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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평양으로 떠나는 하루 여행

이은주


어떤 풍경은 꿈에서만 볼 수 있다. 갈 수 없는 곳이어서가 아니다. 장소가 의미 있는 것은 시간과 또는 상황과 결합해 있기 때문이다. 내가 어릴 때 뛰어놀았던 허름하고 좁은 골목, 누군가와 갔던 눈 덮인 산사(山寺), 자칫 위험한 상황에 빠질 뻔했던 바닷가. 이런 기억들을 뗀 장소가 추억의 장소가 될 리 없다.

분단된 뒤로 북한과의 관계가 좋아질 때마다 우리는 지금껏 막혀 있었던 북한의 명소들을 가볼 수 있게 되지 않을까 기대한다. 중국 북송대 문인 소동파도 한 번 보는 게 소원이었다는 금강산, 이렇게 더울 때면 여름 휴양지로 가고 싶은 개마고원, 곱고 부드러운 모래와 해당화로 유명한 원산의 명사십리. 자연경관만이 아니다.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과 지금 수도인 평양도 가보기를 고대한다. 그런데 막상 그곳에 가면 우리가 보고 싶은 풍경이 펼쳐져 있을까. 쉽게 변하지 않는 자연경관과는 달리 도시는 끊임없이 변화한다. 예전 사람들이 평양이 얼마나 멋진 곳인지 이야기했을 때 그 아름다움은 높은 빌딩으로 가득한 현대적 도시의 모습은 아니었을 것이다.

우리가 보고 싶은 평양은 어쩌면 조선 시대의 평양의 이미지일지도 모른다. 조선 시대 평양은 화려하고 풍요로운 도시로 명성이 높았고, 사람들은 평양의 여러 명소에 대해 수많은 글을 썼다. 조선 시대에 제작된 평양 지도를 보면 지금 우리에게도 낯익은 ‘연광정’, ‘부벽루’, ‘을밀대’, ‘모란봉’ 같은 지명을 찾아볼 수 있다. 평양은 중국 사신들이 한양에 왕래하면서 잠시 쉬던 곳이었기 때문에 둘러 볼 만한 명소들이 곳곳에 산재해 있었다. 만약 우리에게 딱 하루만 평양에 갈 기회가 주어진다면 평양의 여러 명소 중에서 어디를 둘러봐야 할까. 어디든 나름의 정취가 있겠지만, 그래도 평양 하면 꼭 가야 하는 곳이 있다. 그곳의 진면목을 놓치지 않도록 하루 일정을 짜보았다.


[해동지도]평양부 지도, 규장각 소장


첫 번째 코스: 대동문을 지나 연광정으로


조선 시대 나온 평양 지도는 전체 모습이 지도마다 약간씩 다른데, 그 이유는 평양 지형이 약간 특이하기 때문이다. ‘평양도 10폭 병풍’(서울대 박물관 소장)에서 평양성은 가로로 길게 펼쳐져 있지만, 실제로 평양의 지형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해동지도]이다. [해동지도]의 평양부 지도를 보면 대동강은 강동현(江東縣)에서 서남쪽으로 흘러내려 오다가 능라도를 지나는 지점에서 남쪽으로 굽어 흐르고 다시 성을 따라 서쪽으로 흐르다가 바다로 들어갔다. 평양 내성(內城)은 사각형이지만 아랫지방에서 평양으로 올라갈 일반적인 경로는 중화현(中和縣)을 거쳐 영제교(永濟橋)를 지나 강가에 뻗어 있는 긴 숲인 십 리 장림(十里長林)을 통과하여 들어가는 것이다. 장림은 두 줄로 뻗어 있기 때문에 장림을 가는 동안 바로 옆에 흐르는 대동강은 수풀 때문에 잘 보이지 않는다. 그 사잇길로 가는 동안 왼쪽의 수풀 사이로 물새가 날고 배가 떠가는 대동강 풍경이 언뜻언뜻 보일 뿐이다. 십 리 길, 다소 긴 이 숲을 지나면서 부푼 마음을 갖게 되더라도 숲이 끝나고 펼쳐진 풍경은 분명히 기대 이상일 것이다. 그제야 푸른 대동강이 펼쳐지고 강 너머 하얀 평양성이 보인다. 배를 타고 대동강을 건너 도착한 이 층 누각이 있는 대동문은 평양성의 동문(東門)이다.

