한 곳이든 평양을 구경할 때에는 언제나 음악과 기생이 함께 한다. 어쨌든 평양이라는 도시는 산수가 수려하고 풍경이 아름답고 멋진 건축물이 많다 해도 혼자서 조용하게 구경하는 곳이 아니었다. 평양은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음악을 듣거나 술을 마시며 즐겁게 웃고 떠들기에 최적화된 곳이었다.
생전에 평양에 꼭 가봤으면 좋겠다는 소원을 이야기할 때 그 속에는 기생과의 로맨스가 가능할 것도 같고, 남루한 현실을 잊게 만드는 화려한 곳이라는 이미지가 있다. 그런데 기생들과 악사들을 대동하고 술을 가지고 떠나는 이 즐거운 여행을 하려면 돈이 많이 들 수밖에 없다. 평양은 돈을 탕진하는 도시였다. 잠시 현실을 잊고 낭만과 즐거움을 누리는 대가로.
‘애련당’, [평양도 10폭 병풍] 중 부분, 서울대학교 박물관 소장
시기 | 동일시기 이야기소재 | 장소 | 출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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