중화현에서 왼쪽으로 길을 내어 대동강을 건넌 다음에 남문(南門)으로 가지 않고 왜 오른쪽으로 돌아 동문으로 가는 길이 발달하였을까. 아마도 대동강 하류라면 강폭이 더 넓기 때문일 것이다. 대동강은 서해와 가까이 있어 밀물과 썰물을 영향을 받는 감조하천(感潮河川)이었고, 대동문 근처에 있는 바위에 ‘덕암(德巖)’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도 우뚝 솟아서 홍수가 날 때 물을 막아낼 수 있기 때문에 약간 우회하기는 하지만 십 리 장림을 통과한 뒤에 배를 타고 동문인 대동문으로 건너는 것이 좀 더 수월했을 것 같다. 이렇게 보이는 대동문 바로 오른쪽에 연광정(練光亭)이 있다. 연광정은 성벽 위에 세운 누각이고, 덕암 바로 위에 있다.

평양에서는 대동강 가에 있는 누각이 특히 유명한데, 그 이유는 아름다운 풍경을 볼 수 있는 조망처이기 때문이다. 잔치를 열어 기생들의 공연을 보고 술을 마시는 풍류남이 아니더라도 연광정에서 이렇게 오랜 시간을 보내는 이유는 이곳의 풍경이 너무나 아름답기 때문이다. 성벽 위에서 아래를 굽어볼 수 있는 연광정에서는 성 안 전체를 조망할 수 있다. 그리고 성 밖을 보면 앞에 가로로 펼쳐진 대동강과 능라도(綾羅島)의 백은탄(白銀灘), 대동문에 오기 전에 거쳤던 십 리 장림, 맞은 편의 겹겹이 솟은 산도 볼 수 있다. 그래서였는지 명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은 연광정에 올라 풍광에 감탄하면서 ‘제일강산(第一江山)’ 네 글자를 썼고 연광정 편액에 그 글자가 걸려 있었다고 한다.


[연광정도], 출처, 박은순 외, [왜관수도원으로 돌아온 겸재정선화첩], 국외소재문화재재단, 2013.


두 번째 코스: 부벽루와 북성 일대


연광정이나 부벽루 같은 성벽 위의 누각에서 예전 사람들은 밤에 잔치를 벌이며 풍류를 누렸다지만, 이런 곳은 높은 곳에 있어서 아름다운 풍광을 볼 수 있다는 큰 장점이 있기 때문에 올 기회가 별로 없다면 낮에 와서 그 풍경을 보는 쪽이 낫다. 이제 연광정에서 부벽루로 가기 위해서는 보통 배로 가는 것이 일반적이다. 성벽을 따라간다면 거리가 멀다는 점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가파른 절벽 길을 올라가야 하기 때문이다. 이제 연광정에서 내려와 대동문 밖에서 배를 타고 대동강 상류 쪽으로 물결을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면 연광정에서는 제대로 보이지 않았던 덕암을 볼 수 있다. 조금 더 배를 타고 청류벽을 지나 능라도 근처에서 배를 대고 성문을 들어가 오른쪽 성벽 위 누각으로 올라가면 부벽루에 도착하게 된다.

부벽루도 성벽 위에 세운 누각이기는 하지만, 여기서 볼 수 있는 풍광은 연광정과는 전혀 다르다. 부벽루에 있는 성은 북성(北城)인데 1714년에 처음 만들어졌다. 북성은 내성의 을밀대(乙密臺) 서쪽 모퉁이에서 금수산의 모란봉(牡丹峯)을 둘러 부벽루를 지나 내성의 동쪽 암문까지 이어져 있다. 북성 안에는 고구려 동명왕이 기린마를 길렀다고 하는 다소 짙은 신화적 성격을 가진 기린굴과 고구려 동명왕의 구제궁(九梯宮)이 있었다는 곳에 영명사(永明寺)가 있다.

어제 영명사를 들렸다가, 잠시 부벽루에 올랐네.
빈 성엔 한 조각 달, 오래된 바위엔 천고의 구름.
기린마를 가서 돌아오지 않는데, 천손은 어디에서 노니는가.
길게 휘파람 불면서 돌계단에 기대니
산을 부르고 강은 절로 흐르네

고려 후기의 문신 이색(李穡)의 「부벽루(浮碧樓)」 시를 보면 이색이 기린굴과 영명사를 본 다음에 부벽루에 올랐고, 뒤로 보이는 모란봉과 앞에 보이는 대동강을 보면서 감회에 젖는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다.

북성 일대에 남아있는 유적에서 사람들이 보는 것은 옛 왕조의 흔적이다. 이 풍요롭고 화려한 도시의 한 쪽에 이곳이 옛 왕조의 도읍지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유적들을 보면서 사람들은 복잡한 심경이었을 것이다. 너무나 아름답고 화려하고 현실의 고민을 잊을 법한 곳이지만, 이것도 영원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자각을 문득 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현세는 덧없지만, 바로 그런 이유로 현세를 즐겨야 하는 것이다.

기린굴과 영명사를 둘러보며 잠시 옛날 생각을 하다가 부벽루에 오른다. 이곳에서 보는 풍경이 매우 아름다웠다는 것을 전해주는 몇 가지 일화가 있다. 가장 유명한 것은 고려 시대 김황원(金黃元)이라는 사람이 이곳에 올라 “긴 성 한 면엔 일렁이는 물, 큰 들 동쪽엔 점점이 산.” 두 구를 지었다가 이 절경에 어울릴 만한 표현을 찾지 못해서 하루 종일 난간에서 고심하다가 결국 적절한 표현을 생각해 내지 못해 통곡하고 떠났다는 이야기이다. 명나라 사신인 허국(許國)이 부벽루의 승경을 중국의 소주와 항주에 견주면서 소주와 항주는 인공적이지만 부벽루와 청류벽, 섬과 봉우리는 모두 하늘이 만들어 낸 것이라 훨씬 낫다고 감탄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허국이 부벽루에서 본 섬은 능라도이고, 봉우리는 뒤에 우뚝 솟은 모란봉이었다. 금수산 모란봉은 산색이 좋아서 사람들이 봄놀이를 가는 명소였고, 능라도도 비단을 뜻하는 ‘능라(綾羅)’라는 이름처럼 멋진 유람처였다.


[모란대 부벽루], 사진엽서, 부산광역시립박물관 소장(e뮤지엄 웹사이트)


세 번째 코스: 대동강 뱃놀이


배를 타고 북성 일대를 돌아보고 마지막으로 부벽루 위에 올라가서 성 안과 성 밖의 모습을 보았다면 이제 본격적으로 대동강 뱃놀이를 즐겨야 한다. 풍류객들은 배에 술과 기생을 태우고 악기 연주를 들으면서 흥취에 젖었지만, 배를 타고 봐야 할 멋진 풍광들이 있다는 점도 잊으면 안 된다. 대동강을 기점으로 상류 일대를 둘러보는 코스도 있고 하류 일대를 둘러보는 코스도 있었지만, 일반적으로는 강물을 거슬러 상류로 올라가서 그 일대를 둘러보는 코스를 택했다. 절경으로 유명한 청류벽(淸流壁)과 부벽루, 능라도 같은 명소들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부벽루 앞에서 다시 배를 타고 상류로 더 올라간다. 부벽루 바로 앞에는 큰 섬 능라도가 있기 때문에 술이 바위틈으로 흘러나왔다는 전설을 간직한 주암(酒巖)까지 간 다음에 능라도를 거쳐 내려올 것이다. 하류 쪽 능라도에는 여울의 물보라가 하얗다는 의미에서 이름이 붙여진 백은탄(白銀灘)이 있다. 백은탄은 능라도에서 갈라진 대동강 물길이 합류하는 지점이기 때문에 물놀이하기에도 좋고 천렵을 하기에도 좋아서 이곳에 그물을 걸어놓고 물고기를 잡아서 회를 쳐 안주 삼아 술을 마시는 경우도 있었다. 능라도는 능수버들로 유명해서 ‘능라’라는 이름도 능수버들이 마치 비단을 펼쳐 놓은 것처럼 아름답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것이다. 이곳을 지날 때는 섬에 배를 대고 올라가서 악기 연주를 들으면서 흥취에 젖는데, 이 장면은 ‘평양도 10폭 병풍’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대동강 뱃놀이에서 가장 중요한 장소는 청류벽이다. 청류벽은 맑은 물이 감돌아 흐르는 벼랑이라는 뜻으로, 높고 가파르지만 동시에 절경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석벽에는 ‘청류벽’ 세 글자가 새겨져 있고 청류벽과 물에 비쳐 흔들리는 모습이 마치 병풍을 친 것처럼 보인다. 이렇게 부벽루와 북성 일대, 주암, 능라도, 청류벽을 보면 이제 해가 질 무렵일 것이다. 저녁에 석양빛이 대동강에 비치고 여러 곳을 다 둘러보고 돌아올 때는 악기 연주를 들으면서 느긋한 기분에 젖을 것이다.


네 번째 코스: 애련당


이제 날이 어두워졌다. 연광정이나 부벽루에서 날이 새도록 밤잔치를 열었다지만, 이 화려한 도시에도 달밤의 호젓한 정취를 가지고 있는 숨은 장소가 있다. 배를 타고 대동문까지 와서 다시 성문을 통과해서 오른쪽으로 가면 네모난 연못인 풍월지(風月池)가 나온다. 이 연못에는 연꽃이 있고 그 이름을 따 지은 애련당(愛蓮堂)이 있다.

네모난 연못의 한 가운데에는 작은 섬이 있는데 애련당은 그 섬에 지은 3칸짜리 작은 건물이다. 애련당으로 가기 위해서는 연못가에서 가운데 섬에 놓인 다리를 건너가야 한다. 사방이 뚫린 애련당에서는 사방에 핀 연꽃이 보인다. 그윽하고 한가한 정취가 절로 느껴질 것이다. 소나기가 지나가면 구슬이 흩어지는 소리가 들리고, 때때로 바람이 살랑거리며 불어온다. 연꽃은 햇빛을 받아 눈부시게 빛난다. 그러나 애련당과 가장 어울리는 때는 달빛 나리는 밤이다. 밝은 달빛에 이슬이 맺혀 있고 연꽃 향기가 진하게 스며드는 그때, 연못은 거울처럼 맑게 주변의 경물을 비춘다.

이곳은 크지 않기 때문에 몇몇 사람들과 작은 술자리를 열면 거문고 소리와 맑은 노랫소리로 세상과 떨어져 있는 느낌이 들 수 있었다. 애련당 하면 사람들이 낭만적으로 떠올리는 정경도 있었다. 18세기 인물 이의봉(李義鳳)이 1760년 중국에 사신으로 갔던 일을 기록한 󰡔북원록(北轅錄)󰡕을 남겼는데, 그때 평양 주민들이 애련당에 대해 한 이야기를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바야흐로 하늘에서 어여쁜 달이 드러나고 연꽃 향기가 풍길 때
어린 기생들이 노란 저고리에 붉은 치마를 입고
비단 닻줄을 끌거나 노를 두드리면서 노래와 춤을 추는데,
연못을 빙 두르면서 잎과 꽃 사이로 보였다 가려졌다 하는 것이
애련당의 멋진 풍광입니다.

평양은 산수도 아름답고 경제적으로도 풍요롭고 유명한 기생도 많은 화려한 도시였다. 그래서 어쩌면 낮이든 밤이든, 번화한 곳이든 한적한 곳이든 평양을 구경할 때에는 언제나 음악과 기생이 함께 한다. 어쨌든 평양이라는 도시는 산수가 수려하고 풍경이 아름답고 멋진 건축물이 많다 해도 혼자서 조용하게 구경하는 곳이 아니었다. 평양은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음악을 듣거나 술을 마시며 즐겁게 웃고 떠들기에 최적화된 곳이었다.

생전에 평양에 꼭 가봤으면 좋겠다는 소원을 이야기할 때 그 속에는 기생과의 로맨스가 가능할 것도 같고, 남루한 현실을 잊게 만드는 화려한 곳이라는 이미지가 있다. 그런데 기생들과 악사들을 대동하고 술을 가지고 떠나는 이 즐거운 여행을 하려면 돈이 많이 들 수밖에 없다. 평양은 돈을 탕진하는 도시였다. 잠시 현실을 잊고 낭만과 즐거움을 누리는 대가로.


‘애련당’, [평양도 10폭 병풍] 중 부분, 서울대학교 박물관 소장





집필자 소개

이은주
이은주
서울대학교 기초교육원 강의교수. 평양을 소재로 한 죽지사 「관서악부」로 박사논문을 썼고, 평양읍지 2종을 번역하여 「평양을 담다」로 출판하였다. 평양에 대해 「모든 물건은 이곳으로 오라」(「18세기 도시」), 「비단과 꽃의 기억」(「문헌과 해석」82호)을 썼고, 「관서악부」 역해를 준비하고 있다.
“단군과 기자, 동명 세 왕의 도읍지, 평양”

미정, 계산기정, 1803-11-02 ~

인현서원(仁賢書院)은 평양 외성(外城) 안에 있어 기자의 영정(影幀)을 모시고 있는데, 미목(얼굴 모습)이 또렷하고 머리에는 후관(冔冠)을 쓰고 있다. 관제(冠制)는 근자에 부인들이 늘 쓰는 묵모자(墨帽子)와 같다. 서약봉(徐藥峯)이 일찍이 연(燕)에 들어가, 기자가 홍범(洪範)을 진술하는 그림 한 폭을 얻어 와 갑에다 넣어서 이곳에 수장(收藏)하였다. 집의 계단과 초석이 웅장하고 선성(先聖)의 얼굴과 가르침을 간직하고 있어, 실로 사람으로 하여금 우러르게 한다. 왼쪽에는 ‘어서각(御書閣)’이 1칸 있는데, 이것은 효종(孝宗)이 왕위에 오르지 않았을 때 서원의 자리를 찾은 것으로, 붉은 부전을 붙인 갑(匣) 가운데 ‘봉림대군모년모월일(鳳林大君某年某月日)’ 등의 글자가 씌어져 있었다.충무사(忠武祠)는 을지문덕(乙支文德)과 김양언(金良彦) 두 사람을 받들기 위해 설립한 것이다. 당 태종(唐太宗)이 고구려를 정벌하자 문덕이 손을 떨치고 홀로 나서서 일변 싸우고 일변 전진하여 수(隋)나라 백만의 무리가 손을 떼고 북쪽으로 달아나게 했다. 동쪽 땅의 생령들이 지금까지 안도하고 지내는 것은 다 문덕의 공이다. 양언 역시 갑자년 이괄(李适)의 난에 본 읍의 사람으로 분전한 공이 있어 지금까지도 향불이 끊이지 않는다.

“옛 성인 기자의 도읍, 평양 - 기자궁 옛 터에 여전히 궁궐이 우뚝하다”

미정, 계산기정, 1803-11-02 ~

1803년 11월 2일, 평양(平壤)은 옛 성인 기자(箕子)의 도읍이다. 그 유풍과 발자취가 아직도 남아 있는 것이 있으니, 그 기이한 구경거리를 샅샅이 찾아보지 않을 수 없다. 마침내 주작(朱雀)ㆍ함구(含毬) 2개의 문을 통해 길을 나섰다. 성은 내성(內城)과 외성(外城)이 있는데 각각 성 1개에 문이 1개씩 있었다. 외성을 나가는 길로 정전(井田)의 옛터를 방문하였다. 밭길은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였고, 질서 정연한 구역은 그린 것과 같았으며, 사방은 등성이가 없어 툭 트여 있었다. 모퉁이에 돌을 세워 1정(一井)의 한계를 표시하고 있었다. 밭 두덩에는 기자궁(箕子宮)의 옛터가 있었는데 궁전이 우뚝하였다. 동구(洞口)에 ‘인현리(仁賢里)’란 비석이 세워져 있었고, 궁전 문에는 ‘팔교문(八敎門)’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었다. 동구를 경유해서 문으로 들어가면 제단이 설치되어 있고 거기에 돌을 쌓아 한 면에 ‘구주단(九疇壇)’이라 새겼다. 또 비석이 세워져 있었는데, ‘기자궁구기(箕子宮舊基)’라는 5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그 비석에는 음각(陰刻, 조각에서, 평평한 면에 글자나 그림 따위를 안으로 들어가게 새기는 일, 또는 그런 조각)으로 기록한 글이 있었는데, 옛 관찰사 이정제(李廷濟)가 지은 것이다. 여기서부터 또 앞으로 얼마쯤 가면 기자의 우물이 있고 우물 옆에는 돌을 세워 ‘기자정(箕子井)’이라고 새겨 놓았다. 우물의 깊이는 대략 10길(길 : 길이의 단위. 한 길은 사람의 키 정도의 길이다) 가량이나 되는데, 우물 난간에서 굽어보면 다만 푸른 물빛만이 보일 뿐이다. 구삼문(九三門)을 경유해서 내전(內殿)으로 들어가니 그 당급(堂級)의 제도는 서울의 학교와 같아 북쪽은 삼익재(三益齋), 남쪽은 양정재(養正齋), 좌우의 재방(齋房)은 의인재(依仁齋)ㆍ지도실(志道室)이었다. 재실에는 경의생(經義生)이 있어 1개의 큰 족자를 받들고 나와 펼쳐 보여 주었는데, 이것이 바로 정전구혁도(井田溝洫圖)였다.

“대동강에서 평안감사의 환대를 받다”

『평양감사향연도』 중
「월야선유도(月夜船遊圖)」
(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정태화, 임인음빙록, 1622-08-04 ~

1662년 8월 4일, 정태화(鄭太和)는 청나라로 가는 사행길에 있었다. 서울을 떠나 온지 보름 남짓한 기간 동안 일행은 이미 평안도에 이르러있었다. 오늘은 중화 고을에 도착하였는데, 평안감사 임의백과 평안도도사 이관징 및 평양부의 여러 양반들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이들과 함께 대동강에 이르니, 평안감사가 마련해 놓은 배가 한 척 있었다.
배에는 기생들을 가득 채워 놓았는데, 기생들은 정태화 일행이 도착하자 곧바로 과일 쟁반을 올리고서 탁자를 열 준비를 하였다. 그리곤 막 풍악을 울리려 하였다. 정태화는 이런 광경이 썩 내키지 않았고, 더구나 자신은 그럴 처지가 아니었다.
“풍악을 울리는 것이 때에 맞지도 않을뿐더러, 본인의 형편이 기복(朞服)을 입고 있는 사람이니 잔치는 어려울 듯합니다.”
이 말을 들은 평안감사가 곧바로 풍악을 중지시키고는 판관을 돌아보며 말하였다.
“판관이 날마다 음악을 익힌 뜻이 헛되게 되었네 그려.”
그러자 평양 판관의 얼굴이 붉어지며 묵묵히 고개를 숙였다.
배에서 내려 정태화 일행이 묵을 별당에 도착하였다. 이곳은 옛 정자가 있던 터였는데, 감사가 거기에 새로 별당을 지은 것이었다. 별당으로 숙소를 정해 주고는 대접을 매우 후하게 하였다. 비단 정태화에게 극진할 뿐 아니라, 사신단이 요구하는 것이 있으면 듣자마자 바로 시행하였으니 사행에 참여한 역관들도 이런 일은 과거에 없는 일이라고 입을 모아 말하였다. 영의정이란 자리의 권세란 것이 저절로 느껴지는 환대였다. 정태화는 불편한 마음을 숨기고는 내일 일정을 위하여 잠자리에 들었다. 밤새 보슬비가 내렸다.

“평양성에 승전보가 울려퍼지다! 비밀리에 묻은 선왕의 신주를 찾아라”

『평안도변성지도』
(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정탁, 피난행록,
1593-01-07 ~ 1593-01-10

1593년 1월 7일, 왕세자 광해는 아픈 몸을 이끌며 정사(政事)를 돌보았다. 내의원 의관들은 매일이다시피 왕세자와 세자빈의 몸 상태를 돌보아야 했다. 그러던 중 1월 8일, 조·명연합군이 평양성을 탈환했다는 소식이 분조(分朝)에 들렸다. 다음 날인 1월 9일에는 조·명연합군의 단순한 승리가 아니라 매우 큰 승전이라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리고 평양성과 평양성 부근에 토굴을 쌓거나 뚫어 은거한 적들까지도 평양을 탈출하여 도망갔다는 기별이 들렸다. 정말이지 조선은 이 전쟁에서 크나큰 전기를 맞이한 것이다.
왕세자가 이끈 분조에서도 소식을 듣고 기쁘기가 한량이 없었다. 하지만 곧장 해야 할 일이 생겼다. 이전 왜적들의 공격으로 평양성을 떠날 때 종묘 각 실(室)에 있는 선왕들의 신주와 영정들을 너무나도 급하여 비밀리에 평양에 묻게 한 것이다. 이를 묻은 사람은 송언신(宋言愼)이었다. 따라서 송언신만 신주와 영정을 묻은 위치를 알고 있었다. 빨리 송언신을 데려와 선왕의 신주와 영정들을 발굴해야만 하였다. 분조에서는 대조(大朝)에 이를 고하여 빨리 일을 해결해야 함을 고하였다.
그리고 이 때, 평양 주위의 왜적들은 축출되었지만 여전히 함경도 쪽으로 진출한 적들은 남아 있었다. 명나라 장수가 군사의 일부분을 차출하여 함경도의 적들을 공격하겠다고 하였다. 또한 체찰사(體察使) 유성룡(柳成龍) 역시 왕세자에게 왕세자를 호위하던 정예병 300명을 뽑아 중요한 길목을 차단하자는 장계를 올려 왕세자의 허락을 받았다.

“꿈속의 그곳, 흠모하던 도산서원을 찾아 평양에서 내려온 유생들”

김령, 계암일록, 1625-04-20 ~

안개가 짙게 끼었다가 갰다. 평양(平壤) 유생 아무개가 그의 동료 두 사람을 데리고 도산서원(陶山書院)을 흠모하여 걸어서 서원까지 왔으니, 정성이 독실할 만하다.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와 《주자어록(朱子語錄)》을 구해보려 했으니, 또한 먼 지방의 아름다운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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